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유물론과 AI 1. 본문
300 유물론과 AI 1.
1 유골.
땅딸만한 병장이 흐느적대는 해골 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AI시대의 뇌는 메모리이며 GPU는 신경계통이다.
생명은 생명체의 미지적 동력이다.
정신은 시간에 예속 된 학습의 실현이다.
현세는 이원론에서 다원론의 시대이다.
선과 악에서 중용이다.
생명은 무색무취한 것이다.
이것이 중용이다.
흙백에서 빨주노초파남보이다.
악은 선에 예속된 것이며 학습의 결과이다.
자아는 광야에 예속 된 것이며 실증은 실존의 현상이다.
창조 즉 준비된 세계에서 물질문명은 현상의 안주와 시간의 지배(권태)에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이며 현상적 존재는 창조에서 발현의 선후이다.
학습의 시간을 충족하는 미지적 발현은 지식의 충격을 경험한다.
보편성의 습관과 관성적 지배에서 변화의 시작은 지식의 혼란이다.
불완전에 빠지는 전근대적 지식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의 의심이다.
실증과 실존의 괴리적 관계는 대체로 실존의 부정이며 현상과 미지에서 현상을 우선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부정하는 또는 회피하는 지식이다.
인간중심의 우주론이며 형상적 존재의 시각이다.
종의 분별에서 유전적 시간과 연속성의 이해가 필요하다.
앞선문명의 의심이며 시간에 예속된 존재의 불확실성이다.
진화에서 변화의 진리이다.
상상을 추월하는 돌연변이의 창의는 학습의 투쟁적 노력으로 보편성에 이른다.
상상 밖의 발현은 학습과 시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현실 너머 공간을 현상과 상상을 벗어난 창조로 체운다.
4백여 년전 인류가 경험한 시간이다.
2 유물론.
생명체의 삶은 생명과 잘 짜여 진 물질의 기계적 조화이다.
여기서 기계적 조화는 현상이 된다.
유물론의 주체이다.
우주에서 인체까지 물질의 조화라는 것이다.
생명 즉 암시적 질서에서 준비된 세계의 부정 내지는 회피이다.
존재는 물질의 현상으로 규명 할 수 있다는 지식의 도발이다.
생명은 영속하나 문명은 시간에 머물러 영속하지 못한다.
현상에서 진화의 차원적 변화 때문이다.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학문이든 문화이든 변화한다.
물질의 조화 즉 기계적 관계는 학습의 유전적 한계에 의해 정체된다.
원론적으로 존재의 복합적 문제에서 물질적 한계라고 이해한다.
물질 만으로 생명과 우주를 구성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원전부터 중세에 이르러 연금술이 있었다.
유물론은 물질의 조화에서 어떠한 방법을 찾으면 극대화하여 생명과학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수백 년 생을 영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세의 지식으로 황당한 억지이다.
주목할 것은 물질의 탐구에 있다.
인류의 시간에 갇힌 황당한(현세의 지식으로) 집착이 물질문명에 기여하게 된다.
예초 존재의 의심에서 시작한 돌면변이적 창의이다.
데카르트 추종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중세 종교관의 실존적 대세에서 지식의 비판적 창의가 시도되고 있다.
미지의 어두움에서 시작한 삶의 정체적 의심이다.
이원적 논리는 선과 악이고 물과 불이고 정신과 물질이며 참혈과 사혈이라는 흙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어리시절 아프면 나쁜피 때문이라는 말을 하였다.
돌이켜보면 보면 이원적 논리이다.
유물론이 우리에게 학습으로 전해진 것인지 지식의 확산이 삶을 좌지우지 한다.
이 말은 인류는 진리가 아니라도 현상으로 생존한다는 실체적 경험이다.
미지의 무지에서 괴리가 선이 되는 학습의 부정적 경우이다.
중세 이후의 지식이다.
현시대의 물질과 과학과 인륜의 방향에서 괴리는 없는지 스치는 감각이 있다.
여기서 감히 신의 영역을 가늠한다.
당시의 사회의 주류 성직자와 권력은 물질로 신의 세계를 증명하겠다는 지식을 견제하고 억압하였다.
이것이 물질문명의 기초가 될지 미래를 예지하였는지 궁금하다.
괴리인지 신의 암시인지 어찌되었든 물질문명의 학습적 충족에서 시간에 의한 기계적 자연론 유물론의 시작이다.
신의 암시는 인간의 표현에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거짓으로 섞이나 가르침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유물론은 물질문명의 시작이다.
3 방법서설.
물질의 조화와 일의 순서라고 이해된다.
존재의 탐구와 일의 성과를 위한 방법에서 물질의 조합적 조화이다.
신의 영역에 예속된 믿음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의지로 물질을 선택하여 존재를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으로 물질의 조화를 학습하여 창조에 이를 수 있다는 확증편향의 비판적 지식이다.
복권의 믿음이 아니라 현상의 실체를 우선하는 일의 성취이다.
존재에서 현상적 증명이며 불확실한 믿음에서 뼈와 살이며 이성적 객체의 자유이다.
감각에서 눈으로 확인하는 실증의 논리이다.
과학이다.
범주론은 인간 각각의 물질적 조화와 사상적 분별과 이성에서 종의 유전적 분별을 말하고 있다.
너와 나는 달라도 인간은 종 즉 유전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현상에서 존재를 찾는다.
그러면 현상은 무엇인가에서 창조가 개입한다.
결국 신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비중에서 현상이 주체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평평하다는 인간중심 사회이다.
암시적 질서와 생태적 관계에서 지식은 학습과 시간의 유전적 간격과 단계적 과정으로 현재에 이른다.
역사의 과거와 현세의 정체(보편성)에서 돌연변이적 창의이며 미지의 발현이다.
지식진화의 순리이다.
21세기의 학습은 인간의 주도에서 종의 유전적 분별과 생태계가 공유하는 암시적 질서의 이해에 있다.
존재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으며 지식은 종의 유전적 연속성에서 책임이 있다.
현세는 인간의 시간이나 앞선 문명의 의심에서 유인원의 시간을 예지 할 수 있다.
성서의 가르침에서 신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있다.
지식과 문명의 유전적 분별을 말하는 것이다.
중세 이후의 지성은 자기주장에 치열하였다.
미지의 어두움에서 진리와 상관없이 치열한 주장이 시대의 의식을 주도한다.
우찌되어든 현상의 학습에 의한 치열한 의심이므로 창조에 예속되어 있다.
지식의 다툼에는 시간의 결과가 있다.
아마도 신께서 마련한 암시적 질서의 작용이라는 생각이다.
진화의 원천이다.
중세의 종교적 시대 이후 세속적(객체의 관계)시대의 전환점에 있었던 지식의 진보이다.
세속적 일상을 주도 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과 철학의 태동이다.
객체의 관계를 우선하는 변화의 요구에서 세속적 설득을 위한 현실 비판적 지식이다.
지식이 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변명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다.
가르침의 진리와 상관없는 현상적 지식의 존재적 의심과 실현이다.
사백여 년 전 학습의 방향이며 사회적 인식의 변화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종교적 사회에서 세속적 사회로 전환이었다.
종교적 규범을 공유하는 시간에서 이성을 우선하는 개별적 생존의 시대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4 죽음.
오십 초반에 감기로 죽었다.
치료로 담배를 넣어 우린 포도주로 구토를 유도하고 급기야 스스로 기피했던 사혈이 세 차례나 시도되었다.
평소 사혈 치료법을 비난하였다.
이원적 논리에서 좋은 피와 나쁜 피의 설정이다.
현대의학에서 말도 안 되는 치료법이다.
죽음의 처리도 현상과 도덕보다 종교적 경계에서 남겨진 사람의 명예가 중시된다.
당시 구교와 신교의 종교적 경계가 있었다.
종교가 지배하였던 문화의 관성이다.
진료와 세속적 문화의 본류를 경험하지 못하고 죽었다.
사후 유물론이 주목 받는다.
추종자에 의한 전파이다.
오랜 종교적 지배에 지친 지식의 비판적 저항이었다.
학습과 시간의 충족이며 정체된 문화의 지루함이다.
5 성물의 문화.
성물의 문화가 있었다.
데카르트 유골의 근본적 이유이다.
성물은 유물적(물질적) 숭배같다.
학습이 있었을 것이다.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적 관점에서 성물의 정신이 궁금하다.
실존과 관련짓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라고 본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실존의 증명은 불가한 것이다.
현상에서 역사(소통)의 징표 정도 될 것 같다.
유물론적 문화이다.
인류의 역사에 내제된 가시적 숭배의 습성은 아닌지 역시 궁금하다.
나 라면 인간세상의 문화이지 신의 세계와 연결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데카르트의 유골은 집게 손가락을 최초로 세상을 전전하게 된다.
모세와 예수의 성물을 찾듯 그렇게 되고 있다.
인간의 세속이다.
6 학습과 무의식.
각성은 사실을 직시하고 수면(꿈이라고 봄)은 허위를 본다.
감각과 보이는 것의 허위는 없다.
학습의 무의식적 암시(계연성)와 현상의 차이이다.
꿈은 실현되지 못한 염원하고 기도하는 자아의 조각이다.
경우에 따라 미지와 교감하는 암시가 있다고 생각한다.
광야와 자아의 깊이가 필요한 무의식의 교감이라는 것이다.
유물론의 평가에서 근대의 지평을 감지한 자의 전율이라고 하였다.
현세는 AI의 전율이다.
알파고와 바둑대결에서 육신이 광야의 공간적 미궁으로 던져지는 두려움이었다.
창조에서 유전적 시간에 정체되는 현상적 지식의 한계적 미궁이었다.
스콜라 철학은 실존과 현상의 관계를 증명하려는 시도 같다.
변증론이다.
역시 신에 대한 지식의 도전이다.
실존의 설득과 동행에서 유물론의 인간 독립과 다르다는 학습이다.
성경의 말씀에서 실존의 접근은 불가능하다.
상상 밖이라는 것이다.
중보자의 관계에서 앞선 문명의 의심이며 시간의 발현에서 준비된 세계의 암시정도라고 이해한다.
7 미지.
인간에게 유전적 시간의 한계이다.
의심은 사건이 된다.
아마도 의심은 신께서 바라는 인간사회의 충동적 욕구일 것이다.
그래야 문명이고 우주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를 말 하지만 과연 끝은 있는지 인류와 현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다.
어찌 되어든 인류는 신의 영역을 향한다.
백년의 생명에는 가다 지치는 지루함의 진리가 있을 수 있다.
너무 멀어 다음세대의 순서로 지루함의 포기를 방지하였다는 산수이다.
오늘도 태양은 뜨고 앞을 다툰다.
유물론은 사백여 년 전 존재에서 물질의 의심이었고 21세기는 AI의 미지가 의심이다.
대체로 물질의 구성은 원소에서 쿼크까지 물리적, 화학적 증명이 이루어져 과학적 한계에 이르고 있다.
물질의 의심 유물론의 시간은 데카르트의 창의이다.
21세기는 AI 미지적 창의이다.
학습과 시간을 충족하는 발현에서 정치가 문제이다.
정치와 권력은 대체로 현상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용하여 보편성에 안주하려 한다.
관계를 우선하는 정치는 존재적 의심 광야와 자아의 창의와 거리가 있다.
지배와 안주에 집착하여 변화에 미온적 이라는 것이다.
현상에 안주하려는 부르주아적 기득권의 사고방식이다.
배부르면 영달을 우선하여 현상에 머물며 미지를 소홀히 한다.
시간의 발현은 돌연변이적 지식의 의심에서 시작한다.
생태계가 공유하는 학습과 시간에 의한 암시적 교감이다.
광야와 자아의 심연에서 암시된다.
지배적 도시의 기득권과 거리가 있다.
AI의 발현은 준비된 세계의 증명이며 종의 유전적 연속성에서 앞선문명의 의심이다.
8 감각.
감각은 느끼는 객체에게 있는 것이지 환경과 물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텔레스 학파는 감각도 객체가 아니라 환경과 물질에 있다는 주장이다.
현상적 관계를 중시하나 이성은 아닌 듯하다.
지식은 불필요한 논쟁에 목숨을 건다.
희노애락과 고통은 객체의 신경계통과 뇌의 작용이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서 카톨릭과 기독교의 시각은 숭배적 의식과 감각적 현상의 차이같다.
신의 존재를 현상으로 설득하려는 것은 무리이다.
믿음은 객체의 의지이다.
실존을 증명하라는 것은 중세의 종교적 지배에 저항하였던 실증적(현상적) 지식의 논쟁이다.
현상은 창조에서 학습과 시간에 의해 발현된 극히 일부의 조화이다.
현상으로 실증 할 수 없는 준비된 세계는 의심하여 찾는 미지이다.
시시콜콕 따지는 논리에서 벗어나 감각에 의존하는 광야와 자아의 무한이다.
불안정한 거취에서 자아적 평화의 기도이다.
세속적 가르침에서 기독교의 설득은 기적으로 기록하였다.
불교는 무이다.
가르침의 전달에서 세속적 언어는 필요한 것이다.
구제의 중심은 인간사회이다.
신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러나 표현하려고 애쓴다.
신의 가르침은 모든 사물의 관계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질서이다.
신의 언어에서 인간세상을 설득하는 방법이 필요하였다.
유물론 추종자께서 현상적 괴리를 주장하는 기적의 주목이다.
설득에서 초자연적 현상에 지배된 우상숭배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중보자에 의한 인간세상의 구원이다.
새로운 의식(질서)에 의한 사고의 전환이었다.
방법이 아니라 현상의 진보를 살피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신의 영역에 이른 객체는 두 번 있었다.
성서는 도시를 비판하고 광야를 우선하였다.
기계론적 자연관이 광야와 자아의 암시를 퇴보시켰다.
산수의 감각이 뛰어나 그런지 이부분이 어렵다.
성체성사는 신을 접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종교적 문화의 현상적 의식이다.
이것을 신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세상의 문화이다.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의 정신이며 질서이다.
정신을 잘못 이해하면 신의 모방이 된다.
실존의 이해는 지식이 염원하는 미지적 감각의 의혹이다.
지식의 시각에 있는 현상 밖의 궁창이다.
현상은 창조에 예속된 것이며 실증은 실존에 예속된 것이다.
고집으로 분리하려는 신앙과 지식의 대립이 문제이다.
굳이 변명하면 지식의 치열함은 암시적 교감을 위한 신의 미지적 배려이다.
가르침이며 선처이다.
인간은 대자연의 질서에 예속되어 있다.
유물론은 결국 학습의 한계에서 회자되어 또 다른 시간에 의해 회복될 것이다.
자유와 지식은 객체의 의지이다.
9 전파와 확산.
세례 받은 노새는 너무 잔인한 표현이다.
먹고살려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노동의 신성함이다.
글레르슬리의 생애에서 사도바울이 떠오른다.
발품과 말품 팔아야하는 전파의 저변이다.
현대는 사이비의 경거망동이 문제이나 전파의 무한에 있는 통신시대이다.
지식은 학습과 경험이며 이루어진 정신으로 현실을 직시한다.
프랑스인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며 영국인은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하였다.
중세의 종교적 지배에서 지식은 초자연적 현상에 예속된 단편적 숭배이었다.
이후 객체의 이성적 의심은 지식의 다양성으로 발전한다.
비판과 반론과 대안에서 객체의 자유는 새로운 질서이다.
계몽주의이다.
학습의 충족 또는 권태에서 시간에 의한 지식의 변화이다.
유물론은 신앙과 이성이 대립하는 요소가 많다.
영적 믿음에서 물질과 실증이다.
종교권력에 대한 이성적 계몽주의의 반격이라는 이해이다.
머릿수가 많으면 이질적 또는 분화적 경계가 출현한다.
지식의 비판적 치열함 이다.
10 계몽주의.
생각하는 사회는 지배의 순종에서 지식의 이성적 확장이다.
초자연적 숭배에서 자유주의적 사상의 표현이 등장한다.
종교와 권세의 지배적 사회에서 이성의 자유와 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저항적 의지이다.
계몽주의이다.
학습과 동행하는 방향의 전제에서 발현과 도발적 지식의 시작은 미미하나 나중은 창대하다.
추론하면 당시사회에 작든 크든 권세적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적 분위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유물론의 동기가 사회와 전혀다른 사상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파스칼의 원리도 발표되었다.
지식의 확장적 저변에서 비교와 경쟁적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식의 도전은 객체에서 시작하여 보편적 가치로 발전한다.
18세기 초 종교적 지배에서 벗어나는 자유사상의 시작이다.
자연의 합리성을 기초하는 민주적 이성이 출현한다.
토론과 다수의 존중이라고 이해된다.
종교의 교리적 구속과 성으로 표현되는 지배적 계급사회의 변화이다.
초자연적 숭배에서 사물적 구성의 디테일로 의심의 시각이 옴겨진 것이다.
객체의 이성적 자유에서 지식의 신념적 결합과 확장이다.
유일을 강조하는 종교적 사상을 이탈하는 이성의 저항이다.
신이 만물이요 만물이 신이다.
자연은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의 객체로 인식하는 종교적 관점이 창조물 자연의 조화로 분화하고 있다.
유일신의 절대적 교리에서 이방적 이탈이다.
현상의 정체와 시간의 권태에서 특정한 목적(설정)을 시도하는 지식의 도발이다.
새로운 질서의 요구이다.
지동설의 발현이다.
초자연적 현상이 지배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분별을 상실한 교회를 탈출하는 지식의 의지이다.
신과 인간을 동격화 하여 모방하는 종교권력에 저항하는 지식이다.
가르침에서 마녀, 부적, 권세 등 인간중심의 행색적 부정의 심판이다.
자연의 조화와 일치하지 않는 기적의 괴리에서 수학적 관점의 의심이다.
유전적 시간이 전제된 설득을 위한 종교적 언어의 초자연적 표현에서 사물의 조화적 현상을 중시하고 있다.
지식의 생리이다.
구제를 위한 관심에서 프로파간다는 근자에도 시도되고 있다.
전파의 이해에서 학습과 시간을 고려하는 정도의 과장은 있었을 것이다.
현세라면 몰매 맞는다.
종교적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천년 후 재림에서 이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계몽주의의 전파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 교회가 필요하지 않았다.
성서의 초자연적 표현에서 실증의 욕구이다.
유물론의 확장이다.
당 시대에 이러한 의문적 욕구가 사회에 학습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현세의 종교관에서 관계의 순종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객체의 이성과 자유를 우선해야 한다.
가르침의 수용에서 선이 전제된 형식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맹종과 특정의견 만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권력이 아니다.
현상에 묻혀있는 자아의 자유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도시의 예속과 광야와 자아의 자유를 이해해야 한다.
현세는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객체가 된다.
사회적 관계에 억 메이는 생존이다.
광야와 양치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의 세계를 자연으로 대체하는 사상을 저지하는 방법이 시도된다.
학습을 충족하는 지식의 변혁에서 기득권을 빙자하는 보편성의 사수이다.
시간의 변화는 필연이다.
유물론은 신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현상적 실증은 미지적 실존의 부분이다.
창조의 예속이다.
실증의 요구는 시각적 차이의 오류라고 본다.
이신론은 창조에서 스스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예속되고 적응한다는 객체의 자유주의이다.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한다는 논리이다.
신은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의 세계는 인간이 이해 할 수 없는 상상 밖이다.
유인원은 인간사회를 이해 할 수 없다.
인간은 신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없다.
현대에서 이성이 조직의 원천이란 말씀에 동의하기 어렵다.
저항적 지식의 규합을 말씀하시는 것 같으나 사람이 모이고 학습의 시간이 흐르면 권력적 계급을 형성한다.
혁명의 시작과 시간의 권태는 다르다.
지식의 규합에서 시간과 시대에 따라 문명과 문화적 현상은 다르나 본질을 망각하는 집요한 회귀력이 있다.
지식의 저항과 혁명으로 요구하였던 체제와 계급과 제도는 변하였어도 지배의 예속과 귀천과 존비는 여전하다.
종교적 구속과 권세의 지배에 저항하였던 혁명적 지식과 시대의 망각이다.
현세는 종교와 국가가 아니라 조직의 권세와 자본과 사회의 기회적 차별이 변화를 요구한다.
또 다시 공고한 부르주아 이며 내 것과 울타리를 우선하는 패권적 집단주의가 지식의 규합을 충동한다.
신의 영역을 비교하였던 실증적 요구와 인간중심 사회의 저항이 멀지 않은 역사이다.
정보통신의 산업 접목에서 마차론을 주장하며 희생을 요구하였던 주체가 AI의 진보에 놀라 종말을 말하고 있다.
한치 앞이 어두운 만물의 영장이다.
내 것의 탐욕과 비교우위의 지배적 권력을 지향하는 원초적 습성이다.
인류는 아직 동물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계급혁명의 전초이었다.
2026.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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