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초월적 존재 6. 본문
1 에스라(BC 504~421년).
1) 본문.
바사왕 고레스칙령(BC 538년)으로 신앙의 자유에 의해 멸망하여 끌려간 유다와 베냐민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신앙을 되찾는다.
초월적 존재 1에서 선지자 다니엘이다.
[히브리어로 심판 또는 판결을 뜻하는 나의는 야훼의 실체를 뜻한다.
나의 뜻과 나에 의하여 등 상당히 의미 있는 단어로 개인의 명칭에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유다를 함락한 바벨론은 왕족과 귀족 등 유능한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 갔다.
이분도 자료에 확실치 않으나 대략 17세의 나이로 세 친구와 포로로 끌려갔다.
매우 유능하여 왕궁에서 교육받았으며 시종으로 시작하여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석하여 장관에 오른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이방신과 우상이 들끓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다.
철저하게 유대의 율법을 지켰다.
바벨론은 왕들의 실정으로 백년도 안 되어 망하고 페르시아국가의 건국이 전제된 매대 바사(페르시아) 과도국가의
다리오왕에 의해 총리로 발탁된다.
메대 바사는 카스피해 동남부와 페르시아만 북부에 정착한 메대인과 바사인이 연합한 국가이다.
바사는 페르시아이다.
본토인이 아니라 유목생활하다 정착한 인도 아리안족 사람들이다.
메대국은 바벨론과 연합하여 요나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앗수르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킨다.
앗수르의 멸망이다.
올라가면 끌어 내리려는 것이 가진 자들의 심보이다.
다니엘은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이고 멸망한 바벨론의 최고위직을 수행한 관리이다.
이방과 우상으로 오염된 본토출신 관리들의 시기가 없을 수 없다.
협잡과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80된 노인의 약점을 찾으려 했으나 없었다.
마귀는 다니엘의 신앙심을 문제 삼는다.
왕에게 간신하여 삼십일 동안 왕 외에는 어떠한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린다.
어기면 사자굴에 떨어지는 형벌이다.
그때의 왕도 신하들의 집단주의에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나 보다.
다니엘은 알았는지 몰랐는지 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소리내어 유다를 향해 기도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끌려가 사자굴에 던져졌다.
믿음은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사자들이 배불렀는지 먹을 것이 없었는지 아니며 맛없게 보였는지 침도 안 묻히고 살아나왔다.
밤새 노심초사하던 다리오왕은 다니엘이 살아나오자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경에서 악의 결론은 깨끗하다.
간신한 자들의 가족까지 싹 쓸어 사자밥을 만들었다.
인정사정이 없다.
이 사건으로 유다에서 끌려간 포로들의 생활이 나아졌다고 한다.]
고레스왕은 유다가 멸망할 때 노획한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을 돌려준다.
통치에서 나의 백성이라는 예속적 관용이다.
로마도 권력에 예속되는 민족과 종교의 관용을 통치에 이용하였다.
1차 귀환에서 유다의 총독 세스바살에게 관리하여 옮길 수 있도록 감독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가계의 족보에 거의 목숨 줄 건다.
일 시작하기 전에 족보와 계수부터 점검한다.
계수조사의 죄는 다윗의 핑계였다는 생각이다.
돌아와 일곱 달째에 성전의 지대를 마련하지 못하였으나 규례대로 번제를 올리고 귀환을 하나님께 고하였다.
이년 후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시작한다.
기초가 놓이자 기쁨과 통곡소리가 뒤섞여 잊어버린 시간의 회한이 가득하였다.
제국에 예속된 유일민족과 신앙의 험로는 주변의 대적을 피할 수 없다.
다 종교 문화의 갈등과 지배에서 유일신앙을 고집하였던 전쟁과 멸망의 역사이고 회한이다.
여전한 이방의 경계적 사고이다.
경계는 경계를 양산한다.
하나님은 온누리에 있는데 왜 유일하게 유대사회가 고집하였는지 한계가 있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은 내가 그들에게 마련한 땅이니 건들지 말라고 하였고 야곱의 백성이 속썩일 때 주변의 왕국에
명령하여 벌을 주었다고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밖 어디든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자연적 현상에 의지하는 종교적 학습에서 의와 영의 개념 선은 공유된다는 본질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으로 설정된 학습의 한계이다.
너만 잘났냐고 이웃들이 왕에게 성전재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들고 간다.
제국의 정치는 예속된 민족의 풍습과 신앙의 저울추가 필요하다.
특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레스(키루스2세) BC 534년 중단되었다.
이후 BC 520년 다리우스1세 2년에 재계되어 BC 516년12월 유다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에 의해 완공되었다.
다리우스1세(BC 550~486년)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
재건된 성전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유월절을 지낸다.
에스라는 다윗의 제사장 사독의 오대 손이다.
아닥사스다1세(BC 465~424년)의 명에 따라 판관과 제사장의 직분으로 일곱 자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2차 귀환으로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 달 걸려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하였으므로 왕에게 병사를 달라고 할 수 없었다는 대목이 있다.
의와 영과 육신은 다르다.
아벨은 형 가인에게 죽임 당했다.
선은 악에서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에스라는 제국의 역사를 경험하고 왕국의 국경이 무너진 세월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혈통을 강조하여 이방의 아내와
태어난 아이를 버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제사장 중에서 반대하는 무리가 상당하였다.
창조에서 사물과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섞인다.
2) 느디님.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신분이 낮은 주로 전쟁에서 끌려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죄가 많다.
좋게는 레위인과 살면서 하나님께 동화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3) 다리오왕.
바사의 고레스왕이 BC 550년 메대를 점령하고 민심의 안정을 위해 상징적 왕으로 내세운 인물이다.
BC 539년 고레스의 페르시아가 바벨론에 무혈입성하며 통치의 관용을 위해 왕으로 내세워 통치의 기반을 다진다.
고레스(키루스2세)왕의 장인이 된다.
키루스2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괸용정책으로 야곱의 백성이 귀환하고 성전의 재건을 허용하나 2년 후 주변의
반대로 중지시킨다.
다니엘은 키루스2세 제위 삼년 째 대략 백세 때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2025.7.19.일.
2 느헤미야(BC 473~403,년).
1) 본문.
아닥사스다1세의 술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예스라는 성전을 건축하는 사역이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곽의 재건이다.
성전의 하나님과 성벽의 왕정을 달리 표현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성전은 종교와 문화이나 과거 유다의 왕정을 상징하였던 성곽의 재건은 권력으로 볼 수 있다.
관용의 시차가 상당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성곽과 묘실 등 보수하고 개축하기 위해 왕의 허락과 병사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간다.
3차 귀환이며 도착하여 자제를 확보하고 백성을 동원하여 부서진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역사에 순탄한 것이 없다.
이번에도 방해하는 제국 내 이질적 족속이 있어 병기로 무장하여 지키며 건축하였다.
바벨론에 끌려간 백성이 수십 년 만에 돌아오니 가난한 남겨진 사람들의 불만이 발생하였다.
나누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에서 가나안 진입과 같을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땅과 생산성은 한정되어 있다.
이자를 금하고 꾸어준 재물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며 협력하여 소외된 백성의 한을 나누었다.
백분의 일에서 해석이 아리송하다.
특별한 것은 닭이 등장하였다,
“나를 위해 매일 소한마리와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고 닭도 많았다.“ 라고 되어있다.
닭의 의미는 목축업의 이동에서 농경사회의 정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임 총독과 주변은 백성들의 고혈을 요구하였으나 나와 형제들은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굳이 써놓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게 하였다.
예루살렘의 성곽을 재건하고 있으니 과거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는 시비가 있다.
페르시아왕조에 반역하려 한다는 요단강 동쪽의 주둥이 견제이다.
유다의 유지들과 관계가 깊고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암몬의 총독 도비야를 중심으로 하는 하수인들이다.
제국의 통치에서 예루살렘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허용하는 것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역사를 방비하는 것도 있다.
성벽공사가 오십이일 만에 끝났다.
당시의 기술과 시간으로 어림잡으면 말씀만큼 거창한 공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건축이 마무리 되고 예루살렘을 관리하고 지키는 지도자를 세웠다.
“야곱의 딸들을 가나안사람에게 주지 않으며 아들과 후세를 위하여 이방의 딸들을 데려오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에 가나안사람들이 생산한 물품을 구입하면 안 된다.”
멸망하고 제국에 흡수되어 이방의 문화가 유입되었다.
율법은 희석되어 통혼이 많아지고 안식일에 장사하고 성전의 방을 개인이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시대에 성전에서 시장이 들어서 장사하고 있었다.
모세의 시대라면 돌에 맞아죽었다.
느헤미야는 여전하게 유일신앙과 민족주의로 이방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
철저한 고립주의이다.
출애굽의 고난과 멸망의 시련을 종합하여 놓았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모세의 율법시대를 강조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와 베냐민족속과 성전을 관리한 레위족속의 우두머리와 족보를 나열하여 놓았다.
열두지파 중 세 지파 외의 이스라엘 백성은 없다.
백성의 지도자와 십분의 일을 제비뽑기로 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였다.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는지는 모른다.
제비뽑기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가리킨 놈이 증거하여 걸린다.
성전과 성벽을 복구하고 예루살렘 거주민을 파악하여 느헤미야 총독의 행정체계를 재정립하고 있다.
느헤미야서에서 에스라의 기록이 없고 에스라에서 느헤미야의 언급이 없다.
2차 귀환에서 에스라는 제사장중 한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시대 사람으로 총독과 제사장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레위지파 중에서 아론의 자손을 특별하게 챙겼다.
모압왕 발락과 예언자 발람의 역사를 예시하여 암몬과 모압인들을 영원히 총회에서 배제하고 있다.
암몬의 총독 도비아의 행색을 유추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갔을 때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통해 성전의 방을 개인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에스라도 있었을 텐데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가 왕에게 청해 달려와 세간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레위사람들에게 성전을 관리하는 몫을 나누어주지 않아 자신의 밭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여전하게 주변머리 없이 정신 못 차리는 야곱의 백성이다.
예초 야곱은 셋째 레위에게 기업을 상속하지 않고 성전을 관리하고 십일조를 받아 생활하도록 하였다.
세월이 변하여 레위인에게 기업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초막절.
출애굽에서 광야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가을 추수철 집이 아니라 나무나 풀로 초막을 지어 체험하는 행사이다.
2025.7.20.일.
3 에스더.
1) 본문.
전서에서 빠진 것이 있다.
이스라엘을 유다와 베냐민지파로 한정하여 규정하고 있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이민정책으로 야곱의 백성이 강제로 이주되었고 본토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종교와 문화의 혼재에서 통혼이 일상화 되어 유대의 혈통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키지 못하고 결과를 탓하는 사대부의 닭 벼슬 같은 고집이다.
아하수에로1세(BC519~465년)은 크세르크세스1와 생애의 시간이 겹친다.
제국에 왕이 둘일 수 없다.
크세르크세크1세는 이집트와 바벨론의 반란을 진압한다.
삼년간 그리스 원정을 준비한다.
패하긴 하였으나 졸장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르드개와 조카딸 에스더는 사울왕의 아버지 기스의 혈통이라고 한다.
본서의 전계는 아하수에로왕이 잔치에 왕비를 부르나 오지 않은 것으로 시작한다.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왕이 부르는데 오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으로 신분의 위협이 상당한 처신이었다.
왕은 체면이 상하여 신하들에게 왕비의 처신과 왕의 위치에 대해 물어본다.
신하들은 남편으로 처신하여 좋게 해석하면 부부유별이고 나쁘게 해석하면 남존여비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왕후 와스디는 폐위되어 왕과 남편의 권위를 우선하였다.
새로운 왕비를 간택한다.
삼촌이며 양부 격인 모르드개의 수작으로 에스더가 유다의 족속을 숨기고 왕비후보로 추천되었다.
한마디 거들면 이방인에게 딸을 주었다.
왕비가 된다.
왕비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주의에 따라 모든 것을 숨기고 여식으로 행색하였다.
왕정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모르드개는 여기에 더하여 왕의 암살을 염탐하여 에스다를 통해 왕에게 알려 신임을 키운다.
이시기 아하수에로1세 왕정의 총리 하만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끊임없이 괴롭힌 아멜렉 출신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다른 신하들 처럼 예를 갖추어 굴복하지 않았다.
총리 하만이 역정을 낼만하다.
제국에 예속된 만족의 원한이 꿈틀거리고 있다.
하만은 왕에게 유다인은 율법을 우선하여 왕정의 법도를 해치고 있으니 상응하는 처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고한다.
총리가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주고 유다인의 처리를 구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왕정이 그러하였다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역사이다.
고레스왕에서 전임 다리우스1세의 관용정책은 제국에 예속된 각각의 민족을 존중하여 귀환을 허락하고 문화와 종교의
재건을 허용하였다.
어찌되었든 왕은 유다인의 문제를 하만에게 일임한다.
총리 하만은 아멜렉의 정서대로 유다인을 처벌하라고 공문을 보낸다.
므르드개를 우선하여 유다인이 온전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고 있다.
사실을 왕비 에스더에게 알리고 왕에게 말하여 선처를 부탁한다.
왕비 에스더는 자신의 족속을 밝히고 민족을 구해달라고 청하여 왕의 제고가 이루어진다.
기록에는 나무기둥이 어쩌고 멸하려던 자들이 역으로 당하였다는 장황한 살생부가 있다.
모세의 율법에 아버지의 잘못으로 아들을 죽일 수 없다고 하였다.
전쟁에 패하여 끌려온 이민족의 위치는 쥔장의 눈치 때문에 행색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페르시아의 관용정책은 왕정의 기틀이었다.
총리가 되었다면 왕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범인이 아니다.
제국의 통치는 쉬운 것이 아니다.
제국에 예속된 이민족의 관계에서 모르드개로 인한 유다인의 위기를 구하였다는 이해이다.
하나님은 페르시아에도 계시는데 야곱의 백성들은 거론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 구속에 있다.
따지면 어렵다.
2025.7.21일.
4 욥
1) 본문.
초월적 존재 3에서 공부하였다.
[하나님의 세계를 세속적 지식으로 제단하고 판단하는 내용이다.
현상과 결부시키는 신에 대한 인간의 일반적 사고이다.
선을 행하면 육체와 물질적 보상이 이루어 져야 하고 악을 행하면 망하고 육신이 병든다는 단순한 산수이다.
의와 영은 현상이아니라 자아의 평정이다.
마음의 평정하면 매사에 만족이 있다.
이것이 축복이다.
그래도 그렇지 하늘이 선의 인내와 악의 화를 몰라 인간을 고통으로 시험하는 것은 짓 굳은 일이다.
작가의 표현이라도 그렇다.
인간이 감히 하늘의 시험을 판단한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나님의 세계는 변화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고 하였다.]
고통에 있는 환자 병문안 가서 너의 죄를 알고 회개하라 하고 있다.
사건의 번민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에게나 있다.
좋은 결과에는 축복의 교훈이 있고 나쁜 결과에는 인과응보의 교훈이 있다.
본서는 나쁜 결과의 인과응보를 번민하는 병자와 세 친구의 죄의 의식을 세속적으로 가설하여 설정하고 있다.
욥은 부자이고 다복한 집안을 이루며 하나님의 믿음과 축복으로 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칭찬하자 사탄이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용인하는 설정이다.
재산을 빼앗아 믿음을 시험한다.
욥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가변성의 이해이다.
건강한 육신과 정신에서 희망의 미련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육신과 정신을 빼앗으면 믿음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과연 믿음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시험을 이해하고 희망적 극복의 의지로 버틸 수 있냐는 것이다.
죽음이 아니라 육신과 정신의 고통이다.
불행에서 누구라도 운명의 세속적 비교를 포기할 때 까지 처지를 원망한다.
있다가 없으면 학습의 비참함은 더하는 것이다.
예초에 없었다면 이미 포기하여 작은 것으로 만족의 한계를 설정하였을 것이다.
갈매기의 꿈에서 적당한 곳에 안주이다.
정상은 특별한 것의 성취에 이르는 것으로 시간과 학습의 대세와 거리가 있다.
역사에서 시간과 학습의 완성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대세를 이루는 보편성의 진화이다.
부의 상실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욥의 믿음을 종기와 피부병으로 시험한다.
육신과 정신의 건강을 빼앗아 그래도 하나님의 믿음을 유지하는지 신의 권세가 백성을 괴롭힌다.
욥은 처지를 비관하고 저주한다.
아직 증오의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세 친구들이 병문안 와서 네 죄를 알고 고하라 한다.
죄가 있으니 시험에 빠졌다는 것이다.
악으로 밭 갈고 독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고 병든 친구 약 올리고 있다.
인간의 죄를 말하면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
내가 알든 모르든 나의 죄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시험하는 것이라고 믿음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소외의 외로움에서 친구든 무엇이든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있다.
시험은 가혹하게 욥의 비난으로 이어진다.
너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희망으로 고집 부린다는 것이다.
상처에 소금 뿌리고 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굽게 하지 않는다고 하며 잘난 희망을 버리라고 한다.
희망이 믿음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할 테니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의 시간까지 평안을 기도한다.
사탄의 시험은 꿀 병에 빠진 벌이 허우적거리다 잠기듯 질기고 파괴적이다.
사탄의 잔 주먹에 욥의 절망이 커지고 있다.
과정에서 죄의 유형을 나열하여 지적하고 있다.
현대인의 지적 분별에 내제되어 있는 상식의 범위이다.
하나님의 시험을 모르는 악한 자가 오히려 잘살고 씨도 번창한다고 비관하여 악으로 선을 비교한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악은 선에 지배되는 것이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점점 인간의 세속이 사탄의 시험에 무너지고 있다.
희망은 멀어지고 절망이 커진다.
지푸라기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나의 죄를 알려달라고 한다.
악한 자와 비교하여 변론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어도 변론할 수 없다.
선이 존재하지 않는 사탄의 공격은 파멸에 이를 때 까지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 한 방울의 피도 말린다.
욥의 절망은 나는 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악한자의 행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였으나 부당하게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인과응보의 저항이다.
처지에서 결과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순리가 아니라 부정하는 부당함의 저항과 증오이다.
욥의 한계는 인간의 한계이다.
시험의 결과이다.
인간의 세속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세계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는 예수뿐이다.
욥의 식솔과 알고 있는 사람들 즉 친구들은 하나님의 용서로 구원받는다.
재산은 두배로 보상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신을 모방하지 마시고 인간으로 충실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
2) 리워야단.
혼돈과 악마적 의미로 표현되는 가상의 바다생물이다.
3) 베헤못.
강력한 힘을 가진 코끼리나 하마 등 자연에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강력한 동물을 상징한다,
4)켓쉬타.
양 한 마리의 값이라고 한다.
2025.7.22.일.
5 시편.
1) 본문.
하나님을 전적으로 찬양하고 의지하는 개인적 소망의 기도와 시이다.
세계관 하고는 거리가 있는 이방을 배척하고 우리 편과 나를 우선하고 있다.
우리 편은 이스라엘이고 나는 다윗이며 그의 역대가 시편의 대세이다.
어려울 때 울며불며 구원을 구하고 잘나갈 때 말발굽과 병기로 천지를 호령한다.
처지의 소망에서 자나 깨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난한자와 가엽은자의 긍휼이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된 기도이다.
솔로몬의 시는 배부른 왕이다.
마스길은 사람명칭이 아니라 시의 형식을 뜻하고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반란한 인물이다.
반란에도 불구하고 고라의 자손이 번창 하였다는 증거가 시편에 있다.
아삽은 다윗시대 예배음악을 담당했던 놋 제금을 치는 악장이라고 한다.
에스라인은 유다지파의 가문이다.
셀라는 앞 문장을 묵상하고 곱씹어 이해하고 읽으라는 연속성의 주문이라고 한다.
언급되는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고 후에 유다의 살몬과 결혼한 인물이 아니라 대적하는 괴물로 표현하고 있다.
평소에 잘하시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매사 노심초사하여 애절하게 하나님을 찾는다.
선하면 찾지 않아도 곁에 계신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이스라엘의 편애에서 옳은 말씀이다.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가아니라 물과 공기처럼 대자연의 의식에 내제되어 있는 증거이다.
창조와 현세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다윗의 시에서 "야곱의 자손이 함의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점령했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말 많은 인간을 선하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 안 나고 말이 많으면 낮으로 감추는 것이 있다.
시편은 말의 잔치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뜻을 이루신다.
개인적 기대를 기록한 것이므로 읽어보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맥은 성서의 비유적 화법과 달리 직설적이라서 이해하기 쉽다.
2025.7.23.일.
6 잠언.
1) 본문.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네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하였다.
출애굽의 광야에서 배고프고 물이 없다고 목적을 배신하고 노역하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금송아지의 수상숭배와 고라의 반란으로 수천이 희생되었다.
사사시대에 분열하여 이방에 수차례 지배되는 고난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다윗시대는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주변의 맹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셋만 모이면 편 가르고 무슨 자랑거리라고 주적을 따지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무지가 있다.
적은 영토와 주권을 침해하는 곳에 있다.
휴전선은 이념의 시간에서 동서냉전의 피해이다.
대적하는 총이 주적이지 오천년 역사와 민족과 말과 글과 미풍양속과 관혼상제의 문화는 한반도의 피 이고 뿌리이다.
분단의 역사는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하는 냉전적 제국주의의 피해이다.
정치가 앞장서 해소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문제의 해소는 소통과 교류를 통해 평화적 동질성 회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가진 것 없이 지배와 예속의 허울로 서푼 같은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미래 없는 벼슬에 문제가 있다.
세계10대 강국과 k문화를 자랑하지 마시고 걸 맞는 갓으로 고쳐 쓰시라는 것이다.
핵은 무두가 멸망하는 길이다.
동서냉전의 상처와 태평양과 대륙의 경계에서 평화의 담보가 우선되어야 하는 지정학적 난제이다.
평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노력도 없이 정치적 대적을 위해 주적의 개념을 계승시키겠다는 것이 더 큰 위협이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하였다.
상대를 인정해야 옷고름 풀어헤친다.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여 도랑물로 거리를 지저분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나누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계신다.
요사이 대문 밖 문제라면 고삐 풀린 망아지 되었다.
아내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항상 족하게 하며 사랑을 항상 연모해야 한다.
어려워도 옳은 말씀이다.
주린 배를 채우려 도둑질하면 멸시하지 말고 가진 것을 내어 주아야 한다.
배고프지 않은데 배고프다고 하는 놈들이 문제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돼지 코에 금 고리 같다.
낯바닥 공사가 대세이다.
고쳐서 라도 삼가지 못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관계적 선입견이고 상업적 가치이다.
가난한자는 이웃이 없고 가진 자는 이웃이 많다.
21세기의 현실을 말씀하고 계신다.
있다가 없으면 정승 집 개 보다 못하는 산업사회의 인습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면 명철할 것이고 조급하면 화가 있다.
권력의 오만으로 벌어지는 특검의 벼슬에 딱 맞는 말씀이다.
의논이 없으면 무너지고 의지가 모아져 지략이 풍부하면 살아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와 일에서 독불장군은 없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작정하신 것은 하나님이다.
율법에서 세 사람의 증언을 들으라고 하였다.
니네베를 회개시킨 요나와 여리고성 함락에서 노략질한 유다지파의 아간이 제비뽑기로 걸렸다.
사울도 제비뽑기로 왕이 되었다.
현실에서 따라하면 큰일 난다.
제비뽑는 것은 강한 자를 고른 후에 엇비슷하면 분쟁을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해가 된다.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라도 부정하고 미련하여 산수하는 자를 피하라고 하였다.
피할 수 없으면 거리는 두어야 한다.
인연을 빙자하여 낯바닥 철딱서니 없는 미련한 놈들이 앞뒤 없이 산수한다.
늙은 사자도 젖 먹던 힘은 남아있다.
사연을 듣기 전에 판단하면 안 된다.
남의 일에 오지랖 앞세워 앞뒤 없이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타의의 정체와 깊이를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잘못된 것이다.
이익에 치우쳐 낯바닥 앞과 뒤가 다르지 말라는 것이다.
내로남불의 지적이다.
젊은 자의 영화는 힘이요 늙은 자의 백발은 아름다운 것이다.
젊은이의 미래와 나이든 이의 안정은 동행해야 한다.
제 잘난 머리수의 산수로 저울추에 치우쳐 갈라치면 분쟁의 화를 부른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보다 기쁜 일이다.
마음으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행사로 얻는 것보다 좋은 선이다.
다투는 여인과 큰집에 사는 것 보다 나 홀로 움막에 사는 것이 편하다.
성내는 여인과 사는 것 보다 광야에서 도 닦는 것이 났다.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하신 말씀과 다르다.
탓하여 배려와 양보의 사랑이 저무는 남녀관계에서 하나님도 어렵다는 것이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안의 뇌물은 분을 그치게 한다.
왼손이 모르는 오른손의 선행은 가난을 구하고 다툼에서 양보와 배려는 화를 면한다.
선행은 마음으로 가르침을 따르는 작은 것이라도 평안에 이른다.
악인은 의인의 속전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된다.
악은 선에 지배되고 사악함은 정직함과 비교되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되기를 의와 영으로 기도하며 산다.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 방벽을 허문다.
성은 가두는 것으로 지혜의 용기가 경계를 해소하여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말씀이다.
내 것의 울타리가 아니라 전체를 우선하는 대의이다.
남의 빛에 보증서지 말라 갚을 것이 없으면 침대도 빼앗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으나 예전에 빛 보증하다 망한 사람 많았다.
관원과 음식을 먹을 때 탐하는 것이 있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공적 정의에서 이탈하여 부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의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우선해야 한다.
그의 음식을 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능력에 견주어 처신하라는 말씀이다.
과욕하면 뒤탈이 있다.
맛있는 음식은 자제하여야 목구멍 넘어가서 편하다,
행색의 위선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한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사람의 패악한 마음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분칠한 낯바닥 보고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들 잘못은 매로 가르치라는 대목이 다수 있다.
요사이 아이들 체벌하면 큰일 난다.
신앙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강요하면 안 된다.
혼합한 술은 쳐다보지 말고 포도주는 번쩍이고 순하게 내려간다고 하였다.
여름에 땀 흘리고 소맥한잔하면 악과 죄가 사라지고 만사가 형통인데 하나님께서 이것은 모르시는 것 같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하였다.
다 죽여야 속이 풀리는 사람들은 악한 것이 있다.
사십대가 넘지 않도록 삼십구에서 멈춘다고 하였다.
성서에서 이기면 싹쓸이하여 사자 굴에 던지는 승리의 전유와 가르침의 진리는 다르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러면 쓸 만한 그릇이 나온다.
일과 능력에서 옥석이 있다는 것이다.
가릴 줄 알아야 장을 한다.
말과 입에 대한 말씀이 많다.
논리에 정당한 말을 하고 변론 외에 해롭게 평하는 것을 삼가 하라 하였다.
남의 말을 쉽게 하는 자가 시비를 조장하여 분쟁의 씨를 만든다.
말 못하여 죽은 귀신처럼 여기저기 다니며 공의를 해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칭찬하지 말고 면책은 내색하지 않는 사랑보다 났다.
관계에서 타의와 동행하여 인정받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다투는 여성에게 곤혹을 당하셨는지 말씀이 많다.
예쁘게 웃는 얼굴에 욕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무저갱에 빠져도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죄 짓고 회개하지 않는 분들은 화있기 전에 스스로 빠져주시기 바란다.
피를 보고 법의 울타리에 기대하여 핑계 대는 죄의 낯바닥이 버젓하다.
경책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보다 융성한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여 바른말 하라는 것이다.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많다.
관인이 거짓을 믿고 행하면 많은 것이 잘못된다.
적용의 범위가 넓어 피해가 크다.
법과 질서는 정의로워야 사회가 바르게 된다.
종을 곱게 대하면 주인행색을 한다.
생명과 인격은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공동체의 직분은 분별이 있어야 한다.
주문과 집행의 순리이다.
술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금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리는 것이다.
아내는 가족과 남편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말씀은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뚜막 문화는 사라졌다.
멍멍이가 사람보다 나은 세상인데 성서는 바닥을 헤매는 개 팔자이다.
인간세상의 정의이고 시편과 같이 사람의 화법이라서 읽기 쉽다.
2) 아바돈.
끝없이 떨어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의 구덩이 무저갱과 같은 의미이다.
2925.7.24.일.
7 전도서.
1) 본문.
갑자기 허무주의가 등장하여 아닌 밤중에 홍두께 인가하였다.
성서에서 허무주의를 공부한다는 것이 맞는 것인지 수상하다.
항혼의 허무주의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원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러므로 나에게 오라 이것은 모순이 있다.
신앙을 삶의 도피처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호할 것이나 여리고 약한 것이다.
평정의 긍정은 희망과 기여의 용기를 얻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는 용사이다.
금은보화 쌓아두고 용사의 힘 떨어지니 써먹을 데 없어 있으나 없으나 그것이 그것 같아 허무하다.
황혼의 회한에서 작은 것으로 만족하여 안주하면 과장된 학습의 허무에 빠질 이유가 없다.
삶이 고단하여도 주어진 데로 하나님의 뜻으로 살면 늙은이의 시간은 화살같이 지나간다.
허무하여 몽그작거릴 시간이 없다.
재물과 신분과 용사의 과거에 억매여 현재를 비관하는 것이다.
왕이 과거를 버리고 텃밭의 작은 것에 의지하여 자아를 구하는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귀영화는 가진 것에 더하여 그것대로 흠이 있고 고단한 것은 작은 것에 만족하여 그것대로 흥이 있다.
태어나서 얻는 것은 무엇이라도 죽음에 가까울수록 버려지는 것이다.
생은 나로 시작하여 만물에서 헤매다 나로 마무리 된다.
권세와 부귀에 치열하여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사는 농부보다 죄가 많다.
추수 때 간판 떼고 염라대왕을 알현한다.
왕이 사람으로 돌아가서 텃밭을 가꿀 수 있다면 자아의 면책이 이루어 질 것이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이다.
나 하나로 대자연에 예속되어 노동력과 땅의 생산이 있으면 천수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인연의 책임으로 세속을 떠나 자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이 하나님의 추수를 염려하는 것이 씁쓸하다.
이방의 여인에 치우쳐 하나님을 배신한 우상숭배와 금은보화의 사치로 백성을 고단하게 괴롭힌 죄가 크다.
사후 아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대면에서 백성의 고난을 더하여 요구하다 왕국이 두 쪽 난다.
왕의 허무주의는 죄의 벌이다
너의 다음 대에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형벌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은 감각으로 알 수 없고 보이지 않으나 매일 새로운 시간으로 학습이 이루어진다.
대자연의 변화를 의식할 수 없는 생이 잛은 것이다.
세속의 지혜가 어중간 하니 번민이 많다.
기도와 참선은 지혜로 내면을 단순화 하여 탐욕의 번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혜 없는 무는 무지이다.
탄생은 무지의 무에서 시작한다.
죽음은 만물의 학습의 버리고 탄생의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정의 연민이 생이고 삶이다.
과하지 않으면 술의 원기와 나른한 휴식을 번민과 등식하여 이해할 이유는 없다.
때가 있으니 노하지 말고 인내하여 명철 하라는 말씀이 있다.
때를 지나치면 잎은 시들고 줄기는 질겨지며 열매는 썩는다.
대계는 대자연의 순리와 긍정에서 봄에 뿌리고 가을에 거둔다.
보릿고개를 염려하여 가을에 파종하는 보리는 밝아 주어야 추위의 시련을 견딘다.
고난이 크다는 것이다.
인간과 짐승의 비유에서 생명이 같을 지라도 만물을 예속하는 지혜는 유전적 분별이 있다.
구원할 수 있는 것과 구원받는 것은 다르다.
탄생에서 사물적 복과 화가 있으나 시험할 수 있는 선택된 기회이다.
생산과 견주는 성취가 우선하는 감각적 증거를 요구하는 문명의 시간이나 결국은 자아의 회한과 성취로 돌아온다.
삶은 열매를 목적으로 하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신념과 의지와 시간의 소비가 공간을 채우는 주체이다.
성실하고 과하여 비교하지 않으면 삶의 목적은 이루어진다.
작은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안주하는 것이 지혜이다.
지나치게 많으면 죽을 때 버리기 아까워 번민하다 허무주의에 빠진다.
쉽게 버리고 비우는 긍정이 필요하다.
번민은 눈덩이라 굴리면 커진다.
예수께서 죄짓는 자를 추수 때 까지 놓아두라고 하였다.
지혜와 권세와 부귀의 왕 솔로몬이 스스로 벌을 받고 있다.
무식하고 미련한 자는 스스로 벌하여 회개할 수 없다.
자아의 자유와 타의를 해치는 악은 반드시 저항의 벌을 받는다.
공동체의 구성에서 남 탓 말고 네가 스스로 잘하는 것이 문화적 질서이다.
젊은 용사가 늙은 왕보다 났다고 하였다.
전서에서 언급한 여인들의 성깔이 두려운 것은 많은 처첩이 도랑물이 모자라 속 썩인 것이다.
젊음과 건강이 무엇보다 좋은 것이다.
서원하였으면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앙을 선택하였으면 주저하지 마시라는 이해이다.
산업사회의 경쟁에서 의식하여 자아를 찾는 참 종교는 좋은 것이다.
모자라지 않는다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라도 육신에 쌓이는 한계가 있다.
체소 밭에 유익한 거름에는 부귀영화의 분별이 없다.
들풀이 약이 되고 좋은 것이 독이 될 수 있다.
포괄적 의미에서 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
건강과 죽는 시간은 인간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선처하는 것이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나을 수 있으나 혼인집과 초상집은 시작과 끝으로 비교할 수 없다.
젊고 건강한 인간 쓸데없이 기죽이는 늙은이의 회한은 채비가 된 어느 날 고즈넉한 산사의 문틈사이로 찾아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올무와 그물 같고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는 피할 것이고 죄인은 치맛자락에 붙잡힐 것이다.
어떠한 여인의 무엇이었는지 달다고 덤비다 꿀 병에 빠진 벌이 생각난다.
죄와 벌의 교훈에서 악인이 제 명대로 살다 죽어 잊어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니 악을 행하는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의 추수 이전에 사람이 행하는 법치의 형벌을 주장하고 있다.
추수의 심판은 천상과 무저갱의 지옥불로 이루어진다.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났다고 하였다.
삶의 집착이나 바람을 막을 수 없다.
요단강의 때가 가까우면 죄 값의 두려움이 우선하여 자아의 번민으로 돌아가 겉옷이 다르지 않다.
종교에서 인간은 지옥의 두려운 학습을 피할 수 없다.
선과 악의 분별이 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펜의 힘이라는 말이 있었다.
문제에서 위선의 모자람으로 은폐되는 선을 알리는 지혜의 진실이 생명과 인륜을 구한다.
현상에서 천지의 기우에 기대면 할 일이 없고 되는 일도 없다,
자연의 이치는 절기 즉 학습에 따라 씨 뿌리고 거두는 것이 순리이다.
노동은 결실이 중요한 것이나 만들고 가꾸는 정성으로 나에 충실한 선의 자아가 있다.
곧 늙어 생산하고 일할 수 없을 테니 젊어서 쌓아두라고 하였다.
땅의 생산에서 산업사회의 불평등한 기회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
문명과 행복에서 차별을 의식하지 않았던 농경사회의 미련이 있다.
산업사회의 경쟁은 밑천으로 생과 삶이 다르다.
가난한 자의 밑천은 협소하여 다리 밑 태어난 곳이 운명이 되었다.
자아의 삶이 없다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할 짓 다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유대사회의 관습이다.
2025.7.25.일.
8 아가.
1) 본문.
솔로모의 사랑과 혼인이야기 이다.
요사이 사랑을 본서처럼 표현하면 도망갈 사람 많다.
2025.7.25일.
9 이사야.
1) 본문.
초월적 존재 1에서 선지자 이사야이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의 길을 예언하였다.
7장14~17절과 52장13절~53장12절이다.
예수 탄생 8백 년 전이다.
세례 자 요한의 출현과 종교적 업적도 예언한다.
남 유다의 14대 므낫세(BC 709~643년) 왕 시기 전대 히즈키야 왕과 달리 종교의 관용주의가 팽배해 민심이 흉흉해
졌다고 한다.
이 말씀은 종교적 갈등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야훼신앙의 시각에서 엘리야의 철저한 배교정신과 이방신의 배척과 달리 엘리사의 경우는 사뭇 달랐다.
당시 종교는 혼재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유일신앙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교류와 소통을 통해 일상과 민생에서 문화적 공유가 이루지고 있었다.
현세의 지식으로 종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시에는 종교가 왕국운영의 체제를 대신하였다.
종교적 관용주의는 므낫세왕 시기 바알과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었다.
성전에 우상을 만들고 선지자를 핍박하였으며 매일 그 중 몇을 죽였다고 한다.
예언자 이사야는 전대 히즈키야(BC 739~687년) 왕이 죽기 전 활동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톱으로 허리를 잘라 죽였다.
이러한 악행이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종교적 이유가 되었다.
유대의 종교적 관점에 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유일신의 개념이 허무할 정도이다.
절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적 사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종교의 지배적 질서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배신하는 정신의 혼란은 국가의 분열이었다.
이스라엘 고대사의 문제는 국경의 방어와 관계에서 바알과 이방신 등 이단의 끊임없는 침략을 유일신앙으로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문명의 진화와 역사에서 진실이 필요하다.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 왕의 유대율법 회복과 회개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개선되지 않았다.
이방과 공유하는 토속적 신앙의 뿌리가 깊었다.
유일신의 주장에서 국경의 폐쇄성으로 지킬 수 없는 인류적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정한 논리가 보편적 대세를 지배할 수 없다.
국경의 경계라고 하지만 일상과 민생의 공유에서 문화의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왕국의 개념적 경계가 없는 초지를 공유하며 이동하는 목축업의 시대였다.
정착하여 일상의 경계를 설정하는 족속의 확실한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간과 학습에서 역사와 문화의 대세적 연속성 이탈은 판단이 필요하다.
생태적 합리성과 민주주의에서 독불장군은 없다
인류의 문화적 격리에서 교류와 소통으로 공유하여 학습하는 시간의 진화는 어쩔 수 없다.
야훼의 유일신앙을 요단강 서쪽으로 경계하여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유전적 시간의 학습에서 현재의 창을 완성하지 못하면 다음 창으로 넘어 갈 수 없다.
혼재된 종교의 학습과 결론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결국 유대교와 이방신의 갈등에서 유일신의 절대를 요구하였던 구심점 상실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인류적 대세에 의해 유일신앙의 고립이 무너진 것이다.
종교적 시각에서 위정자의 무지와 악행으로 이방신의 침략을 예지하고 방어하지 못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지배와 관계에서 보편적 이해의 확장이 아니라 나의 것에 집착한 결과이다.
특정한 역사와 문화가 인류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초자연적 현상에 의지하는 감각적 학습의 한계에서 의와 영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인류의 미래이다.
초자연적 현상의 지배와 문화적 격리에 의해 발생하는 종교의 이질적 경계를 생명의 심연에 있는 의와 영의 종교적
진리를 공유하여 하나를 이루어 경계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흩어진 종교의 통합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새로운 창의 발현이다.]
신실한 성읍은 창기가 되었고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 살인자들 뿐이다.
포도주는 물이 섞이고 고관은 도둑과 협잡하여 재물을 탐하고 송사가 굽어졌다.
이방을 따라 점치고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패역을 일삼은 백성은 죄의 형벌이 있을 것이다.
장정은 칼으로 용사는 전란으로 망할 것이며 여인들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시온은 황폐하여 어리석은 자의 지배와 학대를 받을 것이다.
어찌하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하늘이 무너져 피할 구멍이 없고 올무에 걸려 피가 양동이이다.
비바람과 폭풍의 형벌에서 살아남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있을 것이다.
죄지은 자는 죽고 선한 백성만 남는다.
회개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면 칼과 창을 달구어 보습과 낫을 만들어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포도는 백성이다.
죄의 형벌을 치루고 아직도 회개하여 다듬지 않은 들 포도를 염려한다.
이정도면 포기하실 만 한데 하나님의 설득이 오히려 눈물겹다.
가옥이 가옥을 이었으며 전토가 빈틈이 없다.
도시화의 우려이다.
목축업의 이동과 초지의 공유적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시간과 학습의 변화에서 익숙한 광야(대자연)의 상실에 걱정이 태산이다.
하나님께서 유전적 분별과 시간의 학습에 의한 변화를 알고 계신다.
도시화가 인류에게 화가 되었다는 말씀은 산업사회의 경쟁과 차별을 비판하고 있다고 비약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학습과 지식진화의 필연에서 인류의 미래가 양치는 목동의 시대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학습의 한계에 머물러 인류적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없고 형벌의 가혹함으로 문화와 신앙의 절대를 추구한다.
종교적 시각에서 변화의 극단적 보수성을 보이고 있다.
형식의 제던에서 신의 존재를 찾으려 하나 광야와 여린 심성의 요구는 어렴풋이 영적 존재의 예속을 엿볼 수 있다.
생명의 내적 의심이 있었으니 예수께서 형식을 패하고 자아의 진리를 하나님의 주체로 이끌어 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을 전달할 사람을 찾으니 핀 숯으로 죄의 사함을 받은 이사야가 나선다.
숯불을 신성시 하고있다.
아하스왕에게 조용히 하라는 단원이 있다.
다음은 열왕기 하편에 써넣은 내용이다.
[이때에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에 앗 수르제국이 확장하고 있었다.
베가왕은 아람(재임기간 BC 754~732년)과 유다와 협력하여 대응하려 하였으나 유다왕 아하스가 거절한다.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나 아하스왕이 성전과 왕궁의 금은으로 앗수르왕의 개입을 설득한다.
아하스왕의 분석에서 다른 면이 있다.
종교적으로 야훼신앙의 배신자이나 외교적 평가도 있다.
당시 가나안과 길르앗 정세가 혼란스러웠다.
북이스라엘에서 일년에 왕이 세 번 바뀌었다.
아람왕 르신이 쳐들어와 아사랴왕이 회복한 엘랏을 점령하여 유다사람을 추방하였고 아람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야곱의 백성 북이스라엘과 관계도 대적되어 있었다.
앗수르에게 도와 달라고 성전과 왕궁의 예물과 복종의 서신을 보낸다.
유다왕 아하스의 요청을 수용한 앗수르왕이 다메섹을 점령하여 아람왕 르신을 죽이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북이스라엘도 다수의 성읍을 빼앗기고 백성이 끌려갔다.
베가왕 때의 전쟁이다.
힘을 합하여 앗수르에 대응하였으면 어찌되었을까 역사의 미련이다.
아하스가 앗수르의 왕을 만나기 위해 다메섹에 가서 그곳의 제단을 보고 제사장 우리야를 시켜 성전의 기물을 옮기고
훼손하였다.
왕국 전역에 산당을 만들고 다윗의 미련으로 보호하는 하나님을 배신한다.
왕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다는 대목을 인신공양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하스왕(BC 763~727년)과 이사야(대략 BC 740~680년) 생애가 겹친다.
이시기에 우상승배가 심했다.
다음도 열왕기하이다.
[히스기아 제위십사 년 앗수르의 산헤립왕이 유다가 애굽으로 돌아서고 조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신전
과 목상을 파괴하자 쳐들어와 유다의 여러 성읍을 점령한다.
히스기아왕은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한다.
산헤립은 조건으로 은 사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하였다.
굴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왕궁과 성전의 곳간으로 모자라 기둥과 문짝의 금까지 벗겨 보냈으나 앗수르왕은 사신을 보내 세를 과시하고 유다를
모욕하며 항복을 요구한다.
앗수르 군의 진군로와 전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의 멸망보다 까불면 혼내준다는 강자의 과시로 보여 진다.
히스기아왕은 초기 블레셋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왕국의 방어를 위해 방벽을 튼튼하게 하였다.
예루살렘에 샘이 없었다고 한다.
성 밖 기혼 샘에서 지하수로를 건설하여 연못을 만들어 물을 확보하는 등 공성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중과부적에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예지를 부탁한다.
예루살렘은 무사하고 앗수르는 물러날 것이며 산헤립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본서에 앗수르 군사 십팔만이 이유 없이 죽었다고 하였으나 시바의 여왕이 생각나는 구스(에티오피아)왕이 앗수르에
대적하여 움직여 대응을 위해 히스기아에 편지 한 장 남기고 철군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과정에서 예루살렘은 멸망을 면했으나 유다는 철저하게 파괴된다.
산헤립은 후계자의 갈등으로 두 왕자에게 살해되고 다른 아들 에실핫돈이 앗수르의 왕이 된다.
히스가아는 종기로 사경에서 아사야의 사망선고를 받으나 벽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15년을 덤으로 더 산다.
바빌로니아에서 병문안으로 사신이 왔는데 왕궁의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하여 보여주었다.
아사야가 탓하며 유다의 모든 것이 바빌로니아로 옮겨질 것이며 왕자가 갈고리에 뀌어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유다의 아하스왕 때 우상숭배와 성전의 제단을 훼손하는 사건에서 저항하고 반론하는 이사야의 언급이 없었다.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다.
7장 14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하였다.
예수탄생의 예언이다.
본서에서 우리야를 진실한 증인으로 평가하나 아하스왕의 명에 따라 이방의 제단을 성전에 들여온 죄인이었다.
이스라엘의 두 집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함정과 올무가 될 것이다.
민족의 역량이 분리된 남북의 분열이다.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진노한 막대기요 몽둥이 이다.
앞서 언급한 유다의 히스기아왕 시대에 앗수르의 침략을 간신히 모면하였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삼년을 공성전으로 포위 당한 후 멸망한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치라고 하신 것이다.
요단강 서쪽의 유일신이 아니라 온 누리에 계시다는 증거이다.
앗수르로 사마리아의 북이스라엘을 멸하고 다시 앗수르를 멸할 것이라고 하였다.
유다의 예루살렘도 그들과 같이 될 것이다.
야곱의 백성은 입술로 공경하나 마음은 나에게서 떠났다.
가장 기이한 이적으로 만연된 종교의 관용주의를 벌하겠다고 하였다.
셉나는 유다의 부패한 재정관이었다.
열국의 경계선을 치우고 타락한 권세를 빼앗을 것이다.
제국의 지배이다.
바사제국의 시대에 에굽을 포함하여 사해와 가나인 지역의 모든 소국이 소멸한다.
“나의 백성 애굽과 내손으로 만든 앗수르와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지어다.” 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을 넘어 애굽과 셈의 자손 앗수르에 이르고 있다.
사해와 요단강 주변의 살벌한 전쟁은 제국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하나님의 나라가 유일사회에서 다민족 시대이다.
강제이주와 예속에서 애굽의 노역탈출이 무색하게 되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시대에 자신들의 땅에 살지 못하고 끌려가고 강제 이주된 백성의 귀환을 예언하고 있다.
“남은 자여 돌아오라!“ 는 말씀은 유대의 습성 벌의 고난이 있어야 그제야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바사의 고레스왕 칙령은 신앙의 자유가 포함된 예속된 민족의 관용정책이었다.
성전과 예루살렘성이 제국에 예속되어 재건된다.
흩어진 하나님의 신앙이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숨통이 트인다.
권세와 부귀영화로 교만한 야곱의 백성은 사라지고 참된 백성만 남았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처절함을 희석하기에 부족한 병 주고 약 주시는 것이다.
애굽의 족속을 나의 백성이라고 하시드니 수치와 수욕이라고 하였다.
유다의 멸망 시 애굽으로 이주한 백성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이다.
욥의 시험을 기억하면 멸망의 처절함에서 믿는 자의 원망과 안 믿는 자의 저주가 있었을 것이다.
꾸짖으니 도망가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고 산마루의 기치 같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며 돌아오는 백성의 상처를 고치시고 달빛을 햇빛 같게 하시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될 것이다.
호세아가 부정한 아내를 용서하고 기다리듯이 또다시 못난 백성을 사랑하고 계신다.
약주고 병 주시고 병 주시고 약 주시는 끈끈한 역사이다.
궁전과 성읍이 파괴되어 백성이 떠나고 요새와 망루는 구덩이가 되어 양과 나귀가 좋아하는 초지가 되었다.
광야는 아름다운 밭이며 열매이고 화평하여 씨 뿌리고 양과 나귀가 살찐다.
의와 영의 시각에서 도시(문명)와 광야(대자연)의 비교이다.
선을 지키는 공의의 설명이 구구절절하여 애절하다.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전도는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의와 영에 이르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본서는 지금까지 공부한 성서의 복습이다.
2) 아리엘.
신의 사자와 불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번제단의 불로 묘사된다.
본서에서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3) 오벨.
높은 곳을 의미하여 밀로와 같이 성의 요새를 말한다.
2025.7.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