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반야심경 3. 본문
반야심경 3.
심지법문.(心地法門)
"법문은 마음에서 시작하였다." 에서 근원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불자가 있었다.
땅은 만물의 거처이고 소생하는 곳이므로 심어 근원을 두고자한 법문이다.
법문도 성경처럼 시대의 관점에 의해 변화하면 오늘에 이르렀다.
머물지 않는 변화의 진리이다.
화두일념(話頭一念) 삼배(三拜).
참선하는 수행자가 화두(話頭)를 들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들겠다는 굳은 다짐과 존경을 표하는 수행의 시작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의심을 풀고 또 다른 의심에 이르는 수행방법이다.
화두(話頭)는 말 머리이다.
간화선(看話禪)의 공부가 필요하다.
삼배(三拜)는 수행 전 부체께 대상적 분별심을 내려놓고 의심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다짐을 하는 예의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자성을 깨달아 해탈에 이르는 경지이다.
수행의 최종단계를 의미하는 한다.
화두를 참으로 말하여 수행한다.
간화선이다.
성철스님께서 대가이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선불교(禪佛敎)의 핵심으로 자성과 불성을 깨달아 해탈에 이른다.
고립의 고요와 참선의 인내를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내적 수행이다.
목조선(默照禪)이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모든(一切) 괴로움과 재앙(苦厄)을 건너뛰어(度) 해탈과 열반에 이른다.
오온이 실체가 없이 공(空)하다는 진리를 깨달아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경지이다.
오온(五蘊).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색,수,상,행,식)를 뜻한다.
1 색온(色蘊): 물질적인 요소.
2 수온(受蘊):감각 작용.
3 상온(想蘊): 인식/표상 작용.
4 행온(行蘊): 의지/형성 작용.
5 식온(識蘊): 식별/총체적 인식.
묵조선(默照禪).
침묵(默)하고 고요히 비추어 본다(照)는 뜻이다.
고요의 고립과 참선의 인내를 통해 스스로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간화선(看話禪)하고 대비되는 불가의 수행방법으로 견주어 머리를 다투었다는 사람사는 냄새가 있었다고 한다.
시대에 따른 경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간화선(看話禪).
화두(話頭·공안)를 참으로 말하여 의심을 일으키고 마음의 깨달음을 얻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언어적 표현을 수반하는 문답방식의 수행방법이다.
"이뭣고"(是甚麽)하는 존재의 의심이 시작이다.
묵조선(默照禪)과 대비되는 수행방법이다.
!!!마음은 아주 그윽하고 현묘하여 골수까지 사무친다.
절절해야 벗고 태어난다.
깨달으려면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알아야한다.
보시하라는 것이다.
네 것이라고 너만 알고 있으면 너만 좋으라고 하는 것이다.
가르침의 지혜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실천하여 전례 되어야 한다.
부처께서도 설하여 시작하였고 당처(무)로 돌아가셨다.
너도 그렇게 하면 된다.
뒤 걱정할 일 없다.
!!!아들과 며느리의 사이가 너무 좋아 어머니를 소외시키면 잘못이다.
그렇다고 헤어지게 해달라고 부처께 기도하면 실성한 것이다.
젊어 농사지을 때 추수철 교회 다니는 할머니가 점심자리에서 우리농사 끝나면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분명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든 안 믿든 알고 있었다.
세속의 분별은 필요한 것이다.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엉켜 망상에 이른다.
옥석을 가려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백 천 개의 강이 있어도 바다는 넘치지 않고 수용한다.
합할 줄 아는 일념이 바로 세운다.
좌우명이 필요하다.
수행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세속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벼운 것이고 비우는 것이다.
의혹을 해소하지 않으면 무겁게 짓눌려 쌓인다.
진리(실) 모르면 보이는 것이 허가 되고 알면 허의 무지가 벗겨져 실이 된다.
지식의 허는 무겁고 실은 가볍다.
노력하여 진리를 알면 날 으는 기쁨이 있다.
!!!출세간의 해탈은 모든 것을 싹 쓸어 벗어 버리는 것이다.
온전한 객체로 존재를 찾아 이생의 학습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속의 무위적 보시는 지혜의 근본을 깨닫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타적 삶이다.
어차피 무에서 시작하였으니 다투지 않아도 손해볼 일 없다는 것이다.
조용히 살면 괜히 손해본다는 어리섞은 생각을 벗으라는 것이다.
사회도 이러한 무소유의 공유적 사상을 우선하여 소유의 다툼에서 파생되는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구제와 보시에서 절대의 결과는 없는 것이다.
좀 더 밝아지면 가르침이 이루지는 것이다.
불토에서 흑과 백은 없다.
상대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연기사상과 불이불원론에서 일체법이다.
상호작용하여 합치면 복덕을 이룬다.
중용이다.
둘이든 셋이든 다수든 상호적이어야 한다.
생태계의 비율적 합리성이다.
진리를 깨우쳐 이롭게 보시하는 지혜이다.
공리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제도적 복지의 필요이다.
극과 극으로 싸우다 부수고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원래 없었는데 손해 본다고 사고하는 물질이 우선하는 학습적 권태의 지적이다.
결국 보편적 학습의 권태와 시간에 의해 변할 것인데 파괴하고 죽이는 어리석음이 상존한다.
답답하여 말이 돌고 돈다.
부처께서 무를 박차고 나오실 것 같다.
그럼 일 벌어진다.
!!!불가의 가르침은 마음이 있어야 몸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마음이 주체라는 것이다.
세속은 건강한 몸이 건강한 정신을 만든다고 한다.
병자에게는 건강한 육신이 필요하고 운동선수는 체력의 컨디션으로 정신을 강화한다.
일백년의 순리를 의식하는 현상적 삶이다.
정신을 수양하는 불가의 객체는 마음(자성)을 우선한다.
육신을 생명의 껍데기로 본다.
불가의 가르침에서 물질과 육신은 인연(시간)에 의해 탄생하고 소멸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없는 것이다.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것이며 이것이 삼라만상의 조화를 주도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생명에 의해서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허)은 생명이고 상(실)은 만상(현상)이다.
공은 어디에나 있으며 영원한 것이고 상은 거처가 있고 인연으로 탄생하고 소멸한다.
공은 부처이고 상은 중생이다.
공과 상의 관계적 근본은 불변적 이나 공에 의한 상의 쓰임새는 천태만상이다.
공으로 현상이 성립하는 것이 일체적 불이불원론이고 연기사상 이라는 이해이다.
병자와 운동선수는 천태만상에 속한 상이다.
세속의 지해는 단절적 시각의 한계가 있다.
창조의 섭리이다.
이것을 근거하여 구제하고 보시해야 한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불상을 해체하는 스님께서 무얼 찾고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수행은 도달할 때까지 법심의 의심을 강조하고 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스스로가 답을 찾아야 한다.
출세간의 시간은 세속의 시간과 다른 언어와 소통이 있는 듯하다.
수행과 참선에서 무아적 성취의 정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강설의 느낌이다.
눈빛으로 통하고 이심전심으로 통한다.
!!! 세속의 사람들은 들은 대로 가르침을 평할 수 있지만은 수행자는 평하면 실체를 말하는 것이 된다.
없다고 하였는데 있다고 한 것이다.
세속의 학습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숨과 앎의 진리에서 단순한 감각의 문제이나 깨달아야 이르는 경지이다.
세속의 학습으로 알 수 없는 수행의 경지를 공유하는 언어와 소통이 있다는 예지이다.
매우 궁금한 대목이다.
!!! 묵조선과 간화선의 수행방법을 견주는 우여곡절이 심심치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사람 사는 세상이 번득하였다.
세속의 감각이다.
생각하지 못한 세속에 익숙한 줄거리로 인하여 많이 가까워지고 있다.
역시 동의적 사고는 좋은 것이다.
일체적 불이불원론과 연기사상의 가르침에서 상호작용은 필요한 것이다.
출세간의 마음도 견주며 상호작용으로 이루는지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 법당이 되고 있다.
!!! "만법이 하나가 되었다면 그 후는 무엇이냐?" 스승께서 질문하였다.
답은 무엇인가?
여기서 수행의 가늠이 이루어진다.
만법이 합하였으니 다시 부서져 만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윤회의 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필부의 고백이기도 하다.
만법이 하나가 되었으면 출세간에서는 최소한 수다원(須陀洹)의 단계에 이른 것이고 세속에서는 합을 이루었으니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수다원의 단계라면 눈빛과 이심전심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돌은 말이 없다.
법문의 경지에 오른 스승께서 질문할 때 현상이나 대상적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적 가르침은 무이므로 여기에 대한 경지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너는 무엇이냐 라고 물을 때 경지에 이른 수행이면 없으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 중 주변에 광체가 일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림없는 수행이다.
광체는 스스로 설정한 대상이고 집착에 의한 망상이나 허상이 된다.
그래서 눈빛과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거짓과 가식이 있을 수 있다는 세속적 선입견이 있으나 차원이 다른 수행자의 언어가 있다는 예지이다.
세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근접할 수 없는 텔레파시 같은 절대적 존중 이상의 소통이라고 생각된다.
세속적 표현이나 또 다른 세계의 미궁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속의 시각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나 진즉에 알았으면 아비규환의 진창에 빠지지 않았을 것있다.
2026.3.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