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2025년. 본문
288 2025년.
2025년이 정리되어 간다.
노년의 선택이 있었다.
나의 사사로움과 생계에서 세월의 갈림이다.
삼십 여년 시류의 변방에서 그나마 아등바등 할 수 있었던 개인택시 영업을 21대 대선전 사실상 포기하였다.
6월3일이 대선이었고 아마도 15일 전쯤으로 기억된다.
나의 사사로움과 운전이라는 직업을 병행할 수 없다는 체력적 한계이었다.
글에 집중하다 보면 잠을 설치게 되고 영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많은 날을 서너 시간 비몽사몽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집착에 과로하여 얼굴이 붓고 잇몸의 위아래가 어긋나는 날들이 꽤나 있었다.
사고도 적지 않게 있었다.
영업 중 생각이 떠오르면 차를 세우고 메모하다 주정차 위반으로 적지 않은 범칙금을 납부하였다.
메모하지 않으면 잊힌다.
사람의 오감과 배설을 제외한 지식 명령체계는 두 가지 동작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생물체이다.
순간에 스치는 문장을 잊으면 난감한 아쉬움에 실망한다.
감성과 느낌의 기억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문장으로 되살리는 노력에서 상당한 체력이 소모된다.
다 동작의 지식 명령체계는 인류의 현제와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계이며 욕구이다.
기계의 도움없이 지식체계를 다원화 하여 운전하며 글 쓸수 있다면 인류의 능력은 현재와 다를 것이다.
학습의 연속성에서 노력하며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미지이다.
말하기 무섭기는 하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헨폰 보며 애먼 짓거리에 열중하는 인간이다.
좌우의 이념적 역사 즉 지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결국 학습의 한계에 이를 것이다.
지식진화에 의한 경계적 문화의 소멸이다.
신의 이유 있는 가르침이다.
굳이 입방정 하면 태평양과 대륙의 경계이다.
만만하여 치졸한 권세의 목줄에 억매이기도 하였다.
정의의 진실을 하찮은 통지서로 예속하려는 사대부의 갓이다.
정치판의 지저분한 속살이다.
알 사람은 안다.
미래는 고사하고 생계의 사선이었다.
나에게서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는 인연의 책임과 주변의 시선이 부담되었다.
성취적 인습을 포기하였으나 자아적 자유의 집착은 오히려 생명에 가까워진다.
그마저 사라지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지켜야 하는 최후의 의지이다.
사지에서 나의 실체를 찾는 자유의 희망이다.
기대할 것 없는 삶이 그런대로 통신사회의 이목에 있는 나의 사사로움에 집착하게 하였다.
인연과 관계의 소외와 외로움의 갈증이다.
일하는 시간에 틈 없이 시사방송에 집중하였다.
알아야 쓰고 동행할 수 있다.
모자란 자격지심이다.
무슨 상이니 동업자니 하는 말의 잔치와 선택 후 어쩌겠다는 연기에 세월이 소비되었다.
방송의 감언이설이 나를 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적으로 타의라기보다는 자의적 붙임이 적지 않았다.
이제는 방송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갈 곳 없는 중생의 지푸라기가 되었다.
총선과 대선에서 어쩌면 하는 나름의 기여에 대한 보상심리도 작용하였다.
그러한 암시가 있었다.
문서만이 약속은 아니다.
까치가 울어도 손님은 오리무중 이었다.
관계에서 신뢰와 존중은 상대의 정체를 지키는 것이다.
나는 통신사회 밖에서 나의 사사로움의 일체를 함구한다.
자식들에게 두어 번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이 전부이다.
물질시류의 지배적 사고를 설득하는 구색의 가설이 싫고 동의에서 표지의 뒷면 같은 비정상의 소외가 될 것이다.
통신사회를 통해 나름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으니 최소한 주변에서 내면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가벼우면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없다.
실증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나 때가 있다.
가슴의 칼이 무섭다.
아직도 소싯적 뒤주 바닥의 절망적 위기를 경험한 염려가 있다.
생계가 무섭고 낫살에 특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시류의 방편이 없다.
하루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유품 성경을 붙들고 초월적 존재를 써 내려갔다.
평소에 시대에 맞는 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오래 전에 잉태된 미지에 대한 암시이다.
돌이켜 보면 내제된 광야와 자아의 그리움이다.
글 쓰고 술로 잠을 청한다.
머리에 들어찬 피와 문장의 집착을 비워야 잔다.
살아 있으려고 뒷산에 오르고 땡 볕에 자전거를 타고 경춘선 역사 주변을 걸었다.
속세의 자유는 스스로 설정한 책임이 전제되는 것이다.
일 하지 않는 휴식은 희노애락의 생이 없다.
탄생에서 죽음은 시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다.
일의 평가에 야박한 치간 같은 조직사회의 경험으로 몽그작거리다 시월 말 폐업 정리하였다.
육 개월이 지났다.
방콕에서 식구들은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어설픈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주변이 의아해 한다.
가난한 육신이 치열한 생존의 사선을 외면하고 삿갓에 방랑이니 산수가 어려운 것이다.
현실은 겨울이 지나면 어찌하나 뒤가 구린 것이 있다.
실존과 실증의 갈등이다.
벌여 놓은 죄가 많아 남의 집 담 넘기는 어렵다.
황혼에 이르러 얼마 남지 않은 생이나 존재하여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예속되는니 하늘에 날리는 것이다.
자유이다.
여백을 채우며 경춘선 역사 주변을 걸어 춘천까지 완주하였다.
산길과 시골길을 합하면 왕복한 거리는 될 것이다.
인적 없는 새로운 길을 걷는 느낌이 좋다.
관계의 구속에서 벗어나 나 홀로 자아의 자유에 젖는다.
밥 공장 정리하고 낫살의 기대와 방황에서 남겨진 추억이 될 것이다.
실증의 한계가 있을 것이란 부족함에서 의식하지 않았던 방향의 새로운 시각이 불현듯 하다.
AI시대의 새로운 질서이다.
두 달여 전부터 과거 정보통신산업의 미지적 관심으로 경제방송을 시청하였다.
새벽 3시 전후 기상하여 꼼지락 거리다 6시 부터 9시 지나고 있다.
자본시장의 동향이다.
지식(데이터)산업의 기존산업 접목에서 새로운 질서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에 관여한 기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우버택시가 활성화 되지 못한 이유가 있다.
IT(정보통신)산업 초기 자본의 지배적 침략에 저항한 투쟁의 희생이 있었다.
음식 값에 포함되었던 배달비 분리 문제이기도 하다.
배달업은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 의한 새로운 산업질서의 산물이다.
현상의 지배는 역사의 과정을 잊는다.
대한민국의 IT산업 역사에 무지한 쿠팡의 자본권력이다.
멍석 깔아 놓으니 숟가락 올려 굿판 벌이는 노동의 사지이며 국가와 제도를 무시하는 제 잘난 골목대장이다.
남의 집 대문 철없이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다.
곳간의 곡괭이는 땅만 파는 것이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였다.
올해 저평가된 우리나라 증시가 얼추 회복되었다.
AI(지식)산업의 대세이다.
암시적 질서의 실증이다.
세월에 쌓여진 듣고 경험하며 써 놓아 던 것이 있었다.
한반도 민족의 저변이고 발전시켜야 하는 미래이다.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으로 고독의 위안이 된다.
나의 끝은 무엇 일지 황혼의 최후는 각오한 것이나 세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미지적 사건들이 생이 되어간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고행과 참선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예전에는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해야겠다는 내 것의 생각을 했으나 요사이는 흐름에 예속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문화와 역사에 예속되어 기여한 나의 사사로움의 정체이다.
나는 사람이다.
암시에 간간히 심부름하는 것이다.
실존의 가르침에 따라 할 일은 많은데 실증의 굿판이 어렵다.
더럽고 치사하게 짠 권세와 자본이다.
세속의 미련으로 정해진 시간이 아까워 무던하게 원망하던 분께서 가까워지고 있다.
2025.12.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