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유물론과 AI 2. 본문

나의 글방.

유물론과 AI 2.

박세욱. 2026. 3. 1. 07:26

301 유물론과 AI 2.
11 혁명.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방법의 체제적 차이는 있으나 봉건적 사회에서 민주적 사고이다.
절대체제의 변화이다.
지식과 민초의 규합을 위한 여론전이 시작되고 있다.
지배의 구속에서 이성적 의지에 의한 포괄적 소통의 시도이다.
지식과 저항적 의지의 규합이다.
종교적 지배와 계급사회의 지루한 정체가 지식의 비판을 간과하였다.
변화에 무지한 소수 기득권의 안주가 학습의 포화상태에 이른 것이다.
문화적 전환의 욕구이며 파괴적 위험이 내제되어 있다.
이성이 전제된 비판적 지식의 궐기는 혁명을 생각한다.
절대와 정제가 부족하여 감성적 도발이 자행된다.
왕권은 무참하였고 교회는 파괴되었다.
혼란은 혼란을 야기한다.
반달리즘은 고의로 예술과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근자에 탈레반이 불교유적을 파괴하였다.
과거와 현재의 필연적 연속성에서 단절의 시도인지 괴리가 있다.
문화적 단절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뿌리의 근본과 국가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일이다.
역사와 유전적 유산은 지울 수 없다.
이성적 혁명의 잔해에서 텅빈 그릇을 보았고 하였다.
혁명 난동에서 진리의 본질과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면 남는 것이 없다.
뿌리적 개념에서 현재의 정체가 불안하다.
프랑스 혁명에서 팡테옹 꼭대기의 십자가는 지구의로 교체되었다.
이후 조각상에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왔다.
불이 난 자리에 풀이 자란다.
근본의 회귀이다.
변화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수 많은 곁가지가 시도되지만 창조의 영역으로 회귀한다.
암시와 계시의 진리가 유일한 질서라는 것이다.
인류에게 내제된 존재적 이성이다.
선택된 사물의 조화는 변하여도 생명적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표현 할 수 있다.
이성적 지식의 저항은 물질의 현상적 조화이다.

혁명을 두려워 한 주변국의 침공을 우려하였다.
죽음 이전에 영원한 객체는 없다.
사회적 예속에서 이웃이 아니면 산 너머 객이다.

이성이 절대적 이라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완전체가 아니다.
한치 앞을 모른다.
이성적 경계와 분노에서 폭력적 수단이 동원된다.
산수로 자행되는 잔인함이다.

혁명 이후 종교적 관점에서 인간을 제한(차별)하고 속박하는 신앙을 배척하였다.
종교적 지배의 권태가 진흙처럼 달라붙어 있다.
체포된 신부 230명이 처형되었다.
혁명의 정당성을 위한 경계적 정신의 말살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보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있다.
신은 무사한가?
유골의 집착은 신앙적 성물숭배의 세속화이었다.
당시 유골로 장식품을 만들어 소장하고 지니고 다녔다.
정신을 지배하는 문화적 학습의 시대적 현상이다.
정신 또는 가치관은 학습의 영향으로 계량되나 좌우명으로 선과 악을 지키기 어렵다.
선과 악은 학습에 혼재되어 진화한다.
선한 자가 악할 수 있고 악한 자가 선할 수 있다.
용서와 자비가 필요한 이유이다.
선한 넘 만 선하고 악한 넘 만 악하다면 굳이 도덕을 논할 이유가 없다.
이성적 혁명에서 주도한 객체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문명의 전환에서 필요한 것이었으나 파괴적 이고 참혹하였다.
문화적 절대에서 지식의 예지적 가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맹신적 절대의 관성적 파괴를 지식의 분별로 가치(능율)를 예지하여 평화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탐욕은 사회의 기득권을 형성하고 현상에 안주하려 한다.
변화의 부제는 학습의 지루함에 빠지는 관성적 절대에 이른다.
상대적 비교의 비판적 지식은 저항을 음모하고 파괴적 전환을 시도한다.
혁명이다.
 
12 혁명의 끝.
혁명의 이성은 폭력으로 뒤죽박죽 되어버린 역사와 문화의 참상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파괴되고 유물은 약탈당했으며 단두대에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혁명의 순수는 숙청과 파괴로 일그러진 이성이 되었다.
주체는 이론과 이성을 주장하지만 기록은 감각을 우선한 분노이다.
당위성에서 체제적 또는 이성적 저항를 주장하나 공포정치는 또 다른 억압적 지배의 시도이었다.
정사에 기록된 역사의 진실은 야사의 구전을 필요로 한다.
다양한 지식과 무수한 사고의 합리성은 여전히 부족하다.
공존적 진보가 아니라 파괴와 폭력이 자행된 변화이다.
이성의 결여이다.
종교와 문화의 정체에서 저항적 선택의 의미는 부정 할 수 없다.
혁명의 당위성이다.
승리한 자들의 주체적 거취에서 패배한 자들의 존재적 견재가 있다.
파괴에서 지켜낸 종교와 봉건적 문화를 상징하였던 유물들이 최초의 유물박물관에 안치된다.
데카르트의 유골이 있는 곳이다. 
나폴레옹 시대 패자의 저항과 구성의 배려에서 일부 교권이 회복된다.
지배자의 권위에 의해 혁명의 근원 군주제가 복원된다.
권좌의 지배적 성취는 혁명의 희생보다 탐욕스런 것이다.
나폴레옹 사후 교회의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졌다.
상황의 반전은 파괴의 시련을 격은 교회의 배상요구로 이어졌다.
정치판에서 주객의 전도는 상시이다.
파괴에서 보호되어 소장된 유물은 대부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성과 과학과 자유를 지향하였던 혁명의 색체는 흔들렸다.
유물론과 이성적 자유의 상징과 혁명에 참여한 인물의 사후가 정리된다.
주검은 유물박물관에서 교외의 묘지로 옮겨졌다.
데카르트는 특별하게 파리의 오래된 성당에 안치되었다.
유골은 성물의 상징성과 진료의 탐구적 욕구로 산자에 의해 훼손 된다.
텔레스 학파가 주장한 물질에 감각이 있다는 괴리적 주장에 지식이 현혹되고 있다.
물질의 선동에 흔들리는 이성적 사고의 혼란이다.
뼈의 성분만으로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문은 혁명의 순수한 시대적 소명을 강조하려 하나 세속은 종교보다 훨씬 다사다난 하다.
항시라도 옆구리 터진다.
역사의 기록에서 격렬한 투쟁의 교훈적 문제제기와 주체적 주도의 평가는 다르다.
심은 자보다 기른 자 또는 기록하는 자가 임자인 경우가 많다.
 
13 격세지감.
예전처럼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학문의 넓이와 깊이에서 하나의 분야도 학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다.
지식의 확장이다.
이전에는 한사람이 거의 전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였다.
겉모습의 조화에 그치는 형태적 학문이었다.
현상적 또는 생명체의 조화에는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과학적 지식이 턱 없이 부족한 시대이었다.
탐구적 의심의 발로 이었을 것이나 지식의 자신감이 현상주의를 이끌어 물질문명의 계기가 되었다.
학습과 시간의 암시가 있었을 것이다.
신을 정점으로 고등한 존재에서 하등한 존재의 위계질서가 있다.
언 듯 종의 유전적 분별을 생각한다.
동일한 종의 사소함을 위계질서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의 동일성은 평등하다.
목적론은 "학습과 시간의 충족은 미지의 발현으로 이어진다."로 이해 할 수 있을것 같다.
생명체는 무엇을 하든 안 하든 보편성의 동행과 시간으로 미지의 발현에 기여한다.
학습은 학문적 접근의 인위적 노력이 아니라도 이루어진다.
일상에서 신체의 외부적 접촉과 자아적 사고의 분별이다.
일상의 욕구와 염원이 학습이 된다
학문 역시 일상과 동행하는 욕구와 성취이다.
종은 예초 각각으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진화하지 않는다.
호랑이는 호랑이로 사람은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이다.
1800 년대 초 과학의 정도이다.
현대를 생각하면 200년의 시간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렇게 발전하였다.
과학을 이용하여 성경을 정의하였다.
상상 밖의 발현과 발견에서 한계를 의식하는 인간의 정신이 새로운 창조에 정복당하고 있다.
미지의 두려움이 신의 세계를 어림잡아 규정하고 있다.
잘못된 실증(현상)주의이다.
과학과 현상으로 창조의 미지를 증명 할 수 없다.
미운 일곱 살은 나름대로의 자신감이다.
학습과 시간에서 점에 머무는 유전적 한계이다.
과학과 영적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의 세계는 물질과 현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상상 밖 존재이다.
영장적 인간중심 사회의 섣부른 동격화이다.
실존의 증명에서 당시의 과학은 현대와 비교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지능적 AI의 돌연적 발현은 미지의 무한을 암시하고 있다.
바둑에서 수를 만들 수 없다.
존재하는 것 찾아내는 것이다.
현세의 인류는 우주가 가깝다는 접근성과 AI의 대세에서 준비된 세계 미지를 수용하고 있다.
현대인은 신의 세계와 인간세상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실증의 논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물질(과학)적 학습의 충족이며 지식의 진보이다.
참선과 고행은 광야와 자아를 찾아 미지의 암시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어차피 우리 편이다.


14 다수의 두개골.

어린 시절 진화론의 논쟁을 들은 기억이 있다.
창조에서 신에 대한 불경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근자에 진화론을 의심하는 학문은 사라졌다.
창조를 시간이 정지된 현상으로 판단하는 오류가 있다.
창조는 현상적 완전체가 아니다.
관계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한다.
우주도 생명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우주는 무수한 진료로 형체를 이루고 중력에 의해 상호작용 하는 동적체계이다.
작용과 시간에 의해 변화한다.
사라진 두개골이 사후 171년 만에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것이 초연하다.
책은 데카르트의 모든 것을 신성화 하고 있다.
정수리의 기록으로 여러사람의 거처를 옮겨다녔다.
진품을 증명하려는 고의적 기록이다.
이후 진품 확인을 위한 디테일 한 추적에서 별개의 두개골과 뼈조각이 등장한다.
불구하고 가치의 모호함이 있다.
진품과 상관없이 신성한 성물의 소유적 나눔은 사사로운 치부이다.
특별한 탐욕이 거짓을 양산한 결과이다.
당시 유럽을 방황하는 그리스도의 성물(십자가)조각을 합치면 배 한척의 족히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성물문화의 집착이다.
 
15 의혹과 탐구.
뇌에 국한하지 않고 인체의 수족과 각각의 기관은 기능적 역할이 다르다.

뇌의 부분적 기능도 학습의 수용에서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할에 주어지는 학습(데이터)이다.
뇌의 기능에서 디테일은 전문부분의 학문이 필요한 것이나 원론적으로 데이터가 없으면 무이다.
태아는 무의식에서 유전적 생존을 위한 데이터의 수용이라고 본다.
수명과 유전적 연속성의 관계이다.
생명에 가까운 시간이다.
입력이라고 하면 기계적 표현이라서 수용이다.
"응애"하고 나온 후 세상 밖의 학습이 인류사이다.
즉 학습으로 기능적 역할의 임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은 학습의 실현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산수이다.
창조의 이해에서 생명과 육신의 분별이 불안정하다.
육신(물질)인가 생명인가 하는 질문이다.
생명이라고 본다.
인류사에서 생명이 없으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의 가르침은 생명에 있는가 물질에 있는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창조는 우주를 아우르는 무한한 것이나 인류사가 없으면 현상적 종교도 없다.
신께서 종교를 만들라고 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초자연적 현상에 지배된 자생적 숭배이다.
인류사에서 어떠한 사물적 존재도 창조에 예속된다.
현상적 실증이든 창조적 실존이든 그렇다.
존재의 의심은 인류의 지혜와 지식에 의한 학습의 결과이다.
중보자의 가르침은 초자연적 현상의 맹신적 우상숭배에서 인간중심의 인륜적 지혜이다.
인신공양과 할례의 특별한 경계를 해소하여 신앙의 인류적 공유를 위한 십자가의 길이다.
새로운 질서이다.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체)과 종교와 문화의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통해야 창조자의 뜻을 전할 수 있다.
짐승은 논리적 언어가 없다.
암시는 사회적 언어가 아니다.
유물론은 창조와 현상의 관계를 무던히도 고민한 학문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현상적 창조를 주장하며 유물론을 경계하는 이유의 괴리가 있다.
시간도 학습도 진화도 변화도 창조에 예속된 것이다.
기원전후 전근대적 질서와 유물론의 시대와 AI의 시대는 지식의 차이에서 격세지감이 있다.
뇌의 학습과 상호작용하는 동적 신경계통의 증명이 로봇이다.
학습 즉 데이터를 활용하는 신호체계 CPU와 GPU 등이다.
영혼을 대입할 대상이 아니다.
사후 세계는 정신과 완전히 다른 영역이며 과학으로 증명할 수없는 미지이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원숭이와 생존하던 소년이 발견되었다.
인간세상의 지식을 가르쳐도 학습의 진행이 전무하였다.
알파뱃 두어 개를 학습하였다.
결론은 뇌의 퇴화였다고 한다.
탄생에서 인류사 즉 지식과 단절된 것이다.
TV로 원숭이를 보여주면 박수 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년은 원숭이로 존재하고 있었다.
학습이 유전적 분별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7세에 죽었다.
정신은 탄생의 후차적 문제라는 것이다.
오래된 기억이나 예전에 인용한 자료라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물론의 한계가 정신의 규명이었다면 아이러니하다.
시작이 정신이라는 인식이다.
의식에는 깨달음의 변화가 있다.
학습을 통한 학문적 추구이다.
현상을 추월하는 가르침의 미래이다.
미지의 암흑이 논쟁의 치열함이다.
지식의 시대적 격세지감(변화)에서 학습의 진보적 연속성을 이해 할 수 있다.
중단 할 수 없는 암시적 의혹과 지식의 질문이다.
학습에 의한 욕구의 자유와 의지이며 존재의 성립이다.
이성적 자아이다.
인격은 나눌 수도 합칠 수도 없는 완전한 독립체이다.
불교에서 피를 이은 아비와 자식의 인연도 독립된 운명이라고 한다.
현대의 시간은 어디 쯤 인지 미래의 암시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출현에서 창의성과 추론력은 증명되었다.
좌우의 진영논리에서 선의 학습 즉 정의와 진실과 인권과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진보이다.
문화적 비대칭에서 시작한다.
사회적 규합을 통한 변화와 개선이다.
보수는 성을 사수하는 형태이다.
선의 현상적 안주이다.
학습과 시간의 충족이나 문화적 권태가 있다.
변화에 대한 선행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분법적 논리는 이원론이 개입한 학습의 결과이다.
굴곡진 인류사이다.
정신이라기보다 사회와 문화적 현상이다.
인류는 원숭이가 아니라 유전적 번지수가 다른 개체의 진화이다.
책의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면 용서를 구한다.
객체의 지식으로 치부해주시기 바란다.
2026.3.3일
 
 
 
 
 
 
 
 
 
 
 
 
 
 
 
 
 
 

 
 
 
 
 
 
 

'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선택.  (0) 2026.03.06
유몰론과 AI 3.  (0) 2026.03.03
유물론과 AI 1.  (0) 2026.02.28
질서.  (0) 2026.02.24
고통의 시간.  (0) 2026.02.2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