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반야심경 4. 본문
반야심경 4.
몽중화두(夢中話頭).
간화선(看話禪) 수행에서 깊이를 나타내는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의미한다.
꿈속(夢中)에서 화두(話頭)가 생시와 같이 뚜렷하게 들리는 경지이다.
이런 수행이 있었다.
평소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생시 같은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
집착의 환몽이며 어떠한 이유이고 무엇 때문인지 일반적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사이 정도를 더하고 있다.
귀신들이 지랄하면 의식하여 시팔시팔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생생하여 현실로 착각하다 꿈과 생시를 분별하여 부분으로 참여하는 경지이다.
긍정적 상태는 아니었으나 어떠한 암시일지 모른다는 각성으로 내용에 집중하려 애썻다.
특별한 줄거리에 집중하고 해몽에 고민하였다.
잡다하나 더러는 연유가 있었다.
희한한 것은 깨어날 때 둔하고 맑지 않는데 시간이 지나면 평상으로 돌아 왔다.
잠들 때 기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식이 부족하여 몽중화두(夢中話頭)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알았다면 대상에 집착하여 진즉에 포기했을 위인이다.
모르는 것이 약인 경우가 있다.
기막힌 반전에 웃음이 난다.
아프고 쓰다.
책이 스승이 되었다.
무지하여 일상에 불편한 점이 있었다.
큰 병인 줄 알고 약 먹다 부작용에 고생하고 생의 끝자락에 왔다는 낫살 탓을 하였다.
이제 앞과 뒤가 다르게 되었으니 어찌될지 세속에 얼룩진 도화지가 있다.
오늘은 귀신들과 마당놀이 작정하고 기획적 취침에 들었다.
역시나 출근도장은 여전하다.
돌 지난 놈부터 두세 살 위쯤 된 대여섯 놈들이 거의 벌거벗고 모여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제일 어린놈 머리가 "뚝" 떨어져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깜짝 놀라는데 두어 살 위인 놈이 아무렇지 않게 집어 몸뚱이에 올려놓으니 붙었다.
어찌된 것인가 하고 슬그머니 들여다보니 두상에 예리한 칼 자욱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하던 데로 산으로 머리 비우러 나가는데 생생하다.
집착의 고민과 망상은 달아나고 살며시 웃음이 난다.
엇 그제만 하여도 무슨 암시인지 액인지 복인지 화인지 환인지 고민으로 한동안 머리통에 쥐가 났을 것이다.
진리를 깨달으면 비워져 가벼운 것이다.
인식하면 그만큼 가장자리의 범위가 넓어진다.
이해와 상상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더하고 더하면 결국 인식의 경계가 사라져 무한이 된다.
무한이 무아이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해탈이다.
깨달은 것이 있으나 다를 것 없을 듯하다.
일상이 되었다.
건강상 문제가 아니라고 하니 낫살의 안심은 된다.
비워져 많이 가볍다.
무지(無知)의 화기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숨이 남아 있을 때 비우고 옛길의 그리움으로 말 없는 산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몰록(돈오).
한순간에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말이다.
돈오(頓悟).
선종(禪宗)에서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본성을 깨달아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점진적 수행인 점수(漸修)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사다함(斯陀含) 을 기억할 수 있다.
선불교(禪佛敎).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는 교학(敎學) 중심의 불교에서 벗어나 참선(참선)과 명상을 통해 체험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대륙에서 발원하며 동아시아에 전승된 대승불교의 전통 중 하나라고 한다.
성철스님께서 몽중화두로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종(禪宗)으로 통칭된다.
선종 (禪宗).
경전의 지식보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일파이다.
일상의 참에서 마음을 깨닫는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세속을 구제하는 무위적 보시를 생각할 수 있다.
중국에서 발원하여 한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내 마음이 곧 부처 라는 뜻이다.
내안에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성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자신의 본성(불성)을 꿰뚫어 보아 부처가 된다는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외부에서 부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된 자아를 깨달아 즉시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불토(佛土)의 형식과 교학을 넘어선 궁극의 깨달음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성(自性)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선종(禪宗)의 핵심 교리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합(契合).
부신(符信)이 꼭 들어맞듯 도리와 이치와 마음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거나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은 불자의 눈빛과 이심전심이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지위(위치)가 없는 참된 사람을 뜻한다.
어떠한 차별이나 외적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며 주체적 인간을 의미한다.
완전한 객체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安心)으로 참된 도리(命)를 세워(立) 살아가는 경지이다.
탐, 진, 치를 깨달아 욕망과 불의를 지우고 안식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이다.
선종(禪宗)에서 중시하는 수행방법이다.
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을 움직이는(일으키는) 순간 어그러진다." 는 뜻이다.
진리는 언어나 분별의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생각 즉 학습에 의한 분별이 개입하면 공의 상태가 무너진 다는 것이다.
멍 때린다고 한다.
만상과 사물의 분별이 개입하면 멍이 망가진다.
멍은 학습을 비우는 것이다.
비워진 상태가 공이고 무이다.
멍은 순간이고 해탈은 영원한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만물은 실체가 없는 공(空)으로 비어 있으나 인연(시간)에 의해 변화하며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연기(緣起)사상과 암시적 질서라는 이해이다.
!!!인류의 정체와 역사에서 창조와 너머에 대해 모르니 분별하려 애쓰고 따지다 엉뚱하게 육신을 우선하여 힘센
놈이 제일이 된다.
감각과 현상적 학습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이고 분별 즉 학습의 한계가 정신의 가장자리(경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자성)으로 수용(지혜)하여 깨우치는 것이 해탈이고 공이다.
이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수행이고 고행이다.
여기에서 수행의 과정과 최고의 경지를 성취한 상태를 증거 하는 것이 설이고 가르침이다.
그러한 수행의 단계와 성취의 근거가 불가의 언어로 소통되고 있다.
!!!인간세상의 너머로 가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설령 있다 하여도 인간의 시간이 아니다.
상과 학습이 필요한 물질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전적 시간의 한계를 상상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시간과
인간과 유인원의 유전적 시간이다.
창조와 너머의 시간은 인간과 유인원의 시간에 견줄 수 없는 갠지스 강의 모래 수 보다 많은 겁이 있다고 하였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중보자의 시간이다.
유추하면 인간세상을 구제하러 오신 중보자(구원자)는 인간과 가까운 시간에서 오셨을 것이다.
결국 인류의 시간과 사람의 생에서 찾을 수 없는 겨자씨 안의 겨자씨에서 상의 집착과 분별의 경계라는 것이다.
창조와 너머의 가르침에서 티끌의 티끌 속에 사는 인간들께서 무명하여 만상에 경계를 만들어 다투고 빼앗고 울타리
치고 거품 물고 사기치고 도적질 하고 머리통 들은 것 없이 견장 달았다고 까불고 창시 없이 웃긴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대승적 구제의 필요이다.
!!!"통하면 술이라는 말 한마디에 목마름이 가신다." 고 하셨다.
술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모름지기 출세간에서 따라할 수 없는 주도가 있다.
세속에서 주의 수행은 광야를 질주하는 야성의 치솟음으로 경지에 이른다.
의심을 열기로 끌어올려 관통하는 만마의 질주이다.
아련함은 학습과 분별을 소화하고 만상에 늘어지는 무아에 이른다.
절재하여 가르침을 따르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시에 소홀함이 없다.
!!!백로가 눈 속에 있다 날아가니 그제야 알았다.
무아의 세계가 내안에 있는데 현상의 선입견에 가려져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의심하여 바늘구멍으로 시작하면 금 새 새가 날아들고 세속의 아비규환을 뒤집어쓴 껍데기는 사라진다.
끝없이 내려가 심연에 이르러 심지를 내리면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핀다.
낙원에서 한가롭다.
2026.3.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