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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 떼.

박세욱. 2026. 4. 30. 17:44

312 정어리 떼.

1 정어리 떼.

조직 꾼은 진보나 보수나 다르지 않다.
누가 하여도 제 밖에 모른다.
한치 앞도 모르는 더럽고 치사하고 죄지은 자들이 만인과 인륜을 지배하고 심문한다.
요사이 TV를 보면 누가 누구를 심문하는지 왜 양인지 알 수 있다.
급기야 죽일 라면 죽이라고 낮 바닥 붉혔다.

권세의 아침과 저녁은 달라 얽히면 골치 아프다.
민초를 위한 민주주의이지 부르주아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너의 성취를 위한 민주주의는 더구나 아니다.
민생의 인격을 대변하는 한계적 소양에서 주객전도의 상대적 괴리를 느끼나 저항하지 않는다.
세도정치의 저항하면 손해 본다는 예속적 세뇌의 관성인지 관념으로 회자되는 정권의 행태에서 어느 놈이 해도 똑 같다는
체념인지 안타깝다.
이번에는 이놈이 설치고 다음에는 그놈이 설칠 것이다.

인간은 인습과 시류의 현상적 저울추에 지배되어 광야와 자아에 진실할 수 없다.
이중적 가면의 대변자들이 인습과 시류 표피를 가장하여 인륜과 인격 위에 군립하며 제 안에 갇혔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대변의 제도를 왜곡하여 이유 불문 하고 만인을 심판한다.
말의 가면으로 탐욕의 죄를 은패하고 정의를 왜곡하여 세상을 오염시킨다.
보이는 것의 성취에서 나로 인한 관계이며 너는 도구에 불과하다.
민주적 절차는 민의의 대변을 빙자하여 권세(가진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신판 세도정치이며 혁명으로 개혁한 부르주아의 회귀이다.
카진스키(유나바머)가 말하였다.
현상이 진실이고 나와 우리 편의 기회가 전부라는 사회적 지배의 사고에서 산다.
정의를 앞세운 진실한 놈이 항상 손해 보는 세상이다.
죄(도시)의 타락이다.
민주주의는 객체와 집단의 사사로운 목적을 우선하는 수단의 가면이 되었다.
결국 나의 성취이다.
떵 뭍은 자들이 떵 탓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정어리 떼는 무지하여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최후의 한 마리 까지 잡혀 먹힌다.
정어리는 모르나 스스로 잡혀 먹혔다는 것을 인간은 안다.
그것이 한계라고,,
알면서 역시 그 것에 갇히어 스스로 파괴한다.

인간은 최소한 지구에서 천적이 없다.
갇힐 이유가 없다.
인간은 인간 이상이 될 수 없다.
언제나 유전적 시간의 깨달음 보다 가르침을 모방하며 시험에 빠진다.
겨자씨 안의 겨자씨에서 실증된 지구 생태계에 예속된 만물의 영장이다.
생명과 존재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심연의 불가항력적 느낌이다.
재림은 문화의 변화와 역사의 혁명보다 훨씬 처절할 것이다.
그러기를 심연으로 바라는 진심이다.
2026.4.30일.

 

2 품삯.

품삿은 일과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다.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렸다고 심은 사람의 품삿은 다르지 않다.

반도체 산업의 예지는 특별한 미지의 창조이었다.

말뚝과 가치의 예지적 창조는 다른 것이다.

미래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창조적 가치이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은 미래적 가치의 수요에 의한 것이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실존적 예지이다.

생산라인의 이익과 다른 가치이다.

울타리에 예속된 고추가루 숟가락 나누기는 특권적 기회주의이다.

내 것과 유니품 울타리가 아니라 사회적 양심과 한반도의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비용과 성과의 잔치비용 제하고 미래를 위해 저장되어야 한다.

일해 놓으면 숟가락 올리는 물질적 인습과 얄팍한 시류의 버르장머리는 따로 없다.

은도끼도 금도끼도 모두 내 것이다.

AI의 미래와 자본주권 시대를 이끌어 낸 태산의 주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동남풍 불은지 언제인데 아직 냉이국 냄새도 없다.

요사이 잔치집에서 개(일꾼) 잡는 몰상식은 통신과 지식시대의 분별이 아니다.

2026.5.2일.

 

3 의견수렴과 양심.

민주주의의 주체 민초와 민생을 우선하는 행동하는 양심은 사라지고 내 것과 우리 편뿐이다.

권세의 압제에 저항하던 의지가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를 왜곡하여 절대권력을 시도한다.

독제에 저항하던 불나방의 역사가 무엇을 위한 희생이었는지 배부른 색깔론적 극단주의의 지배력 획책이다.

생태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합리성 요구에서 부분적 집단의 패권에 집착하는 표피뿐인 민주화의 역사이다.

양극화의 경계에서 수단과 방법이 난무하는 패권전쟁이 작금의 정치판이다.

좌우와 진보와 보수의 개념은 양극화의 울타리 경계를 위한 철지난 허울뿐이다.

21세기는 옳고 그름의 분별을 우선하는 지식시대이다.

무명과 예지의 지혜는 다르다.

관념이 아니라 실상에 의한 실용적 가치의 선택이 필요하다.

우리 편의 편협한 연장이 아니라 국가의 일꾼을 선택하시라는 것이다.

반에 반도 안 되는 국수적 집단에 의한 허울적 지명으로 국민의 선택을 강요하는 절차의 우려이다.

국가의 의견수렴에서 절대다수를 충족할 수 없는 이상한 민주주의의 시도이다.

최선의 관계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민주적 절차가 왜곡되고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양심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의 가치를 우선하는 정치판의 실용적 개념과 신념은 찾아볼 수 없다.

국민과 민생보다 울타리에 예속되어 거수기의 연장으로 연명하는 각자도생의 객체이다.

조직의 권세로 싹수있는 일꾼 잘라내는 비생산적 사대부의 벼슬이다.

표피뿐인 허울로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여 일과 능력의 지배를 획책하는 잘못된 정치이며 인격이다.

양당정치의 획일적 학습에서 기인한 기획정치의 폐단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 판과 다를 것이 없다.

국수적 집단과 내 밥그릇을 우선하여 후대의 미래를 외면하는 인격은 국가를 우선하지 못한다.

지방선거는 국정운영과 크게 관련이 없다.

일의 능력과 인격의 분별에서 옳고 그름으로 미래를 위한 선택이 필요하다.

비교하여 비판할 수 있는 다양성이 필요하다.

기획정치는 사막에 나무 한그루 새워 놓고 숲이라고 하는 것이다.

국가의 미래는 국수적 집단에 의한 정치적 강요가 아니라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절차를 충족해야 한다.

잘못된 민주적 응력은 자유로운 지식의 저항이 있을 것이다.

2026.5.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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