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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6.

박세욱. 2026. 3. 26. 22:59

반야심경 6.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빨에 털이 날 수 없다.
대상과 망상과 허상과 아집 등 깨달음과 관련 없는 질문에 대응한 말씀이다.
헛된 질문에 답 할 이유가 없다.
동문서답이다.
 
사향사과(四向四果).
4과(四果)라고 하며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구분한다.
1 수다원과 (須陀洹果): 예류과(預流果) 또는 입류과(入流果)라고 하며 수행에서 성인의 반열에 들어선 첫 번째 단계
이며 7번의 윤회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지이다.
2사다함과 (斯陀含果): 일래과(一來果)라고도 하며 욕계의 번뇌가 옅어져 욕계에 한 번 더 태어나면 아라한과를 얻는
경지이다.
3 아나함과 (阿那果):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하며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끊어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색계나
무색계에서 아라한과를 얻는 경지이다.
4아라한과 (阿羅漢果): 가장 높은 깨달음의 경지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안심입명(安心立命).
자성으로 가르침을 깨달아 실천하여 평온한 마음(安心)으로 자유와 평화의 안식을 얻는다.
불토에 나를 세워 내적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원행지(遠行地).
대승불교의 수행에서 십지(十地) 중 7지에 이른 보살을 의미한다.
6지까지는 노력에 의해 성취 히였으나 7지부터 스스로의 지혜로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경지에 나아간다.
이르면 다방면으로 지혜와 행동이 원만해져 생각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능력을 얻게 된다.
7지 혹은 8지 보살을 일컬어 불퇴전(不退轉)이라 부르며 낮은 단계로 떨어지지 않는 깨달음의 확고한 위치에 이른다.
8지(부동지)부터는 노력 없이도 이루어지는 무공용행(無功用行)의 경지에 이른다.


보회향진언(普回向眞言).

수행한 성취를 나누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좋은 것 네 안에 만 쌓아 두지 말고 보시하여 나누라는 것이다.
가르침의 뜻은 세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연은 시간의 동행이다.
 
역행보살(逆行菩薩).
부처의 뜻을 악행의 가면으로 가르치는 보시이다.
악의 행태를 연출하여 선을 가르친다.
문수보살께서 개를 구워 등에 지고 씹으면 불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수행의 경지에 이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심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가벼운 보살께서 흉내 냈다가는 쫓겨난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분께서 하실 수 있는 교화(敎化)이다.
 
!!!눈높이가 같아야 눈빛이고 이심전심이다.
사랑한다고 너 뿐이라고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고 그저 죽여주세요." 이것은 두 가지 유형에 대비해야 한다.
첫째는 "너는 나의 포로이다." 이것은 영역의 패배자로 낙인찍어 곧바로 지배자 행색에 아만이 가관이다.
숨에서 고행의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존중하여 인정하면 낮 바닥 밝고 아래가 묘하고 시집, 처가 대접 소홀히 하지 않는다.
눈빛 편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날자 까먹는 일 없다.
동행은 동격의 진리가 있다.
내 것을 우선하여 상대적 산수하는 종자가 있다.
평생 죽어 살 자신 없으면 고쳐야 한다.
문지방 편할 날 없다.
부처께서 이런 것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설픈 수행이 아만(我慢)의 망상과 겉모습의 분별에 빠진다.
 
!!!깨달았다고 하니 "뇌를 해부해서 원인의 현상을 밝혀 보자고 하였다." 고 한다.
사리가 나올 것 같다.
물질적 시각과 벼슬의 권세로 안 되는 것이 있다.
 
!!!7지 보살은 입태(入胎)에 어둡지 않으나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간다고 하였다.
스스로의 지혜와 성숙에 아만 하는 제 풀의 고집이 두렵다.
수행의 단계를 지식으로 인식하여 갈 길을 잊지 않을 것이나 세속의 부정과 불의와 치부의 평정(平正)에서 우지끈
내질러 부러질 것이다.
좀 더 써 드실라면 인정하고 나눔으로 보시하여 중생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염통에 털 난 놈 하면 염치없는 놈이다.
 
!!!점점 심오해 지고 있다.
자아의 분별이 사라지면 경지에 이른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냉정한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에 구속되어 괴롭고 무엇에 집착하여 번뇌하고 상념에 빠지는지 찾아 버릴 수 있으면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지혜와 의지로 옛길의 그리움과 말없는 산천으로 뚜벅뚜벅 비워나가는 것이다.
너는 너의 방법으로 평온을 찾아 비우면 된다.
 
!!!인연에 의해 흩터지고 모이는 지수화풍에 중생을 올려놓으면 왔다가는 것이 된다.
무상이다.
그 것이 마음으로 수용되어 있느냐 이 것이 문제이다.
수용되어 있으면 비워진 것이다.
세속에서 인내이다.
부딪치지 않는다.
지나간다.
나 에게 돌아간다.
심연이다.
아득하고 아련한 꽤나 깊은 숨이 있다.
불가에서 눈빛으로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심(心)이다.
비워지지 않으면 색 즉 물질, 돈, 저울질, 인연, 조직, 족보, 예쁜것, 미운것, 말투, 아침 잘못 먹은것 등 오만가지 잡념에
얽혀 순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사는 것이 볶고 다투고 식히고 얽히고설키고 스치며 사는 것이나 주말이면 마음의 쉴 곳을 찾는 것은 확실하다.
경쟁의 긴장에서 평온의 그리움이다.
수행과 해탈은 사물적 관계를 떠나 내 안에서 찾는 자유와 평화이다.
시장에서 마음의 평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동행에서 가든 말든 너의 선택이나 있는것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있다고 설하지 않으면 너 만 좋은 곳에 있다고 하신다.
중생의 구제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다.
맛들인 분들 거기 들어가면 웬만해서 나오지 않는다.
지랄병이 없다.
 
!!!연못을 만들면 달은 저절로 온다.
장군이 적을 물리쳐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면 칼을 버려야 한다.
가지고 있으면 쓰려한다.
아기는 산모보다 세배이상 고통을 받는다.
오관이 어두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탄생은 삼라만상의 조화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너 만의 것이 아니다.
현대인이 수행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산천의 옛길을 걷던 선사(仙師)와 비교하여 벗어야 할 것이 많다.
한 순간에 벗을 수 있으나 수가 많을 수 없다.
시류의 두께가 뫼(山)같다는 것이다.
삽이 아니라 불도저로 밀어야 속이 보인다.
공(空)없이 들어찬 보이는 것의 관념이다.
 
!!!금강경을 공부하고 제 풀에 쉽게 덤벼들었다 혼났다.
수행의 깊이와 수반되는 생체적 현상과 언어에 대해 이해가 많았다.
종교의 거시적 시각에서 관념을 벗어난 평화와 안정의 궁극적 목적은 같은 것이다.
단지 현상의 학습과 내면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방향에서 접근방식이 다르다는 이해이다.
보이는 것 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보이는 것을 부정하면 창조를 상실한다.
2026.3.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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