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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사로움.

박세욱. 2025. 10. 7. 13:41

171 나의 사사로움.
벌거벗고 히말라야의 고봉에 오른 것이다.
시작은 생의 뿌리였다.
물질과 관계의 성취를 포기한 비교의 소외와 존재의 회의에서 나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회상이었다.
시류의 변방에서 일상적 인습에 섞이려는 그나마의 노력도 절망적 상황이었다.
생명을 담보로 살아야 하는 목적의 상실이다.
인연은 품안과 책임이 다르다.
나 외에서 사회적 비교의 책임은 역부족이었다.
예초 광야와 자아를 떠난 괴리적 시류에서 외로운 시작이었다.
준비의 무지는 사회적 참여의 기회에서 절망의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평범에 섞이고 싶은 관계의 기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미래가 없으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생이다.
물질의 시류와 견주하지 않아도 되는 내안에서 무한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리운 것들의 회상이다.
동의적 위로가 필요하였으나 관계의 부족함으로 하소연 하여 말 할 수 없었다.
삶은 태생적 자존감의 안간힘 이었다.
시류의 소외에서 내안의 편안함에 머무르려는 익숙함의 피난이다.
보이는 것의 욕구와 인연의 책임에서 허무였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버려지는 상황에서 자아의 아련함으로 시작한 존재의 갈망이 나의 사사로움이다.
비교의 소외에서 온전한 나의 실체를 표현하고 싶었다.
 
자존적 흔적의 미련이다.
마주보는 인습의 위기가 없으니 그리움을 찾고 하소연하기 쉬웠다.
예초 성취적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의지는 없었다.
나를 찾고자 몸부림 친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의 허무에서 광야와 자아의 그리움을 찾는 가엽은 희망이었다.
벌거벗은 사선에서 가식은 불필요한 것이다.
쓰다가 막히면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돌아가 너는 무엇이고 왜 이글을 쓰고 있느냐 물었다.
막막함으로 고민하면 다행하게 길이 보였다.
운명 같았다.
 
카페와 밴드 그리고 블로그 이다.
망막하고 답답한 소외에서 나를 말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어지간한 자신감은 그리움에서 사회의 불의적 문제로 진행되었다.
일상의 무력한 부대낌에서 어느 정도 자아를 회복하고 있었다.
불편한 인습의 비교와 가당치 않은 성취의 포기이다.
통신사회의 자존적 여행이다.
그나마의 존재감 옳고 그름의 분별은 사회의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선과 논리이다.
세월호와 펜데믹의 혼란에서 문제의 지적이 수용되는 실체를 체감하였다.
 
삶의 불가항력적 현실에서 무력한 민생의 절규였다.
제도와 통치의 믿음이 사라지는 생존적 불신의 위기에서 예지할 수 없는 선의 기도이었다.
구원의 필요에서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찾는 인간의 한계이다.
민생의 사선에서 길을 찾는 인륜적 상황의 공유이다.
위기를 견디는 역량의 집중이었다.
촛불과 광화문의 난세에서 권위적 시선의 안타까움을 의식할 수 있었다.
반론을 상실한 민심의 거대한 흐름에서 회생이 아니라 거취의 동의를 찾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다.
권세의 사선에서 무엇인가 기대하는 커다란 작용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은 것에 익숙한 내면의 자아가 파장을 일으키며 꿈틀대었다.
통신이라면 선의 영역에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적 사명감이 생겼다.
무저갱의 나락에서 시간에 예속된 역할의 기대이다.
기왕지사 황혼의 시작이라면 크게 설정하고 돌격적 시도에서 뒤 돌아 보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수십 년 버려진 시간의 오기이다.
죽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희망도 절벽이니 손해 보아도 산수라는 배수진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인의 인륜이다.
산업사회의 인습으로 잊히는 대자연의 시간에 잠재된 아득한 자아의 회귀이다.
목적이 아니라 해야 될 일이다.
 
실명과 가명을 고민하였으나 정의와 진실의 설득에서 정체의 완전한 전달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완전하게 까발리는 것이다.
방어할 수 없는 의혹적 경계의 완화이다.
물질과 경쟁의 차별에서 온전한 선과 정의의 결과로 귀결 될 것이다.
과정에서 실명으로 가족의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을 까 염려되었다.
사회적 신뢰에서 완전히 망가지는 정도가 아니라서 그랬는지 가족의 불만적 개입은 없었다.
경쟁적 생존에서 잊히는 논리적 균형과 감성적 갈증의 디테일에 동의한 듯하다.
절망의 사선에서 나만의 공간이 우주처럼 열렸다.
주변의 시선이 없을 수 없다.
 
주장의 전달에서 메아리의 회의적 한계도 있었다.
시간에 집착하는 희망의 염려스런 저울추에서 황혼은 죽음의 시간으로 무시할 수 있는 고집이 있다.
하물며 선이고 대의이다.
소외와 휘둘림의 인내는 나에게 익숙한 것이다.
무감각한 일상의 간열적 외로움에서 감성적 건강의 희열을 느낀다.
고독은 시류의 배반적 저항이 커진다.
나의 사사로움이 지향하는 인륜과 평화는 목적이지 관계와 성취의 위치적 설정은 무의미하다.
인륜과 평화의 정의는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다.
무한의 진행형이다.
 
적당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에서 권위적 차별에 대응할 것이나 굴복하지도 할 수 도 없다.
적당한 거래로 먹고 떨어지기 바라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다.
삶에는 생명과 같은 것이 있다.
자본과 권세로 지배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유전적 시간의 한계에 있다.
관계의 차별은 있으나 고독의 자유는 차별할 수 없다.
세계인의 지성을 대표하는 옳고 그름의 분별은 반드시 필요하다.
논리적 공감의 정의이다.
 
나의 사사로움이 지향하는 것은 통신을 통한 선의 생산성이다.
어려운 곳을 우선하여 살피는 인륜과 평화의 공존이다.
강요와 차별이 없는 교류와 소통의 문화적 질서이다.
냉전과 이질적 경계의 완화이며 존재의 자유와 이웃과 학문의 존중이다.
인류의 창의력과 선의 생산성은 무궁하다.
창작과 통신을 통한 전달에서 세계인을 포괄하는 산업적 가치이다.
인륜과 재난의 협력에서 선을 규합하는 통신사회의 생산성이다.
통신경제이다.
나의 사사로움의 창의성은 통신경제의 생산성에 기여하였다.
 
상당한 수입이 창출되었다고 알고 있다.
길거리의 돌 맹이가 아니다.
나눔의 윤리는 선의 생산성으로 귀결된다.
관심과 참여를 더하여 이끌어내는 행위적 역할이 필요하다.
가시적 존중이다.
2025.1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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