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청산이 부른다. 본문
309 청산이 부른다.
1 청산이 부른다.
청산이 인습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오강단지에 연연하여 치간 가지 않으면 모양이 궁색해 진다.
어차피 어렴풋한 산마루 너머이다.
작정하고 시작한 일 부러진다고 북망산천이 다른지 않다.
차라리 청산에 머물다 한 색깔로 지워지면 그 뿐이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것이다.
죽어도 "찍"하고 죽을 인습의 작 것은 작 것이다.
낫살이 추잡하여 동냥아치 서푼이 서러운 것이다.
갓 끈 길이에 사대부 사랑방에 줄서 정신 줄 놓는 나팔수의 길은 아니다.
힘 있다면 우지끈 외양간 부수고 툇마루에 막걸리 한사발로 "씨팔씨팔"조이도 마이싱 인데 그 마저 한이다.
2026.4.13일.
2 특별한 원숭이.
정치가 세상을 밝게 하는가?
판사와 검사는 나쁜 사람들인가?
사법과 검찰개혁은 우리 편을 위한 것인가?
무엇이 정의인가?
제 잘나 이웃이 없다.
매사가 구태이다.
자아적 깨달음 없이 사물의 감각에 의존하여 견주어 고집하는 한계적 시간이다.
경쟁의 학습에 지배되어 있는 각자도생의 치열함이다.
전쟁으로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세상이다.
전자 막대 든 특별한 원숭이이다.
2026.4.16일.
3 반도체와 증시.
글로벌 반도체 산업과 대한민국 증시의 문전성시는 물질문명의 학습과 시간의 층족에 의한 시대적 요구와 자본시장의
주권적 인식이었다.
민초의 노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특별한 학습의 새로운 발현이다.
지배적 자본에서 우리 것으로 지키는 주권적 자본시장을 이루었다.
어떠한 실효적 가치의 논리와 근본(뿌리)의 정립은 연속성의 제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야사의 그림자로 치부되는 것은 매우 서운한 노력이며 학습적 생산성에서 대승적 시각이 아니다.
발현되어 실증된 학습의 범위는 실존의 범위 즉 준비된 미지(창조)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코스피 육천의 시간이 끝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진실이다.
새로운 질서 즉 발현은 행태와 상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일해 놓으면 숟가락 올리는 낮 바닥 두꺼운 사대부가 한 것이 없다.
똑 바로 보아야 미래가 있다.
2016.4.16일.
4 평화.
교황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평화 자체이다.
종교를 물질문명의 선입견(시각)으로 판단하는 지식이 있다.
종교는 불의에 죄를 지우는 평화의 보루이다.
위아래로 심심하면 기웃거리는 이웃집 문지방이 아니다.
함부로 산수하면 마른하늘에 날 벼락 맞는 수가 있다.
2026.4.16일.
5 중용과 집단주의.
양당정치에서 중도의 선택이 전무한 현실이 안타깝다.
양극화된 좌우조직논리의 극단성에 치우쳐 일 잘하는 중용의 인제가 바람 앞에 등불이다.
선거 때만 되면 찬밥이고 지나면 낮 바닥 분칠하고 혀 잚은 아쉬운 소리해대며 우리 편이라고 한다.
이제나 저제나 개과천선을 기대해도 때 만 되면 쓸 만한 일꾼들 조직으로 아작 내 낙동강 오리알이다.
우리끼리 해쳐 드시겠다는 것이다.
인물이 아니라 사대부의 사랑방에 줄서는 실용성 없는 낮 바닥뿐이다.
역사의 교훈에서 아직도 일이 아니라 당파적 사대부이다.
중도의 유능한 일꾼은 조직의 울타리를 지키는 머시기도 못 된다.
좋을 것 없는 정권의 말로는 인물이 아니라 깃발에 줄서는 색깔론 적 선택의 결과이다.
국가운영과 미래에서 인제의 효율성은 중요한 덕목이다.
정치가 국민과 국가를 우선하지 못하고 내 것의 사사로운 성취에 눈 돌아간 밥그릇뿐이다.
반에서 반에도 모자란 주도적 또는 극단적 집단에 줄서야 갓의 행색에 점지된다.
전체에서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국수적 집단에 의해 기획되어 지배되는 전체주의적 정치이다.
민주국가의 대표성과 의견수렴 절차의 성립에서 괴리적 불신이 매우 크다.
일의 평가가 아니라 팔이 안으로 굽어 비비고 왜곡하며 불문하여 역상 들어야 그나마 우리 편의 기회이다.
보편적 시각을 충족하는 일과 능력의 평가에 인색하고 조직 꾼을 편애한다.
선택받을 여면 조직에 예속되라는 것이다.
조직의 집단주의는 일꾼의 노력과 성취의 정의(평가)마저 상실하고 있다.
일해 놓으면 권세의 숟가락에 속수무책이다.
가치적 성취에서 인색한 일과 생산성의 미래가 어둡다.
이러니 일과 능력을 연장정도로 치부하여 호시탐탐 숟가락 올리려는 권세의 몰상식한 낮 바닥이 판을 치는 것이다.
이분법적 역사에서 학습 된 극단적 권세의 횡포이다.
미래가 아니라 철지난 냉전적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좌우논리의 관성이다.
일의 생산성을 도외시하는 정치의 한심한 현실이다.
생태적 합리성을 전제하는 다수의 원칙에서 어림없는 낮 바닥 드밀며 그놈뿐이라고 선택을 강요한다.
극단으로 치닫는 소수의 국수적 계파정치가 국민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
양극화로 울타리 친 갓의 굿판이다.
국민과 국가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우리 편에 줄서서 거수기 노릇해야 조직이고 일 잘하는 중생이다.
모자란 갓 쓰고 사람 잘 부리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네가 잘해야 유능한 일꾼이 모이고 알아야 가려 쓸 수 있다.
AI와 정보통신을 통한 글로벌 사회의 지적비약에서 국수적 집단정치의 현상이 국가의 미래에 좋을 것이 없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민주적 체제에서 비판과 반론의 수용은 정치적 감각이고 바탕이다.
우리 편의 비판은 생태적 합리성을 위한 민주적 절차이며 생산성이다.
작금의 집단정치는 반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거수기의 세상이다.
오로지 우리 편이다.
옳고 그름의 정의는 양당정치의 경계에 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인재는 색깔이 아니라 도처에 있다.
조직에 물먹고 울타리 밖에서 지붕 쳐다보는 일꾼들 많다.
아무리 조직이라고 하여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유능한 일꾼은 가려서 키워야 한다.
정보통신 산업과 AI를 중심으로 하는 21세기의 지식(데이터)변화에서 가장 낙후된 집단주의 정치판이다.
절차적 정당성의 흠결에서 객체의 행색을 우선하여 성취와 지배에 집착하는 조만간 현상 될 각자도생의 학습이다.
들이미는 것도 동의의 정도가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는 다양성의 균형적(비율적) 합리성이다.
2026.4.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