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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존재 2. 본문

나의 글방.

초월적 존재 2.

박세욱. 2025. 5. 30. 13:06

1 로마서.
1) 본문.
창조에서 생명과 물질의 합리성은 없었다.
빛과 먼지이다.
태초는 땅의 물질적 시간이다.
창조와 태초의 시간에는 선과 악이 없다.
생명체의 태초는 인지와 인식할 수 없는 초자연에 예속된 시간이다.
감각의 이해에서 빛은 생명체의 합리성을 위한 최초의 준비이며 물질 즉 물과 공기는 다음이다.
생명은 훨씬 깊은 것이다.
시간의 연속성에서 생명체의 태초는 창조에 예속된 무에 가까운 것이며 인지와 인식의 단계가 인류사의 시작이다.
악은 창조 또는 태초와 무관한 인간의 시간이다.
 
선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나 악은 인류의 지혜와 지식의 시작에서 인지와 인식의 결과이다.
창조에 가까운 자연에 예속된 시간이 악에서 멀다는 것이다.
인간중심 사회에서 현세는 선과 악의 시간이다.
가르침과 선지자의 길에서 악을 멸절하면 선의 세상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돗자리를 주며 교수라고 하였다.
깔고 앉을 정도이면 악이 선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은 정해진 길로 가는 기차 길과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도로의 차이라고 하였다.
선과 선지자의 길이다.
완전한 선은 초월적 미지에 존재하나 현세의 시간에서 학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엘의 환상과 꿈으로 표현하기 매우 어렵다.
 
본격적 기독교의 인류화이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세계는 나와 더불어 믿음에 이르는 알곡의 복됨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다.
가르침의 실행에서 유대가 먼저이고 헬라가 다음이고 죄에서 유대가 먼저이고 다음이 헬라이다.
유대에 대한 사랑이고 걱정이다.
잘못된 권세에 현혹되어 무리지어 행패부리는 자들은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복음의 길에서 고난을 격어야 했던 신앙의 가면을 쓴 유대의 세속적 권세를 말씀하는 것이다.
야훼신앙에서 유대의 절대가 이방으로 확대되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율법의 지배에 있는 사회의 고난에서 벗어나 온 누리의 사랑과 인간을 우선하는 가르침의 자유이다.
 
규정이나 법령의 조문이 아니라도 선의 가르침을 행하면 알곡으로 선택된다고 하였다.
유대인이 아닌 누구라도의 해석에서 상당히 진보된 시각이다.
유대에 갇힌 그리스도교의 변화와 개혁을 위한 이방의 복음에서 유일신앙을 따지는 무리의 시달림이 개입되어 있다.
유대사회의 설득에서 한계에 이른 구체적 방향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하게 종교의 예속적 관점이 아니라 지향하는 목적 선의 포괄적 이해와 적용이다.
태초의 순수에서 죄가 많아 율법이 있다고 하였다.
악의 행태가 돗자리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폐기론을 말씀하고 있다.
율법은 형식이고 믿음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성취가 전제되어있다.
믿음 이전의 지식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설득하는 것은 근거가 필요하다.
악의 세상은 지식으로 오염되어 자연과 자아의 순수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있다.
바울의 설득은 예수의 계시가 있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긍휼에 있으나 실존의 설득에서 지식이 요구하는 증거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가르침의 목적 선의 확장에서 듣고 보지 못한 대상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말씀의 전도이다.
하나님을 진리를 가지고 태어나신 분은 예수뿐이다.
열두제자도 고기잡이 하다 낙이여 가르침으로 성자와 성령이 이른 것이다.
할례 자와 무 할례 자 말씀은 믿음은 설득과 학습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의한 유대사회의 계승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믿음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가르침이 아니라도 율법 밖의 믿음과 선한 자이면 하나님의 알곡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탄생에서 악의 학습이 없는 인간은 본디 선하다.
의를 지키는 정의로운 사람은 율법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다.
죄는 여러사람을 힘들게 하고 의는 여러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하였다.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죄는 죄대로 하되 선으로 받들어 구원해야 하는 착한 인륜이다.
내 것으로 울타리 치고 밖은 적이고 악이라는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이다.
가르침의 이해에서 학습의 시간에 있는 유대사회와 새로운 개척지 이방의 공유 적 차이가 있다.
 
이방의 복음에서 조문과 형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이해할 수 있다.
가까이 가야 접근하여 선교할 수 있다.
가르침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쉽다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다.
추수 때 까지 죄짓는 자들을 놔두라는 의미와 기회에서 회개할 수 있는 선과 용서의 수용이 확장되고 있다.
바늘구멍이 커지고 있다.
고난의 인내는 가르침을 단단하게 하여 소망에 이른다.
위기를 느끼는 것은 헬레니즘 문화의 대세에서 초월적 존재 자연과 자아를 설득하는 근거가 항상 부족하다.
단단하지 않으면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율법이 아니라 죽음으로 죄에 맞서는 의의 믿음이다.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와 같은 것으로 인류사에서 진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암시적 질서에 의해 공유된다.
세대의 수명으로 인지할 수없는 시간의 질서이다.
율법으로 범죄를 더한다는 가르침은 없을 때는 죄를 알지 못하였으나 있고부터는 죄를 알았을 때 이미 지옥의 형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법리의 형식과 다른 내면적 형벌이다.
동양사상에도 있는 죄의 진리이다.
선함을 알지 못하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과 같다.
율법은 선으로 죄를 알리기 위한 것이지 그 것으로 권세가 아니다.
성경의 행색으로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과 영의 비교는 자연과 자아에서 물질과 문명이다.
자아와 감각에서 실존과 실증 또는 구전과 문서의 논쟁이다.
아브라함 보다 이삭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는 이유이다.
이러한 계시는 이삭의 큰아들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는 야곱(이스라엘)으로 이어진다.
아브라함의 적자는 아내 사라가 나이 90에 하나님의 계시로 낳았다는 이삭이니 그 씨가 그 씨이다.
여기서 신분의 차별적 애기가 중동의 비운적 역사에 개입하고 있다.
낮은 신분 하갈의 이스마엘과 본처 사라의 이삭이다.
성경에서 어떻게 어느 정도 거론될지 모르나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하갈을 외면하지 않고 구원하였다.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의 이후가 궁금하다.
선지자 호세아는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방이 기독교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말씀이다.
법에 억매여 행위를 우선하는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율법에 억매여 행색을 우선한 자 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바꾸고 싶다.
요사이 종교의 탈을 쓰고 위선으로 죄를 모르는 자들이 백주에 버젓하다.
선의 확장적 이해에서 유대율법의 박해를 피해 이방으로 흩어진 그리스도교의 여한과 미래가 있다.
이방의 전파에서 가능성을 확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전도하는 바울과 사도들을 이스라엘 밖에 있게 한 이유이다.
 
주의 이름을 듣지도 전파하는 의인을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자의 믿음과 의를 걱정한다.
소통에서 믿음과 율법 밖에 있는 전도의 한계이다.
본서에 복수로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애증이 있다.
모세는 내가 이방으로 너희를 시기하게 하여 분노하게 할 것이다.
이사야는 나를 찾지 않는 자에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거역하여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하여 선지자를 죽이고 박해한 형벌의 경고이나 근본에는 관계의 부족함이 있다.
폐쇄적 또는 고립적 유대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그들이 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선지자를 죽였으며 한 목숨 남았는데 그 마저 찾는다고 하였다.
종교의 관용주의를 경고하는 율법과 유일신앙의 위기가 절절하다.
 
다윗은 더하여 밥상을 올무와 덧과 날카롭고 뾰쪽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고 등을 굽게 하시라고 하였다.
우리 편을 아작 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방의 선교는 상대적 비교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모자람의 아품으로 설득하려는 것이다.
끝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대적하는 토속적 또는 토착적 무엇이 있는 듯 보인다.
유대율법이 바알과 아세라 등 십 수개의 이방신과 우상숭배의 대적에 고난 하였듯이 그리스도교의 고난이다.
조선의 개항이 어려웠던 것처럼 새로운 것을 경계하는 보수적 사회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21세기는 통신사회이다.
다메섹의 계시를 가람나무에 접붙인 것으로 비유하며 나는 가지이며 성자와 성령이 뿌리라고 하였다.
예수가 탄생하고 가르침을 전파한 열두제자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다.
집필자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하려는 유대와 이스라엘 사랑이 절절하다.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얻은 하루분의 식량 만나가 생각난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서 넘치지 말라는 것이다.
타의를 존중하여 협력하고 협동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는 활동적 이었고 야곱은 순종적 이었다.
활동적 지배와 내면적 의지에서 야곱이 선택된다.
 
종교와 문명적 관점에서 선택이다.
이스라엘과 함께하려는 고난에서 박해를 탓하지 말라는 말씀은 선으로 악을 이겨내라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하나님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인내의 한계에서 분노에 이르는 말씀이 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끝없이 내어주어야 하는 답답함에서 속이 풀린다.
"믿음이 강한 자는 모든 것을 먹고 약한 자는 체소만 먹는다." 라는 대목이 있다.
신앙에서 도량과 자기연민을 말씀하는 것이다.
관계에서 네 것이 아니라 긍휼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 말씀을 띄엄띄엄 골라듣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건축하지 아니한 것은 오로지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구역의 언질로 이해되며 나에게 맡겨진 의무로 가르침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보인다.
이방의 복음에서 같이한 인연의 감사로 정리하였다.
바울이 이방의 선교를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16명이라고 하는데 세보지 않았다.
이분들의 역할이 컷 다.
 
2) 사라.
아브라함의 이복누이 이고 아내이며 이삭의 어머니이다.
신약에서 믿음을 인정받은 한사람으로 미모였으며 여왕 이린 호칭 이있다.
가나안이 가뭄으로 시달릴 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간다.
이때 신변 때문에 사라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인다.
원래 누이이기는 하다.
당시 근친혼이 흔했다고 한다.
미모에 끌린 왕(바로)이 궁으로 사라를 데려가는데 하나님의 경고로 돌려보낸다.
아브라함은 애굽을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온다.
사라에게 늦도록 아이가 없어 몸종 애굽 여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후사를 도모한다.
하갈은 임신하였고 후사의 주도권이 그렇듯이 하갈이 사라를 무시한다.
사라는 분노하여 하갈을 박대하였고 두려워 광야로 도망친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의 설득으로 돌아온 하갈은 이들이며 아랍인의 시조라고 알려진 이스마엘을 낳는다.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90세에 이삭을 낳았고 장자를 제치고 적자로 아브라함의 계보를 계승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측은하게 생각했으며 가족에서 멀리하지 않았다.
두 역사의 시작이다.
 
3) 호세아.

앗수르에 멸망한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다.

당시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 아모스는 우상숭배와 탐욕에 빠진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반신의 신전과 우상숭배 등 하던 짓은 여전하였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출신 호세아를 부른다.

호세아 이름은 "여호와여 구하소서!" 라는 뜻이다.

강압과 강제가 아니라 사랑과 눈물로 백성을 설득하나 제 버릇 여전하였다.

이래서 사랑과 눈물의 선지자이다.

여로보함 2세 때 국운이 기울어 아들 스가랴에 양위하나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죽임당하고 살룸은 한 달 만에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성안의 백성을 모조리 살육한 학살자 므나헴에게 살해된다.

일 년에 죽임으로 왕권이 세 번 바뀌고 결국 앗수르가 쳐들어오자 독재자 므나헴은 국민을 핍박하여 적장을 은 일천만

달란트로 매수하여 왕권을 유지한다.

조공을 위한 무리한 혈세의 부담으로 민심이 작용하였고 반란으로 아들 브가히야가 계승한다.

2년 만에 다시 군 장관 베가가 쿠데타로 왕을 살해한다.

이번에는 호세아가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된다.

처절하다.

하나님의 부름에도 사마리아를 구하지 못하고 멸망 후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간다.

 

4) 베냐민 지파.
베냐민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막둥이 이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 친 어머니이고 요셉이 친 형님이다.
산고가 심해 출산 후 어머니가 죽는다.
초대 이스라엘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이다.
역사가 비운하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레위인 첩을 강간하여 죽음에 이르는 사건이 있었다.
이일로 내전이 발생하여 베냐민 지파가 진다.
보복으로 베냐민 지파 여인들을 대부분 죽이고 딸을 주지 않기로 모의하여 결의한다.
대가 끊어져 사라질 위기에서 열두지파는 딸을 주지 않기로 한 결정을 후회한다.
방법으로 명절에 실로에서 여인들이 춤추는데 여기서 여인을 붙들어 가정을 이루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로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수도이며 성소였다.
 
5) 겐그레아.
고린도 동쪽으로 11km 떨어진 항구로 바울이 일 년 반을 머물며 선교하고 머리를 깍은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고린도서에서 공부할 수 있을 듯하다.
 
6) 뵈뵈.
바울이 보호자라고 하며 신뢰한 여성이다.
로마교회에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로마서 끝장에 16명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그중 한명이다.
2025.5.30일.
 
2 고린도 전서.
1) 본문.
로마는 기독교의 전파로 유대인의 영향력이 커지자 고린도로 추방하였다고 하였다.
바울은 여기에 교회를 세운다.
항구도시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으며 시대적 시류의 종합시장으로 보인다.
탐욕과 음욕과 송사와 같은 감각적 관계의 다양한 갈등이 일상의 행색으로 학습되어 지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세계를
전파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곳이다.
선지자의 복음은 오히려 이런 곳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도바울의 복음서가 계속 이어져 살펴보니 빌레몬서까지 이어진다.
가르침의 전달이 할례 자와 무 할례 자에서 이방과 우상의 죄와 무신자등 모든 인류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
3차전도 여행 중 에베소 체류할 때 글로에와 관련 있는 사람에 의해 고린도의 안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복음서에 글로에의 신앙적 정체는 없고 자료는 그와 관련된 친구나 종으로 보완하고 있다.
전달한 신앙의 주체가 당사자 아니라서 살짝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와 관련이 없다면 찾아와 복음에 우려되는 상황을 전달할 이유가 부족하다.
지금까지 공부에서 하나님의 계시나 전달은 실명으로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되었고 표현하였다.
복음서에 기록되었다면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역사인데 어떠한 연유인지 인물에 대한 실증이 부족하다.
교회와 관련하여 바울에게 세례 받았다고 사기 치는 작자들이 상당했나 보다.
예수께서 내게 구하라 하신 말씀에 반해 가짜 세례가 있었다.
나는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지 않았으며 복음은 세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탐욕과 음욕과 이익의 다툼에서
하나님의 믿음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인도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허락이 필요하다.
사이비 성직자들이 도용했다는 말씀으로 왜 라는 이유에서 시류의 앞잡이들이 자신의 입지를 위한 수단으로 교회의
영향력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복음은 물질의 복됨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영적인 내면을 강조하고 있다.
육신과 정신 즉 물질과 생명의 분리이다.
종교의 관점은 육신의 우선에서 생명의 구원이다.
타의를 핍박하여 치부하는 자들이 교회와 신앙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가면하는 작태가 있다.
사유의 개념에서 나눔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사도행전에서 놓친 아볼로가 등장한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풍부한 학식과 구약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아볼로는 성자와 성령의 이해가 부족하였다.
요한이 헤롯에 잡혀 이복동생의 처와 불륜으로 왕비가 된 애로디아의 사주에 의한 순교 이후 앞선 자 예수의 기적과
행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약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기록이다.
천막 만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기억한다.
당시 고린도에서 이주하여 에베소에 살았다.
요한의 세례에 정체되어 있던 아볼로에게 예수의 기적과 부활 등 초월적 행적을 전하고 믿음을 얻는다.
 
학식이 풍성한 학자답게 배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전언을 이해하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동참한다.
배움에서 행색의 선입견이 아니라 지식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무엇으로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세속적 편견이 있었다.
마태에서 말씀드린 교회가 신앙의 순수가 아니라 인간의 세속적 행색을 우선하는 경계 적 갈등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갈등이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네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스도파, 게바파(베드로), 바울파, 아볼로파 이다.
사람이 모이면 정치를 한다.
 
바울은 교회와 믿음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이른다고 하였다.
너 잘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다는 것이다.
권세와 행색을 우선하여 다투지 말고 협력하라는 것이다.
불안정한 신앙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실증과 시비를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기는 하다.
종교는 하나의 주체를 설정하고 그것의 구심점을 강조하는 믿음이다.
종과 예속에서 신분적 질서가 있다.
그렇다고 믿음의 세계가 물질과 권세에 줄서는 세속과 같다면 실망이 크다.
사람의 판단은 편견이 많으니 싸우지 말고 복걸 복으로 제비뽑기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
최소한 교회의 문제에서 일리가 있다.
 
찔리는 분들 회개하여 천국가시기 바란다.
아볼로는 인물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고린도의 상황을 이해하고 다음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구도시라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이방의 문화가 집결하고 있었다.
종교와 삶의 형태도 다양하였다.
그리스 여신 이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으며 일천 명의 여 사제들이 요사이 말로 비디오 찍고 있었다.
그 시대에 태어나 구경 못한 것 아쉬워 할 분들 많다.
현세는 성 상업시대이다.
창세기는 근친상간이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고린도의 기록에는 혐오하고 있다.
이웃의 관계에서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동체의 한계가 확장된 것이다.
 
가족과 이웃과 씨족사회의 어쩔 수 없는 씨앗과 밭에서 구하기 쉬운 유전적 다양성의 문화이다.
혈통의 집착에서 후대의 빈곤으로 유전적 결함을 발견하였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행했으며 성의 불안정성이 심각하였다.
로마의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성 문화를 연상할 수 있다.
바울은 성의 순결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칠세 부동석이라는 부뚜막문화가 있다.
여성을 칠거지악으로 속박하고 씨의 우월적 권한으로 밭의 순결을 위해 안채에 꼭꼭 가두었다.
씨는 뿌려도 밭은 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의 개방과 상업시대에서 외도는 만인이 인정하는 생의 활력소라고 알게 모르게 필요를 인정하고 있다.
 
대문 밖 생물이 궁금하여 커 보이고 긴장이 더하여 지루한 말초의 자극에 효과적이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구속하지 말고 놓아두라고 하였다.
죄는 씨든 밭이든 육신이 짓는 것이다.
모델업자들 추수 때 가르침을 배반한 순결 방조죄로 벌 받는다.
송사로 시끄러웠다는 것이 전례의 규범에서 법치주의의 확장이다.
가르침의 시각에서 양보와 미덕을 우선하는 문제해결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회가 사유와 이기적 문제로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다.
십자가 길에서 죄의 사함이 이루어졌으나 헬레니즘 문화의 확장은 시간의 대세에 있다.
종교의 실존적 구심점으로 설득할 수 없는 실증적 문화의 대세이다.
 
어찌 보면 예수의 초림은 자연에 예속된 시간의 자아 적 상실을 예시한 것이다.
현실을 상기하면 그나마 자연과 자아를 기억하고 있어야 생명으로 회귀하는 재림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며 현세를 사고하면 언제 멸절하여도 신의 말씀이 정당하다.
온갖 죄를 다 저질러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대문 안이나 밖이나 내 것이 우선이다.
모이면 어떻게 하든 갈라 비교하고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으려 작정한다.
하나님의 세계가 눈을 씻고 보아도 사막의 신기루뿐이다.
어차피 천당은 없고 모두가 지옥가면 똑같다는 심보이다.
지옥은 형기도 사면도 없다.
 
성경에 잘난 체 말라는 말씀이 정말 많다.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요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견 준 다고 하였다.
인간의 시간은 하던 것 하던 대로 하고 산다.
문화와 관계에서 단절된 시간과 학습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문화적 환경과 역사가 지배하는 흐름의 현상적 지배이다.
특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의 개념에서 이러한 각각의 문화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영원하지 않다.
 
다음 창이 열리게 될 것이다.
미래가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있으면 예수처럼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변할 것이라는 예지와 증거는 분명하다.
실증의 과학적 한계에서 초월적 존재의 이해이다.
이방의 복음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같다는 것으로 파벌의 분열을 우려하는 것이다.
나의 이름으로 세운 고린도 교회의 세속적 타락에 속이 터져 입이 마르고 오장육부가 썩고 있다.
유대교의 갈등에서 탐욕적 이익과 음욕의 타락으로 빠져드는 세속적 갈등이 교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
십자가의 길에 있었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다.
 
남녀관계와 부부관계를 순결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다.
씨나 밭이나 지루하고 수틀리면 물 빠질 때 까지 새로운 희열의 탐색에 주저함이 없는 이탈의 시대이다.
말하기 예민하여 돌 처형의 무저갱 지옥이 무섭다.
아직은 인연에서 욕정으로 복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도 교회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21세기의 시각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세계를 따르는 것은 자유이나 이미 선택하였다면 가르침의 배반은 죄가 된다.
죄의 책임이다.
곡식을 터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다.
 
야곱이나 김 유정 처럼 가당치 않은 이유를 들어 부려먹지 말라는 것이다.
야곱은 그래도 줄무늬 염소에 더하여 두 자매와 시종들 까지 여복에서 형편이 나았다.
김 유정은 완전히 새되었다.
복음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처지와 동행한다고 하였다.
동질성의 설득이다.
저만 잘난 체 하는 인간들 가졌어도 별 볼일 없다.
나를 이해하여 주는 인간에게 정이 간다.
갓 쓰고 도적질 말고 무리지어 행패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웃과 민심을 헤아리라는 것이다.
 
인지하고 행하는 것은 책임이 따르고 인지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죄가 없다고 하였다.
하늘의 율법이다.
제물이라고 알지 못 하였을 때는 죄가 없으나 누군가 그것이 제물이라고 알려 주었을 때나 인지하고 행하였을 시
죄가 되니 삼가 하라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법률은 모르고 하였어도 타의의 피해가 발생하면 과실의 범죄가 된다.
요사이는 제물인지 알면서 기대하고 달라고 하고 안주면 잡것을 동원하여 복수의 원초를 만든다.
물질과 자본의 시대에 가르침이 사마리아 여인의 물 한 바가지만 있어도 희망이 있다.
갈비 대 말씀은 알고 있으나 사람의 머리카락에 의문이 있는 대목이 성경에 있다.
뜻밖이다.
 
기도 할 때 남자는 모자를 벗어야 하고 여자는 머리카락을 가려야 한다고 되어있다.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상식의 괴리가 있으나 여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자신을 감추는 것이라고 하였다.
머리로 시선과 얼굴을 가리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자의 머리 가락이 성욕을 자극한다고 하는데 버선 위 발목이 났다.
학습의 위기이다.
대세적 학습에 의해 모두가 그렇게 사고하면 문화의 절대가 된다.
현세는 선택된 것이지 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월적 미지에서 인간의 한계이다.
파벌의 조장과 경계에서 교회의 공동체가 따로 국밥이었나 보다.
 
끼리끼리 무리지어 먹고 마시고 하다 보니 각각의 울타리를 우선하여 긍휼에 소홀하였다.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의 살과 피라는 말씀은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니 치우치지 말고 나누라는 것이다.
편 갈라 떡과 포도주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경쟁하여 경계하였다면 배반이다.
13장 4~8절은 사랑은 참고 온유하며 언제까지 떨어지지 안 는다는 유명한 구절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씀도 있다.
순결의 절대에 미친 유물 같은 영원한 사랑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육신의 절정으로 치닫는 문화이다,
괘락과 우상으로 멸망에 이르는 소돔과 고모라, 두로와 시돈, 봄베이와 로마의 경고가 있다.
실존의 이해에서 실증의 미완과 인간중심 사회의 절대에 예속된 망각의 우려가 있다.
 
진로를 수정할 수 없는 문화적 절대성에 지배된 한계에서 벽에 부디 치는 관성적 충돌의 파괴이다.
전도에서 언어의 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과 통역이다.
가르침의 복음은 기적이 아니라 언변으로 전도해야 한다.
소통이 중요한 것이다.
아볼로의 학식과 언변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이런 말씀이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여 말을 삼가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 하였다.
그 때도 치마 바람이 우려할 정도이었나 보다.
 
아니면 씨의 근육 적 지배이었는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현재는 여성 목회자가 많다.
예수의 주변에 여인들의 참여가 많았고 대화에 개의치 않았는데 바울의 전도에서 특별하다.
좀 더 살펴봐야 할 것이나 세상 많이 변했다.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아직은 아니라고 하였다.
자료에는 고린도에 갔다.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뜻을 고린도 교회에 전달하였다.
에베소와 고린도는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2) 아볼로.
유대인이며 로마시대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헬레니즘 문화의 확장을 위해 어촌마을에 세운 신도시이다.
학문과 문화의 신세대가 펼쳐진 곳이다.
신앙의 뚜렷한 고증은 없으나 유대율법과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 이동상인이라는 문화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베소로 이주한 이유라고 한다.
양을 키우는 유목민들은 정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의 관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 일에 교육자로 열심이었다.
세례요한의 제자이었으며 교회가 목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체 예수의 접촉과 지식이 부족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아굴라 부부와 친분을 쌓으며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음을 얻는다.
학식과 언변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지식을 대하는 자세에서 배움의 격식이 없었다.
만물의 존재와 배움을 얻는 학문에서 격이 없는 순수혈통의 지혜와 지성의 소유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베드로와 바울과 격을 같이하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것이 크지 않다.
나를 낮추는 전형적 봉사자라는 생각이 든다.
복음에서 진정한 일꾼이다.
 
3) 그리스보.
회당장이며 바울이 고린도에서 두 명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온 가족이 그리스도교와 같이 하였다.
 
4) 스데바나.
고린도 교회의 장로이며 교회를 세우기전 바울을 만났고 지역의 첫 번째 그리스도 교인이다.
브드나도, 아기이브와 같이 교회의 안 좋은 일로 에베소의 바울을 찾아 간다.
파벌에 남녀와 부부관계에서 성도의 성 문제와 제사음식과 믿음이 부족한 세례 등 걱정이 태산이다.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세속을 정화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였다.
 
5) 실라.
아가야 총독 갈리오 시대 유대인의 모함으로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힌다.
밤에 찬송가를 부르니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었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서 마가의 합류로 바나바와 다투고 각자의 길을 떠날 때 바울과 함께한다.
안디옥 교회의 이방 전도 상황보고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안디옥으로 유다와 동행한다.
 
6) 디모데.
1차 루스드라 전도에서 디모데의 가족을 만난다.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의 혼혈이다.
신앙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영향이 컷 다.
바울의 전도에서 동역 자 이었으며 영적 아들로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제자를 아들로 생각하는 문화가 있었으나 디모데는 특별하였다.
서신을 데살로니가와 빌립보와 고린도 교회에 전달한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디모데를 보내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였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심해서 교회일로 이방을 방문하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사역이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마게도냐 전도와 고린도에서 1년 반과 에베소에서 3년을 함께하였다.
2025.6.7.일.
 
3 고린도 후서.
1) 본문.
바울은 고린도를 세번 방문한다.
찾 번째는 2차전도 여행 중 에베소가 속해있는 아시아로 가려다 하나님의 계시로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 마게도냐로
가서 돌아오는 길에 1년 반을 머문다.
이때 고린도교회를 세운다.
2차 전도에서 아시아로 향하다 방향을 바꿀 때 막연히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했었다.
예루살렘 여행의 고행에서 아시아 유대인들의 집착적 박해를 접하고 또 다른 이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아가야 총독의 관서가 있는 고린도는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에 끌려가 옥에 갇힌 박해가 험한 곳이다.
법정에 끌려온 바울일행의 송사에서 갈리오 아가야 총독은 유대율법은 유대사회의 규범이므로 로마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관계하지 않는다고 천명하고 고발인들을 몰아낸 그리스도교의 전파에서 상징적 사건이다.
 
이러한 판단으로 로마의 지배에서 그나마 전파가 가능하였다.
두 번째는 파벌과 성문란 등 환란의 서신을 받고 갔다 곧바로 에베소로 돌아왔다.
고린도에 상주하지 않는 이유는 정신적 주체가 박해로 소멸되는 결과의 우려와 스스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완성하기
바라는 것이다.
바울의 위기가 교회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한듯하다.
내가 근심하는 것을 기쁘게 할 자는 고린도의 성도들 이라고 하였다.
유대에 갇혀있던 야훼신앙의 새로운 시험에서 유대율법의 학습적 절대에 예속된 갈등과 세속적 허물을 탓하는 죄와
벌이 아니라 초월적 믿음의 사랑과 용서로 성도 스스로 극복하기 바라는 것이다.
신앙의 자립이다.
 
조문 즉 구약오경의 파멸적 배반 때문에 모세를 바로 볼 수 없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말씀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하는 이방신과 우상숭배의 타락이다.
결국 후회해도 소용없는 유대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진 이천년의 방랑이었다.
조문의 배반으로 이러한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을 따르지 않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잘못이라고 하였다.
율법은 조문이고 하나님의 가르침은 영으로 훨씬 크다는 것이다.
바울은 모세와 엘리야의 시대는 율법의 조문이고 예수시대는 영의 생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율법은 바위에 새겨져 형식의 틀에 가두어 구속하는 것이나 영과 생명은 내면을 일깨우는 자유라는 것이다.
내면은 문명 이전 생명의 태초와 자연에 예속된 시간의에 잠재된 기억이고 율법은 인간중심 사회의 규범이다.
창조에서 생명의 태초와 자연은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타의와 관계없는 신의 시간이다.
 
율법은 이해타산의 관계를 중시하는 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믿음 즉 하나님의 영은 타의를 탐하지 말고 주어진 순리에 따르라는 것이다.
계시는 특별한 것이다.
점점 어려워지기는 하난 헬레니즘 문화에 저항하는 영적 영역의 가르침이다.
조문을 소홀히 하여 잘못된 것의 회개도 은혜인데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것은 온전한 영광의 세계이다.
뉘우침에 그치지 말고 새로운 역사를 위해 종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사함을 따르라는 것이다.
영의 믿음으로 모세의 애굽 탈출과 여호수아의 가나안국가건설 이후 잘못된 역사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 이다.
끝없는 설득에서 성직자 즉 하나님의 세계를 전파하는 자의 책임지는 모습이 느껴진다.
민족의 대의라고 하여도 물질과 경쟁의 관계에서 네 것은 네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며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넘어진 놈 도와 세워놓으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놈 때문에 넘어졌다고 하는 세상이다.
물질과 자본의 경쟁사회에서 죽든지 살든지 남의 일에 나 몰라라 간섭하지 않는 것이 현상의 진리이다.
사도의 길은 이것이 아니라 세상에 부정과 죄가 많으면 선교와 설교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부족한 자의 책임이
크다고 반성한다.
세상이 잘못되면 가르침의 부족한 전달을 자책한다.
죄의 책임에서 나의 한계에 있는 일반적 시각과 전체를 의식하는 선지자의 의식은 다르다.
예수께서 짊어진 죄의 사함에서 사도의 부분적 책임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 국한된 복과 문제가 아니다.
사도의 역할에서 신앙의 완성도 중요한 것이나 복음의 전파는 유대사회 밖의 이방과 교회 밖의 선교에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세상의 구원이다.
네 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누리의 축복이다.
세상을 밝게 하는 그리그도의 길에서 사도의 기여와 책임이다.
하나님의 가면으로 울타리 치고 타의를 구원하는 긍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환란을 막는다.
바울의 행색에서 글과 말의 평가가 있다.
글은 잘 쓰나 말에서 부족하다는 세속적 판단이다.
설교에서 의사전달의 동의적 효과이다.
 
인습의 설득에서 무시할 수 없는 언변의 중요성이다.
파벌의 선입견에서 아볼로와 대비된다.
전도가 어려운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세속적 판단을 설득하는 문제이다.
파벌과 세속의 시장(시류)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실증하는 수단의 어려움이다.
선지자의 길은 같으나 인간세상의 평가는 아와 어가 다르다.
그렇다고 신앙으로 개념 할 이유는 없다.
사도의 거취와 설교를 비교하는 비하적 시선의 그들에게 회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십자가의 길에서 제사장들이 예수께 하나님의 세계를 증명해 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르침을 행하였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면 내가 증명하겠다.” 하였다.
 
초월적 존재의 세계는 보고 듣고 만져보아도 인류의 시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이다.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면 세속적 감각과 논쟁으로 따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파벌의 비하는 인간적 심보의 곁가지이다.
바울도 언변에 대한 세속적 비판을 인정하고 있다.
불편한 심기가 집필되어 있다.
너희는 내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닌 다른 신앙의 가면(가짜세례)과 이방의 유혹에 쉬우면서 나만 가지고
성가시다고 하였다.
신앙의 세속적 평가에서 서운함이 있다.
11장에 있다.
 
성경이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사람사는 세상의 고뇌가 상당하다.
이것이 인간성 접근으로 복음서의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절대 나쁘지 않다.
인간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절대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다.
성경책 옆구리 끼고 다니며 우쭐하여 하나님의 가면을 쓰는 작자와 전혀 다르다.
복음의 수단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나 동질성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전서에서 하였다.
관계는 허물에서 솔직해야 한다.
가롯유다는 은 삼십 달란트에 배신하였고 베드로는 십자가의 길에서 세번 부인하였다.
누구에게나 허물은 있다.
 
수단에서 지나치게 양보하지 않는다면 고집보다 동의의 순리가 효과적이다.
지나치게 양보하면 제 풀에 무시한다고 꼭지돌아 따지고 아래로 보고 말을 무시한다.
속물의 속성으로 견주어 제 잘나 지배하여 예속하려 한다.
관계에서 양보하여 설득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하나님의 세계에 선택되면 모든 것이 하나이다.
바울의 답답함은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고 하고 있다.
고린도교회에서 성도들 사이에 파벌의 시비적 비하가 상당하게 있었던 것이다.
연보(헌금)의 시비도 보인다.
마게도냐 전도에서 비용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며 당시 같이했던 분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점점 시장되어 간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도 인간이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교인과 교회의 박해를 수행하러 가는 광야에서 예수의 계시로 시작한 복음의 고행은 수없이 매 맞고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로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전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계시와 복음의 고행과 신앙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주변으로 대적할 것이 못된다.
성경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바위에 세긴 고정된 관념의 율법으로 알았는데 하나님의 가르침을 매개로 하여
인간세상의 관계를 구원하는 것이다.
법률처럼 이러하면 저러하다는 획일적 강요가 생각같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지자의 신성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교회 안의 관계가 시장이라는 것은 관용과 용서에서 이해의 동의가 쉽지는 않다
붉은 속살의 진리에서 역사의 야사가 떠오른다,
교회도 하나님의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신비가 영적예속보다 세속적 관계를 우선하고 있다.
무지에서 신비로운 것이 자아와 내면의 순수에서 차라리 나았다.
이것저것 현상의 증거로 견주다 자아적 내면의 근원을 상실하는 지식의 오염이다.
영의 깊이는 사라지고 현상만 남는다.
감각적 껍데기의 장막으로 생명의 속살을 가리고 있다.
종교는 법이 아니라 선과 악의 분별에서 선에 의지하여 자아적 내면의 충족을 기도하는 도이고 도리이다.
 
반성이든 성찰이든 축복이든 세속을 떠나 생명으로 돌아가는 온전한 나만 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칠일 째 날의 근근함이라도 필요한 것이다.
참 종교는 좋은 것이다.
삶의 필연적 관계에서 지혜와 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진실을 선의 질서로 규범하려는 것이다.
침략과 방어의 대립과 충돌의 파괴적 역사를 대자연의 암시적 질서 자아의 공유를 일깨워 평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위정자들의 위선 죽음의 평화가 아니라 생명의 평화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겉모습의 늙음이 아니라 내면의 젊음이라고 하였다.
보이는 겉모습은 날이 갈수록 늙으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날을 세워 젊어진다.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이미 인류의 역사에 합류한 AI의 발현과 공유경제의 이론은 이익의 다툼을 상실하는 멀지 않은 미래이다.
선은 다툼이 사라지는 재림의 사간을 위한 가르침이다.
세 번째는 고린도교회 안정 후 간다.
 
2) 디도.
디모데와 같은 동역자로 서신을 전달하고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지중해 가운데 있는 제주도 보다 여섯배 큰 크레타 섬의 주교였다.
디모데의 세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이유와 유대인이 알고 있었다고 굳이 밝히고 있다.
베드로가 이방이며 군인 코넬료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바울은 디도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행사에 어떠한 거부가 있었다는 의심이 든다.
율법과 유대사회의 문제인지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한 것인지 예수시대에 풀어야 할 것이 있는 듯하다.
세례를 받지 않은 성직자가 세례를 행사 할 수 있는지 성인이 될 수 있는지는 궁금하다.
디도는 성작자이며 그레데 섬의 주교이다.
실루아노는 2차 전도에서 마가의 합류문제로 바나바와 다투고 각각의 길을 떠날 때 동행한 실바이다.
드루이는 목마로 알려진 트로이이다.
안디옥의 지명은 교회가 있는 곳과 그리스교를 박해하는 사람들 많은 아시아에서 가까운 두 곳이다.
아시아는 바울이 3년간 머무른 도시 에베소가 속한 지역이다.
인물에서 관계와 역할과 행적의 공부가 어렵다.
2025.6.10.일.
 
4 갈라디아서
1) 본문.
복음을 전하고 지키는 것이 힘들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유대의 율법으로 희석하는 문제에 대한 설득이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대적한 확실한 율법과 영의 분별이다.
다메섹으로 가는 광야의 계시는 인간세상의 인연과 학습이 아니라 죽음으로 사함을 이루고 부활하여 생명으로 돌아간
예수의 유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세상 즉 영의 영접이다.
나는 사람에서 태어나 유대교에 심취하여 영을 따르는 자를 박해했으나 광야에서 예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 율법의
형식에서 떠나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것이다.
영은 율법과 조문 등 인간세상의 관계가 아니라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의 믿음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사회의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의 의심이 있다.
기적과 긍휼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복음의 전파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해야 구원받고 구원할 수 있다.
이방신과 우상숭배 등 가르침은 종교적 관점이고 율법의 해석에서 선의 지혜와 지식으로 악의 분별이 이루어진다.
인류는 영을 위한 도와 생산에서 어찌해야 하는지 갈증이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예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 홀로 기도하고 참선하여 내면의 자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세속의
관계에서 주어진 것으로 생산하여 선을 행하는 것인지 의심의 설교가 필요하다.
포도밭과 추수와 건축 등 가르침의 예시와 바울의 행적에서 둘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선지자와 목회자의 길은 세속에 선을 전파하는 것이다.
선은 율법 이전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서 덕과 자아를 우선하는 것이므로 강제된 규범과 다르다.
조문의 불안정한 또는 기득권적 요소의 지배와 차별은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다.
십자가의 길과 스테파노와 바울 등 선지자의 박해는 인간의 율법에 의해 자행되었다.
한편으로 율법의 정의를 지키는 것은 덕과 자아에 이르는 문이라고 하였다.
인간으로 지켜야 하는 정의와 의로움이 관계의 이해타산을 넘어 사랑과 용서로 덕과 의에 이른다.
율법의 의로운 지식으로 악의 인지하여 자아적 벌이 악을 감하고 선의 기쁨을 알고 선을 행한다.
공유할 수 있는 선과 악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율법은 선과 악의 분별을 위한 겨자씨 안의 겨자씨이다.
 
하나님의 세계 의와 영은 인간세상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인륜과 생명으로 무한의 초월적 미지이다.
말씀에서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나는 이방의 무 할례자에게 라는 말씀이 있다.
할례의 종교적 의미이다.
유대와 이슬람과 일부 아프리카에서 신체의 일부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의식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할례자는 유대사회이며 바울의 무 할례자는 이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례와 다르다는 생각이다.
세례는 온 누리의 것이고 할례는 특별한 형식의 의식이다.
그리스도교의 성령 안에서 형식에 의지하는 할례의 의식은 성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세계는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므로 형상과 형식 등 인간의 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
 
게바(베도로)에게 일러다는 대목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소홀히 하여 이방의 세속을 가까이하다 할례자(유대인)가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한 것을 책망하였다는 것이다.
바나바와 유대인들의 외식도 있다.
세속의 유혹은 어디에나 있다.
외식은 하나님 밖의 세속이다.
겉모습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모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유대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하였는데 다시 돌아가면 범법자로 그리스도의 욕됨이 된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길은 진로를 수정할 수 없는 기차 길이라는 것이다.
외식(배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파에서 유대의 율법과 이방의 세속적 대적이 상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앉으나 서나 한 치의 방관을 허용하지 않는 당신 생각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모든 인류는 같다고 하면서 하갈의 이스마엘과 사라의 이삭은 다르다고 하였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계보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로 태어났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구원하였고 아브라함은 박대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의 박대를 걱정하자 하늘의 별을 가르기며 그만큼 자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유목민의 상속에서 장자에게 멀리 떨어진 땅을 주어 독립하게 하였으며 둘째가 가업을 승계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이삭과 야곱은 둘째이다.
에둠은 큰아버지 이스마엘의 도움과 그의 딸 마할랏과 결혼한 이삭의 장남 에서가 세운나라이다.
 
동생의 자식 조카가 사위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열두형제는 외사촌자매 레아와 라헬과 그들의 시종 빌하와 실바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친가와 외가로 대적할 수 있는 이스마엘은 유전적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요나를 통하여 이방 앗 수르의 수도 니네베는 회개하였다.
여기서 적자의 관계는 마무리 되었다.
21세기 글로벌사회는 국가의 경계를 넘는 공유의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
가족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씨족으로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국가에서 글로벌 사회이다.
미래는 태초의 동질성으로 돌아가는 유전적 소통의 시대이다.
지금까지 공부에서 유대사회와 율법을 넘은 그리스도교의 이방전파는 씨(민족)로 갈등하고 미워하지 않았다.
 
유대의 율법은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다.
재림의 시간에 인류는 태초가 같고 너희는 씨가 같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실 것이다.
남성 우월적 시대의 씨와 밭에서 집안의 족보문제로 지구가 시끄럽다.
 
2) 시내산.
호렙산 이라고 하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삼년의 기근을 예언하고 광야로 도망친 후 돌아와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와 싸워 이긴 후 성서의 영광과
달리 잘되지 못하였다.
왕비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등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시돈왕국의 공주였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의 박해는 여전하여고 또 다시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피해 도망친 곳이 시내산이다.
시나이 반도 홍해 쪽 끝에 있는 메마른 산이라고 한다.
시내산은 유대교와 관련된 사건의 중요성으로 성지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형식과 우상을 배척하는 하나님께서 
정확한 장소를 감추었다는 말씀이 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해 서쪽 브엘세바에 거주하였는데 복음서는 시내산을 언급하고 있다.
시나이 반도 홍해 쪽 끝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부분의 자료가 없다.
좋은 표현으로 분가한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사경을 헤매다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를 만나 구원을 받는다.
이때 하갈은 기적의 구원에 엘 로이(돌보는 신)이라고 하나님을 호칭하였다.
자료에는 인간이 최초로 하나님의 명암을 창조한 것이라고 한다.
큰 아버지 이스마엘이 자신의 딸과 혼인으로 이삭의 큰 아들 에서를 받아 준다.
활쏘기와 광야에서 둘의 야성적 성격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에서는 사해 남쪽지역에 에돔을 세운다.
가계도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온 누리와 내안에 계신다.
2025.6.12.일.

5 에베소서.
1) 본문 (무저갱).
세상만사가 생각대로 되면 신보다 위다.

신의 노력에도 도적놈, 사기꾼, 죽이는 놈, 거짓말 하는 놈, 나의 집 기웃거리는 놈,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놈, 제
잘나 아무데나 쏘는 놈, 맞어야 말 듣는 놈, 어제와 오늘이 다른 놈, 서픈으로 갑오 잡는 놈, 심심하여 쓸데없이
주뎅이 불나는 놈, 속창시 없이 덩달아 춤추는 놈, 밥상 차리면 숟가락 올리는 놈, 남의 밭 서리하는 놈,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는 놈, 호박에 말뚝 박는 놈,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놓는 놈, 제비다리 부러트리는 놈, 주걱으로 시동생
빰 갈기는 인간, 속창시 없이 말뚝 자랑하는 놈, 국민 앞에서 낮바닥 분칠하는 놈, 밑이 지저분하여 구린 놈, 차별
하는 놈, 실력 없이 위아래 따지는 놈, 경우 없이 위아래 없는 놈, 말꼬리 잡는 놈, 양보 할 줄 모르는 놈, 권세에
줄서는 놈, 남 탓만 하는 놈, 밑으로 찍는 놈, 돈 밖에 모르는 놈, 학벌 간판 자랑하는 놈, 갈라치는 놈, 매사 산수
하는 놈, 총과 권세로 국민을 위협하는 놈, 탈세하는 놈, 어린자식 학대하는 놈, 부모와 자식 나 몰라라 하는 놈,
폭력 쓰는 놈, 돈으로 표 사는 놈, 옴박지 불성실한 인간, 도박하고 약하는 놈, 나라 팔아먹은 놈, 줄 세워 학살한
인간, 세치 혀로 모함하는 놈, 선을 박해하는 놈 등 하여간 율법이 필요하다.
거시기가 두개라는 같잖은 가오리 잡아다 주리를 돌려야 제 팔자 안다.
그리스도께서 영의 가르침이라고 하니 개나 소나 영 인줄 안다.
세상만사 바람처럼 가벼워 들어 앉아 창호지로 가렸더니 문풍지가 문제이다.
솔솔 시장바람 들어온다.
핏 국 먹고 뻘건 주뎅이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다.
꽤나 시간이 지루한 것이다.
이것저것 들쑤셔 먼지 나야 감각이 살아나는 인간들 이다.
이도저도 없으면 바늘로 마빡 찌를 죄인들이다.
좀이 쑤셔 잡것의 기대로 채우다 포맷 될 중생들이다.
귀신한테 잡혀가 물골이 나야 "찍" 하고 찌그러질 고물들 이다.
지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 탓은 아무데나 갈기는 노상방뇨 수준이다.
영의 실증이 부족하니 너도 나도 대장이다.
사람사는 것이 껍데기뿐이다.
의와 덕은 촌놈의 행색이다.
순한 놈 깔보고 이용해 먹으려는 승냥이들 천지다.
어설픈 서픈으로 정신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속창시 가관인 작긋들 끝없는 구덩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지독한 지옥체험이 필요하다.
문풍지 바람에 사람 꼴이 배고픈 사자다.
의와 덕의 천군만마가 지축을 흔든다.
저들은 모르는 것이다.
때 되어 영의 세계에 이를 것이다.
문풍지 바람에 강물에 담긴 달 조각날까 눈 가리고 귀 막고 의와 덕과 인이 가엽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대로 잘되어가고 있다.
대체로 격려의 말씀이다.
 
2) 두기고.
소아시아의 동역자이며 마게도냐에서 예루살렘까지 이면 3차전도 여행의 동행이다.
두기고를 검색하면 드로피모 라는 인물이 나온다.
둘 다 소아시아 사람으로 바울의 이방전도에 동행한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율법으로 이방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여행에서 바울이 드로피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이방인과 성전이 들어가 더럽혔다고 잡아 죽이려 하였다.
천부장의 개입으로 죽기 전에 살아난다.
유대율법의 폐쇄성이다.
이일로 로마시민의 권리로 황제에 상소하여 난파선의 기적으로 로마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로마 투옥이다.
두기고 역시 바울의 서신을 각지의 교회에 전달한다.
지중해 가운데 있는 그레데 섬의 디도를 알 것이다.
바울이 디도를 잠시 부를 때 두기고에게 그레데 교회의 설교를 대신하게 하였다.
두기고와 드로피모는 로마에 같이 있었다.
바울의 성실한 동역자 이었다.
2025.6.14일.

 
6 빌립보서.
1) 본문.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고 무례하지 않으며 이익을 탐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악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에 저항하고 선의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언제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 사랑이 으뜸이다.
오른쪽 뼘을 맞으면 왼쪽 뼘을 내어주고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였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니 그의 종이 찾아오면 음식을 나누고 잠자리를 내어주라 하였다.
갈라디아와 빌립보서에서 복음의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방과 세속과 율법에 대적하는 문제에서 교회중심의 격려와 칭송이 많다,
바울은 로마황제 네로의 박해로 참수형을 받는다.
로마시민 이었기 때문에 고통의 순간을 짧게 하였다.
 
같은 시기에 베드로는 스스로 찾아가 원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선과 사랑의 고통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콘스탄티누스(280~337년) 대제가 325년 니케아에서 개최한 재1회 공회이다.
당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파 주장이 퍼져 그리스도교의 혼란이 있었다.
로마의 황제에 의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가 채택되었다.
로마의 기독교 수용에서 문화의 대세는 절대권력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의 학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클레멘스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의 영향이 컷 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지배에 있었던 알제리 출신의 철학과 신학자이다.
 
플라톤의 실존주의 이데아를 수용하였다.
클레멘스의 자료는 베드로의 제자에서 역대교황으로 분별하기 어렵다.
1세기 로마의 집정관으로 기독교인 이었다는 성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로 추측된다.
이분도 처형된다.
문화적 절대에서 새로운 시간의 이해와 학습의 인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다.
희생과 파괴가 전제되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결과론에서 예수의 탄생과 가르침은 선택으로 인류의 역사에 도움이 되었다.
현세를 지배하는 헬레니즘 문화도 알렉산더의 전쟁으로 전파되었다.
2회 공회는 787년 동로마 제국 황후 이레네(752~803년) 2세에 의해 개최되었다.
 
성상문제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이레네 황후의 이력이 만만하지 않다.
자신의 아들 왕을 폐위하고 눈을 도려내 유배시켰다.
이런 분이 기독교의 전파를 도왔다.
정치판의 현실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대륙의 기독교는 781년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 전해진 경교이다.
대진은 로마를 칭하고 경교는 로마의 종교 기독교의 교리이다.
우리나라는 17세기 초기 들어와 실학자들에 의해 서양의 학문으로 취급되었다.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를 중심으로 1784년 천주교회를 설립한다,
 
기록을 유추하면 대륙의 천주교는 박해가 없었다.
이후 성리학의 신분제도와 다른 평등의 권리에서 천주교의 박해는 알려진 것이 많다.
개신교는 이후 2백여 년 후의 일이다.
파괴와 희생의 교훈에서 문화의 관성적 절대를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의 학습으로 다음 창을 예지하려는 것이 통신을
공유하는 지식과 데이터의 시대이다.
시간은 새로운 것의 필연을 말하는 것이다.
세대의 격차가 좁아지는 것은 유전적 분별에서 학습에 의한 지식진화의 시간이 단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이해에서 인류의 본성 선과 사랑의 원초는 평등에서 목숨을 이겨내는 저항의 진리가 있다.
이러한 적극성이 수많은 희생과 십자군의 파괴적 전쟁을 통한 이천년의 시간으로 현세의 그리스도교이다.
 
종교의 태생과 목적에서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는 학문적 바탕을 전제하는 인류의 미래와 소통의 부제에서 관성적
지배에 있는 암흑의 괴리적 숭배와 다르다.
몰록과 레판의 우상숭배는 초자연의 예속이 지나쳐 인간이 결여되어있다.
시간과 학습에서 초월적 존재의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2)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은 여성으로 빌립보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지만 갈등이 있었다.
바울이 상당히 염려한 듯하다.
상호존중과 협력을 부탁하였다,
 
3) 데살로니가.
에게해 북서쪽 도시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이주정책으로 다민족이 거주하였다.
로마는 다민족국가이다.
2차와 3차전도 여행에서 방문한다.
3차 여행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을 데살로니가의 성도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동행한다.
현재는 테살로니키로 불리는 인구 이백만의 그리스 제2의 도시이다.
 
4) 에바브로디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빌립보 교회의 걱정이 많았다.
물품과 조력자를 보내는데 에바브로디도가 선정되었다.
빌립보에서 로마는 2천km의 거리이다.
당시의 환경으로 물품의 이동은 굉장한 위험이 따르는 역할이었다.
도중에 죽을병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바울을 만났고 빌립보 교회의 믿음을 전달한다.
바울은 전달자의 건강을 생각하여 곧바로 돌려보낸다.
격려와 칭송이 있을 법하다.
2015.6.15.일.
 

7 골로새서.
1) 본문.
교회가 사도가 아닌 성도에 의해 개척되고 있다.
겨자씨의 생산이다.
기적과 긍휼과 십자가의 희생에서 자생적 전파의 시간에 이르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년)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플라톤의 실존주의를 수용하였다.
감각적 세계 이외의 또 다른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넓게는 영적세계이며 가깝게는 미래에 발현될 사물적 미지이다.
창조에서 현세의 만물은 준비된 것이 발현된 것이고 미래에 발현될 미지의 사물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인류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시간과 학습의 충족으로 발현된다.
지식의 역사에서 대표적 발현이 지동설과 AI이다.
인간의 시각에서 창조는 삶의 이기를 위한 것이므로 선이다.
영적세계는 생명이다.
생명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이 없다면 만물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지식에 의한 종교는 인류가 선택한 인간을 위한 것이다.
선은 생명 즉 인륜의 공유이다.
종교는 모두에게 평등한 생명으로 선을 일깨워 만물의 공유에 이르려는 것이다.
 
생명과 만물은 선이나 인간의 지식에 의해 악이 발현된다.
사과는 뱀의 꼬임 즉 지식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선은 전체이나 악은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에 예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악은 선의 지배에 있다는 것이다.
참 종교의 가르침은 선을 일깨워 악의 차별에서 생명과 만물의 평등을 이루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에서 복됨은 정신과 물질의 균형이다.
예수의 기적과 긍휼은 육신의 생명을 구하고 나누어 영적세계에 이르는 가르침이다.
도와 생산 모두에 있다.
 
알렉산드리아 클레멘스의 사상적 유연성이 돋보인다.
불교 쪽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의 세속적 질서 즉 조직에 반대하였다,
공감이 간다.
그노시스와 영지주의와 로고스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노시스는 물질세계 이면에 초월적 미지가 있다는 영적지식이나 깨달음이다.
플라톤의 실존주의가 있다.
영지주의와 연관성이 있다,
지식에 의한 자생적 종교관이다.
 
누구라도 특별한 지식과 노력으로 영적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수 있다는 가르침과 다를다.
이해할 수 있다.
종교시설에 나가는 분들보다 훨씬 선한 분들 많다.
정도에서 동양사상의 신선이 될 것이다.
정도라 함은 이성과 자유에서 내것으로 세속의 다툼이 없는 스스로의 성취이다.
타의가 없는 내안에서 자유이다.
네 안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너의 자유이다.
영지주의는 그노시스에서 세속적으로 발전한 자생적 종교단체나 종파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영지주의는 똑똑하다는 분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밖에서 자의적으로 가르침을 해석하는 것이다.
종교의 분별에서 참 종교를 요구하는 것은 영지주의 즉 스스로 설정한 절대사고에 갇히는 경계적 다툼의 염려이다.
종교가 지향하는 선의 세계는 초월적 존재 창조에 이르는 것이다.
창조는 하나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에게 돈으로 성령을 사려는 사이비 마술사가 있었다.
이분이 영지주의의 시조라고 한다,
문서와 구전의 가르침에서 소통부제의 전체적 미완이라는 설정도 가능할 것 같다.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하게 있었으나 그리스도교의 정의적 대세에 의해 소멸되었다.
현세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모방하여 참 종교를 훼손하는 영지주의의 관성적 이단이 있다.
 
기왕이면 족보 있는 참 종교의 가르침이 좋다.
로고스는 이성과 자유이며 철학에서 신의 영역이고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이다.
클레멘스는 이 방면의 지식이 풍부하였다.
제1회 공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삼위일체에 기여한 분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일수 있다.
종교개혁 전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는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다,
 
2)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로마시대 알제리 출신의 수사학자이다.
젊어 열정과 사랑을 찾아 자유분방한 방탕에서 노년에 그리스도 교인으로 성취를 이루었다.
실존주의자이다.
악은 태초와 생명이 아니라 지식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글 솜씨가 뛰어났다.
백여 권의 저서 중에 고백론과 삼위일체론이 있다고 한다.
마니교에 있었던 과거로 공격받은 매사에 열정적 이었던 히포의 주교이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파와 도나투스파의 분쟁이 치열했던 것으로 보아 교회의 불안정성이 있었다.
마니교는 유대교와 영지주의와 그리스도교에 불교까지 석어놓은 짬봉 종교이다.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에서 대채로 존경받는 성인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이다.
 
3) 에바브라.
바울의 설교를 듣고 고향 골로새로 돌아가 교회를 개척한 성도라고 한다.
사도가 아닌 성도로 교회를 세운 분이 등장한다.
주춧돌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4) 아리스다고.
바울의 행적에서 자주 등장한다.
바울의 동역자로 2차전도 여행 마케도니아 데살로니가에서 제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차 여행에서 예루살렘과 로마의 감옥에 마가와 함께 있었다.
2차전도 여행에서 바나바와 다투고 각자의 길을 떠날 때 마가의 문제가 있었다.
3차여행과 로마의 1차 투옥에 같이 있었다는 말씀이다.
바울의 이방전도에서 곁에는 성실한 동역자가 많았다.
 
5) 유스도라 하는 예수.
유수도는 별명이고 예수를 이름으로 하는 바울의 동역자이다.
 
6) 눔바.
지명 라오디게아는 골로새교회와 가까웠다.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마가의 집처럼 꽤나 큰 건물의 가정집이었다.
눔바는 집을 내어준 여주인으로 보인다.
 
7) 데미우르고스.
그노시스에서 자의적으로 설정되는 초월적 존재를 말한다.
 
8 데살로니가 전후서.
1) 본문.
전도의 결실을 말씀하고 있다.
복음이 이루어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인 결실에 그들이 놀라워하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박해자인지 이방인지 궁금하나 상관은 없다.
전도의 안정기에서 지역에 보내는 서신의 내용은 비슷하다.
예수와 선지자를 죽이고 우리를 박해하여 있지 못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역하고 그리스도인을 대적하였다.
이방의 전도와 구원을 방해하여 죄를 쌓아 노여움이 유대에 이르렀다는 대목이 있다.
성전의 화려함을 지적 할 때 예수께서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율법의 타락으로 진노한 하나님의 파괴적 형벌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사후 70년경 1차 유대와 로마의 전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과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이어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과 함락이다.
로마의 거대한 제국은 점령지를 몇 단계로 나누어 관리하는데 각각의 민족을 존중하여 왕을 세워하여 통치하거나
직접 총독을 보내 직할지로 지배하였다,
후자의 경우가 점령지의 사정이 안 좋다고 볼 수 있다.
헤롯왕 대에는 유대의 왕이 통치하였으나 죽자 숙주로 직할지가 되었다가 아그리파1세의 친 로마정책으로 점령지의
왕정이 회복되었다.
헤롯대왕의 손자 유대왕 아그리파1세는 44년 병사한다.
아그리파 2세 나이가 어려 속주로 또다시 로마의 직할지가 된다.
 
로마에서 보낸 총독 즉 행정관이 직접 유대사회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당시 행정관의 유대사회 통치에 문제가 많았다.
아그리파 2세는 48년 칼키스와 53년 바타네아 봉분왕을 거쳐 55년 네로에게 갈릴리지역을 할당받아 봉분왕이 된다.
바울의 3차 예루살렘여행과 가이사레아 심리에서 “항소하지 않았으면 여기에서 풀려 날 뻔 했다.” 고 말한 왕이다
유대사회의 유일신앙은 헬레니즘과 점령지 각각의 민족문화를 수용하는 문제에서 로마와 끊임없는 마찰이 있었다.
로마는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고 있었다.
로마는 지배자로 성전의 제사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을 직접 임명하였다.
이방의 로마가 성전의 관리자를 지명하자 유대사회는 세리의 불만에 더하여 야훼신앙 훼손으로 격양되었다.
39년경 칼리굴라 로마황제의 신격화에 의해 자신의 성상을 성전에 세우는 사건이 이었다.
 
유일신앙에서 율법의 폐쇄성이 민족적 불만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가 부과하는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의 착복으로 불만이 많았다.
예수께서 문제에 대해 마태가 질문하자 로마가 요구하는 대로만 하라고 하였다.
로마의 요구에서 세리의 마음대로 추가징수가 많았다.
복음서는 세리를 가장 저질적 부류로 평가하고 있다.
마태의 집안이 세리였다.
세리의 불만에 로마가 임명한 제사장들의 성전운영비리도 성상으로 쌓여있는 민심에 더하여 저항의 일부가 되었다.
사회의 불만과 성전의 성상을 우상화라고 판단한 유대사회는 무장반란을 계획한다.
사회의 극단적 불만은 저항을 고조시켜 강경파들이 대세를 주도하는 상황이 된다.
 
단검으로 무장하고 로마와 야합하는 지도층 인사를 살해한다.
단검의 암살자를 사카리라고 하였다.
저항의 징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66년 가이사레아의 회당 앞에서 그리스인들이 제사를 지냈고 이일로 유대인과 충돌이 있었다.
유대사회에 가혹했던 행정관 플로루스는 그리스인 편을 든다.
로마 행정관들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해묵은 종교갈등에서 유일신앙을 주장하며 이방신을 배척하는 유대사회를 좋지
않게 생각하였다.
행정관의 처신에 고무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죽은 새를 입구의 화분에 던져다.
고의적 도발에 분노한 유대사회는 행정관에게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항의하러온 유대인을 옥에 가두었다.
 
지배지의 안타까움이다.
세리들의 착복으로 민생에 시달리던 당시 더하여 네로 황제는 세금증액을 요구한다.
행정관은 유대사회의 중심이고 신성시 하는 성전에서 금 17달란트를 몰수하였다.
거칠게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진압 하는 과정에서 채찍으로 때리고 로마법으로 금지된 십자가형을 자행하여 수천
명이 희생된다.
유대는 격양되었다.
로마에 유화적인 사두개파는 행정관에게 책임을 돌리며 대화를 주장하였고 강경파는 전쟁불사를 주장하였다.
유대사회에서 기름을 부었다는 말씀은 좋은 인연을 뜻하고 있다.
66년 7월 예루살렘에 폭동이 일어났다.
 
아그리파 2세의 요란한 설득으로 잠잠해지나 했으나 다른 행정관이 올 때까지 학살자 플로루스의 명을 따르라고 하자
격분하여 돌을 던져 유대왕을 추방한다.
아그리파 2세는 무력진압을 결정한다.
과정에서 강경파는 마사다 요새를 습격하여 수비하던 로마군을 학살한다.
전쟁의 시작이다.
로마의 동화정책에 대립하는 유일신앙의 저항이다.
봉기 후 로마가 임명한 제사장들은 처형되고 성전세의 미납문서를 불태웠다.
아그리파 2세는 2천의 기병대로 무력진압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예루살렘이 저항군에 점령되었다.
 
저항은 전 유대사회로 확대되었고 점령지 민족사이의 갈등으로 그리스인과 유대사회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저항군에 패한 로마수비군은 도시를 통과하는 조건으로 항복한다.
지휘관 엘리아살은 유대교로 개종한 지휘관 메틸리우스 한사람을 제외한 로마군 모두를 학살한다.
이후 예루살렘을 장악한 자항군은 무슨 이유인지 대제사장 장남 엘르아살과 열심당 메나햄의 갈등으로 분열된다,
난세의 당파적 분열이다.
로마의 보복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내전수준이었다고 한다.
메나햄은 살해된다.
1만8천의 병력으로 아그리파 2세와 협력하여 1차 진압에 나선 시리아 총독은 카이사레아와 야파에서 보복으로 수천
명을 죽인다.
 
예루살렘성의 견고한 성곽은 만만하지 않았다.
결국 예루살렘 진압에 실패하고 퇴각하는 길에 유대의 반격으로 수천 명의 병력을 상실한다.
점입가경으로 빠져드는 죽음의 피바다이다.
지식인들이 로마의 보복이 두려워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민족의 전쟁을 방관하여 요르단 지역 펠라로 피했다.
전쟁 중에도 유대사회의 모함과 분열은 극심하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온건파는 누구라도 로마가 아닌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동족에게 처형된 유대인이 1만여 명이라고 한다.
포위된 예루살렘 주변에 처형 때 사용된 십자가가 줄서 있었다는 믿기지 않는 자료가 있다.
 
오죽하면 진압군 사령관이 저들끼리 죽이게 놔두라고 하였다.
극단적 저항의 무모한 작전으로 식량을 불태워 주민과 군인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더구나 공성전 인데 식량을 불태운다는 것은 자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쟁의 상식이 아니다.
실제로 패한 유대의 진영에서 로마의 항복 권유에도 자결을 택하였다.
진압작전도 성을 포위하고 괴롭히며 식량 등 내부의 자중지란을 기다리는 지연전술이었다,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벽은 무너지고 도시와 성전은 약탈당하고 불타고 철저히 파괴된다.
저항군은 주변의 요새로 피하여 저항하지만 예루살렘 서남쪽 30km에 있는 마시다 요새를 제외하고 모두 진압된다.
엘르아살이 지휘한 1천여 명의 저항군은 로마의 방관에서 저항하다 73년 토벌전에서 모두 자결한다.
 
이로써 1차 유대와 로마의 전쟁이 유대사회가 멸망하는 참혹한 결과로 끝났다.
사두개파와 유대사회의 결정기구 산헤드린공회도 해산되었다.
하나님의 보호에 있는 유대는 이방 로마에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은 선지자를 죽이고 십자가의 길에서 배반한 참혹하고 비참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유대사회는 붕괴되고 뿔뿔이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졌다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1차 유대와 로마 전쟁에서 포로 9만7천명과 사망자 110만 명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270만 명이 있었다.
과장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 즉 예루살렘 지역의 인구는 1백만 정도로 35만 정도의 희생을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맹수의 우리에 던져지고 검투사로 죽었다.
17세 이상의 남자는 노예로 팔렸다.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의 전리품이 되었다.
전쟁의 전서는 유대의 군인으로 패하여 제비뽑기의 자결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 중 한사람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차례로 죽이는 과정에서 최후에 두 사람이 남았고 합의하여 투항하였다고 한다.
이후 로마 진압군에 협조한 정황이 있다.
성전을 보호하고 전쟁의 참상을 줄이려 하였다는 진압군 사령관 티투스의 인간성에 애쓰는 부분이 많다.
참상의 결과는 비극적이다.

 

유대와 로마의 전쟁은 이후에도 두 번 더 있다.
절대가 지배하는 동행의 괴리에서 피지배와 지배의 안타까움은 인류의 비극이다.
가르침을 행하여 죄짓지 않으면 재림의 심판은 없다고 하였다.
전쟁의 원인과 멸망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거론되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역한 형벌의 후회이다.
전쟁 후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계속되었다.
로마는 이방의 유대사회와 신앙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경으로 돌아와 지역으로 발송하는 서신의 내용은 안정되는 전도의 저변으로 격려와 칭송이다.
이제는 전도에서 배교를 경고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2) 티투스(39~81년).
아버지 베시파스아누스의 권좌를 이어받은 로마의 열 번째 황제이다.
유대의 원정에서 베시파스아누스의 황제를 예언하였다는 요세푸스의 권세와 기록이 이해된다.
전후 점령지 민족의 갈등에서 유대박해에 반대하였다.
1차 유대와 로마전쟁에 참전한 두 군인이 황제가 되었다.
로마에 있는 개선문은 티투스가 유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비이다.
네로가 신임이 부결되자 자결하였고 이후 1년에 로마황제가 네 번 바뀐다.
4황제의 무능한 마지막 무텔리우스 황제시대 차기의 물망에 있었던 시리아 총독 무카아누스와 아버지를 지지한다.
유대왕가 혈통의 베레니카와 사랑에 빠졌다.
황제가 된 후 클레오파트라와 비교하는 백성의 반대로 결혼을 포기하였다.
즉위한 8월 베수비오화산 폭발로 봄베이 등 다수의 도시가 사라진다.
80년 로마가 대화제로 사흘간 불에 탄다.
즉위 후 2년 만에 열병으로 죽었다.
성서에서 거론되는 기록이다.
 
3) 마시다 요새.
광야에 450m 높이의 진입로가 뱀처럼 구부러진 한곳 뿐인 천해의 요세로 헤롯왕이 건설하였다.
고지의 특성으로 전투에 유리하였으며 물이 스며들지 않는 지질이어서 식수와 용수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곡물과 포도주, 기름, 과일 등 기후의 특성으로 보관이 용이하여 헤롯왕이 쌓아놓은 식량을 탈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평평한 정상을 이용하여 곡물을 생산하고 비둘기를 길러 배설물을 연료로 쓰고 고기의 허기를 채웠다.
당시 난공불낙의 요새이다.
2년여를 버티다 로마의 최후 공격으로 버틸 여력을 상실하자 유대의 율법에 반하는 처자를 죽이고 자결을 선택한다.
공성전에서 시간의 공격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불길에 로마군이 올라가 보니 수백구의 시체가 있었고 찾아보니 숨어있던 다섯의 어린이와 두 명의 노인이 있었다.
10명이 선택되어 수백 명을 죽이고 최후에 모두 자결한다.
살아남은 분들에 의해 마시다의 저항이 전해졌다.
곡물창고는 태웠다는 설과 태우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태우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죽을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노예가 될 수 없어 자살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2천년 후 발굴에서 대추야자 씨를 발견하여 싹을 틔웠다고 한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통곡의 벽에서 입소하고 마시다 요새에서 퇴소하였다.
 
4) 성전세.
로마에 세금내고 왕정의 권세는 품위를 유지해야 하고 성전세는 내야하고 힘든 시대이다.
관리들 하는 짓이 수탈이라서 민생이 우선하여 안타까운 것이다.
20세 이상 남자에게 부과 되었다.
매년 반 세겔이다.
한 세겔은 노동자 4일 품삯이다.
예수께서 성전 운영에 대해 말씀이 있었다.
유추하면 헌금으로 긍휼에 부족했다는 것이다.
유대사회에서 율법의 송사가 이루어진 성전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사두개파와 산헤드린공회가 성전운영과 유대사회의 정신적 주체였다.
성전의 의미는 매우 컷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2세 왕과 불륜왕비의 횡포는 성전이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유대사회의 주체에 대해 왕정인지 성전인지 의심이 있다.
제사장인 레위파와 사제는 면제되었다.
레위파는 제사장의 지위를 부여받아 성전을 관리하고 땅은 소유하지 않았다.
12지파가 부담하는 매년 생산량의 10% 공물로 성전의 관리와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십일조의 시초라고 한다.
2025.6.17.일.
 

9 디모데 전후서.

1) 본문.

기적이 다반사 이고 하나님과 아브람함의 역사로 율법을 지탱하는 당시에 신화와 족보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근원에서 내 것은 괜찮고 이방의 문제이다.

신화와 족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유일한 역사로 변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내 것의 고집은 고결하고 깨끗한 것이다.

이방신의 변론은 죄이다.

세속에 대비하면 율법은 죄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선한 자는 자신의 죄를 알 때부터 형벌을 받는다.

죄의 지식이 있어야 벌의 교훈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와 선한 율법은 죄와 벌의 지식이라는 것이다.

무식하여 죄짓고 유식하여 죄를 염려한다.

 

현세는 아는 놈이 더한다.

남자들의 다툼이 없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여성들 말씀이 현대와 다르다.

복음서에 그리스도교의 여인은 정절을 지키고 값진 옷과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로 치장하지 말고 소박함으로

단정해야 한다.

일체의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한다.

남자를 먼저 만들고 갈비대로 여자를 만들었다.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면 안 되고 입 다물고 따르라 하였다.

창세기에 뱀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죄에 빠졌다.

 

칠거지악을 지켜 현모양처가 되라는 것이다.

요사이 이런 말 하면 돌팔매 당한다.

유대교에 여성랍비는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스도교의 여성목회자는 더러 있다.

보수적 개신교에는 없다고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야훼신앙의 여성차별이 있다.

이슬람의 근원도 아브라함 계보의 야훼신앙이다.

남자의 세계에서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역사가 된 것이 이상하다.

중동의 현세는 아브라함의 역사가 아니라 하갈과 사라의 역사이다.

 

씨는 벼슬세우는 물건뿐이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을 염려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 모두가 나쁜 영과 귀신이다.

전도와 교회의 발전에서 나중에 있을 나쁜 영과 귀신 말씀은 배교의 경고이다.

영적세계에 나쁜 것이 있을까 생각된다.

귀신으로 표현되는 환상 또는 자아적 망상은 온전한 영적세계로 볼 수 없다.

초월적 존재의 이해에서 영적이다 하는 것은 인류의 현세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 밖에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신분이 없다.

천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세상의 지식으로 포장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과 하나님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보자라 하였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의 영적 만남은 중보자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이해이다.

참 과부는 육십이 넘어야 하고 한 남편의 아내 이었어야 하며 수절과 고결을 강조하고 있다.

젊은 과부는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하였다.

홀아비 행색의 말씀은 없다.

교회가 성으로 혼란해 지는 것을 굉장히 염려하고 있다.

과부는 교회 밖에서 긍휼하라고 까지 하고 있다.

 

당시 유대지역의 성문화가 어떠하였는지 로마시대를 생각하면 꽤나 궁금하다.

죄의 벌은 변론을 충분하게 듣고 판단하라 하였다.

죄의 판단은 거듭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흠흠이다.

전도의 동역에서 병사와 지휘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회관의 거취는 병사의 능력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부활의 시간은 잊히고 있으나 하나님의 터는 마련되었다.

복음에서 그릇은 쓰기에 달려 있다.

부정적 대적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밭의 관리와 지조가 허술하여 남의 집 기웃거리는 씨 도적놈들이 있었다.

 

도둑처럼 복음을 모방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훼손하는 영지주의이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면류관이 준비되었다.

마가를 데리고 겨울이 되기 전에 겉옷을 가지고 속히 오라 지금은 누가뿐이다.

순교의 시간에 이르고 있다.

후서는 로마의 감옥에서 작성하였다.

 

2)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본서에서 이방의 변론을 경계하였다.

후메네오는 기독교 내에서 대적하는 영지주의자 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세공업자이었다.

이들은 부활은 지나갔다고 교사하며 바울의 죽은 자가 살아난 예수의 영적생명을 부정하였다.

 

3) 부겔로와 허모게네.

소아시아 사람들로 바울을 도왔으나 복음의 희생이 두려워 배신하였다.

심한 배신감이 표현되고 있다.

 

4) 오네시브로.

부겔로와 허무게네와 대비되는 에베소의 성도이다.

바울이 로마의 체제에 저항하는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고 투옥되었을 때 에베소에서 찾아가 위로하였다.

재판이 진행되었을 때 바울 곁에 있는 동역자들이 떠났다.

누가만 남았다.” 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가 위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열정이 대단하였다.

바울과 친분 때문이었는지 모르나 이분도 순교하였다고 한다.

성령의 축복을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5) 얀네와 얌부레.

모세의 행적을 술수를 부려 모방한 이집트의 마술사이다.

티끌로 이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따라하지 못해서 영적 중제자와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다.

모세와 이단의 비유에서 바울이 로마에 투옥된 후 복음의 흔들림이 상당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복음서의 전반이 대적자의 경고이다.

디모데에게도 흔들림 없이 나에게 배운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6) 데마.

누가와 같이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 이었다.

1차 로마투옥에서 같이 있었다.

2차 투옥에서 데살로니가로 갔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복음의 동역에서 영과 함께할 것인지 세속으로 돌아가 전도를 계속할 것이지 의미하는 바가 많다.

누구든 남아있기는 해야 한다.

2025.6.18..

 

10 디도서.

1 본문. 
젊어 철학과 시학에 해박하였다.

바울이 낙은 이유가 된다.

고린도교회의 혼란에서 바울의 뜻으로 방문하여 수습하였다.

바울의 기쁨이 컷 다.

절충과 중제에 자질이 있었다.

바울의 신임으로 그레데 섬의 주교(감독)가 되어 장로를 임명하였다.

디모데와 달리 할례가 없었다.

이방인은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는 자세 때문에 디모데와 달리 할례를 받지 않았다.

디모데는 유대의 사역을 위해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유대와 이슬람과 아프리카 일부에서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종교의식이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물세례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영접 세례는 가시적 행위가 아니다.

내면의 수용이다.

유대사회에서 할례는 의무적으로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은 할례의 종교적 의식이 없다.

디모데와 디도의 사역 대상과 지역이 다른 이유도 생각할 수 있다.

여타의 문제로 신체의 의식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레데 섬은 민생이 험악하여 교회가 필요한 곳이다.

평생을 여기서 봉사하였다.

바울의 이방전도에서 디모데와 같이 소임에 충실하였다.

2025.6.18일.

 

11 빌레몬서.

1 본문.

오네시모를 부탁하는 서신이다.

로마로 1차 연금 때 바울에 낙이여 회개하였다.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으로 사연이 깊은 것이다.

빌레몬은 골로새인 이며 부자였고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준 지역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오네시모는 재물을 훔쳐 달아난 노예이다.

압비아는 아내이고 압킵보는 아들로 추정된다.

추정된다는 가설이 많다.

골로새서에서 빌레몬의 말씀이 없었다.

오네시모는 로마까지 도망쳐 바울을 만난다.

성경의 이해에서 하나님의 역사이다.

당시 로마제국에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권리와 생사는 주인에게 달려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물까지 훔쳐 달아났으니 신분이 발각되면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바울이 간고하게 부탁하여 보낸 이유이다.

빌레몬은 바울의 부탁을 수용하고 노예에서 해방시켜 바울에게 다시 보낸다.

서신을 골로새교회에 전달하며 많은 노예들의 개종을 도왔다.

바울에게 주교의 의무를 받는다.

95년 도미씨아노 황제 때 박해로 순교하였다.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처참한 역사인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1회 니케아 공회가 기적 같다.

바울의 순교에 대한 자료가 없다.

재판과 사형선고와 집행의 과정이 이방의 사역과 노력에 비해 아주적다.

추운감옥과 겨울이 오기 전에 겉옷을 가져다 달라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와 증언할 사람이 없었다는 정도이다.

3차전도 예루살렘 여행과 가이사랴 체류에서 위험을 만류하던 제자들은 바울의 최후 행적에 소식이 없다.

쓸쓸한 순교였다는 생각이다.

 

2) 압킵보.

골로새교회의 에바브라를 기억한다.

에바브라가 바울의 박해로 로마에 있을 때 설교와 교회운영을 대신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바울은 압킵보를 만나지 못했으나 편지로 보아 신임이 상당하였다.

2025.6.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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