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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존재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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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존재 1.

박세욱. 2025. 5. 18. 16:59

1 마태복음.
1) 서두.
만물의 시작은 물리학에서 빅뱅이고 종교와 인류학에서 창세기가 된다.
통칭으로 창조이다.
인류를 창조로 표현하고 있다.
인류는 태초 생명의 잉태와 탄생에서 분화와 진화를 통해 생태적 합리성을 충족하는 생명체로 발견되었다.
현생인류의 유전적 뿌리는 3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창조와 발견에서 유전적시간과 학습의 노력에 의한 지식과 과학의 시대적분별이 있다.
신은 생태계의 질서에 개입하지 않는다.
창조와 무한한 미지에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현세에 이른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구원은 기원 전 수세기에 걸친 종교적 갈등과 예언자의 학습에서 실존과 실증의 시간을 예지하는 미지의
발현이다.
사과든 홍수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초월적 미지 하나님의 영역에 예속된 선택이다.
예수께서 말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만인이 공감하는 진실의 설득이다.
초월적 존재의 시간 창세와 종교와 문화의 시간 중세와 문명과 산업사회의 시간 현세에서 지식의 거취이다.
태초의 창조에서 생명의 발현과 탄생과 물질의 합의와 완성의 과정에 있는 문명의 시간이다.
창세기의 초자연적 지배와 중세기의 실존주의와 실증주의 논쟁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역사이다.
예수께서 자연과 문명의 격변에 있는 인류의 시간에 오신 이유이다.
초월적 존재의 실증은 유전적시간과 학습의 진화에서 지동설의 우주론과 AI의 발현에 있는 현세의 시각으로 선의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노력이다.
성경을 읽기 전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의 다양한 종교와 유대교와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경이 전부는 아니나 현세에서 문화적 주체이다.
책 또는 학습의 완성에서 보완적 탐구는 전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토대로 하는 율법과 탈무드를 추가하여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을 공유하며 신약성경 즉 예수 이후의 가르침이다.
유대교의 유일신 하나님에서 성자와 성령이 추가 된다.
이것은 성자 예수와 하나님의 가르침 성령이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유일신이나 기독교는 예수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진보하면 인간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세계 즉 창조의 시간을 학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간 계 즉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자를 통하여 창조의 미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신의 직접 소통에서 유전적 시간과 학습의 한계를 이해하는 중간계의 중계 적 개념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여기에서 갈등이다.
유대교는 유일신 하나님의 절대를 벗어나는 그리스도교 즉 예수의 존재를 이방으로 보았다.
이것은 시간과 학습의 한계에서 문화의 정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만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같은 교회를 사용하는 초대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충돌이 불가피한 역사이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했는가의 의문이 있다.
예수께서 짊이진 죄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지배적 욕구에서 우상승배로 치부되는 이방신이 전부냐는 것이다.
아니면 유전적시간과 학습의 충족에서 새로운 지식과 질서를 요구하는 미지의 발현이냐는 것이다.
 
2) 모세 (출생과 사망년도 미상).
예언자이며 십계명과 홍해의 기적이 있다.
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중요한 예언자이다.
이분의 이야기는 기회가 많다.
 
3) 엘리야 (BC 9세기경).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한 두 사람 중 한사람이다. 

모세는 사탄의 방해로 승천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길르앗에서 기도하였으며 이슬람에서 25대 선지자 중 한사람이다.

기원전 팔레스티나에서 구약을 토대로 하는 유대교와 이슬람이 공존하였던 시간을 공부할 수 있다.

왕비(이세벨)와 주변은 바알과 아세라 등 이방신을 숭배하고 모자라 하나님의 사람을 박해하고 죽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아합(BC 935~853년)왕에게 3년의 가뭄과 기근을 예언하고 요단의 그릿 시냇가에 은둔한다.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다 준다

가뭄이 심하여 시냇물도 마른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서 만난 과부에게 음식을 달라고 부탁한다.

과부는 아들과 마지막 남은 한 끼의 식량으로 허기를 채우고 죽으려 하였다고 한다.

엘리야는 걱정하지 말고 떡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고 과부는 그렇게 하였다,

여기에는 유대사회의 손님접대 문화가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그의 사람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과부의 아이가 어떠한 이유로 병들어 죽으니 원망이 엘리야와 하나님께 이르렀다.

엘리야는 아이의 주검을 침대에 뉘이고 하나님께 간청하니 기적이 일어나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고 기름과 식량이

끊이지 않았다.

살아난 아이가 엘리사라고 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이다.

카톨릭의 성인이다.

엘리사는 적군대장의 병도 고쳐주고 하나님과 이방신을 동시에 섬기는 불손한 군주를 도와주기도 한다,

엘리야의 철저한 이방신 배척과 달랐다.

현대의 문명에서 다양성은 진보적 시각이나 당시에는 종교가 국가의 토대였다.

사마리아로 돌아온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 왕에게 청하여 이방신 바알신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과 대결을

벌인다.

아세라는 일월성신으로 자연현상을 토대로 하는 이방신이었으며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 사람들의 주교였다.

방법은 황소를 제물로 하는 제단을 쌓고 자신의 신을 통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엘리아는 황소에 물까지 부어 젖은 황소를 불태운다.

승리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되어있다.

이후 비가내리고 가뭄이 해갈되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의 종교적 다양성과 경계적 관점을 볼 수 있다.

왕비 이세벨이 자신이 섬기는 신의 사제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 한다.

도망하여 주야를 걸으며 천사의 도움으로 호렙산의 동굴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 이르러 내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다.

아합과 왕비 이세벨이 선지자를 모두 죽이고 나만이 남았다고 하였다.

이르되 “다메섹의 하사엘을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를 너의 후계자로 하면 그들이 너의 적을 멸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4) 이사야 (BC 8세기경).

타락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의 길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7장14절과 52장13절~53장12절이다.

예수 탄생 8백 년 전이다.

세례 자 요한의 출현과 종교적 업적도 예언한다.

남 유다의 14대 므낫세(BC 709~643년) 왕 시기 전대 히즈키야 왕과 달리 종교의 관용주의가 팽배해 민심이 흉흉해

졌다고 한다.

이 말씀은 종교적 갈등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야훼신앙의 시각에서 엘리야의 철저한 배교정신과 이방신의 배척과 달리 엘리사의 경우는 사뭇 달랐다.

당시 종교는 혼재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유일신앙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교류와 소통을 통해 일상과 민생에서 문화적 공유가 이루지고 있었다.

현세의 지식으로 종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시에는 종교가 왕국운영의 체제를 대신하였다.

종교적 관용주의는 므낫세왕 시기 바알과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었다.

성전에 우상을 만들고 선지자를 핍박하였으며 매일 그 중 몇을 죽였다고 한다.

예언자 이사야는 전대 히즈키야(BC 739~687년) 왕이 죽기 전 활동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톱으로 허리를 잘라 죽였다.

이러한 악행이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종교적 이유가 되었다.

유대의 종교적 관점에 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유일신의 개념이 허무할 정도이다.

절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적 사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종교의 지배적 질서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배신하는 정신의 혼란은 국가의 분열이었다.

이스라엘 고대사의 문제는 국경의 방어와 관계에서 바알과 이방신 등 이단의 끊임없는 침략을 유일신앙으로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문명의 진화와 역사에서 진실이 필요하다.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 왕의 유대율법 회복과 회개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개선되지 않았다.

이방과 공유하는 토속적 신앙의 뿌리가 깊었다.

유일신의 주장에서 국경의 폐쇄성으로 지킬 수 없는 인류적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정한 논리가 보편적 대세를 지배할 수 없다.

국경의 경계라고 하지만 일상과 민생의 공유에서 문화의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왕국의 개념적 경계가 없는 초지를 공유하며 이동하는 목축업의 시대였다.

정착하여 일상의 경계를 설정하는 족속의 확실한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간과 학습에서 역사와 문화의 대세적 연속성 이탈은 판단이 필요하다.

생태적 합리성과 민주주의에서 독불장군은 없다

인류의 문화적 격리에서 교류와 소통으로 공유하여 학습하는 시간의 진화는 어쩔 수 없다.

야훼의 유일신앙을 요단강 서쪽으로 경계하여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유전적 시간의 학습에서 현재의 창을 완성하지 못하면 다음 창으로 넘어 갈 수 없다.

혼재된 종교의 학습과 결론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결국 유대교와 이방신의 갈등에서 유일신의 절대를 요구하였던 구심점 상실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인류적 대세에 의해 유일신앙의 고립이 무너진 것이다.

종교적 시각에서 위정자의 무지와 악행으로 이방신의 침략을 예지하고 방어하지 못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지배와 관계에서 보편적 이해의 확장이 아니라 나의 것에 집착한 결과이다.

특정한 역사와 문화가 인류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초자연적 현상에 의지하는 감각적 학습의 한계에서 의와 영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인류의 미래이다.

초자연적 현상의 지배와 문화적 격리에 의해 발생하는 종교의 이질적 경계를 생명의 심연에 있는 의와 영의 종교적

진리를 공유하여 하나를 이루어 경계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흩어진 종교의 통합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새로운 창의 발현이다.

 

5) 예레미야 (BC 6세기경).

BC 6세기경 예언자 또는 선지자로 이스라엘 멸망을 목격한다.

북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관용주의는 아합 왕과 그의 왕비 이세벨의 이단으로 바알신과 아세라의 우상숭배였다.

종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로 멸망한다.

호세아 왕 집권 4년 후 앗 수르(아시리아)왕 디글랏빌레셀(BC795~727년)이 죽는다.

호세아는 앗 수르와 조공의 관계를 끊고 애굽과 손을 잡았다.

꼴이 난 앗 수르의 다음 왕 살만에셀 5세가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애굽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포위 3년 후 살만에셀이 죽고 다음왕 사루곤 2세 때 BC 722년 앗 수르제국은 사마리아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였다.

이때 선지자와 백성들 대부분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

앗 수르는 대홍수를 예지한 노아의 장남 셈의 둘째아들로 아시리아를 건국하였다.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다툼이다.

남 유다의 요시야 (BC 648~609년) 왕은 할아버지 므낫세 왕 시절 창궐한 이방신의 우상을 제거하고 유대율법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당시 중동지역의 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왕이 죽으면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는 이상한 승계가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한 분열이고 국력의 약화이다.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고 신 바벨론이 태동하는 시기에 앗 수르의 아슈르바니팔(BC 685~631년) 왕 사후 두 아들에게

양분된 아시리아가 왕권다툼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신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리아를 도우러 가던 애굽 군을 요시야 왕이 가로막는다.

BC 609년 1차 갈그미스 전쟁의 전초전 므깃도 전투이다.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바벨론 쪽에 줄서는 것이 남 유다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요사야 왕은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그나마 이스라엘을 구할 기회가 사라진다.

애굽의 왕은 바로느고 이었다.

바로느고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남 유다 국민이 옹립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하고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여호아김으로 계명하여 꼭두각시 왕을 만들었다.

애굽의 속국이다.

이래도 정신 못 차리고 율법을 배반하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BC 605년 당시 중동지역의 정세를 결정지었다는 애굽과 바벨론의 2차 갈그미스 전투가 벌어진다.

바벨론의 승리였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승리의 여세로 남 유다에 들이닥친다.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저울질 하던 꼭두각시 왕 여호아김은 바벨론을 선택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무시하고 애굽을

선택하여 꼴 난 바벨론제국에 의해 BC 597년 예루살렘이 함락된다.

남 유다는 또 다시 바벨론의 속국이 된다.

이때에도 선지자 에스켈과 왕족 등 많은 포로들이 끌려갔다.

예레미야는 끌려간 포로들이 70년 후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바벨론은 요시야의 조카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운지 삼 개월 만에 포로로 잡아갔다.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 맛다니아를 시드기아로 계명하여 왕으로 세운다.

속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BC 586년 유다 왕 시드기야가 시도한 저항이 실패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이로써 유대국가 이스라엘이 사라졌다.

성경은 므닷세가 벌인 이방신의 우상숭배와 선지자의 살육으로 하나님의 분노에 의해 멸망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요시야 왕의 유대율법 복원과 이방신의 제단과 우상의 파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짝이 전쟁이 많았다.

빙하기를 피해 따뜻한 지중해 연안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은 모여든 인류의 다툼이 치열했던 곳이다.

사람이 많으면 생산성과 비례하여 다툼이 증가한다.

견고하였던 예루살렘 성곽은 점령자에 의해 파괴되고 교훈으로 남겨진 일부가 통곡의 벽이다.

기원후 3세기 포로로 끌려가고 타국으로 이주하고 광야에 은거한 유대인들의 본격적 예루살렘 귀향이 이루어진다.

성은 역사의 처참하게 허물어지고 관계와 저항의 교훈으로 남겨진 벽에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멸망 후 천년의 방량이었다.

이슬람의 구원자 마호메트의 자료에서 유대사회가 당시에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기원후 5~6세기 정도로 기억된다,

예루살렘 순례와 관련된 역사이다.

유대민족은 자존감이 강한 민족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여러나라가 종교와 민족적 경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쁜 것은 사람이 모이면 탐욕의 다툼이 발생한다.

팔레스티나의 고대사이다.

예레미야는 유대국가 멸망 후 고행으로 가르침을 전달하며 이스라엘 복원에 힘쓴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기록이 있다.

남 유다 멸망 시 친 애굽계 왕족과 귀족들이 애굽으로 망명하는데 이때 그들에게 끌려가 바벨론을 편들고 유대의 멸망을

예언한 죄로 돌에 맞아 죽었다.

사람 사는 것이 덧없다 하여도 심하다.

십자가의 길과 가르침의 진리를 주장한 스테파노 성인의 돌 처형도 그렇고 종교적 관점에서 잔인하다.

어찌 성경의 뒷면이 우울해 지고 있다.

평화와 풍성한 수확이 없다.

 

6) 헬라파와 히브리 파.
예초 유대교는 이스라엘 밖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도 나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에 이른다고 하였다.
멸망 후 포로로 끌려가고 타국과 광야로 흐 터진 유대인들의 귀향이 이루어진다.
이때 새로운 지식과 문화가 상당히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사회 밖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헬라파의 귀향 후 과학과 의학 등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께서도 이방이 와서 기적을 청했으나 이스라엘 밖이라고 거절하다 믿음을 확인하고 구원하였다.
헬라 파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일 태면 해외파이고 히브리 파는 멸망 후 예루살렘을 지키며 살던 토착민이다.
구성에서 히브리 파가 월등하게 많았다.
초기에 차별이 있었다.
복음서에서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고 있다.
이유가 같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열악한 환경에 있는 헬라 파 과부들을 구제에서 차별하였다.
사도 즉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과부들은 가난한 사람에 속했다.
이문제로 헬라파의 항의가 있었고 절대다수에 있던 히브리파의 양보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대사회에서 7인의 봉사자를 헬라파로 구성한다.
배려이다.
이것이 유대사회의 구심점이다.
스테파노 성인은 7인 중 한명이다.
제자가 세금문제를 물으니 예수께서 타인과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며 아들에게 세금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기를 잡아 나눈다고 하였다.
종교와 세금에서 가난의 구제와 맥이 통하는 대목이다.
 
7) 스테파노 성인 (AD5 ~ AD34년).
신앙심이 강한 청년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다.
일설에는 성전의 화려함을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를 신의 실체가 전부인 신앙의 진원으로 생각하는 오류가 있다고 한다.
지역감정과 분열이 있는 인간적 본성의 갈등이 있었다.
당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갈등이다.
유대교의 대 의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방으로 배척하는 시기였다.
새로운 질서와 사상의 욕구에서 보수적 개념의 방어이다.
익숙한 것의 안주이다.
시대와 세대의 변화에서 갈등이다.
스테파노는 예수를 따르는 7인 봉사자의 신분으로 신변의 노출이 잦았다.
쉽게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 예수와 제자들의 신변을 예견할 수 있다.
얼핏 대중적 행보가 많았는데 교회와 권력의 견제와 추적이 만만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기적을 행하면서 타인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능력의 수신 적 자세가 아니라 신변의 위협일수 있다는 것이다.
체포 후 심문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유대교를 비판하고 예수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종교적 신념으로 대의회의
미움을 받는다.
현상적 안주와 변화적 진보의 논쟁이다.
유대교의 기득권에 의해 결국 투석 형으로 죽는다.
전언의 의하면 들에 맞아 죽으면서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이다.
투석 형을 집행하는 자들을 도와 겉옷을 챙겨주는 청년이 있었다.
나중에 회개한 사도 바울로 이다.
 
8) 세례 자 요한. (AD 전후 ~ 36년.)
제사장 즈가리아와 성모 마리아의 사촌자매 엘리사벳 마리아의 아들이다.
임신 중 성모의 관심과 사랑이 지극했다고 한다.
집안이 편안하였으나 광야를 선택하여 복음의 길을 갔다.
예수의 부탁으로 세례를 행한다.
“내가 찾아가서 세례를 청해야 하실 분께서 어찌 내게로 오신다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예수의 제자 계시록의 사도 요한과 다른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다.
예수의 탄생과 시대적 역할을 예언하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똑같은 이름이 많다.
요한은 이복동생을 죽이고 그의 부인과 결혼한 헤롯 왕의 불륜을 비판하였다.
헤롯은 선지자 요한의 처벌을 두려워하였다.
종교적 미지의 의심이다.
연회장에서 불륜녀의 딸이 요사한 춤으로 헤롯을 현혹하여 갇혀있는 요한의 목을 선물로 달라고 청한다.
어미의 불륜을 권세로 지우려는 수작이다.
철딱서니 없는 마귀가 청한 선물로 헤롯 왕에 의해 요한의 목이 잘려진다.
유대의 사람들은 이방신과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엘리야를 죽이려 했던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과 그의 딸 아달라가
다윗의 후손을 죽인 악행이 재현되었다고 하였다.
학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헤롯은 예수의 행적을 듣고 요한이 죽은 자에서 살아나 기적을 행하고 있다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요한의 출현과 종교적 사건에 대해 이사야의 예언이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 중 으뜸이며 하나님의 세계에서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라고 하였다.
요한의 사망소식을 들은 예수는 지역을 떠난다.
예수께서 권력과 교회의 위협을 피해 거처를 옴 기는 대목이 복수로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절대의 신분으로 기적을 행하며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운 실망이 있다.
분노에서 기적의 능력으로 저항을 기대하나 하나님의 세상은 폭력이 없다.
오른쪽 뼘을 맞으면 왼쪽 뼘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였다.
절대자의 기적과 십자가의 길에서 “확“ 뒤 업어버리고 싶은 안타까움이 있으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여 완성해야
하는 인간의 학습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충족이다.
배신과 십자가 길을 예지하며 요나의 고래뱃속 즉 바다에서 삼일과 땅속 삼일을 말씀하였다.
인간세상에서 자신의 시간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르침의 학습이 완성 될 때 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위해 인간의 시간표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에서 믿음과 관계를 부인하는 인간의 한계가 있다.
제자들은 도망치고 관계를 부인한다.
성령과 예수의 절대에서 인간과 관계의 아쉬움이 있다.
은냥 삼십에 스승을 배신한 유다는 목을 매 죽는다.
십자가의 길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성경의 문맥이 아니라 특종기사 같았다.
 
9) 헤롯 안디바 (BC4 ~ AD39년).
로마의 지배에서 헤롯대왕의 둘째아들이다.
초대 헤롯대왕이 죽자 나라를 세 등분하여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중 예수 즉 그리스도교와 관련 있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책임지는 분봉 왕이다.
예수의 활동시기에 통치하였다.
예수와 세래 자 요한과 스테파노와 같은 시간의 생이다.
이복동생을 죽이고 그의 부인과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신한 것이다.
폭군으로 선지자 요한을 두려워하며 어미 헤로디아와 공모한 이복동생 딸의 요구로 요한의 목을 벤다.
예수의 탄생이 두려워 동방박사에게 예수의 거처를 찾으면 알려달라고 하지만 천사를 만난 박사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인지하고 헤롯을 피해 동방으로 간다.
예수 탄생 시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아래 남자아이를 죽이라 명령하였다.
집요하게 예수의 행적을 쫓는다.
예수는 애굽으로 피한다.
세례 자 요한의 순교와 십자가의 길에 기여한 유대의 왕이다.
 
10) 아벨.
아담과 하와의 둘째아들이다.
첫째 카인의 시기로 살해된다.
재물에 얽힌 첫째 가인의 시기이다.
형제가 하나님께 재물을 바쳤으나 카인의 농작물은 거절되고 아벨의 양은 받아들인다.
카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키웠다.
다윗의 자료를 보면 당시 양치는 일을 천대하였다고 한다.
이것의 시기로 첫째카인이 동생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때려죽인다.
아벨은 야훼신앙이 깊었다.
가설에 의하면 당시 인류는 부모 아담과 하와와 자식카인과 아벨 네 사람이 전부이다.
유추하면 인간의 뱃속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하나는 최초의 살인자이고 하나는 최초의 죽은 자가 된다.
카인은 악의 우상이 되었으나 아벨은 이유 없는 소멸에서 허무와 소외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식을 잃고 상심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셋째 셋을 주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아벨의 죽음이 셋의 존재로 부활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인과응보 또는 현상의 학습에서 논리적 정당성에 집착하는 지식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문제가 있다.
평범과 평화는 약발이 없다.
야훼신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고증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요란하다.
예초 신앙이라는 것이 초자연적 변화의 무지에서 감각적 안주를 염려한 불가항력적 현상의 지식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식은 자연과 자아의 예속에서 이웃과 공동체의 발달로 사물과 현상의 합의가 필요하였고 그것이 무엇이라는 공통의
상징적 의지와 소통을 위한 언어의 결론이 필요하였다.
명칭과 제목이다.
여기에서 불가항력적 현상이 무엇인지 또는 무어라할 것인지 공유할 수 있는 상징이 신 즉 종교로 발전하였고 본다.
어두운 것에 대한 공통된 지식과 신념의 공유와 행위적 표현이다.
예초 가나안 지역의 토속신은 엘이었다고 한다.
토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적 이해가 아니라 나와 가족 좀 더 나가면 이웃과 마을이다.
나중에는 씨족에서 부족 즉 민족이 된다.
신의 영역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문명 즉 이동과 소통의 역사에서 창세기의 조건으로 인류적 공유는 불가한 것이다.
초자연의 초월적 무지에서 가나안 지역의 지식이 구한 것이 엘과 바알이었고 여기에서 변화한 야훼신앙은 아브라함
계보의 영역에 한정된 신이었다.
물론 한정된 지역과 지식으로 현상의 증거에 기대는 우상 아니라 초월적 존재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새로운 변화
이고 개혁이다.
사물 적 개념에서 공간적 개념의 진화이다.
자연과 자아 적 암시와 학습의 공유에서 확장성은 인류적이다
현세의 종교는 초월적 미지의 발현과 증거에서 실존을 실증할 수 있는 시대이다.
묻고 따지면 곤란한 나름의 이해이다.
 
11) 요나.

고래뱃속에서 삼일 만에 살아남은 선지자이다.

큰 물고기라고 되어있는데 소싯적 움막교회에 잠깐 다닐 때 고래애기를 들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배의 구석에 숨어 바다로 도망치다 야훼(하나님)의 체벌로 폭풍우가 몰아친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요나는 아시리아가 괴롭히는 북이스라엘 선지자이다.

적국의 사람들에게 야훼의 말씀을 전달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냥 불로 몰살시키라는 것이다.

그래서 뻔히 발각될 것을 알면서 도망친 것이다.

뱃사람들이 자신의 신께 기도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누구 때문인지 제비뽑기로 시험하는데 요나가 “딱” 걸렸다.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의 보완자료에서 보면 제비뽑기가 종종 등장한다.

당시에 사람들이 제비뽑기 등 여러가지 인위적 현상으로 운세와 미래를 예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일신 야훼신앙의 관점적 선입견에서 종교의 체계적 정립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추리할 수 있다.

요나는 야훼의 체벌을 알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사람들은 꺼렸으나 사정을 파악하고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폭풍은 멈추었고 사람들은 야훼의 신통방통한 능력에 개종하게 된다.

던져진 요나는 준비된 큰 물기의 뱃속에서 삼일을 견디다 숨 쉴만한 육지에 이른다.

이후 아시리아의 도시로 가서 오기가 삭지 않아 건성으로 말씀을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네베 사람들은 하얀 옷을 입고 금식하며 야훼의 말씀을 따른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밖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구하고 야훼(하나님)께서 아시리아 백성들의 회개를 받아들인 것이다.

요나의 투정은 절대자와 관계에서 인간적 감각과 야훼신앙의 인류적 예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전체의 흐름 주종의 관계에서 특별한 설정이다.

부활의 예언에서 예수께서 바다에서 삼일 땅속에서 삼일이라고 말씀하였다.

부활과 승천에서 창조 이외의 사물적 현상의 흔적은 학습과 관계에서 이유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

 

12) 사두 개인 (사두개파).
유대교의 종파이다.
주로 제사장과 귀족의 가문으로 구성된 유대사회의 기득권층이었다.
다윗 (BC 1040~970)왕 시대 사독 대제사장이 사두개파의 시작이라고 한다.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추앙받는 다윗의 생애가 전쟁과 회개의 증거 말고는 감각과 육신의 찬란함이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용서와 거리가 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궁금하다.
예수사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 될 때 유대교 역사에서 사라진 종파이다.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권세 적 이익을 추구한 집단이다.
모세의 오경에서 문자적 범위에 있는 규범을 유대교의 유일한 율법으로 하였다.
성서에 기록된 모세오경의 문자 외에 구전으로 전례 되는 예언과 성문과 토라(경전)와 부활의 교리를 부정하였다.
오로지 성서의 문자에 의한다는 것이다.
사물과 관계의 증거를 우선하는 책대로 법대로이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의 부활과 천사와 영적세계 등 신앙의 공간적 의미를 부정하는 종파이다.
의심되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는 우상 즉 형상과 현상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두개파의 실증주의를 로마의 지배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있었다.
사두개파는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였고 바리새파(바리새인)는 저항하였다.
자연과 자아에서 물질과 문명이다.
실존주의에서 실증주의이다.
작은 야고보를 죽인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바리새파를 기억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의 실증요구가 여러 차례 나온다.
예수의 시대는 종교와 문화의 격변기이다.
보이지 않는 초월적 미지 즉 종교의 설득은 어려운 것이다.
모새오경은 아브라함을 민족의 근원으로 하는 종교에서 공통된 경전(토라)이다.
창세기와 애굽 탈출기(출애굽기)는 곁가지로 보았으나 이외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궁금하다.
복음서에 사두라는 단어가 나온다.
사두개인과 다른 이슬람 사제를 말한다.
당시에 바알과 아세라 등 다양한 종교가 있었다.
바알은 사탄으로 표현할 정도이다.
주의할 것은 이슬람에 대한 경계가 바알과 아세라에 비교하여 전무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제시작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니다!
그러면 좋겠다.
 
13) 바라카.
이슬람의 영적 힘으로 카리스마와 비슷한 의미라고 한다,
아직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단어에 이슬람이 거론 될 수 있다는 불길함이 있다.
 
14) 가이사.
로마황제의 칭호이다.
로마의 지중해 연안 지배는 인류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 문화이다.
동전에 조각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 제자가 세금문제를 질문하자 동전을 가져오라 하시며 가이사 것은 가이사 것이고 하나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다.
기부와 구제는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것이고 국민 즉 타의에 의한 생산성에서 세금은 국가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15) 다니엘 (6세기경).
히브리어로 심판 또는 판결을 뜻하는 나의는 야훼의 실체를 뜻한다.
나의 뜻과 나에 의하여 등 상당히 의미 있는 단어로 개인의 명칭에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유다를 함락한 바벨론은 왕족과 귀족 등 유능한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 갔다.
이분도 자료에 확실치 않으나 대략 17세의 나이로 세 친구와 포로로 끌려갔다.
매우 유능하여 왕궁에서 교육받았으며 시종으로 시작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여 장관에 오른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이방신과 우상이 들끓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다.
철저하게 유대의 율법을 지켰다.
바벨론은 왕들의 실정으로 백년도 안 되어 망하고 페르시아국가의 건국이 전제된 매대와 바사(페르시아) 과도국가의
다리오왕에 의해 총리로 발탁된다.
메대 바사는 카스피 해 동남부와 페르시아 만 북부에 정착한 메대 인과 바사 인이 연합한 국가이다.
바사는 페르시아이다.
본토인이 아니라 유목생활하다 정착한 인도 아리안 족 사람들이다.
메대국은 바벨론과 연합하여 요나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앗 수르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킨다.
앗수르의 멸망이다.
올라가면 끌어 내리려는 것이 가진 자들의 심보이다.
다니엘은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이고 멸망한 바벨론의 최고위직을 수행한 관리이다.
이방과 우상으로 오염된 본토출신 관리들의 시기가 없을 수 없다.
협잡과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80된 노인의 약점을 찾으려 했으나 없었다.
마귀는 다니엘의 신앙심을 문제 삼는다.
왕에게 간신하여 삼십일 동안 왕 외에는 어떠한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린다.
어기면 사자 굴에 떨어지는 형벌이다.
그때의 왕도 신하들의 집단주의에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나 보다.
다니엘은 알았는지 몰랐는지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소리 내어 유다를 향해 기도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끌려가 사자 굴에 던져졌다.
믿음은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사자들이 배불렀는지 먹을 것이 없었는지 아니며 맛없게 보였는지 침도 안 묻히고 살아나왔다.
밤새 노심초사하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이 살아나오자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경에서 악의 결론은 깨끗하다.
간신한 자들의 가족까지 싹 쓸어서 사자 밥을 만들었다.
인정사정이 없다.
이 사건으로 유다에서 끌려간 포로들의 생활이 나아졌다고 한다.
 
16) 가야바.
유대의 대제사장이다.
십자가의 길에 관여하였다.
예수의 체포와 심리에서 여러 차례 부결되자 수단을 동원한 독선으로 가결을 강행한 권세이다.
물질의 시작에서 권세와 사고의 안주에 집착하여 약자를 매도하는 매수와 협잡의 죄이다.
신의 가르침을 설파하며 시간과 학습의 한계와 개인적 성취가 지배하는 우상이 깔려있다.
당시 사회를 엿보면 정의가 아니라 물질과 권세가 득세하였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의 속성이다.
학문과 문학과 과학과 철학의 논쟁이 치열하나 속성은 물질과 권세의 성취가 있다.
그러니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예수와 스테파노 등 기독교의 비극적 역사는 타의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다.
교회에 의해 예수와 스테파노 등 신앙과 관련 없는 희생이 많았다.
예수의 탄생과 기적에서 유대교의 모태 모세와 이사야 등 메사아의 예언은 많았다.
신앙의 접근이었다면 예수께서 행한 기적의 소문은 예언의 의심으로 충분하였다.
시간과 학습의 한계에서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변화의 무지와 빌라도가 의심하였던 권세의 사사로운 탐욕이 있다.
십자가의 길에서 동굴 속에 있는 고문의 흔적은 종교의 가치와 상반되는 괴리가 있다.
폭행하고 고문하고 죽일 필요까지 있었냐는 것이다.
당시의 종교적 지배가 어느 정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증거이다.
21세기의 종교에서도 배교에 대한 지나친 신앙의 순결을 강조하는 사례가 있다.
마귀의 형식을 빌려 감금하고 폭행하는 사건들이다.
근본적으로 신앙은 자아와 자유의 광야이다.
가야바 추종자들이 칼과 망치를 들고 들이닥쳐 예수를 겁박하고 팔을 잡아 강압할 때 “내가 성전에서 말씀을 전할 때
그러하지 못하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느냐!“ 하셨다.
성전은 유리 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와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반론과 저항이 두려운 것이다.
가야파와 추종자들에게 붙잡힌 예수는 폭행과 멸시와 수모를 당한다.
제자들은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에도 깨어있지 못했다.
가야바는 “네가 찬송 받는 이의 아들 그리스도이냐?“ 라고 묻는다.
예수께서 “내가 그 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하였다.
가야바는 광분하여 자신의 옷을 찢으며 마귀의 형상이 되었다.
기적과 예언의 분별이 필요한 대제사장이다.
자신에게 내제된 절대의 사고로 기적과 예언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역이다.
가야바 추종자들은 멸시하고 폭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선지자에 머무르라는 것이다.
이 땅에 이른 목적이 아니다.
초월적 존재를 증명하고 현상에 정체되어 있는 시간과 학습의 한계를 구해야 한다.
로마의 지배에서 유대사회는 사형권한이 없었다.
유대지역의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빌라도)의 결정이 있어야 했다.
유대사회는 명절에 살인자와 같은 죄수 한명을 풀어주는 전례가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와 죄수 바라바 중 누구를 풀어줄 것이냐고 제사장들에게 묻는다.
빌라도는 예수를 시기하는 대제사장의 모함을 알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마귀들은 악행이 끝나고 나야 잘못된 것을 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둘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둘로 갈라져다.
가야바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피는 로마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사후 민심을 엿 볼 수 있는 변명이다.
휘장과 십자가의 길 이후 묘연하였다는 가야바의 행적은 교회와 유대사회의 책임과 관련이 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십자가의 길에서 사역하였으나 상은 줄 수 없어도 그의 잘못이 아니다.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의 박해는 이어졌다.
 
17) 뱃세다.
어부의 집으로 불리는 어촌마을이다
배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이 살던 곳으로 가르침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을 떠났다.
가난한 자의 회유라면 불손할 수 있다.
현상의 안주와 차별적 또는 우상적 기득권의 권태에 있는 시간과 학습의 저항이다.
종교가 추구해야 하는 약자의 관심이다.
물과 배의 말씀이 많고 물고기는 식량으로 유익한 것이다.
 
18) 바알 신(하다드).
풍요와 폭풍우의 남신으로 전해지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토속신앙이다.
유대교는 유대사회에서 만 성립되었으므로 이방의 종교는 이슬람과 바알 신과 아세라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이전 유대교가 배척하였던 이방신으로 당시 상당한 정신적 지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알과 하나님의 비교에서 선지자 엘리사의 승리로 바알의 사제들이 도륙되었다고 한다.
베엘 제불(똥의 신)으로 폄하하였고 기독교에서 사탄으로 배척하였다.
아주 커다란 파리로 묘사되었다.
유대지역에 다수의 종교가 있었다.
복음서에서 남의 집을 강탈하려면 가장 힘센 놈을 꽁꽁 묶어 결박해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비유가 선과 일치하지 않으나 바알신의 경계이다.
당시 바알신의 정신지배를 의미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인류가 빙하기의 추위를 피해 이동한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초승달 지형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생산성과 비례하는 갈등과 분쟁이 많다.
분배이다.
 
19) 즈가리아.
세래 자 요한의 아버지 이며 성모 마리아의 사촌자매 엘리사벳 마리아의 남편으로 유대의 제사장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이스라엘 왕족 다윗의 후손이다.
예수의 외가 마리아의 집안도 만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례 자 요한의 탄생을 천사를 통해 알았으며 태어날 때 까지 비밀을 지키려 벙어리로 지냈다.
요한의 거처를 말하라는 헤데로(헤롯 왕)의 명을 거절하여 성전에서 살해되었다.
교회의 역사에 비극이 많다.
즈가리아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성서의 인물이 많다.
 
20) 야고보와 요한.
아버지 어부 세베데와 어머니 살로메의 형제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
집안이 돈이 많은 부자였다고 한다.
당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미미한 때였으나 예수의 시간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진보적 사고를 기대하여 예수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비용도 지불하였다.
나중에 예수의 권력적 성공을 예상하고 두 형제의 입신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권세에 오르면 두 형제를 오른편과 왼편에 두어달라는 청탁이다.
예수를 속세의 잡동사니로 우습게보고 있다.
예수께서 두 형제를 불러 하신말씀은 “너희가 들은 말이 무엇이지 알 것이다.”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형제의 대답에 “내 잔을 너희가 마실 것이.” 하였다.
이문제로 제자들 사이에 내가 잘났다고 언쟁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큰 야고보로 12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된다.
야고보가 세이 있는데 제자 중 첫 번째로 순교한 요한의 형 큰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이고
여기에 요셉의 아들 야고보가 있다.
요셉의 아들이라면 성모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한 하나님의 이들이다.
작은 야고보는 요셉의 야고보와 동명이인의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어찌되어든 예수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
작은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에게 작성한 서한이 많았다.
신약에서 야고보 서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작은 야고보는 부활절에 바리새파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한다.
끝내 거절하자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리고 돌로 쳐서 죽였다.
사건은 일부 극단적집단의 소행이었다.
바리새파(바리새인)는 전통 유대교를 계승하는 분파이다.
로마의 지배로 헬레니즘이 성행하자 관성적 질서를 염려하여 유대교의 종교적 절대성을 고수한 집단으로 보인다.
실존주의이다.
헬레니즘은 감각과 자연과 과학과 개인의 자유와 사상 등 학문을 통한 문화적 개념의 질서이다.
로마의 지배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전파이다.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헬레니즘 문화가 번창 한 도시였다고 한다.
헬레니즘의 현상은 알렉산더의 원정과 정복이면에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증적 철학이 있다.
기원전후 실존과 실증의 논쟁이다.
 
21) 바리새인(바리새파).
율법을 따르는 곧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중간계층 이하를 형성하는 사람들이다.
2차 예루살렘 파괴 시 바리새인은 육천 명 정도이었다고 한다.
왕정과 대제사장의 주도에도 불구하고 사건과 질서에서 반론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예수께서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사회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물질의 시작에서 소외 계층을 보호하고 반론하는 저항의 신념이 있다.
낮은 곳에 임하리라는 가르침이다.
예초 그리스도교의 가치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기득권에 저항하는 사회적 결속이라고 보았다.
부르주아와 노동사회에서 약자의 저항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신념의 시대가 있었다.
이것이 예수와 주변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세속적 생각을 하였다.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실존의 주장이다.
초월적 미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유전적 시간과 학습의 한계를 예수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두개파의 대립하였던 바리새파와 관련이 있다.
 
22) 어머니 마리아와 누이.
열두제자와 함께 있을 때 찾아온 어머니와 누이를 하나님의 절대에 예속된 이유로 외면하였다.
가르침의 전달에서 말씀의 목적을 위한 정치적 수단의 희생이라고 보아야 한다.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재산과 성취와 인연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하였다.
예수의 주변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와 누이가 찾아왔다고 버선발로 호들갑떨면 대장과 주체가 아니다.
설득에서 같다는 동지와 동질성은 최고의 수단이다.
정치판에서 국민을 집구석 가족처럼 대하는 인간 못 보았다.
복음서 후반에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였다는 말씀도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존재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들은 내 아버지의 종이라는 이유로 관계를 차별한다.
 
23) 막달라 여인 마리아.
일반적으로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을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씀으로 알려진 여인이다.
예수의 행적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으로 십자가의 길과 부활에서 세여인 중 한명이다.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고 구해준다.
요사이는 미천한 여인이 아니었다고 부인하는 성서자료도 있다.
 
24) 마태.
성경은 AD 70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여 파괴되기 1~2십년 전부터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성전의 화려함에서 죄악을 물었을 때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마태는 가버나움에 살던 알패오의 아들이며 세리였다.
세리(징세청부업자) 레위가 예수를 따랐다고 하였다.
레위가 세금에 대해서 예수께 여쭈니 더하여 빼앗지 말고 문서에 있는 대로 정당하게 하라고 하였다.
세리들이 로마가 제시한 액수에 고무줄 잣대로 더하여 착복하였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라고 하여 창녀와 같은 비천한 직업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바리세인들이 예수께 왜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식사하고 가까이 하냐고 비난하는 대목이 있다.
예수께서 “의사는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가르침은 병든 곳을 치유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금 좋아하는 사람 없다.
작은 야고보와 요셉을 알패오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고렇다면 형제인데 확실하게 고증된 것은 없다.
마태와 야고보를 형제로 기술하는 자료도 있으나 요셉(요세)의 거취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에서 추상적 기술이 보인다.

25) 초월적 존재의 증명.
계속되는 증명의 요구에서 기적을 행한다.
폭풍 치는 바다에서 난파의 위기에 있는 배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온다.
제자들이 놀라는 상황에서 배드로가 나를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도록 권능을 증명해 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나를 의심하느냐 하시며 내게로 오라 하니 배드로가 폭풍 치는 바다 위를 걸어 예수께 갔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의 끝임 없는 실증 요구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고 행하였는지 먼저 증명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세계를 증명 하겠다." 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세상을 알고 행하면 그런 증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시간으로 창조와 앞선 문명은 보아도 들어도 인지하여 학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인원에게 문명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인간의 시간과 학습으로 이해하고 근접할 수 없는 창조의 절대이다.
창조와 우주는 현세의 시간에서 인류의 지식과 문화로 견줄 수 없는 미증유의 미지이다.
예수의 시간과 행적은 인간의 시간에서 학습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미지의 발현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시험은 창세기에서 기원전후 까지 본격적 물질문명 이전의 회개이다.
태풍, 지진, 화산, 홍수, 가뭄, 기근 등 자연에 예속된 숭배에서 인간중심 사회의 전환이다.
태초에서 진화한 만물과 현세는 유전적 시간과 생존 적 학습의 충족에서 수십억 년의 시간을 소비하며 미지가 발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만물과 현세의 지배가 아니라 대자연의 암시적 질서에서 시간과 학습에 예속된 것이다.
창조의 무한에서 인간세상은 겨자씨 이고 성경은 겨자씨 안의 겨자씨이다.
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겨자씨를 키우고 가꾸는 목자이다.
믿음의 강조는 예수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와 우주 중심이 아니라 초월적 미지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인류의 시간과 학습으로 상상할 수 없는 창조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가르침의 말씀과 성경에 수록된 내용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와 성경의 행색 적 소속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이 앞서지 말고 행하여 구하라는 것이다.
아직 감각과 문명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미지를 지나야 우주 끝에 갈 수 있다.
현상과 감각에 의존하는 시간에서 초월적 미지의 발현은 절대성의 무의식 적 관성에 있는 지식과 문화의 정체를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자동설과 AI의 발현에서 미지의 이해가 필요한 시간이다.
불행한 것은 헬레니즘 문화와 자연과 과학은 학습의 연속성에 있으나 예수의 기적은 연속성이 없다.
예수의 탄생과 생에 국한된 괴리 적 현상이다.
현세에서 예수의 기적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다.
실증의 요구와 문명의 시간에서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재림은 인류의 나약함을 인지하고 기적을 기다리는 창조와 초월적 미지의 실존주의 이다.
21세기의 시각으로 예수의 시간은 창세와 중세의 전환에서 자연과 자아의 상실과 물질과 문명의 예지이다.
실존의 증명과 학습에서 기적이 필요한 시간이 있었고 미증유의 발현으로 초월적 미지를 실증하는 시간에 있다.
재림은 이천년의 시간을 충족하는 초월적 미지의 발현을 의미한다.
실증주의에서 기적을 기대하는 물질의 사유와 차별적 성취의 무한 경쟁에 있는 문명의 괴리는 현세의 문제이다.
감각을 우선하는 도시와 물질문명의 다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자연과 자아의 회귀이다.
예수께서 인간의 무지와 고집에 무지하게 답답하셨을 것이다.
 
26) 디테일.
바알과 달리 이슬람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없었다.
현세에 벌어지는 중동의 위기에서 당시 이슬람과 종교적 갈등은 미미하였다.
이슬람 사두의 행색을 조심하라는 정도이다.
요사이 개와 동석하여 식사하는 식당의 허가를 추진하고 있다.
예수의 기적을 바라는 믿음의 확인에서 개는 주인이 식사하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수러 기를 먹는다고 하며 자신을
낮추는 대목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믿음의 절대복종은 개와 주인의 관계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해 진다는 말씀과 5달란트와 2달란트와 1달란트 말씀은 지혜의 노력이다.
지혜와 학습은 노력에 따라 크고 작다는 것이다.
시간과 학습의 충족으로 미지 즉 하나님의 세상에 이를 수 있다는 암시이다.
물질의 탐욕으로 착각할 수 있다.
가져다 붙이는데 이골이 난 마귀들의 굿판을 염려하여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다.
농사의 씨 뿌림 비유에서 비옥한 토양은 신앙이고 척박한 토양은 이방신과 우상이 된다.
잡초는 이단과 이방과 외식(외세)이다.
추수 때 까지 놔두라 하신 것은 최후의 날 행색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추수는 마지막 날이고 이날에 잡초를 먼저 뽑아 불태운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였다.
불의 지옥이다.
그렇게 해야 다음해 농사에 잡풀이 덜 난다.
말씀에서 죄 짓는 자를 놔두라고 하였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는 진리가 있다.
진정한 심판은 최후의 날 하나님의 선별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은 인간을 주인으로 하는 창조 또는 교회이고 가꾸는 것은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나태하고 배신하여 따를지 않으면 멸절하여 주인을 바꾼다는 경고이다.
마태복음에서 가르침은 대체로 수도자의 길로 보여 진다.
물질과 권세와 성취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하였다.
여행은 옷 한 벌 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세상의 집들은 하나님의 것이고 따르는 자의 것이라고 하였다.
너희 중 누구든 아무집이나 들어가 음식을 청하고 거하여도 된다고 하였다.
누구든 거절하여 가르침을 어기면 하나님의 엄중한 처벌을 경고하였다.
만물은 창조자의 것이고 그를 따르는 자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년의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는 집에 들어간 선지자 엘리야에게 마지막 남은 한 끼의 식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 한
믿음이 구원받았다,
수도자 또는 손님을 접대하는 유대의 문화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문제이지 들어가는 것은 나온다고 하였다.
나온 것의 말씀은 말에는 거짓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는 것이다.
들어간 것의 말씀은 식량과 음식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다.
세균은 안 나온다.
손은 씻는 것이 맞다.
간음 아니면 하나님이 정해준 아내를 바꿀 수 없다고 하니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어떠냐고 반문한다.
사제의 길이다.
어쩌면 사랑의 선택에서 감각의 욕구를 한번으로 충족할 수 없다는 씨와 밭의 포괄적 탐욕이다.
가르침을 배신할 수 있는 유혹을 차라리 포기하자는 결의이다.
간음으로 가르침을 배신한 이스라엘 왕들이 다수이다.
용서하라는 오른쪽 뼘과 왼쪽 뼘의 가르침에서 이를 갈았다는 말씀은 증오가 내제된 세속의 표현이다.
이만 갈고 말았다면 다행이다.
십자군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약탈의 기록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역사를 보며 왜 그래 을 까?
매사가 시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생에서 미지의 발현은 요원하다.
너 죽어도 지구와 인간은 그런대로 시간을 견디며 자의반 타의반 학습의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의 세상 미지는 시간과 학습으로 분명하게 존재한다.
미래는 민족의 경계가 아니라 창조이다.
그것의 희망으로 인류의 역사를 이끌고 있다.
주둥이 까발리니 할 말이 많아진다.
너(인간)와 지구가 전부가 아니다.
초월적 존재와 예수의 가르침에서 이천년의 시간은 학습의 다음 단계를 요구하고 있다.
선지자의 길에서 소외와 죽음이 아니라 진실의 두려움이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 미지는 창조의 실체이다.
2025.5.14.일.
 
2) 마가복음.
1) 본문.
대체로 기적의 행적을 쓰고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난 오라버니 나사로의 기록은 없으나 어떤 여인이 향료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제자가 삼백 데나리온의 비싼 향료를 함부로 쓴다고 책망한 대목에서 예수께서 “나를 위하 것이다.“ 라고
하시면 놔두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은 종교의 변화와 개혁을 말씀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트집에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일에 따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악을 배척하고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이라 하여 유대교의 율법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식 때 식사하고 제사에서 제사장들 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
 
성전과 가르침과 제사에서 주인은 받는 자이지 격식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가에서 오병이어가 나온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광야에서 굶주리는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였다는 기록이다.
모세가 애굽을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에 머룰 때 먹을 것이 없어 기도하니 하나님은 하루에 하루분량의 식량만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기적을 행한다.
새벽에 이슬이 걷히면 광야가 온통 새하얀 가루로 덥혀 있었다.
이것을 구워 남자만 오천 명인 유대민족을 먹였다.
고기 투정에 메추라기 떼가 출몰하여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때의 음식을 만나라고 한다.
 
먹을 것의 기적은 모세의 애굽 탈출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베드로와 큰 여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간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께서 함께 계신다.
베드로가 천막 세 개를 치자고 하며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나머지는 예수를 위한 것이다.
이때 구름으로 시야가 가려지고 구름이 걷히니 예수만 계셨다.
예수가 이르기를 여기서 본 것을 내가 죽었다 살아날 때 까지 말하지 말라고 한다.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아가 있는곳 즉 사후의 증거를 보여주신 것이다.
따라간 제자들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모세와 엘리야의 강림은 내가 가게 될 곳이라는 암시이다. 
 
유월절 행사에서 장소를 물었을 때 시내에 가면 물 항아리는 이고 가는 여인을 따라가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마가의 집 연회장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 때를 알고 감람 산에서 엎드려 기도 할 때 “이 잔을 내게서 옮 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 대로 하시 옵소서!“ 하는 염원에서 인간세상의 안타까움이 있다.
예수께서 잡혀 갈 때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가다 가야바 무리들이 의심하여 잡으려 하자 이불을 벗고 도망친 젊은
사람이 있었다.
당시 홑이불은 혼한 것이 아니라 부자 집 물건이었다.
마가의 집안은 부자였다.
일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이 딸린 건물에 살았다고 한다.
 
이곳이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마가의 집에서 지역과 종교행사가 자주 있었다.
예수와 제자들도 여기에서 자주 모였다.
혹자들은 복음서의 내용이 자신의 경험을 써 놓은 것으로 마가 자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은 마태와 비슷하였다.
 
2) 감람 산.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 이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세 개의 봉우리에 오르면 성전이 한눈에 보인다고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죽은 자 중 살아나온 나사로 살던 베다니가 가깝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자주가시는 마을이었다.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멸망할 때 감람나무가 많이 잘려서 사라졌다.
현제는 유대인의 묘지가 더 많다고 한다.
예수께서 다락방 유월절 행사 후 마지막으로 기도 한 장소이다.
예루살렘과 가까워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산이다.
다윗 때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한 곳이 여기이다.
 
3) 겟세마네.
감람산 서쪽에 있는 예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옴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
옵소서!“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기도의 특정지역이다.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이 아니라 여기에서 예수의 체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묻혀 있다는 전언도 있다.
 
4) 진설병(떡)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고 한다.
임재는 임하여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행사가 있을 때 새것으로 바꾸고 묵은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먹었다는 진설병은 새것으로 교체된 묵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음식은 오래두면 상 할 텐데 새것과 묵은 것의 시차가 아리송하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상징하여 열두 덩이로 마련된다.
떡을 마려하여 진열된 상을 진설상이라고 한다.
얼핏 불교와 유교의 재단과 제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이것도 아리송하다.
우상의 숭배와 격식을 위한 상징은 다르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포도주와 떡을 예수의 피와 살로 표현하고 있다.
물질과 형상에서 최소한의 감각적 충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5)마가.
부유한 집안사람이었다.
본문에서 잠깐 서술하였다.
베드로가 아들처럼 아끼는 제자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알려진 것이 없고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구브로 섬에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어찌 되었던 이방인이 예루살렘에 살았다는 것은 신앙심이 깊어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 열린 곳으로 추정되는 다락방이 최초의 교회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베드로가 헤롯에 잡혀가 처형 직전 천사의 도움으로 피하는데 처음 찾아간 곳이 마가의 집이었다.
자주 갔던 곳이라는 의미이다.
마가도 그리스도교의 이방전파를 위해 바울과 동행했으나 도중에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간다.
누가와 다르다.
마가의 기록에서 바나바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레위 족이며 구브로 섬 출신으로 마가와 친척이고 부자였다.
바울(사도 바울로)의 행적에서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마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건국한 여로보암 1세와 같은 에브라임파이다.
마가복음서는 마태와 비슷하여 생략하려 하였으나 하나도 빠트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채운다.
내가 꼬부라져 원만하면 말을 잘 안 듣는 편이다.
이방도 천당 갈 수 있는지 계산이 복잡하다.
2025.5.25일
 
3 누가복음.
1) 본문.
예수와 세례 자 요한의 탄생과 복음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의 초월적 예지와 정체된 학습의 설득이 있다.
두 분 어머니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소통한 방법이 궁금하다.
실증의 요구가 아니라 어떠한 방법의 암시인지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면 믿는다.
제사장 사가랴(즈가리아)와 아내 엘리사벳의 임신은 생리적 한계에서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천사의 설득과 전달에서 태어나는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하였다.
요한을 임신하고 여섯 달 째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의 요셉과 약혼자 마리아에 이르러 성령에 의해 아들의 잉태를
예지하고 초월적 상황에 쉽지 않은 마리아를 설득한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들인다.
 
천사는 요한의 예지와 같이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초월적 현상이다.
그럼에도 천사가 전달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럴 만 하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게 된 마리아는 지체 없이 찾아가 축복하고 자신이 격 게 될 상황을 믿음으로 위로 한다.
아들을 낳았고 가계의 전통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의 전달 대로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였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요한은 부유한 조건의 집안에 머물지 않고 들(광야)로 나가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한다.
이시기에 로마의 황제 옥타비아누스 (BC 31~AD14년) 일명 아구도스는 제국의 호적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한다.
유대사회는 로마의 지배에 있었다.
 
나사렛의 요셉과 약혼자 마리아는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간다.
여기에서 시차의 오해가 발생하고 있다.
수리아(시리아) 총독 구레뇨는 AD 6년 임명되어 인구조사와 호적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유대지역은 무주공산으로 사실상 구레뇨의 통치 지역이었다.
예수탄생 6년 이후이다.
실증주의에서 성경의 신화화라고 주장하고 실존주의에서는 인구조사가 두 번 있었을 것으로 이해를 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베들레헴에 도착하니 마리아의 산기가 임박하였다.
좋은 곳은 모두 호적을 정리하러 온 여행객으로 만원이고 작은 여관에서 아기예수가 탄생한다.
탄생의 신화는 많다.
 
종교의 이해에서 주체의 정체에 대한 실증보다 가르침의 진실을 우선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주체적 대세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선을 설득하고 악을 지배하기 위한 대중적 관심의 수단에서 문학적 표현은 자아의 광야와 시대의 분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과 민생과 인륜을 차별하는 권세와 힘의 지배를 요구하지 않았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찾아 동행하는 최선에서 가르침을 증명할 이유는 적다.
좋은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좋으면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이 모이면 선의 역사와 문화가 된다.
될 만한 싹 가지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하였다.
 
열두 살에 유월절 예루살렘 여행에서 하루 동안 실종된다.
가족여행이 아니라 대규모 이동이었던 것 같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식을 하루 동안 생사를 방치하는 신앙의 불손이 있었다.
뒤돌아가 찾으니 성전에서 선생들과 문답하고 토론하고 있었다.
부모가 걱정하니 “어찌 찾으셨습니까?” 내 아버지 집에 있다는 것이다.
이해 못할 것도 없으나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한 것이 서운할 법은 하다.
종교도 사람 사는 세상의 것이다.
싸 가지에서 그냥두지 괴리 적 혈육의 정에 이끌려 찾아간 것이다.
그래도 낫살에 거역하기 어려웠는지 부모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탄생을 열두 살 자식에게 보았을 것이다.
다베로 (AD14~42년) 로마황제가 통치하던 때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통으로 부임한다.
헤롯 안디바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분봉 왕이다.
가야바는 대제사장이다.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BC22~AD40년) 라는 인물은 가야바 전 대제사장 이었다.
이분도 꽤나 심했던 모양이다.
예수를 체포하여 첫 번째 심문하였고 원하는 증거가 나오지 않자 가야바가 개입한 것이다.
작은 야고보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끌고 가 개종을 강요하고 굽히지 않자 떨어뜨리고 돌로 쳐 죽인 장본인이다.
집안의 권세가 무지하다.
 
광야로 나간 요한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요단강 근처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다.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의 신발 끈도 풀지 못 한다.“ 라고 하며 그가 앞선 자 임을 분명히 하였다.
예수께서 광야에 은거하여 사십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마귀가 시험한다.
육신과 정신의 고행을 견디어 내는 과정에서 감각의 유혹을 내안의 것으로 인내하는 과정의 표현이다.
악마 역시 내안에 있다는 것이다.
대계는 선이나 육신의 고통과 죄와 불의의 선택으로 악이 준동한다.
기도와 참선은 마음의 평정으로 선(무심)의 자아를 지키려는 것이다.
싸우려는 놈에게는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말꼬리의 심보는 주둥이 닫는 것이 답이다.
 
물질과 성취의 다툼이 대세인 현실에 이런 성군은 없다.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유행어가 있었다.
물질사회의 책(학문)과 법의 한계에서 수단을 우선하여 너 죽고 나 살기로 먼저 챙기는 놈이 장땡이다.
옷이 두벌이면 하나를 주고 맨발로 다니고 가난한 자가 달라면 주고 가진 것 없이 살라면 속세의 이웃과 동행이
사라진다.
겉모습 기름칠하고 있어 보여야 쳐다보는 세상이다.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가면 잡혀간다.
예수의 시간에서 이천년 후의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은 거의 사라졌으나 여행객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풍습이 있었다.
 
대표적 시례가 무전여행이다.
신앙이 내제된 유대의 손님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께서 나사렛 고향사람들에게 서운함이 있었다.
과거의 행색으로 시간의 변화를 부정하여 자신들의 현재와 견주려는 선입견이 있다.
낮은 곳이야 동격으로 견딜 만 하지만 어깨 힘들어간 인간들이 제 잘나 위세하려는 것이다.
요즘의 사고로 그때에도 물질과 권세의 기득권에 저항하는 낮은 곳의 변론과 내 것을 나누라는 말씀이 세속에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천년 전이나 요즘이나 문명과 문화의 변화는 있으나 탐욕과 성취와 지배와 욕정 등 인습의 근본적 변화는 크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고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절벽으로 끌고 가 위협할 것까지야 있었냐는 것이다.
성경에는 엘리야를 비롯한 선지자와 하나님의 아들 나는 기적을 행하는 정도가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 나사렛 사람들이 분노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종교와 사회적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사렛은 예수가 성장한 상당히 성스러운 지역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나쁜 실증이 되었다.
유대사회에서 선지자 엘리야의 의식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엘리야와 비교하는 대목이 많다.
성경에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예언 말고는 존재를 거론하는 대목이 적다.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이 있어 예전에 줄줄 외웠던 기억으로 시도해 봤으나 드문드문 세월의 안타까움 있다.
 
누가복음에서 기도문 예시가 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도 이곳에 있다.
레오14세 교황 즉위식 때 어부의 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부는 고기를 낙지만 나는 사람을 낙 는다고 하였다.
기적은 점점 커지고 사람들은 구름처럼 따르는데 예언의 실증이 사두개파와 대제사장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누가복음은 인간사회의 관계에서 예수의 말씀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제단의 떡을 먹고 금식기간에 포도주와 음식을 먹고 마시는 예수와 제자들을 보고 탓하자
주를 위한 떡이고 금식이니 주의 아들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필요할 때 고행하고 기도한다고 하였다.
 
성전이 내 집이라는 말씀과 같다.
주의 아들은 종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나의 앗 수르 수도 니네베 회개를 높이 평가하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구분하였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자 그가 하나님을 주라고 하였으니 주의 아들과 다윗은 동격이 아니라고 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철저한 암시이다.
손에 쟁기를 잡은 자가 뒤 돌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믿음을 뒤 돌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귀신을 쫓아 으나 허하여 귀신이 다시 들어오면 전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배교의 경고이다.
 
중동의 사람들은 척박하고 거칠 은 광야에 귀신이 있다고 의식한다.
우리는 외지고 습하고 격리된 곳에 귀신이 있다고 의식한다.
공통점은 인적이 없거나 드문 곳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이 귀신을 쫓는다.
시장 통에 귀신 있다는 소문은 없다.
아비의 장례를 치르러 먼저 간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의 거취에 맡기고 너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였다.
유대사회는 죽은 자의 무덤을 멀리한다고 한다.
간혹 평장을 하고 위치를 표시하지 않아 사람이 밟고 지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실족이라고 하여 상당히 민감한
거부감이 있다고 한다.
 
꼭 무덤에 회칠하여 위치를 알린다고 한다.
제사장(율법학자)에게 손가락 까딱도 안하면서 무거움 짐은 사람에게 지우고 선지자의 무덤을 만든다고 하였다.
교회라는 말씀은 안 했으나 수많은 선지자의 죽임에 제사장과 그들 선조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다.
제사장은 대를 이어 가문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선조들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회의 기득권 사두개파의 역사이다.
예수시대 유대사회(종교국가)의 특성이 있었을 것이나 민주주의의 시각으로 대제사장의 무소불위 권위는 종교와
정치의 잘못된 관계가 있다.
예수님 말씀과 종교적 이해에서 목자는 옷 한 벌의 고행인데 물질과 권세로 대물림 하는 행색이 배반 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돈 꽤나 들어오는 대형교회 목회자 자리를 대물림 한다고 말씀들이 많았다.
화려한 성전의 가르침을 전할 때 돌 위에 돌 하나 없이 파괴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말씀을 전파하였던 스테파노 성인의 일설이 있었다.
지식의 열쇠는 사두개파의 기득권을 지적하고 유대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세와 물질에 세뇌된 세상의 구원이 필요하고 했던 것이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세상에 이른다는 종교적 진리의 변화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갈등 성자와 성령의 주장이다.
사물과 현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중심 사회는 앞선 자가 죽어야 변한다.
 
종교와 문화의 지배적 정체에서 기득권(안주)의 꼴사나운 우월적 자기중심에 갇혀 창조와 우주가 내 것으로 착각한다.
이직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
누룩은 부풀어 오르는 현상에서 나쁜 것의 전파이다.
선의 오염에서 거짓의 죄악은 놓아두면 상처가 고름으로 상하기 쉽다는 것이다.
상처와 악은 빨리 치유해야 한다.
성경에서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비유가 있다.
세속의 귀속 말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이다.
심판의 날 인명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조심하라 하셨다.
 
쉽게 거짓으로 비방하고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고 오리발로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판의 생리적 무의식의 민 낮이다.
요사이 식당 예약하고 빵 구 내는 노 쇼의 죄악이다.
추수하여 알곡은 곳간에 챙기고 검부러기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운다고 하였다.
착한사람은 천당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는 옥석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는 죄악은 근본이 있어 쉽게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는 좁은 문의 경고이다.
부자가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자는 욕구의 접근에서 가진 것을 나누기 어렵고 탐욕과 욕정의 유혹이 쉽다는 것이다.
없는 놈은 없어서 포기한다.
 
찬치 집에 가난한 사람을 초대하면 기대할 것이 없어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믿음의 가식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누고 베풀 때는 인습의 격과 돌아올 것을 계산하면 베풀고 나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치페이는 종교적 관점이 아니다.
나눔에서 호주머니 가난하면 못 사고 어울리기 힘들다.
이번은 내가 다음은 네 가 이것이 아니라 여유 있으면 깨끗이 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에 들려고 마음에도 없이 베풀고 나누는 것은 믿음의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의 순수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과 자본에 지배된 세속의 인간은 코끼리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인연을 생각해서 적당히 남겨놓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옷 한 벌 뿐인 열두제자와 사제의 길이다.
가르침대로 모든 집과 식량과 의복과 만물이 하나님의 것으로 베풀고 나눈 것이 그리스도교의 개념이다.
근본적으로 사물로 존재하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것으로 사유는 죄라는 것이다.
21세기 속세의 경쟁과 성취의 다툼으로 천당갈분은 없을 듯하다.
미달이라면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으나 천당과 지옥은 풍선이다.
그 짝과 이짝의 제로게임이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씀에서 찬치 집은 예초에 상석이아니라 맨 끝자리 구석진 곳이 좋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세계도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라 구석진 자리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사제그룹과 범인그룹이 따로 있던지 니네베의 구원을 기억하여야 한다.
인간이 모자라 좀 더 많아 합격시키려고 스파르타 교육하시는 것이다.
양 백 마리의 교훈은 7일 중 6일을 죄짓고 안식일에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흔아홉 마리는 죄 없는
양이라는 전제가 있다.
까불다 다친다.
누가복음은 감각적 인간성이 많다.
인간중심 사회의 평등과 평화를 위해 인간의 시각으로 말씀하시고 쓰여 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로 말씀하시고 쓰였다면 인간은 보고 듣고 지식을 총동원 하여도 알 수 없다.
 
유전적시간과 학습의 분별이다.
아직은 시작이나 나의 작은 지식과 이해에서 성경은 인간적 표현이다.
 
2) 당시화폐.
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
세겔 노동자 4일 품삯.
은 달란트 노동자 6천일 품삯.
금 달란트 은 달란트의 15배.
가롯 유다가 받은 삼십 은 달란트면 굉장한 돈이다.
 
3) 성녀 요안나.
헤롯 안디바의 집사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예수와 제자의 여행을 도왔다.
충심으로 예수를 따랐던 부자였으며 귀부인 이었다.
구사는 이방인으로 추정되며 요안나는 유대인이다.
예수의 기적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두 여인 중 한명이다.
이 일로 예수와 제자들을 은인으로 돕는다.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였으며 부활의 날 새벽 향유를 가지고 세여인과 예수의 무덤에 갔다.
부활을 세상에 전파한 세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안나이다.
복음서에서 힌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이미 무덤에 있었으며 예수의 부활을 알렸다.
요안나는 놀라기보다 부활의 예언을 믿음으로 확인하였다.
 
4) 안나(수산나).
안나(수산나)는 성모 마리아의 아버지 요아킴의 아내이면 족보로 보면 예수의 외할아버지 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다.
안나는 외모가 뛰어났다
요아킴은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바벨론에 살았으며 넓은 정원이 있는 부자였다.
유대율법에는 자식이 없으면 재산을 기부할 수 없다고 한다.
요아김과 안나 부부는 자식이 없었다.
광야로 나가 기도하며 자식을 주시면 하나님께 봉헌 하겠다고 약속한다.
기도가 받아들여져 천사의 암시가 있었으며 성모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사건으로 돌아가 두 원로 재판관이 있었는데 요아킴의 집에서 업무를 보았다.
안나의 미모에 미혹되어 흑심을 품었다.
호시탐탐 하던 늑대들이 합의하여 몰래 들어와 정원에서 목욕하는 안나에 달려들어 몹쓸 짓을 시도하였다.
물론 문은 잠 그었다.
롯의 시험에서도 위장한 천사를 겁탈하려는 권세가 있었다.
여성의 지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안나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놈과 간음한 부정한 여자로 모함한다.
당시의의 사람들이 우유부단하였다.
율법에 지배되어 현상의 분별이 떨어진 느낌이다.
사형이 선고되었다.
권세와 무리의 무의식적 무모함에 지배된 정의이다.
안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은 다나엘을 통해 안나에 이르게 된다.
성경에서 군중에게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이 무슨 궤변인가 싶다.
젊은 놈의 의심으로 사건의 중심에 뛰어든 것이다.
재판에서 심문 없이 사형을 선고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하나님의 뜻이 작용한 듯하다.
어찌 되었든 군중은 의심하였고 원로 회에서 다니엘에게 원로자격을 부여하고 심문을 허락하였다.
다니엘은 사악한 두 원로를 분리하여 신문한다.
목격한 현장을 설명하여 증언하라는 것이다.
한 죄인은 유황나무 밑이라고 하고 또 다른 죄인은 떡갈나무 밑이라고 한다.
“딱“ 걸렸다.
성경의 결론은 간결하다.
안나는 누명을 벗었고 두 죄인은 두 동강나 죽었다.
이 사건으로 다니엘은 솔로몬과 견주는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니 권세와 부자가 낙타 바늘구멍 이라는 것이다.
 
5) 회당장 야이로.
회당 장이었다.
회당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이 흩어져 만든 소규모 교회이다.
야이로 딸은 중병에 걸려 사경에 있었다.
예수의 발에 엎드려 딸의 생사를 간청하였다.
복음서에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딸은 이미 죽어있었다.
예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이 비웃었다.
불러 깨우니 잠에서 깨었다.
야이로는 진정으로 예수를 따랐다고 한다.
 
6) 디아스포라.
흩어진 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세계 각지에서 민족의 문화와 언어와 종교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 예가 팔레스티나를 떠나 살면서 자신들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다.
우리에 익숙한 교포사회이다.
성전의 파괴에서 공회의 설명이다.
 
7) 가버나움.
가버나움은 갈랄리 호수가의 유대인 마을로 자비와 위로의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성자와 성령의 가르침을 시작 한 지역이다.
제2의 고향 같은 마을이나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서 마태를 제자로 삼았다.
가버나움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기적을 소돔에서 행하였으면 오늘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돔은 고모라는 아브라함과 갈등을 빛은 롯이 선택한 타락으로 멸망한 도시이다.
예수께서 고향의 인연에 대해 서운한 것이 표현되고 있다.
고라신과 벳새다에 대해 가버나움과 똑 같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기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이미 굳은
삼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하였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가버나움의 북쪽으로 30km 떨어진 도시이다.
시돈은 바알과 이방신을 섬기는 왕국이며 왕 엣 바알은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완악한 왕비 이세벨의 아버지이다.
두로는 시돈국의 도시이다.
유대의 유일신앙이 바알등 이방신으로 포위된 형국이다.
유대의 선지자들은 이세벨의 바알 등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8) 마르다.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당시로는 대단한 노력과 사건이라고 한다.
문제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와 가르침의 상반된 이해이다.
마르다는 대접을 위해 열심히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바쁜데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경청하느라 혼이 없다.
마르다는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를 보며 예수께 마리아에게 일손을 도와주라고 말씀을 청한다.
이에 예수께서 마리아를 두둔하며 한 가지 일에 열중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누가 예수와 가르침을 섬기는지 문제이다.
인간의 시각에서 마르다 이다.
신의 세계에서 마리아 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인간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시간과 학습이 완성 될 때 까지 인간의 인습적 이해가 중요하다는 세속적 판단이다.
 
9)누가.
로마시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 출신의 의사였으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하였다.
헬라(그리스)인으로 바울의 전도를 따라 동행하며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발전에 역할을 하였다.
죄수로 로마에 끌려가 수감되었을 때도 동행하여 곁에 있었다고 한다.
이방인으로 성경을 집필한 유일한 인물이다.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밖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고 로마사람 고넬료에게 침례를 행한다.
신약의 침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다.
물로 머리를 적신다는 의미이다.
세례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나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교 이방전파를 시작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나갔으며 이스라엘 밖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안디옥의 교회가
그중 하나이다.
안디옥은 그리스도교의 외부전파에서 중심지역 이었다.
지금의 튀르키예 안타키아 지역이다.
2025.5.21.일.
 
4) 요한복음.
1) 본문.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천상과 현세의 괴리 적 논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는 보았으되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유대사회는 아브라함의 계보와 모세와 엘리야 등 존재의 뿌리와 선지자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다.
발알 신 등 이방신의 배척하는 유일신앙의 절대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튼튼한 상자 안의 정신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이방제국의 속국을 지나 기원전후 지중해의 강자 로마시대의 유대사회 결속은 외세의 강압에
의한 헬레니즘 문화의 갈등에 있었다.
실존에서 실증주의가 지배를 시작하는 시기이다.
초자연적 숭배와 지배에서 현상의 무지에 의한 무조건적 순종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유전적시간과 학습의 단계이다.
 
성경에서 모세와 이사야의 예언으로 메시아가 올 것 이라는 암시가 있었다.
유대의 역사에서 예수의 시간은 어느 날이 된다.
예언과 유일신앙의 근본에 의해 메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문화적 무의식에서 어느 날 실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은 바알과 이방신의 우상숭배가 원인이었다는 후회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유일신앙에 예속된 어느 날 율법을 달리 해석하고 기적의 행적으로 관심을 유발하는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예수의 출현과 불확실성에서 나라가 사라진 역사의 과거를 상기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예언의 암시와 상상을 초월하는 미지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표식의 요구는 새로운 것에
저항하는 변화의 절벽을 느낄 수 있다.
예수의 노력이 답답할 정도이다.
 
복음서 절반이 너머 가는데 예수의 설득은 절벽에 헤딩하는 꼴이다.
나 같으면 죽든지 말든지 벌써 포기하였다.
유전적시간과 감각적 학습으로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의 설득이다.
끝없이 묻고 답해도 섞일 수 없는 지식의 시간적 한계를 확인하는 정도이다.
차원이 다른 무한적 괴리이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탄생은 국가의 주권을 상실한 민족의 염원으로 선지자의 예언과 암시의 기대가 있었다.
어느 날 출현한 기적과 나눔의 대세적 흐름에서 문화적 절대의 설득은 절벽 같은 미증유에 대한 학습의 한계이다.
아직 지동설 이전 천동설 시대이다.
존재와 우주의 중심은 현세 즉 인간의 세상이다.
 
초월적 존재의 설득은 보고 듣고 만져보아야 하는 사물 적 관점이 지배하는 체험적 기억의 학습적 한계가 있다.
유인원에게 문명을 설명하여 설득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말하니 동격으로 간주하여 견주고 저울질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오지 않고 구름이나 바람으로 왔으면 믿음을 얻는 것이 달랐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과 다른 개체 즉 우상과 이방이 차라리 쉽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사회에서 요구하는 하나님의 세상을 배신하는 우상이고 이방이 된다.
사물 적 개념과 공간적 개념의 차원이다.
일월성신의 한계이다.
해와 달은 보이는 것이고 사물의 형체를 알 수 있도록 어둠의 두려움을 비추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마음 즉 내면의 자아에 있다.
보여서 중명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이다.
인간은 보고 듣는 감각의 실체로만 믿는다.
생명과 물질의 합리적 관계에서 물질과 과학적 증명을 우선하는 감각의 실체로만 믿는다.
예수의 시간은 학습의 단계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실증주의 시간이다.
예수의 시대는 실존의 희석에서 생명과 미지의 가르침을 위한 하나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문명(도시)의 시대에 잊혀 질 초자연적 현상에 예속되었던 자아 적 시간의 기억이다.
물질의 타락에서 생명의 제고이다.
고향사람들이 요셉의 아들 목수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고 한다.
 
사물과 현상적 사고의 한계이다.
과거의 기억을 우선하여 시간과 학습의 내면적 변화를 모르거나 무시하고 이웃의 동격으로 견주어 부정하는 것이다.
아는 놈들이 더 한다.
남에 떡이 커 보이고 사돈이 논 사면 배 아프고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임하는 문제에서 기적에도 불구하고 관념적 학습의 한계가 있다.
유다의 배신과 대의회의 고초에서 가야바 무리들이 선지자라 하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선함을 행하였는데 어찌하여 돌로 치려고 하느냐?“ 하니 유대인들이 ”선함이 이유가 아니라
사람으로 하나님이라 신성모독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일신 하나님의 절대에서 근접할 수 없는 비하 적 선입견과 선택의 불신이 내제되어있다.
 
견주지 않는 자아 적 내면이 아니라 견주어 판단하는 사물 적 선입견이다.
변화의 이해에서 관념적 사고의 국수적 시각이다.
무리와 사회에서 문화적 절대의 무의식이 지배하는 시간과 학습의 정체이다.
예수사후 정치적 이목으로 판단하면 모두가 그래 던 것이 아니라 기득권 집단의 선동이다.
성전에서 장사하고 거래하는 무리들을 내쳤다.
신성의 요구이다.
성전이 시장을 겸하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하던 것 못하면 신에게도 저항한다.
초월적 존재의 강변에서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고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고 강도라 하였다.
 
나는 주인이고 그들은 삯꾼이라고 표현한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를 나를 통해 중계하려는 종교적 의식의 변화에서 아브라함의 존재와 모세와 엘리아 등 유대신앙의 율법
또는 근본을 따르는 무리들의 반론과 저항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행위의 간사함이 없는 목적에서 견디어야 하는 변화와 개혁의 시련과 고통이다.
광야에서 악마와 싸운 사십일이 있다.
기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맹인을 괴롭혀 예수의 행방을 쫒고 행적을 비하하려는 권세의 추종이 사악하다.
가르침을 설득하는 성전과 약자를 구하는 기적의 현장에서 예수와 제자의 행적을 쫓는 무리들이 상당하다.
예수를 죽이려하는 정황이 복음서 곳곳에 있고 위기를 피했다는 대목이 더러 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의 생명으로 현재를 지킬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한다고 한다.
유일신앙에서 우상과 이방의 침략으로 국가를 상실한 이유에서 경계 적 대비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예수의 행적은 유일신앙의 절대에서 하나님의 배신이 아니다.
성자와 성령의 주장에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이른다는 관점의 변화이다.
초자연적 숭배에서 지식에 의한 공유와 소통의 요구로 엘과 바알의 변화에 의해 야훼신앙의 탄생과 발전이 있었다.
종교의 역사에서 변화와 개혁의 학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상식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선지자의 예언으로 메시아의 출현을 의심이나 예지할 수 있었다.
병자에게 기적을 행하고 낮은 곳에서 나누는 가르침은 제도나 격식을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순수한 종교와 일반적 시각에서 예수의 행적은 내버려 두면 하나님의 가르침 선의 결론에 이르는 바탕이라는 것이다.
 
사두개파의 기득권 적 권세와 안주에서 변화와 개혁의 도전이 불안했던 것이다.
유대사회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기적과 행적이 보편성을 뛰어넘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과 갈등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한 믿음을 얻는다.
북이스라엘 멸망 후 바알과 이방신이 창궐하였고 침략에 의한 혈통의 문제가 갈등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아합과 그의 왕비 이세벨과 므낫세 왕이 후 질러 놓은 멸망 이후의 역사가 있을 듯하다.
복음서 반이 넘어가는데 실증의 공방은 결론이 없을 것 같다.
요한복음이라고 해서 요한의 행적 인가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는 답답한 설득이 이어지고 있다.
요한은 헤롯의 망동을 성토하며 앞서고 큰 메시아 예수의 시간을 위해 세례의 전피를 계속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다니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러 간다.

오라버니 나사로를 죽은 자 중에 살리기 위한 것이다.
기름(인연)의 관계가 깊다.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가깝다
제자들은 일부 유대사회의 반감을 의식하여 돌로 치려는 자들이 많다고 만류한다.
하나님의 뜻이다.
마르다가 마중한 동네 어귀에서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른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예수께서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린다.
자료는 두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나사로의 죽음에서 자매와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의 비통함과 예수께서 나사로는 죽지 않고 살아아 있다는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의 없음을 애통해 한 것이다.
나사로의 장례와 예수께서 온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시신은 죽은 지 나흘이 넘어 냄새가 나고 있었다.
무덤의 돌을 옴 기고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니 나사로가 시신을 감싼 베에 말린 채 걸어 나왔다.
이것이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난 기적이다.
기적은 거침없이 전파되어 나아가고 위기를 느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의한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의 중심이 되면 로마가 쳐들어온다고 위해 적 선동을 한다.
시끄러우면 외세를 팔아먹는 속박된 정치이다.

요한복음에는 가야바의 말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간에서 죽음의 희생으로 유대의 백성이 하나가 될
것을 예지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있다.
가야바가 예수께 행한 악의 행색은 그의 것이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이 마련한 예수의 길이라는 것이다.
기적이 더하고 쌓일수록 십자가의 길이 가까워지고 있다.
마지막 유월절 베다니에 이르러 죽은 자 중 살아난 나사로가 예수의 옆에 앉아 있고 부지런한 마르다는 일하고 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고 자신의 머리칼로 닦았다.
가롯 사람 유다가 향유를 팔아 가나한 사람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말하기를 나의 장례를 위해 남겨두라 한다.
나사로의 기적은 유대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정치와 권세는 민심의 원인에 관심이 많다.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 나사로의 신변까지 위협하였다.
십자가의 예지에서 제자의 발을 씻기는 대목이 나온다.
베드로가 안 된다고 하자 나에게 발을 씻기지 못한 자는 나와 상관없다고 하였다.
이에 베드로는 머리와 몸을 씻겨달라고 한다.
예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복음서 15장에 제자를 종에서 친구라고 말씀하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구하였듯이 너희가 네게 구하라!” 하였다.
초월적 존재와 사물 적 현상에서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다.

시간과 학습의 충족에 이른 것이다.
젖은 빵으로 배신의 역할을 표시한 가롯인 유다의 발이 궁금하다.
요한복음에서 젖은 빵으로 유다가 사탄에 빠진 것으로 쓰고 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하기위한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유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시간을 제자들에게 예언하며 그 유명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 니라!“ 이 말씀을 하였다.
십자가의 길이 복음서 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있다.
가야바의 무리들이 잡으러 왔을 때 상황이 마테와 다르다.

마테에서는 유다가 입 맞추는 분이 예수라고 하였다.
유다가 삼십 은 달란트로 매수되어 예수를 팔았다고 하였다.
제자들이 깨어있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요한복음은 유다에게 젖은 빵을 주며 나의 뜻을 행하라고 하였다.
내가 나사렛 예수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가리켜 이들은 죄가 없으니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가야바 시종의 귀를 칼로 쳐서 상하게 하는데 예수께서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책망하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였다.
모든 시간과 사건이 예비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바꿀 수 없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속옷의 제비뽑기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뼈를 상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궁금하다.
십자가의 길 이전이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고난이 교회와 유대사회에 의해 있었다는 것이 의아하다.
최종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속세의 설득에서 공감의 이해는 필요하다.
예수의 시신은 가야바 무리들을 피해 숨어 있던 제자 요셉의 요청을 빌라도가 허락하여 유대의 장례법대로 향료와
함께 세마포로 싸 마침 근처에 있는 새 무덤에 안치하였다.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시간은 막달라 마리아에서 시작한다.
마테에서 세 여인이다.
하나님의 세계로 가기 전 벳새다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를 찾아온다.
갈릴리에 먼저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2) 베데스다 호수.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수산나)가 태어난 곳이다.
병자들이 모여 살았다는 곳이다.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내릴 때 물에 씻으면 병이 낫는다고 복음서에 있다.
예수께서 거동이 불편하여 천사의 물에 씻을 수 없다는 병자의 말을 듣고 기적을 행한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이다.
 
3) 니고데모.
바리세파 사람으로 유대교법에 따르는 판관들 모임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
안나의 기록에서 다니엘의 문제제기와 비슷한 사고로 예수를 비난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율법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죄인을 단정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밤에 예수를 찾아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다." 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 기름(인연)부을 기회를 놓쳐 지만 십자가의 죽음 후 요셉과 함께 예수의 시신을 인수하여 동굴에 안치하였다.
당시의 직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시신을 몰 약과 침향으로 된 향료로 정화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신자가 되어 유다 인에 의해 순교하였다.
 
4) 수전 절(하누카).
안티오쿠스 4세 시절 헬레니즘 문화에 저항하여 성전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기간이다.
8일 동안 촛불을 켜고 봉헌한다.
우상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기간이다.
잔혹한 역사의 한이 스며들어 있다.
헬라는 그리스를 칭한다.
 
5) 에브라임.
창세기 야곱의 손자이며 요셉의 둘째아들이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명 아들 중 한명으로 자매 아내 중 라헬이 늦게 나은 두 아이 중 하나이다.
야곱의 생애가 디테일하다.
나중에 애기할 기회가 많다.
요셉은 사랑하는 라헬의 아이라고 하여 야곱의 지나친 편애를 시기한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간다.
노예 등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에서 성공한다.
야곱은 말년에 요셉의 장남 므나쎄와 둘째 이브라임을 양자로 삼는다.
창세기 유대사회에서 가계의 후계를 지명할 때 오른손을 머리에 올리는 의식이 있다.
요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장자 므나쎄가 아니라 에브라임을 선택한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는 야곱의 자매 아내 레아와 라헬과 두 자매의 시종 빌하와 질바가 낳은 열한 명 아들들의 후손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개의 지파의 권한을 준다.
요셉의 아들 므나쎄와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두지파이다.
가나안 지역을 지배하여 각각의 지파를 형성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열두아들 중 하나인 레위지파를 제사장을 하였으므로 요셉에게 두파의 권한을 주신것이다.
제사장은 총괄 즉 통치자란 의미이다.
모든지파는 레위지파에 생산성의 십분의 일을 부담하였다.
므나쎄파와 형제라서 그런지 왕래가 자유로웠다고 한다.
여호수아와 북이스라엘 을 건국한 여로보암 1세가 에브라임지파 소속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두지파가 이스라엘이다.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적다고 한다.
하나님이 버릴까 말까 할 정도로 행색이 요란하였나보다.
얼핏 보아 좋은 평은 아니다.
 
6) 호산나.
염원한다는 뜻으로 대체로 주소서의 서술적 의미가 있다.
구원하여 주소서!
*시온은 신성한곳을 가리킨다.
*다데오는 유다라고도 하고 예수의 제자 작은 야고보라고도 한다.
 
7) 만나.
최후의 음식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모세의 애굽 탈출에서 광야에 머물 때 먹을 것이 부족하여 불평불만이 많았다.
어려움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내려준 식량이다.
새벽에 이슬이 걷힌 뒤 하양 알갱이들이 광야에 널려 있었다.
이것을 모아 빵처럼 구워 먹었다.
하나님께서 하루 식사량 이상을 체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루의 식량 이상을 수확하여 남기면 썩거나 벌레가 꼬였다.
단 안식일 전에는 이틀분의 시량을 체취해도 썩거나 벌레가 꼬이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 때의 오병이어는 모두가 오천 이었으나 모세 때에는 남자만 오천이었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투정에 간혹 메추라기 떼가 출몰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이때의 식량을 만나라고 한다.
 
8) 사도 요한.
어촌마을 벳새다에 살던 세베대와 살로메의 두 아들 큰 야고보와 요한에서 요한이다.
살로메는 주님의 나라가 융성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 곁 좌와 우에 두어달라고 부탁한다.
예수께서 “내가 받을 잔을 너희가 받겠느냐?” 하고 물었다.
큰 야고보는 열두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요한은 예수께서 어머니를 부탁하였다는 계시록의 작성자이다.
십자가의 고난 당시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어 골고다의 형장에 갈수 있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어머니와 요한에게 “여인이시여 이제부터 어머니의 아들이고 너의 어머니 이니라!”하였다.
열두제자 중 나이가 제일 적었으며 유일하게 천수를 누렷다.
이것을 죄인처럼 아프게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세례 자 요한하고 혼동이 있었다.
2025.5.23.일.
 
5 사도행전.
1) 본문.
예수사후 그리스도교의 미래와 방법을 논의하고 실행한 기록이다.
미래를 시작하는 장소는 일백이십 여명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넓은 회의장이다.
마가의 다락방이 연상된다.
제자와 예수주변의 여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가롯사람 유다는 없다.
베드로가 유다의 배신에 대해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삯으로 아겔다마(피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삐져나온다고 하였다.
사람이다.
유다가 빠진 자리를 바사바라고 하는 요셉과 맛디아 중 제비뽑아 맛다이가 선택되어 사도의 수에 들어갔다.
 
예수가 아닌 사람의 선택으로 열두제자의 자리에 선택된 영광이다.
두 사람은 예수와 제자들이 활동할 때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도왔던 유대사람이다.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언급에서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이천년 후의 일이다.
앗 수로의 수도 니네베의 회계를 시작으로 성령이 유대와 갈등에 있는 사마리아와 온 누리에 전파 될 것을 제자들과
주변에 암시하였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대의 땅을 벗어나 오늘에 이르게 된다.
오순절 행사에 신께서 강림하여 갈릴리 사람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세계의 언어로 저마다의 혀에서 불이 났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취해서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하였다.
 
자아 적 내면과 암시의 진실을 형색으로 쉽게 판단하여 알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사후에도 이르고 있다.
유대의 율법에 의해 이방 즉 타민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에 머물던 그리스도교의 인류적 시작이다.
좋은 것은 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환상과 꿈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 요엘(BC 9세기경)의 예언이 있었다.
제자와 주변이 여전히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민심이 예수의 기적과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교회와 권세의 후회인지 종교의 관용인지 “내게 구하라!”는 말씀으로 인류적 대세의 시작이다.
사두개파의 안나스와 가야바 무리가 공회에서 예수의 기적과 선을 전파하는 제자와 주변을 강제하려 하였으나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가르침을 거론하지 말라고 강요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로 땅위에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씨(집안)의 문제로 그 짝이 아직도 거칠다.
구브로 섬의 레위 족 마가의 친척이고 부자였던 바나바가 전답을 팔아 헌금하였다고 칭송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바나바를 기억해야 한다.
다방면으로 기독교와 전파에 기여한 노력이 많다.
재산을 팔아 감추었다가 비명횡사 했다는 아나니아와 아내 삽비라 말씀을 들으면 요새 사람들 교회 근처도 안 간다.
헌금과 긍휼에서 옷 한 벌의 가르침으로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나눔이 실현되었는지 물질과 자본의 성취에 지배된
현대의 시각으로 기대하기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계속되고 예수의 행적으로 충만 하자 공회의 대제사장이 수하를 부려 사도들을 잡아온다.
괴리가 있는 것은 로마와 유대의 왕정이 있는데 교회가 사람을 벌하는 문제이다.
 
로마가 치열한 야훼신앙의 근본을 어떻게 지배하였는지 힘이었는지 신앙의 자유였는지 그렇다고 교회가 삶과 선택을
강제하여 걸핏하면 돌로 치고 죽이는 역사는 실존에서 자아의 실현이 아니다.
율법의 강조에서 예수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죄짓는 자를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였다.
아리송하면 넘어가는 것이 편하긴 하다.
공회는 의견수렴에서 우리 편이 아니라 민심이 모이는 다양한 장소이다.
권세와 추종하는 무리들이 강압하려 하였으나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기적과 선함을 강변하였다.
고기나 잡는 어부의 지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대율법에 견주어 기적과 가르침을 강의하니 놀란다.
겨자씨의 가르침에서 네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였다고 하니 관리들이 저 작은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올 리 없다고 하였다.
 
만물을 형상화하고 사람을 행색으로 판단하려는 헬레니즘 문화의 근원을 볼 수 있다.
초월적 존재의 근원 자연과 내면의 자아를 소홀히 하고 있다.
대제사장과 무리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였다.
온 누리의 씨앗이 되어야 하는 유대의 율법이 걸핏하면 죽인다.
밤중에 사자들이 찾아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이끌어 백성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한다.
무리들이 심문하려고 옥에 가니 문은 잠겨있는데 안에 잡아가둔 사도들이 없다.
멀쩡하게 성전에서 설교하고 있는 사도들을 다시 잡아왔으나 민심이 두려워 어찌하지 못하고 공회에서 심문한다.
악의 무리들이 굽히지 않는 사도들에게 해를 가하려 하자 바울의 스승이었던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나서 사도를 격리
하고 제사장과 무리에게 십자가의 길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과거에 드다가 일어나 여호수아와 비교하고 신을 모방하여 사백여명이 따랐으나 그가 죽자 흩어져 사라졌다.”
“호적할 때 갈릴리의 유다가 세금문제로 백성을 선동하였으나 죽자 그의 추종자도 사라졌다.”하며 예수가 사람이면
그의 사람들도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사도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율법의 대적 자가 되는 것이니 두고
보자는 제안이다.
당시에도 사이비들이 솔 찬 했었던 것이다.
호적정리는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려는 로마의 제도정비이다.
대제사장과 무리들이 돌로 치자니 사람들이 두렵고 자신들이 행한 독선의 정당화도 필요한 것이라 동의한다.
이로써 가르침과 전도의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다.
공회의 의견수렴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인류적 기여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중요한 대목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가 자세히 적혀있다.
해박한 지식은 하나님에 의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돌 처형이 결정될 떼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사도만 남겨두고 유대와 사마리아 땅을 흩어진다.
스테파노의 순교로 피하여 흩어진 신앙에 의해 기독교가 세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돌로 내칠 때 옷을 챙기던 사울(사도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교회를 박해한다.
후일 이 사람에 의해 주객이 전도되어 기독교가 이방에 전파된다.
 
사도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믿음 전파하고 성령이 이르자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이 세례를 위해 간다.
예수사후 성령의 전달과 세례는 내게 구하라는 말씀에 따라 열두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세례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한다.
천당 가는 기차표 파는 사람들 시조이다.
베드로는 돈으로 성령을 살수 있다는 악행으로 망할 것이니 회개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두려운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의 기도가 나에게 이르지 않도록 하여달라고 한다.
추수하는 날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지는 쭉정이의 가르침이 무서운 것이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울이 공회의 일로 다메섹에 가는 길에 성령이 이르러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하늘의 계시에 “주여 누구시나이까?”묻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말씀하시고 다메섹에 가서 내가 보낸 사람을 만나라 하였다.
유대의 율법에 따라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주라 호칭하는 것이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였다.
다메섹의 제자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불러 기도하는 사울에게 가라고 이른다.
제자는 교회와 교인을 박해한 행적을 고하나 사울의 사명과 고난을 계시하고 따르라 한다.
사울의 회개와 사도바울의 탄생이다.
다메섹에서 공회의 임무를 거절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말씀을 전한다.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명령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포박하여 끌고 가야 하는 바울(사울)의 역전에 놀란다.
예수의 부름으로 회개하여 이방에 기독교를 전파한 중요한 사도가 되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방 전도기이다.
대제사장을 따르는 무리들이 사울의 배신에 분노하여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며 죽이려 하였다.
제자들이 줄에 매달린 광주리에 담아 성벽 너머로 탈출시킨다.
예루살렘으로 간다.
열두제자를 만나 사귀기를 청하나 교회를 박해한 행적을 아는지라 두려워 꺼린다.
여기서 앞서 기억한 마가의 친척 바나바가 나선다.
바나바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강림과 다메섹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여 회개의 이해를 구한다.
용서는 가르침이다.
복음서에는 바울은 실존을 주장하고 헬레니즘에 저항한 헬라 파 유대인들과 어울렸다는 말씀이 있다.
 
특별한 암시가 있을 것이다.
병자를 고치는 예수의 기적은 유독 베드로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로마군인이 있었다.
하나님의 신앙으로 기도하던 어느 날 천사가 이르러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찾으라 한다.
어떠한 경우나 경로인지 알 수 없으나 유대율법의 처절한 수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방인이 야훼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까지 무어라 말할 수없는 것이다.
보낸 사람들이 이르렀을 때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음식이 담긴 바구니가 내려온다.
열어보니 각종 네발달린 짐승과 벌레와 날개달린 새가 있다.
 
하나님께서 잡아먹으라 하니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하며 세 번째 바구니를 시험하지 못한다.
이때 고넬료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정을 들은 베드로는 짐승바구니의 예지를 이해하고 일행과 가이사랴를 찾아간다.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곳이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사귀지 않는 규범 같은 인습이 있었다.
당시 기독교가 유대사회를 넘어야 하는 고난이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과 세례가 하나님이 명하신 이방의 최초 전도라는 생각이다.
학습의 한계에서 시간의 충족이다.
지식은 학습의 한계에서 시간에 의해 넘치는 것이 순리이다.
 
다음창이다.
스태파노 성인의 죽음을 환란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사회와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커다란 사건이다.
성경에서 돌 처형의 잔인함으로 걸핏하면 죽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전파를 이어갔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파의 중심이 된다.
이때 헬라(이방)인들이 어떠한 이유이든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유대율법에서 이방은 철저한 배척이었다.
접촉도 꺼리는 이방인에게 세례는 배교이다.
초기 이방의 교회에서 유대인에게만 가르침을 전파하였다는 정황을 알 수 있다.
 
유대사회의 보수적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종교의 인류적 전파는 권세나 지배로 어쩔 수 없는 문화적 한계에서 시간의 충족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상황을 인지하고 바나바를 보낸다.
다소에 있는 사도바울을 찾아 이방의 교회로 동행한다.
본격적 사도행전이다.
헤롯의 박해는 계속되어 살로메의 아들 큰 야고보가 유대의 무리에 잡혀 희생된다.
희생에 대해 복음서의 기록은 없다.
율법과 이방의 관계적 지배에 있는 유대인들이 기뻐하였다는 정도이다.
이를 본 헤롯은 민심의 반응을 의식한 정치적 계산으로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다.
 
꿩도 잡고 닭도 잡아 굿판 벌이려는 것이다.
베드로를 유대의 백성들 앞에서 박해하여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수작이다.
열두제자와 사도들의 시련과 고난이 다시 시작되었다.
형장의 배우로 전락하기 전 천사가 나타나 따르라고 한다.
천사는 사라지고 마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연회장으로 간다.
옥에서 탈출하여 최초로 찾아간 곳이다.
문을 두드리며 말하니 여자아이 로데라가 듣고 베드로라는 것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놀라 천사인가 하고 나가 문을 여니 베드로였다.
형장으로 끌려가 순교당하기 전날이다.
 
헤롯은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벌레에 먹혀 죽었다.
어찌 되었든 교회와 교인의 분노이다.
안디옥 교회에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이라는 사람이 바나바와 바울과 시므온과 루기오와 같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방전도에서 역할이 기대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섬 구브로에 전도하러 떠난다.
열두제자 중 나이가 가장적은 사도요한이 동행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마술을 견제하는 말씀이 있다.
거짓의 속임수라는 이유일 것이다.
이익과 관계없이 알고 속는 것은 감각과 인지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바울이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하나님 사이에서 대립하는 마술사 엘루마의 눈을 잠시 멀게 하였다.
총독이 좋아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구했다는 것이다.
다윗과 승계자 예수의 정제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죽어 썩는 자와 죽은 자중 살아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하여 가르침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비방하자 너희를 떠나 이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유대를 구원하겠다고 하였다.
토속적 신앙의 고착화에서 종교의 인류적 변화와 개혁이다.
유대의 비방과 박해를 발의 티끌이라고 하였다.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사는 개의 표현이다.
 
상당히 심했던 모양이다.
아시아와 길리기온 사이에 있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전도도 쉽지 않았다.
루스드라 1차 선교에서 하나님과 사도를 위해 제사지내는 것을 이단으로 심하게 야단하여 하지 못하게 한다.
전도의 진실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행적을 추적하여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찾아와 박해하였다.
붙잡아 돌로 쳐 죽은 줄 알고 내쳐 놓았으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다.
당시의 박해로 죽었다면 기독교의 미래가 어찌되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르침을 배척하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이 사도들을 돌로 쳐 죽이려는 악행이 여전하다.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다.
 
사도들에게 이방의 전도와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예루살렘은 이해하였고 바나바와 바울의 일행에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를 동행하여 안디옥으로 간다.
이시기 이방선교에서 율법의 짐에 매이지 말고 우상숭배와 음행과 목매여 죽이는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설교하고 있다.
후에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 상주하고 유다와 실바는 돌아온다.
최초 베드로의 로마군인 고넬료의 세례에서 바나바와 바울에 의한 안디옥과 주변도시의 전도가 예루살렘과 가르침을
공유하는 시간에 이르렀다.
안디옥 주변의 전도를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준비할 때 바나바가 마가의 동행을 구한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신들을 떠난 마가의 합류를 반대한다.
다투었고 여기에서 각자의 길을 간다.
 
바나바는 마가와 동행하여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동행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난다.
2차 전도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데 어머니는 유대인 이었으나 아버지는 이방의 헬라인 이었다.
디모데가 합류한 바울의 일행은 계시에 의해 알렉산더대왕의 고향 마게도냐로 향한다.
도중 빌립보에 머물며 기도처를 찾던 중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옷감 장사하는  여성 루디아를 만나 그의 집에서 유하며
가족에게 세례를 준다.
유럽최초의 기독교인 이라고 한다.
이방의 전도가 일반화 되고 있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루디아가 바울일행의 행적과 목적을 알고 반강제로 청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기적과 행적에서 구전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하러 가는 길에 주인의 이익을 위해 점치는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자라고 소리 지르며 몇 칠을 따라온다.
바울이 일러 귀신을 쫒아주었다.
주인들이 여자를 치유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하였다고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 이라고 칭하며 관리에게 고발한다.
기적을 행하고 이유 없이 잡혀 매질당하고 옥에 갇힌다.
로마의 사회도 참 힘들다.
밤중에 기도하니 묶인 것이 풀어지고 옥문이 열렸다.
겁먹은 간수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치료하고 음식을 주며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의 권능인지 로마사회의 법률인지 다음날 관리가 사람을 보내어 풀어주라 하였다.
로마사람을 이유 없이 끌고 가 매질하고 가둔 것을 항의하고 사과를 요구하자 주인들이 구하여 떠나기를 청하였다.

유럽최초의 기독교인 루디아의 집에 들러 떠난다.
헬라인에게 가르침의 전파가 이어지고 유대인의 시기와 박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었을 때 유대인이 시비하여 법정으로 데려간다.
비난할 때 그리스도교의 정체와 유대의 율법을 강변하며 변론하자 갈리오는 부정하거나 불량한 행위가 아니면 유대의
법에 따라 행하되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며 유대인들을 몰아냈다.
사도들의 행적에서 일벌어지면 유대인이고 율법이다.
당시 유대사회의 규범과 의식에서 야훼신앙과 그리스도교의 뿌리 깊은 갈등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이다.
형상을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세공들과 마찰도 있다.

형상을 통해 이방신과 우상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에 예속되어 있는 현대의 시각으로 예술적 감각에서 아름다움과 자아 적 신앙의 차이이다.
예술적 가치는 지성에 이르는 현대의 문화이다.
학습은 시간에 의해 진보한다.
베드로가 행하던 기적의 행적이 바울에게 있다.
심심하면 나온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일행이 두로에서 머물다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전도사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 묵었다.
선지자 아가보가 와서 띠로 자신의 수족을 결박하며 바울의 고난을 예언하였다.
길을 떠나며 말리는 일행과 제자들에게 나는 결박되고 죽임을 당해도 예수의 뜻으로 가야한다고 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예루살렘 여행을 계속한다.
 나사르를 죽은 자중 살리기 위해 돌팔매를 염려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다니로 향하는 가르침이 있다.
결국 아가야의 도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의 선동으로 그리스도교를 이방으로 보는 율법에 의해 잡혀간다.
사도바울은 스테파노 성인의 돌 처형 때 행한 자의 옷을 지켰고 유대의 율법에 따라 교회와 교인을 박해하였으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성령으로 회개한 일련의 시간을 증언한다,
자신은 유대의 바리새인이며 태어날 때부터 로마사람이었다고 하였다.
공회는 술렁이었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대립이 발생한다.
예수의 시대에 씨가 같은 아브라함 자손끼리 율법과 초월적 미지의 설득에서 갈등이 많았던 것이다.
현명한 천부 장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에 끼어 다칠까 염려하여 영내로 이동시킨다.

영내는 예루살렘과 상당한 거리에 있는 도시 가이사랴 이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사회의 율법적 집착은 계속된다.
심리와 변론을 이유로 공회의 진행을 요구하여 영내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호송될 때 살해를 모의한다.
다행히 바울의 생질이 듣고 천부 장에게 알린다.
천부 장은 총독 벨릭스의 결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보호한다.
총독은 죄가 심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백부장에게 일러 지키되 자유와 친구들의 도움을 방해하지 말라고 한다.
두해를 그렇게 보낸다.
총독이 베스도로 바뀌고 또 다시 유대사회가 시기하여 고발한다.
십여 일 후 가이사랴로 이동한 총독 베스도의 심문에도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베스도는 유대인이 바울을 해치려 한다는 전후사정을 알면서 통치의 이유에서 민심의 시선을 의식한다.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심리를 진행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로마사람으로 가이사(황제)에게 상소한다.
로마의 제도가 헬레니즘 문화의 근거에 있는듯하다.
수일 후 헤롯 안디바의 조카 유대 왕 아그립바와 그의 딸이 총독에게 문안 인사하러 가이사랴에 왔다.
총독 베스도가 사도바울의 문제를 설명하니 자신도 관심이 있다고 하여 심리에 참석한다.
가이사에게 상소가 받아들여진 관계로 심리는 형이 아니라 진실과 증거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로마황제에게 제출할 자료의 보충이다.
모들 것을 들은 유대 왕은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여기서 풀려났을 뻔하였다.”라고 하였다.

헤롯이 조카는 잘 두었다.
복음서에 우리라고 표현하는 곳이 자주 나온다.
등장인물 외의 동행자가 있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을 집필한 누가라고 판단할 수 있다.
바울을 포함한 죄수를 호송하여 로마로 가는 뱃길은 험난하였다.
폭풍으로 파도에 휩쓸려 조난되어 떠돌다 멜리데(몰타 섬)라는 섬에 가까스로 상륙한다.
주민들의 보살핌이 있었고 독사에 물리고 아무렇지도 않았고 족장가족의 병을 고쳐 기적을 행한다.
멜리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뱃길에 당시 가장 큰 항구도시 보디올에서 친구들을 만나 이레를 머문다.

로마에 도착하여 친구들의 환영을 받는다.
지금까지의 이해는 예수시대 종교의 변화와 개혁에서 유대의 율법과 성자와 성령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의 갈등이
많았던 것이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핍박하여 로마인에게 죄수로 넘기었다고 하였다.
처음으로 죽지 않고 살았다.
사도바울의 행적이 중요한 것은 로마의 지배에서 유대의 울타리에 갇힐 번한 기독교를 인류사에 전파한 것이다.
 
2) 데오빌로.
하나님의 친구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다.
집필 가 누가가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였던 존재이다.
 
3) 아겔다마.
피밭이라고 하며 가롯유다가 목매여 죽은 장소이다.
유다가 죽은 후 은전으로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들었다.
십자군 전쟁 때 시체를 매장한 장소이다.
예수가 체포될 때 제자들이 이곳의 동굴로 피했다고 한다.
 
4) 바사바(요셉).
유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두 사람이 천거되어 제비뽑기 하였는데 이때 탈락한 사람 요셉이다.
항상 예수와 제자들 곁에 있었다.
바사바 유다는 다른 사도로 실라와 같이 바나바와 바울을 따라 안디옥에 갔다.
 
5) 맛디아.
예수가 아니라 사람에게 뽑힌 어찌 보면 13번째 제자이다.
요셉과 제비뽑기하여 유다의 빈자리를 채웠다.
 
6) 그레데인.
그레데 섬사람이다.
성경에서 표현이 좋지 않다.
지중해 가운데 있는 제주도 6배의 큰 섬이다.
사도들이 선교를 위해 노력한 섬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나쁜 이미지로 표현된 성경의 말씀을 여기에 다 써놓기 그렇다.
 
7) 요엘.
BC 9세기경 선지자이다.
예언의 해석에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개의 희망이 동시에 있고 십자가의 길 등이 있다고 한다.
환상과 꿈 애기도 있다.
 
8) 몰록.
고대 가나안과 페니키아의 신이다.
대단한 신이다.
거대한 신상을 가열한 뒤 오른쪽 팔에 갓난아기를 죽여 올려놓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솔로몬 왕은 몰록을 숭배하는 신전을 세웠고 사악한 유다 왕 므낫세는 자신의 아이를 제물로 하였다고한다.
1차 갈그미스 전투에서 사망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으로 단절되었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다.
 
9) 레판.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다.
유대인의 애굽 탈출 시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였는데 유대의 율법은 이것은 몰록의 장막과 레판의 별을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이방신의 이유가 애굽 탈출의 역사이다.
모세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이방신으로 유대사회의 오염을 염려하였다는 종교적 해석이 있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이 말씀은 몰록과 레판의 잘못된 숭배에서 구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대단하다.
역사학으로는 군사적으로 부족하였다는 이유를 적시하고 있다.
 
10) 간다게의 내시.
간다게는 에티오피아 여왕이다.
사도빌립이 여왕의 내시를 전도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이다.
한사람의 만남으로 나 중이 창대하다.
 
11) 다소.
사도바울의 고향이다.
 
12) 시므온과 루기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5명 중 두 사람이다.
5명은 바나바, 니게르라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키레네) 사람 루비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과 사울이다.
이방전도에서 역할이 기대되는 사도들이다.
 
13) 브리스길라와 아퀼라.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가 기독교를 믿는 유대인들이 많아지자 추방한다.
디아스포라의 고난이다.
대체로 고린도로 이주한다.
이때 이주한 부부로 추정된다.
브리스길라가 부인이고 아퀼라가 남편이다.
여성을 앞세운 것은 여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부인은 명문가의 딸이고 아퀼라는 노예였다고 한다.
굉장한 신분의 사랑이다.
천막 제조업을 하였다.
2025.5.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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