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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간과 세속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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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간과 세속 1.

박세욱. 2026. 3. 14. 08:36

금강경 1.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가장 높고 바르며 완벽한 깨달음(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을 의미한다.
더 이상 위가 없는(무상) 최고의 진리이자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글자의 세부적 의미 보다 전체적 이해가 우선하는 불교의 정체이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
부처님이 도달한 가장 높고(無上) 바르며(正) 평등한(等) 깨달음(覺)을 뜻하는 궁극적인 진리이다.
일체의 번뇌를 초월하여 우주의 이치를 꿰뚫는 원만한 지혜를 의미한다.
성불(成佛)을 위한 최상의 경지이다.
수행자의 길이다.
 
브라만,
카스트제도의 최상위 신분이다.
 
브라마교.
베다경전을 근본으로 하여 브라만 신분이 주도한 고대 종교다.
 
베다경.
기원전 1500년의 신앙으로 지식과 앎을 가르친다.
제의 절차가 수록되어 있다.
 
아트만.
자아와 생명으로 이해된다.
영원한 초월적 존재로 호흡과 숨으로 표현된다.
생명체의 이성적 이해이다.
스승(가까운 현상)에게 배운다.
학문에서 현상적 또는 감각적 학습으로 이해한다.
일상의 사물적 이기와 희노애락의 변화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대자연의 질서와 사회적 관계의 예속이다.
 
불이일원론.
주체와 객체와 나와 타의와 물질과 정신이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임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연기(緣起)사상에 근거하여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대자연의 질서는 다양한 개체의 비율적 합리성으로 균형을 이룬다.
단순히 하나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일원론보다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不一不二)는 상호적 개념으로
중용의 정체에 가깝다.
 
연기(緣起)사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이 상호적 관계하여 생겨나고(生) 소멸한다(滅)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인과관계에 따라 고정된 실체는 없다.
공(空)과 연결되어 있으며 12가지 단계로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12연기가 대표적이다.
암시적 질서의 공유이다.
 
12연기법(十二緣起法).
괴로움(老死)이 발생하는 인과과정을 12가지 단계로 설명한다.
생로병사에 이르는 윤회의 사슬을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무명(무지)을 해탈하여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12연기의 단계.
무명(無明): 무지와 어리석음.
행(行): 무지에 의한 업.
식(識): 인식과 분별.
명색(名色): 정신(명)과 물질(색).
육처(六處/六入): 감각기관(안이비설신 의)
촉(觸): 대상의 접촉
수(受): 감각에 대한 느낌(고락)
애(愛): 갈망하는 마음
취(取): 애착의 집착.
유(有): 업이 형성됨.
생(生): 태어남
노사(老死): 늙음과 죽음.
무명(무지)으로 인한 행(업)과 생(시간)에 의해 생로병사의 굴절이 발생한다는 삶의 순리이다.
소승불교의 관점에서 순리를 수용하여 지혜를 밝히고 고통을 인내하여 현상을 멸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대승불교의 대상적 구제에서 지혜로움으로 선행과 가르침을 보시하여 공덕을 쌓아 업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다.
 
고집멸도와 사성제.
사성제(四聖諦)는 부처님이 깨달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요약된다.
괴로움의 실체(苦), 그 원인(集), 소멸한 상태(滅),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道)을 뜻한다.
모든 불교의 근본이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열반)에 이르는 핵심교리이다.
감각적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 해소하여 자아로 회귀하는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대승불교에서 열반(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네 가지 덕목(열반사덕)이다.
 
열반사덕(涅槃四德).
영원함(常) 즐거움(樂) 참된 나(我) 깨끗함(淨)을 의미한다.
아, 인, 중생, 수자의 깨달음으로 탐, 진, 치를 멸도한 열반의 세계이다.
고통과 무상한 현실 세계를 벗어난 부처님의 법신(본성)이 갖춘 아라한의 경지이다.
 
대승불교.
큰 수레라는 뜻으로 기원전 1세기 전후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스스로의 깨달음(자리)과 타인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보살 사상을 핵심으로 삼는다.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시하여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실천하는 불교운동이다.
실상의 혜안을 강조한다.
소승불교에서 금기시 하는 대상적 목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세속과 동행하는 구제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북방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불교의 주류이다.
 
5호16국(五胡十六國).
304년 흉노족 유연의 한(전조) 건국부터 439년 북위의 화북 통일까지이다.
중국북방(화북지방)에서 5개의 이민족(흉노, 갈, 선비, 저, 강)과 한족이 16개 이상의 나라를 세우며 흥망성쇠를
거듭한 130여 년간의 혼란기이다.
서진(西晉) 멸망 후 이민족이 중원을 지배한 시기로 남쪽의 동진(남조)과 대치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전반부이다.
유교의 대세에서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던 시대이다.
 
구마라집(344~413년)
불교사상가 이며 최초의 삼장법사이다.
다수의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불교서적을 번역하여 동아시아에 전파하여 불토의 장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보살이다.
이후 다수의 삼장법사가 출현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부처님이 여러 장소에서 설하신 교훈과 법문들을 모은 50권 분량의 초기불교 경전이다.
초기불교의 핵심자료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6가지 핵심덕목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이다.
보시는 재물과 불법을 베푸는 것이다.
지계는 의지를 지키는 것이다.
인욕은 욕됨과 번뇌를 이겨내는 것이다.
정진은 고기를 삼가고 채식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선정은 사물을 분별함에 있어서 흐트러짐 없는 한결 같은 심성을 말한다.
지혜는 옳고 그름을 가려 실천 또는 실행하는 것이다.
세속의 미혹에서 깨달음의 보시로 실상의 혜안(밝음)을 이루어 이타적 배품을 실천한다.
세속에서 가르침을 실천이다.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최고의 수행 공덕을 뜻하한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베푸는 무주상보시(보시바라밀)를 가장으뜸으로 꼽는다.
모든 바라밀을 포괄하고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을 가장중요하게 본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실천을 덕목으로 무엇을 베풀었다는 자만심이나 상(相·집착)에 머무름(住)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푸는 보시이다.
줄때는 뒤 끝없이 주라는 것이다.
주고 후회하면 보시가 아니다.
대승불교의 보시와 구제에서 책임도 희생도 흔적도 없다.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있다는 대상 불가의 가르침이다.
행하되 행함의 흔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시바라밀 (제일바라밀).
금강경의 이상적멸분 등에서 말하는 것으로 물질과 정신적 베품에 집착이 없는 무주상보시를 말한다.
베풀 때 조건 없이 주라는 매우 강조하는 불토의 가르침이다.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눈과 귀 등 육근으로 느껴지는 모든 형상(相)이 허망함을 깨달아 집착을 버리면(離相) 적멸(寂滅)의 세계이자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
감각에 의한 현상적 학습보다 내적수행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것의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야바라밀 (최고의 바라밀).
육바라밀 중 지혜(반야)가 모든 수행을 완성하는 가장중요하고 근본적인 바라밀로 가르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혜를 바탕으로 베푸는(보시)행위가 최고의 수행임을 뜻한다.
물질이 아니라 가르침의 혜안으로 부처의 세계를 보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선이 전제된 자아적 분별이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지혜는 현상적 효율성 이라는 생각이다.
내적인 것은 자아이다.
인간의 심성에서 잉태 즉 유전적 학습 이전은 무에 가까운 것이므로 선과 악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입하여 자아의 깊이 즉 탄생에 가까운 심연은 무에 가깝다.
자아를 통한 심연(탄생의 순간)의 깨달음이라고 이해한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 있다.
세존에 물어야 하는 의심은 필요한 것이다.
 
삼장(三藏)과 경율론(經律論).
교법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세 가지 핵심경전의 총칭이다.
세 개의 바구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르침 경(經)과 수행자 규율인 율(律)이며 해석인 논(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의 기초사상과 수행의 자세와 논리의 전반이다.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願解)원하여 풀다.
(如來) 부처.
(眞實義) 옳음의 참뜻.
 
아난.
부처의 십대제자 중 한사람이다.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
거상 수닷타를 지칭한다.
고독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베푼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부처님께 기증한 후원자로 유명하다.
어찌되었든 세속은 시대의 대세이며 객체가 예속되는 보편적 결집의 현장이다.
연기사상은 불가와 세속을 연결하고 있다.
종교는 세속의 사회성에서 발전한 정신이다.
무의 성취 역시 존재의 이유가 된다.
지식 즉 학습의 깨달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세의 무리적 또는 관계적 사회이다.
대승적 종교가 구제해야 하는 대상이다.
불가도 세속에 의지하여 동행한다.
 
탐, 진, 치(貪瞋癡).
깨달음을 방해하고 괴로움에 빠뜨리는 근본 번뇌인 탐욕(탐), 화기(진), 무지(치) 등 세 가지 독(삼독, 三毒)을 말한다.
탐욕과 화기는 이해할 수 있다.
우매의 어리석음에서 악의 시각인지 선의 시각인지 물질문명의 시대적 혼란이 있다.
요사이는 악보다 선이 우매한 경우가 많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혜를 바탕으로 베푸는 행위가 최고의 수행임을 뜻한다.)라는 말씀이 있다.
세속적 시각에서 베푸는 바보가 있다.
베푸는 놈도 받는 놈도 모두가 기쁘면 더 좋다.
선처에서 조건 자에 의해 배품의 기쁨이 발생하므로 그 것으로 복이다.
맨 날 죄 짓고 남의 것 빼앗는 자가 있다.
그리고 안식일에 조건 자의 역할에 만족한다.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과 성전의 더럽힘과 권세와 탐욕과 모방 등 온갖 배신과 극의 인내에서
성전의 파괴와 멸망의 고통으로 교훈하셨다.
문수보살의 예리한 칼날은 세속적 선 즉 배품을 지키는 것이다.
세속적 배품에서 열반의 씨앗을 결부시킬 이유는 없다고 본다.
불가와 세속은 연기사상과 불이일원론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완전체는 아니다.
 
발우공양(鉢盂供養).
사찰에서 승려들이 규범에 따라 식사하는 청정한 수행의식이다.
음식에 대한 감사, 절제, 평등, 환경과 자원을 보호하는 정신이 담긴 식사법이다.
식사 전 과정을 의례 화하여 밥, 국, 반찬, 물을 4개의 그릇(발우)에 나누어 남김없이 먹어야한다.
하루 일식과 걸식에서 보시의 고마움이 있다.
수행은 형식으로 시작하여 무위법에 이른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걸식 후 일상적인 의례(좌선)를 마치시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경전의 서분이자
핵심이다.
생명과 육신에서 육신은 물질이 필요하다.
해탈의 과정에서 물질의 인식적 정립이라고 생각한다.
탐욕과 무소유에서 최소한의 물질공양은 필요한 것이다.
그마저 조심스러운 것이다.
 
편단우견과 통견.
가사를 왼쪽어깨에 걸치고 우측어깨를 드러내는 차림으로 순종을 의미한다.
생각보다 격식(형식)에 엄격하다.
수행에서 외적 인내로 내면의 숨을 이끌어내려는 절재의 방법 같다.
통견은 저고리이다.
 
보리샤트바.
보살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보살은 깨달음의 경지가 엄격하였으나 시방은 모두가 보살이다.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서 세속화 되었다는 것이다.
 
시방세계.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을 칭하는 부처의 세계이다.
 
묘행무주(妙行無住)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상(相, 집착)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라 함은 아, 인, 중생, 수자에 예속된 행(업)이며 무의수행에서 깨달아야하는 세속적 현상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하여 복덕을 이루라는 것이다.
줄 때는 미련 없이 주어라!
주고 후회하면 업이 된다.
사유의 현세에서 보시의 바보가 있다.
선으로 주고받는 것은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기쁘다는 것이다.
세속의 구제에서 그래야 공유하여 발전한다.
받는 놈이 뻔뻔하면 구재가 어렵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나 세상(세속)은 변한다고 하였다.
구제의 선처에서 지혜의 시대적 슬기로움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종제선근(種諸善根).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여 학문의 바탕이 되면 혼란하여도 씨앗이 되어 되살아난다.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저변의 확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례에서 생존확률이다.
 
투쟁견고(鬪諍堅固)시대.
불기 2,500년이 지난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뜻한다.
학습과 시간의 충족하는 문화적 권태(지루함)에서 지식과 계율(법칙)이 충돌하는 시대이다.
학습의 보편성 정체에서 지루한 반복의 번뇌와 미지의 의심이 증가하여 존재의 증거를 다투는 현상이다.
중세의 종교사회에서 지식이 충돌한 이성적 자유 유물론을 기억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변화의 가르침에서 학습의 충족을 의미하며 새로운 질서를 예지하고 있다.
2천년 후 재림과 유사하다.
 
비로자나불(Vairocana).
불교의 진리를 인격화한 법신불(法身佛)이다.
"광명이 온 세상에 비춘다."는 화엄경의 주존불이다.
우주와 만물에 깃든 진리를 상징한다.
주로 왼손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지권인)수인을 취하고 대적광전에 모셔진다.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법신불)의 대표적인 수인(손 모양)이다.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형태이다.
오른손은 부처(지혜, 불계)를 왼손은 중생(이치, 중생계)을 상징한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불이불원론)중용의 지혜를 상징한다.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진리의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과 함께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봉안한다.
대광명전, 비로전, 화엄전 등으로도 불린다.
주로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한 큰 규모의 사찰에서 볼 수 있다.
 
무위법과 유위법.
대승과 소승 또는 불이불원론에서 무위법과 유위법을 말할 수 있다.
초월하여 이르면 규범이나 율법 또는 법칙의 범위를 벗어난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열반은 사물적 법칙을 초월한 무의 경지이다.
무로 돌아갔다 환생하는 윤회의 순간이다.
아라한에 이른 성인에게 법칙과 규범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 무위법이다.
법 없이도 사는 양반들 말씀이다.
대응하여 규범과 법칙이 필요하면 성인이 아니다.
성인이 아니면 유위법에 속한 세속의 중생이다.
유위법은 법칙 또는 실상에 예속된 인연이다.
규범 즉 법의 지배에 있는 세속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라도 멸도의 진리를 통해서 세속을 벗어나 무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불법자(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불법(佛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있어도 없고 없다는 있다는 무의 창조적 고요이다.
삼라만상은 무에서 시작한 것으로 예초에 없었다는 진리이다.
사물적 현상을 다시 무의 원례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실상에 집착하면 진리가 되지 않는다.
설하였으되 즉시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후는 들은 자 의지이다.
법(法)이라는 상(相)에 얽매이지 말라는 공(空)의 지혜를 말씀하고 있다.
상 즉 현상(사물)은 인연(시간)에 의해 발현되고 시간에 의해 소멸(空)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수행에서 마음의 정진 외에 있다가 없어지는 정체가 불분명한 세속적 학습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아, 인, 중생, 수자의 세속적 깨달음과 탐, 진, 치의 멸도는 열반에 이르는 수행자의 길이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실천적 보시를 지향하는 대승불교에서 세속의 구제를 위한 배품(보시)은 실상의 혜안(지혜)이 필요하다.
지혜의 의미는 현상적 실효성이라고 본다.
아라한(해탈)의 경지를 지혜의 밝음이라고 표현한 대목의 의심이다.
열반은 창조 이전의 시간 무로 돌아간 것이다.
지혜는 세속적 실상이라는 주장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산수이다.
 
즉비불법(卽非佛法).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설 하면 즉시 무로 돌아가 재설정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들은 자의 의지에 남겨진 것이 전례의 전부이다.
고정된 형태의 불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공(空) 사상을 강조한 말씀이다.
열반은 사물적 법칙을 초월한 무의 경지이다.
환생하는 윤회의 순간이다.
 
수다원과(須陀洹果).
수행의 네 가지 성자 단계(사과, 四果) 중 첫 번째인 감각을 초월한 경지를 의미한다.
성인의 초입이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불교에서 인간의 6가지 감각기관 육경(六境)을 뜻한다.
시각(색), 청각(성), 후각(향), 미각(미), 촉각(촉), 의식(법)을 통한 사물의 현상적 학습을 말한다.
수행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여섯 가지 욕구라고 한다.
불자의 수행에서 이러한 가치적 과정의 학습은 불필요한 것이다.
세속적 또는 현상적 감각의 욕구적 방해이다.
수다원은 해탈의 초입을 말하며 감각적 욕구를 초월한 경지이다.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실로 오지 않음이 없다" 또는 "실상은 오지 않음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득도하였다고 중생의 구재에 소홀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 된다.
호수에 물이 가득하면 앞뒤의 분별이 사라진다.
부처의 가르침으로 오늘이 있다.
본받아 따르는 것이 씨앗이다.
세속의 구제는 불가의 의무이다.
구제에서 선이 전제된 언어와 동행적 설득은 필요한 것이다.
이 부분의 노파심이 있다.
멸도와 고행은 본받아야 하는 예지적 방향의 씨앗이나 객체 즉 격리된 수행자의 한계가 있다.
세속의 구제는 객체의 성취와 다른 대승적 종교가 목적하는 가르침과 수행(보시)의 실천이다.
설득에서 세속적 또는 대상적 언어와 동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이불원론과 일체론의 이해에서 소승적 시각의 우려이다.
기적의 설득은 지식의 시간적 한계에서 세속과 동행한 이유가 있다.
 
아라한(阿羅漢)
번뇌를 완전히 끊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성자를 뜻한다.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주종의 의미를 생각한다.
천상의 안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곁이다.
 
아, 인, 중생, 수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은 나라는 착각, 차별심, 존재에 대한 집착, 수명에 대한
미련을 뜻한다.
일단 버리면 극락의 문고리가 보인다.
매사 인연과 시류의 계량을 의식하면 피곤할 뿐이다.
 
공부.
!!! 수학에서 더하기 빼기는 진리이나 일은 아니다.
일(사물)을 우선하면 진리에서 소홀해질 수 있다.
초자의 느낌이다.
 
!!! 걸식에서 긍휼과 자급도 있을 듯하다.
요사이 한국불교에서 걸식은 사라진 듯하다.
 
!!! 가르침에서 생명을 중시 할 때 물질적 학습을 가식으로 본다.
학습을 버리고 탄생의 생명에 이르러야 보살이고 나아가 열반에 이른다.
학습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학습은 대부분은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멸도는 숨(시간)으로 얻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세속(문명)과 격리된 광야이다.
자아도 탐욕이라고 본다.
멸도에서 마지막 자아에 이르러 열반을 준비한다고 본다.
어떻게 버릴 것이냐의 문제이다.
이타적이어야 하고 보시해야 하고 탐욕과 화기와 우매함을 버리라고 하였다.
일상에서 학습과 관련된 관계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객체에 이르는 수행이다.
여기까지도 일반적 경지이다.
무념무상의 열반은 나조차 잊어야 한다.
육신과 사고에서 완전하게 분리된 숨 즉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완전한 생명에 이르는 경지이다.
태아 이전 보다 앞선 시간이다.
잉태도 유전적(생존적) 지식의 증거가 있다.
잉태에서 유전적 학습 이전의 경지를 이해해야 가능할 것 같다.
이르지 못할 시간이라는 한계를 느낀다.
죽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성취되는 무에서 동적생명으로 극에 이르는 숨의 열반이다.
어려우면 착하게 살면 된다.
 
!!! 불법은 2500년 이라는 시간의 정체에 있으며 미래를 위한 것이다.
막불(莫佛)은 오백 해 다섯 번 굴절의 마지막 시간에 진리와 지식이 충돌하는 혼란한 시대이다.
이것을 시간의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하고 있다.
사물과 지식은 변한다는 것이다.
재림의 계시가 있다.
여기에서 경(종교적 질서)의 공부는 미래의 씨앗이 된다.
학습과 시간에서 씨앗의 저변에 의해 중생이 구재된다.
이 말씀은 어떠한 학문의 저변이 확대되어 일상에 구전되면 감각적 학습에 휩쓸려 시간을 충족하게 된다.
주도적 학문에 의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미지(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뗏목과 미지의 이해에서 선이 주도하는 현재 또는 대세적 학습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식과 감각적 멸도의 생명이나 뗏목은 미지(준비된 세계)를 가르치며 세속의 발현은 수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이해이다.
 
!!!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있는 것이다
사물적 현상은 예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창조는 무에서 시작되었다.
삼라만상은 인연(시간)에 의해 언젠가 창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티끌에서 왔다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에서 실이 되었다 공으로 돌아가고 다시 실로 돌라온다.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윤회론이다.
볼토의 중심적 가르침이다.
 
!!!현상적 존재에서 생명은 감각이 없는 무이며 물질과 합하지 않으면 체를 이룰 수 없다.
진리와 법칙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지식과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
불이불원론은 사물적 존재론이다.
술에 물 탄다고 생각되시면 가만히 계시면 된다.
중간은 중용이 될 수 있다.
2026.3.15일.
 
금강경 2.

상좌부 불교(上座部 佛敎).
소승불교이며 대승불교에서 비하한 명칭이라고 한다.
세속의 구제(利他)를 통한 성불보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으로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방법이다
해탈을 목표로 하는 초기불교의 전통이다.
불교역시 시대의 지식과 문화에 적응하면 변화한 역사가 있다.
기독교도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있었고 한 때는 영지주의가 횡행하였다.
정리하면 대승불교는 세속의 구제와 함께하는 것이고 소승불교는 고립된 수행이다.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 지역에서 전승되어 남방불교이다.
가르침을 모르고 구제할 수 없고 구제 없는 수행에서 지혜를 발견하기 어렵다.
불이불원논의 이해가 필요하다.
 
사다함(斯陀含).
한자로 일래(一來)라고 번역된다.
윤회하여 인간세상 한 번 더 태어나 수행하면 아라한에 이른다는 조건적 경지이다.
환생하여 더하면 곧바로 아라한에 이른다는 바늘구멍이다.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은 전생의 업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다원에서 일곱 번 죽어다 살아나야 아라한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열반의 단계적 기준은 수행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타의적 판단이고 수행자가 단계를 의식하여 집착하면 아, 인, 중생, 수자에 연연한 것이 되므로 헛됨이 된다.
아라한의 과정은 무의 성립이므로 감각과 현상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의 과정은 있으나 나와 관계없는 타의적 계량일 뿐이다.
점점 난해하고 어려워진다.
 
일상무상(一相無相).
"하나의 상(相)마저도 상에 없다"는 뜻이다.
수행에서 육신으로 접하고 요구하는 감각과 현상을 완전하게 멸도 하였다는 것이다.
남아 있으면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알렉산더가 현자에게 소원을 물으니 "햇볕을 가리고 있는 대왕께서 비켜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일상무상에 딱 들어맞는 유명한 고사이다.
 
수보리(須菩提).
수보리는 공(空)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무쟁제일(無諍第一)로 알려진
10대 제자이다.
금강경은 부처님(佛)께서 제자 수보리의 물음에 답하여 법을 설하신 것이다.
 
환희지(歡喜地).
화엄경의 십지(十地) 중 제1지로 보살이 수행을 통해 범부단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첫 단계에 들어서며 느끼는 큰
기쁨을 의미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고정관념, 집착, 욕심에 얽매이거나 머물지 말고 청정한 마음을 쓰라는 것이다.
광야에 홀로된 자유이다.
태풍에 던져진 입새가 어렴 풋 하다.
정체를 존중받지 못한다며 봉변을 피할 수 없는 무 방어적 개념이다.
작금의 세속이 그렇다.
소승불교에서 가능한 수행이다.
대승불교에서 구제를 위한 언어와 동행에서 수자는 없어도 아, 인, 중생의 외형적 시각이 있다.
말 빨이 서야 통한다.
소통에서 인식의 평등을 요구하는 관계의 벼슬(상)이 있다.
나라면 출가에서 소승불교에 가깝다.
세속은 대승불교이다.
불이불원론은 중용을 중시하는 마땅한 가르침이다.
 
연등불(燃燈佛).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께서 전생에 선혜(제화갈라) 보살이었을 때 진흙길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깔아 밟고 지나가게
한 정성에 감동하여 "그대는 내세에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부처님이다.
삼세불(과거는 연등불, 현재는 석가모니, 미래는 미륵불.) 중 과거불이다.
연등불로 공양한다.
부처 이전에 부처가 계셨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지식의 역사는 학습에 의한 보편적 바탕에서 시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미 암시적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전적 시간의 벽을 통과하는 상상 밖이라서 돌연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종이처럼 얇아도 가려진다.
미지는 한 치가 어둡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형상(모습)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는 뜻이다.
상에 집착하지 말고 실체 없는 덧없음을 깨달아야 진리(여래)를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실증(현상)과 실존(미지)의 분별이나 모두 창조에 예속된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에서 불일 불이의 가르침이 있다.
여기서 이미 발현된 현상 또는 실체는 존재의 의미를 다했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 같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상과 미지의 경계적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형상(相)이 진짜 상이 아님(非相)을 깨달으면 여래(부처)에 이른다는 뜻이다.
사물의 외형적 집착을 버리고 존재의 본질을 볼 때 진리를 깨닫는다.
존재에서 유물론의 현상적 또는 이성적 개념과 다른 왜 라는 실존적 의심이라고 이해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라는 뜻이다.
대상의 고정관념과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순수한 마음을 의미한다.
만상과 나와 인연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 같다.
세속적 표현에서 "그럼 어떻게 살지요?"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유추하면 만물의 이치를 깨달으면 아주 작은 것으로 기쁨에 이른다.
언 듯 심오한 경지를 느끼나 쉬운 접근은 아니다.
금강경은 대체로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색장엄(色莊嚴).
부처님이나 극락정토를 다양한 색깔과 칠보(금, 은, 유리 등)로 아름답고 청정하게 꾸미는 것이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시대(1236~1251)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내고자(호국불교) 8만여 장의 목판에 경전, 율법, 논설 등
불교지식을 새겨 넣어 완성한 대규모 목각 대장경이다.
국가의 결집에 불교의 공덕을 이용하였다.
작금에도 종교는 중요한 정치적 시각에 있다.
 
반야(般若, Prajñā).
사물의 실제 모습(공, 무아)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근원적이고 밝은 지혜를 뜻한다.
탐, 진, 치를 끊고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게 하는 최상의 지혜를 의미한다.
반야심경의 핵심개념이다.
금강경의 전반부 내용은 소승불교가 추구하는 무의 수행이다.
중반부부터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나온다.
 
도피안(到彼岸).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언덕(차안, 현실)에서 깨달음과 열반의 세계인 언덕(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교화하는 광대무변한 공간으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가 10억 개 모인 거대한 우주단위를 뜻한다.
소천, 중천, 대천의 3가지 차원을 거쳐 형성되어 삼천이라 부른다.
무한한 우주를 암시하는 공간적 개념이다.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하나로 합쳐진 모습(일합상)은 단지 이름일 뿐이며 그 실체는 비어 있다.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있는 것이다.
형상에는 태생적 진리가 있다.
아래의 논지를 참고할 수 있다.
 
일합상(一合相).
무수히 많은 미세한 먼지(티끌)가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우주) 또는 형상을 뜻한다.
우주를 쪼개면 티끌이 되고 티끌이 모이면 세계가 된다.
결국 우주 또는 형상은 티끌로 돌아간다.
물질의 윤회이다.
만물은 인연(시간)에 의해 잠시모인 현상일 뿐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관념 속에서 없는 것을 있다고 형상(실증과 현상)에 집착한다.
어려우나 현존하는 무엇도 예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창조와 윤회와 무의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창조적 시각의 필요이다.
 
체루비읍(涕淚悲泣).
깨달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울며 기뻐한다.
바보가 된다.
 
바라밀다(波羅蜜多).
괴로움의 세계(차안)에서 깨달음과 지혜의 세계(피안)로 건너간다.
도피안(到彼岸) 혹은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출세간과 멸도를 성취하여 세속을 떠난다는 것이다.
 
칸트의 오성(悟性)
감성(感性) 및 이성(理性)과 구분되는 지적능력이다.
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논리적 사고력(지성)이다.
감각적 자료를 규칙에 따라 통일하여 개념을 구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흔히 지력 깨달음 이해력 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학문적 정리는 중요한 것이나 실체적 진실에서 이전에는 없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의 확장에서 문서와 구전이 충돌한 시대가 예수시대이다.
전례의 전통과 합의된 법칙의 분별이 공존하여 학문의 보편성을 확장한다.
구전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체계화된 학문이다.
학문의 연속성에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정해진 법(진리)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현상과 진리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황(학습)과 인연(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세상과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진화론이다.
 
바라밀(波羅蜜).
저 언덕(깨달음/열반)으로 건너간다.
도피안 (到彼岸)과 같은 뜻이다.
 
할절신체(割截身體).
신체를 마디마디 잘리거나 베이는 극심한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도 아상(我相)등 사상(四相)을 내지 않은 무아(無我)의
경지를 상징한다.
현세를 생각하면 태풍에 던져진 낙엽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모든 것을 내어주면 바보가 아니라 가스라이팅 당한다.
시장 통이든 국제사회든 힘센 놈 세상이다.
무지하고 사악한 지배적 관계의 대응이 반드시 필요한 혼란한 불기 2570년 이다.
스스로 대의를 지키는 호국불교가 있다.
소승불교의 무아와 정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대승불교의 차이가 있다.
수행자의 길을 존중하나 세속의 가르침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강력한 주장이다.
 
위이익일체중생(爲利益一切衆生).
보살이 모든 중생에게 진정한 이익을 주기 위해 보시하고 수행한다는 실천적 불교적 대승적도 정신이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병든 자에게 약을 주듯 상대의 상황에 맞게 돕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널리 베푸는 자비심의 실천이다.
드디어 대승불교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아, 인, 중생, 수자에서 탐, 진, 치를 멸절하는 수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야 실상의 혜안으로 세속의 구제 가능하다.
 
심주어법(心住於法).
마음이 법(상/집착)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즉무소견)과 같다.
대가를 바라는 보시는 깨달음의 공덕을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줄때는 대상을 버리고 무심하게 보시하란 것이다.
주고 돌아서 잊으라는 것이다.
 
부주법.
무주법(無住法) 또는 무주상(無住相)과 맥을 같이한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자세를 말한다.
선을 행할 때 대상을 생각하지 말고 무심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일테면 무기명 기부 같은 것이다.
 
무주상(無住相).
형상이나 특정한 대상(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와 행함을 말한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여래(진리)가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등 행동(위의)을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실상은 고요하여(적정)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여여(如如)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분별 심을 버리고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정진하여 진리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무위의 세계에서 분별 심은 형식과 현상을 따지고 증거 하려는 대상적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속적 시각에서 분별력은 논리적 이해와 양보를 우선한다.
무위와 세속은 시각적 차이가 있다.
 
공부.
!!! 만물의 이치와 인연에서 감각과 깨달음의 시각은 다르다.
감각은 계량하나 깨달음은 계량하지 않는다.
작다고 탓하지 않고 크다고 우쭐하지 않는다.
작든 크든 존재로 받아들인다.
불자의 수행은 경쟁을 추구하는 물질문명과 거리가 있는 사물적 자유의 정신세계이다.
2500년 전과 현재의 사물과 관계의 이해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 깨달음으로 실상에 이른다.
관념에 의한 상이라는 것을 금기시한 가르침에서 실상을 말씀하시고 있다.
모르고 행하는 것과 알고 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진리로 접근하면 지혜가 밝다.
소승불교의 성취에서 대승불교의 시각이라는 생각이다.
결국 중생의 구제이다.
세속과 출가에서 불이불원론이다.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세속 즉 문화와 지식은 종교의 근원이다.
창조와 사람과 종교의 순서이다.
초자연적 현상의 예속과 숭배에서 극복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여 문화를 형성하였다.
다수(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질서에서 종교가 탄생하였다.
학습과 시간의 과거적 순리이다.
인류사의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 진리에 이르면 상에 머물지 않는다.
현세에서 또는 속세에서 상이 상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에 도달하여 득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에 구속되지 않는 깨달음의 혜안을 말 한다고 본다.
연기사상과 연결된 관계의 순수이다.
세속에 머무는 대승불교의 정체이다.
 
!!! 현상을 말하며 "실체는 없는 것이고 명분만 있다."라고 하였다.
무의 경지에 이르는 뜻은 이해하겠는데 실상의 인정에서 학문적 논리는 필요하다.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달기 전에는 실이 허가 될 수 있으나 깨달음에 얻으면 허가 실이 될 수 있다는 정리이다.
될 수 있다는 표현은 무엇이든 규정할 수 없다는 변화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예지적 사고이다.
 
!!! 대상에 집착하면 자연 즉 진리를 감춘다.
관념적 집착은 광야의 넓음을 감추어 마음을 어둡게 한다.
아, 인, 중생, 수지에 집착하면 탐, 진 ,치의 어둠에 빠진다.
2026.3.16일
 

금강경 3.

4상(四相).
사상이라고 하는 상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의미한다.
4상의 분별에서 벗어나 탐, 진, 치를 깨달아야 아라한(열반)에 이른다.
탐욕에서 시작하는 화기와 우매함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수행의 요점이다.
 
세간(世間).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세속을 말하며 주로 소문이나 이목 등 대중적 영역이다.
출세간은 세속을 떠난 깨달음의 세계이다.
열반은 경이로운 것이나 전적으로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다.
중생의 구제는 대승적 보살의 보시이다.
깨달음은 사회와 이웃의 관계에서 공과를 의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작례위요(作禮圍繞)
예를 갖추어 부처님 주변을 도는 것을 말한다.
대계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것이 상례이다.
시방은 거의하지 않는다.
탑돌이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불경의 가르침 참에서 공경이라는 사사로운 감각이 있다.
관계의 높낮이 이다.
무의 성취에서 위치를 가늠하는 세속이다.
아라한의 수행은 세속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나 머무는 부족한 거취가 있다.
세간을 떠돌며 부처의 가르침을 빙자하는 겉모습의 치장이다.
 
선세죄업(先世罪業)
전생(선세)에 지은 죄와 업보(죄업)를 말한다.
금강경을 열심히 공부하면 전생의 죄를 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세속에서 자식의 인연은 눈에 넣어도 아픈 것이 없는데 전혀 모르는 전생에 예속되는 운명이 있다.
불경의 가르침은 만물의 이치는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전생으로 이생을 규정하는 설에 의심이 있다.
현상에 머물지 않고 떠나는 가르침에서 지나온 시간에 정체되는 모순이라는 무지이다.
 
구류중생(九類衆生)
모든 중생을 태어나는 방식(사생)과 모습과 인식의 유무(오상)에 따라 9가지로 분류된다는 뜻이다.
생의 시작을 살펴 보살이 제도해야 할 대상이다.
구류중생의 9가지이다.
태란습화(胎卵濕化)는 태생(모태), 난생(알), 습생(습기), 화생(변화)으로 탄생의 모습이다.
다음은 오상(五相)의 인식이다.
유색(有色)은 빛의 숨에 의한 형상이 있는 중생이다.
무색(無色)은 물질에 갇힌 형상이 없는 중생이다.
유상(有想)은 생각이 있는 또는 의심과 탐구가 있는 중생이다.
무상(無想)은 생각이 없는 정체된 중생이다.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중생이다.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살이 보리심을 발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인도해야 할
일체의 중생을 의미한다.
열반은 내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씨앗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불경의 깊이는 실상의 밝음으로 세속과 동행하며 진리로 구제하는 것이다.
다면적 분별에서 차별 없이 제도하려는 대승불교의 자비사상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의외로 격리의 성취보다 세속적 구제에 밝다.
 
위발대승지설(爲發大乘之說).
대승(大乘)의 마음을 낸 자(보살 심을 낸 자)를 위한 부처의 가르침이다.
중생을 위해 마음과 실천을 행한다.
소승(小乘)의 도리에서 벗어나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큰 뜻이다.
세속의 구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종교의 목적이다.
대승불교의 정체이다.
불토의 변화이다.
 
과보(果報).
전생이나 과거의 선악으로 인하여 현재나 미래에 받는 결과(보응)이다.
인과응보의 도덕적 법칙이다.
선한 행동은 낙과(즐거운 결과)를 악한 행동은 고과(괴로운 결과)를 낳는다.
이생의 복덕은 윤회와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사다함에 즉 전생에 대해 정말로 모른다.
 
사량(思量).
생각하여 헤아림을 뜻한다.
상대방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헤아리는 보시이다.
사랑의 어원이라고 한다.
 
당처(當處).
선종(禪宗)에서 생각이나 행동이 일어나는 자리 또는 면목(본성)이 드러나는 곳을 뜻한다.
발생지와 발현지와 가르침과 법칙의 근본 또는 근원을 말한다.
터 닦은 곳이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부처께서 도달한 가장 높고(無上) 바르며(正) 평등한(等) 깨달음(覺)의 진리이다.
일체의 번뇌를 초월하여 우주의 이치를 꿰뚫는 지혜를 의미한다.
성불(成佛)을 위한 최상의 경지이다.
아라한의 성취이다.
아뉵다라삼먁삼보리를 기억할 수 있다.
 
마하살.
마하살 즉 마하살타는 크다는 마하와 중생의 살타를 합친 위대한 존재라는 뜻이다.
불토와 세속의 영원불멸한 절대를 기도하고 칭송하는 예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공경과 예의는 객체와 대중적 의미에서 다른 표현이다.
 
불일불이(不一不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가르침은 현상과 본질이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연기법에 따라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므로 고정된 하나(一)가 아니다.
동시에 완전하게 다르지도(異/二) 않다.
즉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중도(中道)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의한 이분법적 극단성을 예시할 수 있다.
연기사상에서 만물은 생태계의 비율적 합리성으로 나누어 존재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입에 거품 가득한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정해져 있는 고정된 법(진리와 방식)은 없다.
공(空)과 무상(無常)의 사상이다.
실상은 학습과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기울어지면 채워지고 차면 비워진다.
학습과 시간이 충족되면 새로운 미지(질서)가 발현 된다
시간의 순리에 의해 준비된 세계의 가까움이 발현되면 있던 것은 비워지고 새것으로 채운다.
획일적 가치관을 거부하고 유연한 사고로 시간의 변화에 대처하는 지혜의 자세이다.
 
미륵존여래불(彌勒尊如來佛).
석가모니 이후 미래에 사바세계에 내려와 성불하고 중생을 구제할 수기(인증)받은 미래의 부처님(미륵보살)이다.
56억 7천만 년 후 이면 아득하다.
시방도 AI로 정신없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할지니라(볼지니라)"는 뜻이다.
현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처럼 덧없으니 집착하지 말고 맑은 눈으로 관찰하라는 말씀이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형상의 껍데기를 깨우쳐 존재의 진리에 이르면 무명(비워진)의 밝음으로 실상(현상)의 긍정적 이로움을 깨닫는다.
탐, 진, 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렇게 보인다.
이것저것 따져 의심하지 마시고 실신(實信)하게 해보시면 안다.
발 뺄 준비하시고 시작하면 아니한 만 못하다.
 
득성어인(得成於忍).
"참음을 성취하다" 또는 "법에 대한 인가(認可)를 완성하다"라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음(무아, 無我)을 깨달아 무위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 무위법이다.
외부의 현상적 감각에서 감정적 충동을 절재 하는 한결같은 자세이다.
함부로 꼭지 돌지 말라는 것이다.
참음과 인내의 수행에서 불자의 공덕이 크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사홍서원(네 가지 큰 서원) 중 첫 번째이다.
"끝없는 중생을 모두 건져 오리다." 라는 서원이다.
모든 중생을 자비심으로 제도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이타적 배품의 시작이다.
자기에 갇히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삶을 지향하는 동행적 보시이다.
소승불교의 객체에서 세속의 실상을 구제하는 대승불교의 정체이다.
불토의 이타적 변화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우는 네 가지 커다란 서원(맹세)이다.
모든 보살이 공통으로 세우는 원력이라 하여 총원(總願)이라 부른다.
한국불교에서 법회나 의식을 마칠 때 항상 함께한다.
네 가지 내용.
(1 중생무변서원도 (衆生無邊誓願度):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
2 번뇌무진서원단 (煩惱無盡誓願斷): 끝없는 번뇌를 끊는다.
3 법문무량서원학 (法門無量誓願學): 한량없는 법문의 수행이다.
4 불도무상서원성 (佛道無上誓願成): 최상의 불도를 지향한다.
의미에서 멸도의 깨달음과 중생의 제도를 병행한다.
수행에서 불자가 지켜나가야 할 구체적 목표이자 길이다.
대승불교이다.
 
업식(業識).
행동과 마음가짐(업)이 쌓여 형성된 고정관념, 습관적 분별심, 잠재의식을 의미한다.
행동 패턴을 반복하는 무명(지혜 없음)으로 인해 망념이 일어나는 첫 단계를 말한다.
학습 또는 수행의 깨달음이 없는 무의식한 객체를 말한다.
 
무명(無明)
비워져 밝다의 긍정과 채우지 못한 없다의 부정적 뜻이 있다.
무지(無知)에서 지식(현상)이 없다를 현상(지식)을 비웠다 라고 하면 지혜(밝음)만 남는다.
아라한에 이르는 시간이다.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자의 해석에는 다면적 방향의 추론이 가능하다.
 
노장사상(老莊思想).
인위적인 규범을 배격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 자연 그대로의 순리)을 따르는 도가의 사상이다.
인위적인 예치(禮治)를 강조한 유가와 대비된다.
절대 자유와 유연한 삶의 태도를 중시한다.
생태적 질서의 이해이다.
인간은 대지연의 질서에 예속된 지적 개체이다.
여행의 욕구가 탐구의 시작이다.
탐구는 지식의 욕구이며 이것이 객체의 이성적 자유가 된다.
진화와 확장성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 신경의 핵심내용이다.
"형체가 있는 물질(색)은 곧 고정된 실체가 없는 빈 것(공)이며 그 빈 것이 곧 물질이다"라는 뜻이다.
어려우나 물질만 있다면 색은 없다.
빛의 영역 즉 공간이 없으면 볼 수 없다.
상대적으로 색(빛)만 있어도 볼 수 없다.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리서 공간이 있어야 색(시각)에 의해 물질이 존재하게 되고 물질의 반사가 있어야 색이 있다.
불이불원론에서 상호작용에 의한 일체법으로 실상(현상)의 해석이라고 본다.
생명적 접근에서 티끌이 모여 물질을 이룬다.
빛도 티끌이다는 개념에서 공간의 티끌이 인연(시간)에 의해 물질이 되고 물질은 시간에 의해 부서져 티끌이 되므로
공간이 된다.
불이불원론에서 일체법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근본적 시각에서 윤회론으로 이해된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형상과 색의 불멸적 원천이 아니라 무에서 시작(작용)이라는 것이다.
무한으로 넓히면 창조에 이른다.
불경의 가르침은 규정하는 것이 없다.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의 원칙은 성취를 목표하거나 위치(정도)에 연연하는 세속적 실상(현상)을 잊는 것이다.
밝음(혜안)으로 실상의 평등한 진리를 구제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배려가 있다.
아라한의 성취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중생을 구제하지 못하였으면 불토의 장엄함은 존재할 수 없었다.
경에서 열반의 밝음이라 함은 무의 새로운 시작과 생명과 사물적 관계와 윤회의 이해라고 본다.
 
공부.
!!!경천(敬天)은 하느님(상제)이나 하늘의 이치를 공경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경천하면 선세죄업이 사라진다는 대상이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탐, 진, 치에 예속된다.
작례위요(作禮圍繞)와 경천(敬天)에서 공경과 대상의 차이가 궁금하다.
부처님 말씀에 설법도 종국에는 없는 것이 된다.
설법으로 열반에 이르면 모든 것은 무(空)가 된다.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씨앗은 시간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을 구제하는 것이 종교의 참 뜻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인간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가르침으로 전하는 것이 중생을 바르게 구제하는 것이다.
세존 즉 부처께서 세속에 어떠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시는지 궁금하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면 만물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있어도 없는 것이며 설하여도 설하지 않은 것으로 공부였다.
대승불교의 이해에서 깨달음 전에는 실이 허가 되고 멸도하여 아라한에 이르면 허가 실이 되므로 진리의 밝음으로
실상을 볼 수 있다는 정도의 안심은 필요하다.
억지 같은 산수이나 어찌되었든 설명이 필요한 중생의 무지이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하셨다.
가르침을 의심하여 법당의 불상을 해체하였다는 수행자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사물에 부처의 가르침이 있다.
멸도의 길이 멀다.
 
!!! 베풀되 남기지 말라는 말씀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일에서 목적도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무지가 있다.
산수의 의심으로 반항하면 가르침은 경 또는 설의 실상으로 전달되었다.
중생의 이해에서 실상이 있었으나 듣는 자에서 허(虛) 즉 공(空)이 된다.
시작의 주체는 있었으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어둠을 비치는 빛은 있었으나 객체에 의해 흡수되어 사라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와 만물의 지식(현상)으로 창조를 향해 진화 한다
연기사상에서 존재하는 것은 공유의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정신이든 육신이든 존재하는 것은 창조에 예속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심연의 고요이다.
암시적 질서이다.
따지자면 시작(창조)은 있었다는 것이다.
아, 인, 중생, 수자의 집착에서 멸도와 병행하여 무위(無爲)적 보시를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과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가르침이 있다.
수행이 부족한 답답함이 여여(如如)하다.
 
!!! 불자의 길이 소승과 대승 사이에서 분별하고 있다.
출세간과 소승의 가르침은 확고한 것이나 대승의 실천을 위한 속세의 언어와 행색의 동행에서 세속적 분별이 필요한
실상의 경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초자연적 현상의 숭배와 물질문명과 경쟁적 성취를 요구하는 시대는 분별의 정도가 다르다.
빼앗는 것이 수단으로 용인되는 시대이다.
이기는 놈이 장땡이다.
2500년의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다.
가르침에 따르는 무위(無爲)적 세속의 구제이다.
대승의 시작이 또 다른 창조이다.
 
!!! 세속과 불가는 이원론적 객체가 아니다.
아라한은 존재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지 생명과 물질을 분리하여 분별하지 않는다.
멸도 또는 멸적이라고 하니 생을 버리는 허무주의를 생각한다.
불자의 수행은 허(虛)를 깨우쳐 실(實)에 이르는 전혀 다른 생의 기운이다.
대승은 실상의 밝음으로 중생을 평등으로 구제해야 한다.
모든 중생에게 아라한의 경지를 요구할 수 없다.
멸도는 가르침의 수행을 통해 씨앗으로 학습과 시간의 연속성에 보시하는 것이다.
실체 없이 공유되는 암시적 질서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진다.
연기사상에서 존재적 공유이다.
 
!!! 어떠한 일에 몰두하면 순간 일체감을 느낀다.
상념이 잊혀 진 것이다.
홀로 산행을 하면 육신이 어지간할 때 간간히 일상의 즐거움과 어두운 상념의 순간이 있다.
피로가 쌓이면 발걸음과 길의 윤곽과(없는 곳에는 주변의 상황에 정신을 빼앗긴다.) 진행의 끝으로 단순해진다.
어느 정도 정신과 육신의 일체감을 느낀다.
물론 산의 높이에서 시각적 새로움에 집중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것이 일상 속 잡다한 관계의 혼란과 분별과 계량에서 단순한 일체가 주는 격리된 자유와 이성적 학습의 그리움이
된다.
수행이라고 하면 과한 것이다.
 
!!! 수행자가 씨앗을 목적하면 아, 인, 중생, 수자에서 탐, 진, 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토의 역사에서 아라한의 씨앗은 시간의 방향을 제시하는 보편적 학습에 이른다.
뿌린 데로 중생이 본 받아 다음 생에 전달하게 된다.
인간의 시간으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에서 유전적 연속성이다.
객체의 시각에서 씨앗은 탐, 진, 치의 성취가 되는 것이나 역사의 씨앗은 세속을 구제하는 배품의 보시가 되어 불토의 장엄을 이룬다.
 
!!! 할 수 있다면 무아적 삶은 온전한 생명에 이를 것이다.
현세의 인류는 물질문명과 유물론의 감각적 학습에 예속되어있다.
실증적 현상주의이다.
멸도를 통한 불토의 장엄과 거리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식의 다면적 창조에서 선택이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멸도와 무상에 의한 불가의 복을 모르면 덜하여 불행한 것이다.
알면 더하여 행복한 것이다.
2500년의 시간에서 변화를 예지하셨다.
불가의 선대에서 사라진 것이나 전례의 씨앗으로 후대에 남겨진 것이다.
세속은 가르침의 보편성을 이루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전체이다.
연기사상과 불이불원론의 가르침은 세속과 연관이 있다.
물질문명의 실증적 사고에서 무상의 실존적 공간으로 행복을 더하는 보시이다.
소승불교에서 씨앗으로 세속에 던져졌으면 그만이다.
실상과 동행하는 대승불교의 맡기면 고립된 깨달음을 다한 것이다.
있어도 없는 것이므로 대승불교의 책임과 희생도 없는 것이다.
내 것의 강조는 탐, 진, 치에 속한다.
 
!!! 부처께서는 껍데기로 포장된 학문의 명칭이 아니라 구성의 진리를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현상적 실상에 가깝다.
이름이 아니라 인격이고 성품이다.
밥그릇이 아니라 밥이다.
교회는 성경이고 사찰은 불경이다.
프로파가다가 아니라 일의 능력과 성과이다.
말의 구제가 아니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위이다.
갓과 벼슬이 아니라 백성과 민생을 우선하는 것이다.
상이 아니라 인륜을 우선하여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일(수행)에서 목적이 다른 혹은 사사로움이 섞이는 것은 탐, 진, 치에 속한다.
2026.3.17일.

 

금강경 4.

이색이상(離色離相).
색(물질적 형체)을 떠나고 상(모양)을 떠난다는 뜻이다.
부처의 진정한 모습(여래)은 눈에 보이는 육체나 거룩한 외양에 있지 않다.
"색신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빛에 의한 시각과 기관을 통한 감각적 선입견으로 아라한의 무아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시각(색), 청각(성), 후각(향), 미각(미), 촉각(촉), 의식(법)을 통한 사물의 현상적 학습을 말한다.
수행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여섯 가지 욕구라고 한다.
불자의 수행에서 이러한 가치적 과정의 현상은 불필요한 것이다.
세속적 또는 현상적 감각의 접근적 방해이다.
(수다원은 성인의 초입을 말하며 감각적 욕구를 초월한 경지이다.}
위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십 세 전 증조모 손에 이끌려 동네 점보는 할머니 집에 갔었다.
나는 불상이 모셔진 재단이 무서워 가기 싫었다.
가며는 증조모 등 뒤에 숨어 불상을 뚫어지게 훔쳐보았다.
훗날 법당에 두어 번 들어간 적이 있는데 상보다 뒤가 더 무서웠다.
지금도 법당의 불상이 두려워 실적 훔쳐보는 정도이다.
전생을 모르는데 죄가 많아 그런 것이라고 단정할 때가 있다.
세속적 분별은 사물적 기준의 실상이며 수행자의 분별은 실상 즉 고정된 관념에 머무는 탐, 진, 치에 속한다.
 
즉위방불(卽爲謗佛).
(여래(부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나의 설은 있으되 없다고 하신 가르침의 원천은 설하여도 들어도 없는 무의 회복이다.
있다고 분별하는 것은 설하되 없다고 하신 가르침의 무지이다.
한마디로 불토의 성취에서 얻는다는 것은 세속의 실상을 버린다는 또는 상념과 번뇌를 벗는다는 것이 된다.
최상의 경지에 이르면 완전하게 비워져 무아에 이르므로 설하여도 뒤가 없다는 것이다.
대승적 보시의 시각에서 들은 자의 혜안에 흡수되어 또 다른 수행에 내제된 전례라는 가설에 애착이 간다.
 
육도윤회(六道輪廻).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 전 지은 업(業)에 따라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여섯 가지의 세계관이다.
윤회하는 육도이다.
1 천상도(天上道): 선한 중생이 태어나는 곳이다.
2 인간도(人間道):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3 아수라도(阿수羅道): 싸움이 끊이지 않는 세계이다.
4 축생도(畜生道): 짐승이나 벌레 등으로 태어나는 세계이다.
5 아귀도(餓鬼道):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겪는다.
6 지옥도(地獄道): 극심한 형벌과 고통이 지속되는 세계이다.
단테의 신곡이 생각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수레바퀴(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탈의 고요에 이르는 것이다.
천상의 안주이다.
기독교의 승천과 같다.
인류사에서 몇 안 된다.
죄 짓지 않으면 된다.
중간계도 있다고 하니 희망을 가져보시기 바란다.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교화하되 교화한 바가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여래)은 수많은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구제하지만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부처는 아라한의 경지에 있으므로 무에 이른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구제하여도 구제한 것이 아니고 설을 하여도 안한 것이고 들었어도 들은 것이 아니다.
들었다고 하면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아, 인, 중생, 수자의 대상으로 경솔한 행위가 된다.
설하되 막(莫)이라는 것이다.
나중은 들은 자 또는 얻은 자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불상이 아니라 불상의 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릇유다의 배신으로 붙잡혀 신문을 받을 때 대제사장과 수하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증명해 보라고 하였다.
이때 하신 말씀이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으니 너희가 먼저 증명하면 나도 하겠다."이었다.
창조자의 세계는 인류의 유전적 한계에서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있다는 것이다.
비유할 수 있는 예시라고 본다.
금강경 전반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니 산수 밖에 모르는 중생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인류의 유전적 한계는 보이는 데로 있는 데로 직관한다.
여기서 따지기 좋아하시는 분들은 부처는 중생과 외면으로 대면하지 않았느냐 이런다.
기독교는 중보자 예수를 통해 또는 계시자 모세나 선지자를 통해 가르침을 들었다고 한다.
대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에도 수 맗은 제자 즉 중보자(보살)가 있다.
어떠한 모습이든 설이든 중생의 구제는 같은 것이다.
기적이고 무의 설득이다.
자비이고 사랑이다.
같은 것이다.
 
구족상(具足相).
부처님이 깨달음의 복보(福報)으로 갖춘 완벽하고 훌륭한 신체적 특징을 뜻한다.
왜 이러한 대상을 만들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아, 인, 중생, 수자를 공부하였는데 생뚱맞은 말씀이다.
금강경에서 구족상은 부처의 완벽하고 위대한 외형을 나타내지만 궁극적으로 초월해야 할 멸도의 대상이 된다.
공경과 예의는 다른 것이다.
내 것에 집착하면 혜안이 흐려진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서 텔레스 학파의 헬레니즘이 역사적 인물을 형상화 하였다는 기록에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사람 짓이라는 분노이다.
신의 경계를 따지는 분들의 저의가 의심되었는데 빌미가 있었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육바라밀에서 짧게 거론된 내용이다.
대승불교의 여섯 바라밀 중 세 번째로 억울함과 모욕과 고통 등 견디기 힘든 상황을 흔들림 없이 참아내는 수행이다.
수동적 인내를 넘어 자비심과 지혜를 바탕으로 화를 다스려 평정을 유지하는 수행이다.
내게 특별하여 다시 공부하였다.
 
불수복덕(不受福德).
선행과 복덕에 대해 집착하거나 탐내어 누리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복과 덕은 안 받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기대하는 것은 아, 인, 중생, 수자에 해당한다.
따라서 선행은 뒤 끝없이 무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쟁(和諍)사상.
원효대사가 제창한 한국불교의 핵심사상이다.
다양한 견해의 절충을 넘어 서로를 포용하는 화합과 소통의 지혜를 강조한다.
마음의 도리 또는 대세적 질서를 깨달으면 대립된 주장을 수용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당시 다양한 종파의 시비와 갈등을 극복하고 부처의 사상을 일체하여 전하고자 하였다.
당리당략의 역사가 아쉽다.
시방도 시끄럽다.
 
항하사 등신명(恒河沙 等身命).
항하사(갠지스 강의 모래)만큼 많은 수의 자신의 몸과 목숨을 의미한다.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 몸과 목숨을 다해 보시한다는 선언 또는 약속이다.
대승불교의 구제에서 아라한에 이를 수 있는 보시이다.
 
아승지(阿僧祇).
불교에서 유래한 '헤아릴 수 없이 큰 수'를 말한다.
갠지스 강의 모래를 여러 번 말씀하였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현상이 이슬(露)과 같고 번개(電)처럼 덧없다.
존재하는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것이므로 삼라만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인내하여 수행으로 아라한에 이르러 윤회를 벗어나 천상에 안주하라 하시고 끝물에 허무하지 말라고 힘 빼고 계신다.
잘 생각해서 출세간 하시라고 먼지 털고 계신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삼법인(三法印) 중 하나로 존재와 현상(제법)에는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인 실체로서 '나'나 '자성'이 없다는 진리이다.
사물은 인연에 따라 잠시 모여 있는 것일 뿐 영원히 실체는 없다는 가르침이다.
왔다 가는 것이다.
본질적 의미에서 언젠가 소멸되므로 있어도 없다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이다.
현상은 시간(인연)에 의해 변화하므로 영원하지 않다.
관념적 집착에서 벗어나 학습과 시간의 변화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율법과 법칙은 시간에 의한 지식과 문화의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오백년이 다섯 번 지난 후 법칙과 지식이 충돌하는 혼란한 시대를 예지하셨다.
현세가 2500년 지날 즈음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 현상에 연연하지 말고 혜안으로 살펴 아, 인, 중생, 수자를 깨달아 탐, 진, 치를 멸도하면
해탈의 고요에 이른다는 말씀이다.
삼법인(三法印)이 금강경의 정수라는 말씀이 있다.
 
성주괴멸(成住壞滅).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머물고 붕괴되고 소멸하는 4단계 과정(成·住·壞·空)을 말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에서 물질의 윤회론을 말하였는데 있었다.
삼라만상은 태어나고 멸한다는 불멸의 진리이다.
재행무상에서 변화의 가르침을 참고할 수 있다.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응해서 나타난 응신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난 화신은 대상이 있으므로 부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소승불교에서 객체의 내면적 성취를 말하고 있다.
물질적 보시보다 경전을 독송하고 이웃에 전하는 공덕이 더 큰 보시이다.
현상(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부동 한 마음을 가질 때 반야의 지혜에 이른다.
실상을 수용하는 대승불교와 다른 관점의 불토이다.
성경에도 접대와 탐구에 관한 견해에서 자매와 관련 된 비슷한 말씀이 있다.
부처께서는 변화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른 화신이시다.
 
12연기법(十二緣起法).
괴로움(老死)이 발생하는 인과 과정을 12가지 단계로 설명한다.
생로병사에 이르는 윤회의 사슬을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무명(무지)을 해탈하여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12연기의 단계.
무명(無明): 무지와 어리석음.
행(行): 무지에 의한 업.
식(識): 인식과 분별.
명색(名色): 정신(명)과 물질(색).
육처(六處/六入): 감각기관(안이비설신 의)
촉(觸): 대상의 접촉
수(受): 감각에 대한 느낌(고락)
애(愛): 갈망하는 마음
취(取): 애착의 집착.
유(有): 업이 형성됨.
생(生): 태어남
노사(老死): 늙음과 죽음.
무명(무지)으로 인한 행(업)과 생(시간)에 의해 생로병사의 굴절이 발생한다는 삶의 순리이다.
소승불교의 관점에서 순리를 수용하여 지혜를 밝히고 고통을 인내하여 현상을 멸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대승불교의 대상적 구제에서 지혜로움으로 선행과 가르침을 보시하여 공덕을 쌓아 업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다.
 
공부.
!!!소승불교에서 수행의 순수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구제에서 불토의 분별이 있다.
정토(淨土)와 실토(實土)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 같다.
불교가 세속의 질서에 관심이 없다는 시각은 있을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호국불교가 대표적이다.
무소유의 학습은 세속적 관념이 내제되어 있으나 아주 좋은 대승적 가르침이다
 
!!!씨앗(인.因)은 물질이고 인연(공.空)은 색이 된다.
씨앗이 있어야 현상의 작용이 있다
설과 경과 출세간의 전례는 세속의 구제와 불토의 확장에 중요한 것이다.
중생의 구제에서 전례를 위한 최고의 공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객체에 머무는 성취는 불토의 장엄과 거리가 있다.
실천적 불교를 말하는 것이다.
 
!!!덕에는 내양이 있고 외양이 있다.
수행은 내면적 덕을 쌓는 것이고 보시는 외면적 덕을 쌓는 것이다.
복은 대상적 의미를 우선한다.
받는다고 한다.
대가의 설정이다.
멸도의 수행에서 대상은 과에 해당한다.
세속의 구제에서 권장해야 하는 선의 정체가 있다.
덕과 복의 선행에서 아라한의 수행과 불이불원론 또는 연기사상이 양립되는 괴리가 있다.
일체법의 이해에서 불안정하다.
불기2570년 변화의 시간를 이해하고 수용해야하는 가르침이 있다.
할 말이 많은 것이 중생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텔레파시와 특정한 주파수와 연기사상은 암시적 질서와 상통한다.
보이는 사물적 현상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시간을 공유하는 유전적 정체는 학습의 보편성을 추월할 수 없는 한계에서 정체된다.
지식과 문화의 충족 또는 권태의 지루함이 준비된 세계의 발현에 촉매가 된다.
객체의 특별함으로 준비된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대에 존재하는 유인원에게 인간사회를 학습할 수 없는 생태적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
굳이 우주를 논하지 않아도 인류는 창조의 절대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민족이든 종교든 파괴하고 죽이고 해봐야 시간에 갇힌 우물 안 지랄병이다.
학습의 유전적 한계이다.
 
!!!불경(금강경)의 속살에는 세속과 구제의 가르침이 많다.
아라한과 무의 열반을 최고의 수행으로 주장하여도 부처의 가르침은 중생의 구제이다.
인간의 집착이 무량의 무아에 있는 부처의 거취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다.
인간은 대상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학습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
배우지 않으려 하여도 눈 뜨면 보고 듣고 맛보고 좋은 것 나쁜 것 가리고 시시때때로 슬프고 분노하고 탐하고 염원
하고 욕구에 불 켜고 물질적 시류의 태풍에 휩쓸리는 어리석은 낙엽이다.
이성적 자유가 어쩌고 격리된 자유에서 자아 어쩌고 하여도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수 없다.
세속은 존재 자체이다.
그러려니 하고 부처에 맡기면 그나마 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너 잘났다고 딱히 별 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이고 이성이다.
섞여 살라는 것이다.
 
!!!줄기(본질)의 가지와 잎으로 진리(옳고 그름의 정의)를 무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 좋으라고 한일이 틀어져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
작금을 알았으면 두려워서 시작도 안 했다.
문풍지 바람에 들려오는 하늘의 점지는 어렴 풋 하나 중거는 티끌도 없다.
초월적 존재 하늘에 기대하고 젖 먹던 힘까지 보시하여도 양에 차지 않는다고 시큰둥하시다.
시류의 변방에 쳐박아 부려 드시면서 품 삿은 고사하고 불면증에 인간성 말라버린 조직의 권세를 동원하여 절절하게
시험하신다.
살아야 있어야 일 한다고 하여도 그 짝은 인간의 운명하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창시 뒤틀려 맞 짱이 간절한데 상대를 않 하여 준다.
그냥 시키는 대로 만 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날 지옥을 각오하고 머시기 쳐박고 제대로 제사지내려고 견디고 있다.
부처는 아실 것이다.
금강경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원문은 아니고 해설서 이다.
 
!!! 나에 귀의 하지 말고 법에 귀의하라!
공경과 예의의 가르침이다.
객체가 아니라 관계(우리)이다.
어찌어찌 끝내긴 하였다.
무엇이 무엇인지 홍수처럼 밀고 들어와 아득하게 흙먼지 날리는 광야 앞에 서 있는 막연한 상태이다.
30년은 멀고 죽기 전에 정리되기를 있어도 없는 분에게 선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26.3.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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