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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1.

박세욱. 2026. 3. 18. 18:28

금강경 1.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가장 높고 바르며 완벽한 깨달음(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을 의미한다.

더 이상 위가 없는(무상) 최고의 진리이자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글자의 세부적 의미 보다 전체적 이해가 우선하는 불교의 정체이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

부처님이 도달한 가장 높고(無上) 바르며(正) 평등한(等) 깨달음(覺)을 뜻하는 궁극적인 진리이다.

일체의 번뇌를 초월하여 우주의 이치를 꿰뚫는 원만한 지혜를 의미한다.

성불(成佛)을 위한 최상의 경지이다.

수행자의 길이다.

 

브라만,

카스트제도의 최상위 신분이다.

 

브라마교.

베다경전을 근본으로 하여 브라만 신분이 주도한 고대 종교다.

 

베다경.

기원전 1500년의 신앙으로 지식과 앎을 가르친다.

제의 절차가 수록되어 있다.

 

아트만.

자아와 생명으로 이해된다.

영원한 초월적 존재로 호흡과 숨으로 표현된다.

생명체의 이성적 이해이다.

스승(가까운 현상)에게 배운다.

학문에서 현상적 또는 감각적 학습으로 이해한다.

일상의 사물적 이기와 희노애락의 변화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대자연의 질서와 사회적 관계의 예속이다.

 

불이일원론.

주체와 객체와 나와 타의와 물질과 정신이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임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연기(緣起)사상에 근거하여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대자연의 질서는 다양한 개체의 비율적 합리성으로 균형을 이룬다.

단순히 하나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일원론보다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不一不二)는 상호적 개념으로

중용의 정체에 가깝다.

 

연기(緣起)사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이 상호적 관계하여 생겨나고(生) 소멸한다(滅)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인과관계에 따라 고정된 실체는 없다.

공(空)과 연결되어 있으며 12가지 단계로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12연기가 대표적이다.

암시적 질서의 공유이다.

 

12연기법(十二緣起法).

괴로움(老死)이 발생하는 인과과정을 12가지 단계로 설명한다.

생로병사에 이르는 윤회의 사슬을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무명(무지)을 해탈하여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12연기의 단계.

무명(無明): 무지와 어리석음.

행(行): 무지에 의한 업.

식(識): 인식과 분별.

명색(名色): 정신(명)과 물질(색).

육처(六處/六入): 감각기관(안이비설신 의)

촉(觸): 대상의 접촉

수(受): 감각에 대한 느낌(고락)

애(愛): 갈망하는 마음

취(取): 애착의 집착.

유(有): 업이 형성됨.

생(生): 태어남

노사(老死): 늙음과 죽음.

무명(무지)으로 인한 행(업)과 생(시간)에 의해 생로병사의 굴절이 발생한다는 삶의 순리이다.

소승불교의 관점에서 순리를 수용하여 지혜를 밝히고 고통을 인내하여 현상을 멸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대승불교의 대상적 구제에서 지혜로움으로 선행과 가르침을 보시하여 공덕을 쌓아 업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다.

 

고집멸도와 사성제.

사성제(四聖諦)는 부처님이 깨달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요약된다.

괴로움의 실체(苦), 그 원인(集), 소멸한 상태(滅),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道)을 뜻한다.

모든 불교의 근본이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열반)에 이르는 핵심교리이다.

감각적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 해소하여 자아로 회귀하는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대승불교에서 열반(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네 가지 덕목(열반사덕)이다.

 

열반사덕(涅槃四德).

영원함(常) 즐거움(樂) 참된 나(我) 깨끗함(淨)을 의미한다.

아, 인, 중생, 수자의 깨달음으로 탐, 진, 치를 멸도한 열반의 세계이다.

고통과 무상한 현실 세계를 벗어난 부처님의 법신(본성)이 갖춘 아라한의 경지이다.

 

대승불교.

큰 수레라는 뜻으로 기원전 1세기 전후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스스로의 깨달음(자리)과 타인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보살 사상을 핵심으로 삼는다.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시하여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실천하는 불교운동이다.

실상의 혜안을 강조한다.

소승불교에서 금기시 하는 대상적 목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세속과 동행하는 구제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북방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불교의 주류이다.

 

5호16국(五胡十六國).

304년 흉노족 유연의 한(전조) 건국부터 439년 북위의 화북 통일까지이다.

중국북방(화북지방)에서 5개의 이민족(흉노, 갈, 선비, 저, 강)과 한족이 16개 이상의 나라를 세우며 흥망성쇠를

거듭한 130여 년간의 혼란기이다.

서진(西晉) 멸망 후 이민족이 중원을 지배한 시기로 남쪽의 동진(남조)과 대치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전반부이다.

유교의 대세에서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던 시대이다.

 

구마라집(344~413년)

불교사상가 이며 최초의 삼장법사이다.

다수의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불교서적을 번역하여 동아시아에 전파하여 불토의 장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보살이다.

이후 다수의 삼장법사가 출현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부처님이 여러 장소에서 설하신 교훈과 법문들을 모은 50권 분량의 초기불교 경전이다.

초기불교의 핵심자료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6가지 핵심덕목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이다.

보시는 재물과 불법을 베푸는 것이다.

지계는 의지를 지키는 것이다.

인욕은 욕됨과 번뇌를 이겨내는 것이다.

정진은 고기를 삼가고 채식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선정은 사물을 분별함에 있어서 흐트러짐 없는 한결 같은 심성을 말한다.

지혜는 옳고 그름을 가려 실천 또는 실행하는 것이다.

세속의 미혹에서 깨달음의 보시로 실상의 혜안(밝음)을 이루어 이타적 배품을 실천한다.

세속에서 가르침을 실천이다.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최고의 수행 공덕을 뜻하한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베푸는 무주상보시(보시바라밀)를 가장으뜸으로 꼽는다.

모든 바라밀을 포괄하고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을 가장중요하게 본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실천을 덕목으로 무엇을 베풀었다는 자만심이나 상(相·집착)에 머무름(住)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푸는 보시이다.

줄때는 뒤 끝없이 주라는 것이다.

주고 후회하면 보시가 아니다.

대승불교의 보시와 구제에서 책임도 희생도 흔적도 없다.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있다는 대상 불가의 가르침이다.

행하되 행함의 흔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시바라밀 (제일바라밀).

금강경의 이상적멸분 등에서 말하는 것으로 물질과 정신적 베품에 집착이 없는 무주상보시를 말한다.

베풀 때 조건 없이 주라는 매우 강조하는 불토의 가르침이다.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눈과 귀 등 육근으로 느껴지는 모든 형상(相)이 허망함을 깨달아 집착을 버리면(離相) 적멸(寂滅)의 세계이자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

감각에 의한 현상적 학습보다 내적수행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것의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야바라밀 (최고의 바라밀).

육바라밀 중 지혜(반야)가 모든 수행을 완성하는 가장중요하고 근본적인 바라밀로 가르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혜를 바탕으로 베푸는(보시)행위가 최고의 수행임을 뜻한다.

물질이 아니라 가르침의 혜안으로 부처의 세계를 보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선이 전제된 자아적 분별이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지혜는 현상적 효율성 이라는 생각이다.

내적인 것은 자아이다.

인간의 심성에서 잉태 즉 유전적 학습 이전은 무에 가까운 것이므로 선과 악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입하여 자아의 깊이 즉 탄생에 가까운 심연은 무에 가깝다.

자아를 통한 심연(탄생의 순간)의 깨달음이라고 이해한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 있다.

세존에 물어야 하는 의심은 필요한 것이다.

 

삼장(三藏)과 경율론(經律論).

교법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세 가지 핵심경전의 총칭이다.

세 개의 바구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르침 경(經)과 수행자 규율인 율(律)이며 해석인 논(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의 기초사상과 수행의 자세와 논리의 전반이다.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願解)원하여 풀다.

(如來) 부처.

(眞實義) 옳음의 참뜻.

 

아난.

부처의 십대제자 중 한사람이다.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

거상 수닷타를 지칭한다.

고독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베푼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부처님께 기증한 후원자로 유명하다.

어찌되었든 세속은 시대의 대세이며 객체가 예속되는 보편적 결집의 현장이다.

연기사상은 불가와 세속을 연결하고 있다.

종교는 세속의 사회성에서 발전한 정신이다.

무의 성취 역시 존재의 이유가 된다.

지식 즉 학습의 깨달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세의 무리적 또는 관계적 사회이다.

대승적 종교가 구제해야 하는 대상이다.

불가도 세속에 의지하여 동행한다.

 

탐, 진, 치(貪瞋癡).

깨달음을 방해하고 괴로움에 빠뜨리는 근본 번뇌인 탐욕(탐), 화기(진), 무지(치) 등 세 가지 독(삼독, 三毒)을 말한다.

탐욕과 화기는 이해할 수 있다.

우매의 어리석음에서 악의 시각인지 선의 시각인지 물질문명의 시대적 혼란이 있다.

요사이는 악보다 선이 우매한 경우가 많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혜를 바탕으로 베푸는 행위가 최고의 수행임을 뜻한다.)라는 말씀이 있다.

세속적 시각에서 베푸는 바보가 있다.

베푸는 놈도 받는 놈도 모두가 기쁘면 더 좋다.

선처에서 조건 자에 의해 배품의 기쁨이 발생하므로 그 것으로 복이다.

맨 날 죄 짓고 남의 것 빼앗는 자가 있다.

그리고 안식일에 조건 자의 역할에 만족한다.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과 성전의 더럽힘과 권세와 탐욕과 모방 등 온갖 배신과 극의 인내에서

성전의 파괴와 멸망의 고통으로 교훈하셨다.

문수보살의 예리한 칼날은 세속적 선 즉 배품을 지키는 것이다.

세속적 배품에서 열반의 씨앗을 결부시킬 이유는 없다고 본다.

불가와 세속은 연기사상과 불이일원론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완전체는 아니다.

 

발우공양(鉢盂供養).

사찰에서 승려들이 규범에 따라 식사하는 청정한 수행의식이다.

음식에 대한 감사, 절제, 평등, 환경과 자원을 보호하는 정신이 담긴 식사법이다.

식사 전 과정을 의례 화하여 밥, 국, 반찬, 물을 4개의 그릇(발우)에 나누어 남김없이 먹어야한다.

하루 일식과 걸식에서 보시의 고마움이 있다.

수행은 형식으로 시작하여 무위법에 이른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걸식 후 일상적인 의례(좌선)를 마치시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경전의 서분이자

핵심이다.

생명과 육신에서 육신은 물질이 필요하다.

해탈의 과정에서 물질의 인식적 정립이라고 생각한다.

탐욕과 무소유에서 최소한의 물질공양은 필요한 것이다.

그마저 조심스러운 것이다.

 

편단우견과 통견.

가사를 왼쪽어깨에 걸치고 우측어깨를 드러내는 차림으로 순종을 의미한다.

생각보다 격식(형식)에 엄격하다.

수행에서 외적 인내로 내면의 숨을 이끌어내려는 절재의 방법 같다.

통견은 저고리이다.

 

보리샤트바.

보살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보살은 깨달음의 경지가 엄격하였으나 시방은 모두가 보살이다.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서 세속화 되었다는 것이다.

 

시방세계.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을 칭하는 부처의 세계이다.

 

묘행무주(妙行無住)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상(相, 집착)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라 함은 아, 인, 중생, 수자에 예속된 행(업)이며 무의수행에서 깨달아야하는 세속적 현상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하여 복덕을 이루라는 것이다.

줄 때는 미련 없이 주어라!

주고 후회하면 업이 된다.

사유의 현세에서 보시의 바보가 있다.

선으로 주고받는 것은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기쁘다는 것이다.

세속의 구제에서 그래야 공유하여 발전한다.

받는 놈이 뻔뻔하면 구재가 어렵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나 세상(세속)은 변한다고 하였다.

구제의 선처에서 지혜의 시대적 슬기로움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종제선근(種諸善根).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여 학문의 바탕이 되면 혼란하여도 씨앗이 되어 되살아난다.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저변의 확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례에서 생존확률이다.

 

투쟁견고(鬪諍堅固)시대.

불기 2,500년이 지난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뜻한다.

학습과 시간의 충족하는 문화적 권태(지루함)에서 지식과 계율(법칙)이 충돌하는 시대이다.

학습의 보편성 정체에서 지루한 반복의 번뇌와 미지의 의심이 증가하여 존재의 증거를 다투는 현상이다.

중세의 종교사회에서 지식이 충돌한 이성적 자유 유물론을 기억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변화의 가르침에서 학습의 충족을 의미하며 새로운 질서를 예지하고 있다.

2천년 후 재림과 유사하다.

 

비로자나불(Vairocana).

불교의 진리를 인격화한 법신불(法身佛)이다.

"광명이 온 세상에 비춘다."는 화엄경의 주존불이다.

우주와 만물에 깃든 진리를 상징한다.

주로 왼손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지권인)수인을 취하고 대적광전에 모셔진다.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법신불)의 대표적인 수인(손 모양)이다.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형태이다.

오른손은 부처(지혜, 불계)를 왼손은 중생(이치, 중생계)을 상징한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불이불원론)중용의 지혜를 상징한다.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진리의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과 함께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봉안한다.

대광명전, 비로전, 화엄전 등으로도 불린다.

주로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한 큰 규모의 사찰에서 볼 수 있다.

 

무위법과 유위법.

대승과 소승 또는 불이불원론에서 무위법과 유위법을 말할 수 있다.

초월하여 이르면 규범이나 율법 또는 법칙의 범위를 벗어난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열반은 사물적 법칙을 초월한 무의 경지이다.

무로 돌아갔다 환생하는 윤회의 순간이다.

아라한에 이른 성인에게 법칙과 규범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 무위법이다.

법 없이도 사는 양반들 말씀이다.

대응하여 규범과 법칙이 필요하면 성인이 아니다.

성인이 아니면 유위법에 속한 세속의 중생이다.

유위법은 법칙 또는 실상에 예속된 인연이다.

규범 즉 법의 지배에 있는 세속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라도 멸도의 진리를 통해서 세속을 벗어나 무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불법자(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불법(佛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있어도 없고 없다는 있다는 무의 창조적 고요이다.

삼라만상은 무에서 시작한 것으로 예초에 없었다는 진리이다.

사물적 현상을 다시 무의 원례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실상에 집착하면 진리가 되지 않는다.

설하였으되 즉시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후는 들은 자 의지이다.

법(法)이라는 상(相)에 얽매이지 말라는 공(空)의 지혜를 말씀하고 있다.

상 즉 현상(사물)은 인연(시간)에 의해 발현되고 시간에 의해 소멸(空)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수행에서 마음의 정진 외에 있다가 없어지는 정체가 불분명한 세속적 학습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아, 인, 중생, 수자의 세속적 깨달음과 탐, 진, 치의 멸도는 열반에 이르는 수행자의 길이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실천적 보시를 지향하는 대승불교에서 세속의 구제를 위한 배품(보시)은 실상의 혜안(지혜)이 필요하다.

지혜의 의미는 현상적 실효성이라고 본다.

아라한(해탈)의 경지를 지혜의 밝음이라고 표현한 대목의 의심이다.

열반은 창조 이전의 시간 무로 돌아간 것이다.

지혜는 세속적 실상이라는 주장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산수이다.

 

즉비불법(卽非佛法).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설 하면 즉시 무로 돌아가 재설정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들은 자의 의지에 남겨진 것이 전례의 전부이다.

고정된 형태의 불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공(空) 사상을 강조한 말씀이다.

열반은 사물적 법칙을 초월한 무의 경지이다.

환생하는 윤회의 순간이다.

 

수다원과(須陀洹果).

수행의 네 가지 성자 단계(사과, 四果) 중 첫 번째인 감각을 초월한 경지를 의미한다.

성인의 초입이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불교에서 인간의 6가지 감각기관 육경(六境)을 뜻한다.

시각(색), 청각(성), 후각(향), 미각(미), 촉각(촉), 의식(법)을 통한 사물의 현상적 학습을 말한다.

수행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여섯 가지 욕구라고 한다.

불자의 수행에서 이러한 가치적 과정의 학습은 불필요한 것이다.

세속적 또는 현상적 감각의 욕구적 방해이다.

수다원은 해탈의 초입을 말하며 감각적 욕구를 초월한 경지이다.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실로 오지 않음이 없다" 또는 "실상은 오지 않음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득도하였다고 중생의 구재에 소홀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 된다.

호수에 물이 가득하면 앞뒤의 분별이 사라진다.

부처의 가르침으로 오늘이 있다.

본받아 따르는 것이 씨앗이다.

세속의 구제는 불가의 의무이다.

구제에서 선이 전제된 언어와 동행적 설득은 필요한 것이다.

이 부분의 노파심이 있다.

멸도와 고행은 본받아야 하는 예지적 방향의 씨앗이나 객체 즉 격리된 수행자의 한계가 있다.

세속의 구제는 객체의 성취와 다른 대승적 종교가 목적하는 가르침과 수행(보시)의 실천이다.

설득에서 세속적 또는 대상적 언어와 동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이불원론과 일체론의 이해에서 소승적 시각의 우려이다.

기적의 설득은 지식의 시간적 한계에서 세속과 동행한 이유가 있다.

 

아라한(阿羅漢)

번뇌를 완전히 끊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성자를 뜻한다.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주종의 의미를 생각한다.

천상의 안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곁이다.

 

아, 인, 중생, 수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은 나라는 착각, 차별심, 존재에 대한 집착, 수명에 대한

미련을 뜻한다.

일단 버리면 극락의 문고리가 보인다.

매사 인연과 시류의 계량을 의식하면 피곤할 뿐이다.

 

공부.

!!! 수학에서 더하기 빼기는 진리이나 일은 아니다.

일(사물)을 우선하면 진리에서 소홀해질 수 있다.

초자의 느낌이다.

 

!!! 걸식에서 긍휼과 자급도 있을 듯하다.

요사이 한국불교에서 걸식은 사라진 듯하다.

 

!!! 가르침에서 생명을 중시 할 때 물질적 학습을 가식으로 본다.

학습을 버리고 탄생의 생명에 이르러야 보살이고 나아가 열반에 이른다.

학습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학습은 대부분은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멸도는 숨(시간)으로 얻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세속(문명)과 격리된 광야이다.

자아도 탐욕이라고 본다.

멸도에서 마지막 자아에 이르러 열반을 준비한다고 본다.

어떻게 버릴 것이냐의 문제이다.

이타적이어야 하고 보시해야 하고 탐욕과 화기와 우매함을 버리라고 하였다.

일상에서 학습과 관련된 관계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객체에 이르는 수행이다.

여기까지도 일반적 경지이다.

무념무상의 열반은 나조차 잊어야 한다.

육신과 사고에서 완전하게 분리된 숨 즉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완전한 생명에 이르는 경지이다.

태아 이전 보다 앞선 시간이다.

잉태도 유전적(생존적) 지식의 증거가 있다.

잉태에서 유전적 학습 이전의 경지를 이해해야 가능할 것 같다.

이르지 못할 시간이라는 한계를 느낀다.

죽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성취되는 무에서 동적생명으로 극에 이르는 숨의 열반이다.

어려우면 착하게 살면 된다.

 

!!! 불법은 2500년 이라는 시간의 정체에 있으며 미래를 위한 것이다.

막불(莫佛)은 오백 해 다섯 번 굴절의 마지막 시간에 진리와 지식이 충돌하는 혼란한 시대이다.

이것을 시간의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하고 있다.

사물과 지식은 변한다는 것이다.

재림의 계시가 있다.

여기에서 경(종교적 질서)의 공부는 미래의 씨앗이 된다.

학습과 시간에서 씨앗의 저변에 의해 중생이 구재된다.

이 말씀은 어떠한 학문의 저변이 확대되어 일상에 구전되면 감각적 학습에 휩쓸려 시간을 충족하게 된다.

주도적 학문에 의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미지(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뗏목과 미지의 이해에서 선이 주도하는 현재 또는 대세적 학습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식과 감각적 멸도의 생명이나 뗏목은 미지(준비된 세계)를 가르치며 세속의 발현은 수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이해이다.

 

!!!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있는 것이다

사물적 현상은 예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창조는 무에서 시작되었다.

삼라만상은 인연(시간)에 의해 언젠가 창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티끌에서 왔다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에서 실이 되었다 공으로 돌아가고 다시 실로 돌라온다.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윤회론이다.

볼토의 중심적 가르침이다.

 

!!!현상적 존재에서 생명은 감각이 없는 무이며 물질과 합하지 않으면 체를 이룰 수 없다.

진리와 법칙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지식과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

불이불원론은 사물적 존재론이다.

술에 물 탄다고 생각되시면 가만히 계시면 된다.

중간은 중용이 될 수 있다.

2026.3.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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