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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 정치.

박세욱. 2026. 4. 11. 07:33

 

307 관념적 정치.

1 관념적 정치.

하루 종일 잔 것 같다.

누우면 두세 시간이 서너 차례이었다.

아직 완전치는 안으나 못된 작자들의 비인간성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이다.

많이 힘들었다.

오랜만에 계절다운 봄비가 추적추적 종일 내리고 있다.

하루를 채워나가는 실업자의 일상에서 뭉텅이로 비워지는 시간이 상처로 느껴진다.

비워지는 공허의 괴로움이다.

부셨다 새로 지을 수 있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육신의 형체적 감각뿐인 지루함이다.

 

기여의 한계에서 재주부리는 연장의 자괴감이다.

가고 오는 인정이 씨가 말랐다.

무슨 인연이 있다고 쥔장 행세인지 낮 바닥이 가관이다.

요사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보편성을 충족하는 문화적 질서와 거리가 있다.

지식시대를 거부하듯 각자도생의 모가지가 특별하여 창궐하고 있다.

여기저기 왕이다.

반론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중용의 전무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전체주의의 향수가 되살아나고 있다.

통신사회의 공유적 지식에 어긋나는 극단적 집단의 지배이다.

 

민주적 시각에서 응력이 발생하고 있다.

목적의 예지적 설득 없이 무조건 내 것과 우리 편이다.

무지하여 순종하는 시대가 아니다.

다양성을 부정하는 권위적 현상에서 답답함이 무한이다.

노상 떠드는 법치의 적용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이율배반적 행태이다.

네가 했으니 나도 한다는 목적 없는 정치이다.

기득권의 권위적 시각을 인정하라는 것은 피의 희생으로 이룩한 민주적 시각이 아니다.

일에서 정의와 진실이 아니라 관계(조직)의 수단이 앞서는 행태이다.

일이 아니라 권세이다.

 

일꾼의 자리를 권세로 빼앗는 조선후기의 세도정치를 보고 있다.

피의 역사를 거스르는 개인과 집단의 영달뿐이다.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지향하는 가치가 분명하지 않다.

능력의 존중이 아니라 울타리의 비효율적 고집이며 사사로운 탐욕이다.

기득권에 안주하여 회색의 성벽을 쌓고 반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또 다른 부르주아이다.

나를 따르라고 하면 이유 없이 따를 21세기의 지식과 지성은 없다.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현상의 말로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20세기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관념적 정치이다.

계란과 불나방으로 희생된 민주지사의 관 뚜껑이 열릴 것이다.

 

2 노트북.

헨폰으로 초벌하고 사십Cm높이의 장식장 위에 있는 TV와 연결된 컴퓨터에 옮겼다.

장식장 앞에 같은 높이의 접이식 상이 놓여있다.

앞에 구부정하니 책성다리하고 몇 시간을 어떤 때는 거의 하루를 죽치고 앉아 있었다.

헨폰의 작은 창으로 쓰면 눈의 피로가 많았고 전체적 내용을 숙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자세도 문제이었다.

벽에 기대고 구부정하게 앉고 침구위에 비스듬히 등대고 뒹굴며 쥐나게 짜내곤 하였다.

좋을 리가 없었다.

시야는 흐려지고 차갑거나 바람 부는 날 눈물이 많아 닭아 내느라 수건을 챙겨 다녔다.

돼지 창시 같았던 소화기의 이상은 자세 때문이었다.

 

건겅을 의식하여 운동에 집중하였으나 문장의 집착은 숙면 부족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겹친 격으로 못된 악마가 개입한 약물 부작용의 고통이 있었다.

글의 완성에서 단어와 역사의 검증은 필수 이었으며 자료의 확인에서 공부와 노력의 시간이 훨씬 많다.

대지에서 나무가 자란다.

문장의 집착이라는 것이 적당히 관리되면 좋을 것이나 떠오를 때 써놓지 않으면 감각을 다시 찾기 어렵고 전체의 구도와

완만한 연속성을 위해서는 맥락으로 단원을 마무리하는 집중이 필요하다.

주제가 주어지고 시작하면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배고픈지도 모르고 챙겨먹을 정신없이 어느 결에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더 이상의 집중력 한계에서 포화상태의 머리가 되어야 정도를 느낀다.

 

무엇이 가득 들어차 무겁고 멍청하고 흐릿한 상태이다.

무모하였던 집착이었으나 일에서 필요한 것이다.

이쯤에서 창시를 데워야 한다.

술시는 때가 없다.

짜릿하고 따듯한 기운이 머리에 몰려있던 피를 전신으로 운반한다.

만상에 널브러지는 무아의 경지이다.

따뜻한 창시로 객관적 입장에서 작성한 문장을 더듬어 전체의 맥락을 되 집어 보는 시간이다.

적당하게 풀어지면 시야가 넓고 깊어진다.

소주는 독해서 마시지 않고 주로 소맥과 청주이다.

 

대략 소맥은 1리터 청주는 330cc 두병정도이다.

마셔야 그나마 잔다.

창시를 위해 두어 시간을 견디려 하지만 등대면 쌓였던 피로에 떨어진다.

위장이 편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었다.

무슨 죄인지 줄 끊어진 연처럼 팽개치지 못하는 밥그릇 고생이었다.

동업의 무심한 메아리에 곰의 재주라는 비대칭적 아쉬움과 인연의 책임으로 비감하여 "확" 업어버리고 해탈하자는

생각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의 미련뿐인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

결국 남겨야 한다는 나름의 대의에서 품 삿 없이 부려 드시는 신을 원망하며 죽어 사는 것이다.

개인택시 하면서 생각나면 차세우고 쓰다 주정차 위반으로 딱지가 더러 날라 왔다.

 

생업에서 글쓰기의 집중과 숙면 부족으로 많이 힘들었다.

운전 중 집중력 저하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내안에서 밖으로 전달된 것이 자라 사명감이 붙은 후 나의 사사로움은 일상의 주가 되었다.

도피적 취미가 업이 된 것이다.

글의 비판적 내용에서 치졸한 사대부(정치)의 개입은 약방의 감초이었다.

"싸필씨팔" 하여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저항적 오기로 즉시 납부하였다.

이짝이나 저 짝이나 밥그릇 제안이 있었으나 격과 방향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통신을 통한 암시이었으므로 증거는 없다.

이즈음에서 못 다한 생의 미련이 한의 생체기로 발동하였다.

 

생계는 글쓰기를 위한 곁가지의 수단으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였다.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해야 한다는 짐승의 가죽 같은 흔적의 미련이었다.

내안에 집착하는 날의 증가는 고립을 자초하였고 스스로의 선택에 이르게 된다.

깊을수록 일상을 나의 시선으로 보았다.

내안의 대화와 다른 타의적 인습에서 원치 않는 관계의 불편함을 거부하는 시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왜 이런저런 잡다한 관계에서 원치 않는 표정연기를 해야 하며 나의 생각과 괴리가 있는 입바른 소리로 상대의 비위를

배려해야 하는지 자아적 고립이다.

관계의 불편함에서 스스로 원한 것이다.

어찌되어든 시류의 모자람에서 인연의 도피이었고 최후의 발악이다.

 

나로썬 생존의 마지막 시도이었다.

순수를 찾는 방황이라고 하면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타의적 불편함이 힘들게 한다.

존재하여 관계를 이루는 것은 시간의 필연이 있다는 사고에서 순수를 고집하는 목적의 집착이 있다.

적당하게 타협할 줄 모르는 무지이다.

자가당착에 빠져 인정하여 나누라는 가치적 주문의 고집이다.

개인택시라는 직업이 세상물정과 가까운 곳에 있다.

모자란 학습의 미련으로 시사방송과 함께하였다.

시동과 방송이 동시에 어우러지고 끝났다.

학습에서 처음은 막연하여 지루하였으나 인내하여 듣다보면 단어에 익숙해지고 정의에서 의심이 생겨났다.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정치적 시각의 형성이다.

시작은 작으나 나중은 창대할 것이다.

기억력이 있었다.

이해하여 입력되면 메모하지 않아도 한두 시간의 줄거리를 작성할 수 있었고 촉매가 주어지면 의식하지 않았던 수십

년 전 기억이 불숙 튀어 나온다.

컴퓨터의 학습에서 그럴 수 있다는 생물학적 능력의 무한한 의심이 있었다.

인간은 AI시대에 적응할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다.

그렇게 적지 않은 세월을 쌓아왔다.

 

방송이 스승이었고 자아(순수)적 내면이 창고이었다.

시류의 관계와 이해타산의 계산에서 비워져 있었기 때문에 나만의 것으로 채울 수 있었다.

통신을 통한 전달과 이목의 확장에서 또 다른 시작이 되었다.

되 든 안 되든 낫살의 가죽으로 들이밀어 보자는 배수진이었다.

이미 권세와 물질적 시류의 합류는 불가한 것이었으며 세태에서 아무흔적 없이 죽는 것이 아쉽고 무서웠다.

통신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삶의 목적이 되었다.

한반도 평화와 인륜이라는 거창한 목적의 설정이다.

시류의 변방에서 쫓기며 작아져 응축된 한이 어렴풋한 미지를 향해 나를 내지른 것이다.

글 빨의 산수에서 더하고 더하였던 대중적 관계의 원한이었다.

 

나의 생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이었다.

최후의 사선에서 몸부림치며 배우고 악다구니 하면 쓴 것이다.

다행한 것은 비워져 있어서 올바른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자아와 광야를 말하는 이유이다.

신의 가르침에는 인간의 시간으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인류사에서 물질문명은 필요한 것이나 영원할 수 없는 보이는 것의 시간이다.

미래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여행 즉 지식(데이터)의 시대가 될 것이다.

AI의 발현이 시작이다

북미대화의 희망과 하노이 회담의 절망이 있었다.

 

한반도 문제는 이념적 시대의 흐름에서 약소민족의 선택이 있었으나 민족적 잘못은 없다.

인류사적 문제의 책임이 있다.

학습과 시간의 충족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도처에서 재앙을 일으켰다.

세계화로 희석되는 이념적 경계와 민족적 분쟁으로 희생되는 인륜의 구제에서 목적한 사명으로 대응하였다.

낮은 곳에서 세계인의 이목과 참여로 재앙과 재난에 기여하였다.

노력을 기관을 통한 데이터로 알 수 없으나 당사자의 부탁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목적에 충실하였다고 자부한다.

존재에서 세파와 잡다한 시류와 사대부적 권세와 극단적 패권주의에 흔들리지 않았다.

회한이 많으나 나의 사사로움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글과 운전을 병행할 수 없는 생계의 난처한 딜레마이었다.

믿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손안에 장부를 말하는 것이다.

개인택시 사회에서 대의원으로 의결에 참여하였다.

나름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였으나 일과 조직은 별개이었다.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매우 거부감이 있는 갓 쓴 사대부적 사고방식이다.

극단적 양극화의 비생산적 조직에서 일의 평가를 우선해야 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비율적 참여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인지 조선의 야사인지 확실치 않으나 말 많은 선비를 때려죽였다는 대목이 있다.

 

우암은 팔순에 사약을 받았다.

실록에서 편하게 가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학습에 의한 정신의 집착이나 진퇴의 정도는 있는 것이다.

충분하게 고려하고 있다.

글의 목적에서 벗어나 말이 많아지고 있다.

십여 개월 실업자 신세이다.

잚은 시간에 우여곡절이 있었다.

시류의 잡동사니적 시각으로 겉모습을 판단하는 조직논리의 비인간적 죄악이다.

반론의 수용에서 사대부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매우 잘못된 조직적 지배의 시도이다.

 

말은 평등이나 조직과 권세로 민생과 민심을 지배하려는 작태이다.

역시 연장의 자괴감에 빠지는 손안의 장부 격(서얼)의 차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대의이나 지켜야 하는 최후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신은 전능하여 역사를 파괴하였으나 힘없는 중생은 장열하게 스스로의 파괴를 생각한다.

권세가 민생(인격)에 이르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관계에서 대중에 굽신거리고 인격을 차별하는 시정잡배의 짓거리이다.

이런 자들은 정치판에서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미더웠던 밥 공장 접고 일상의 불안에서 시간에 집중하여 무엇인가 해보자고 하였던 것이 초월적 존재이다.

 

공허를 채우기 위해 순전하게 나만의 의지로 마련한 시간이었다.

밤낮과 때가 없는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사 개월 넘게 컴퓨터 앞에 붙어살았다.

운전하며 문장에 집착할 때 내일이 비워진 시간을 염원하였으나 막상 비워지니 생각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시간의 공허가 있었다.

몇 칠정도 나비가 되었을 것이다.

경춘선 주변에서 소일하였다.

책도 성경과 불경과 데카르트와 역사지 등 전문서적으로 십여 권 읽었다.

소설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일방적 생각으로 기피하다 삼포 가는 길을 어제 끝냈다.

 

알고 찾아 읽은 것이 아니라 꺼리 찾아 헤매다 작가의 명성으로 뽑아든 책이다.

일상의 겉모습에서 내면을 찾는 전계이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는 마음을 그린다고 하였다.

글은 마음을 쓰는 것이다.

몇 칠 전 책상다리를 청산하였다.

저렴한 노트북 마련하여 식탁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쓰고 있다.

굉장한 발전이다.

공허를 매우기 위해 경춘선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다.

낫살에 전철은 공짜이고 산과 강의 경치가 좋고 가까운 곳이다.

 

벌이가 없으니 돈이 무섭다.

운동이라면 뒷산도 좋으나 순전히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싸돌아다닌다.

이름 모를 산과 길을 나 홀로 걷는다.

주변과 간섭의 관계에서 자유롭다.

운동은 마시려고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다.

당위성은 중요한 것이다.

위장이 안 좋아 진단에서 의사가 권유한 헬리코박터 검사는 음성이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하시며 계속 부려 드실 작정이다.

삶은 시간의 공허를 채우는 것이다.

2026.4.11.일.

 

3 청산이 부른다.

청산이 인습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오강단지에 연연하여 치간 가지 않으면 모양이 궁색해 진다.

어차피 어렴풋한 산마루 너머이다.

작정하고 시작한 일 부러진다고 북망산천이 다른지 않다.

차라리 청산에 머물다 한 색깔로 지워지면 그 뿐이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것이다.

죽어도 찍하고 죽을 인습의 작 것은 작 것이다.

낫살이 추잡하여 동냥아치 서푼이 서러운 것이다.

갓 끈 길이에 사대부 사랑방에 줄서 정신 줄 놓는 나팔수의 길은 아니다.

힘 있다면 우지끈 외양간 부수고 툇마루에 막걸리 한사발로 "씨팔씨팔"조이도 마이싱 인데 그 마저 한이다.

2026.4.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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