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학문과 현상. 본문
265 학문과 현상.
1) 주말주차.
주민생활 배려 없이 주말에도 주차단속에 여념이 없는 행정이 아리송하다.
주말은 쉬어야 일한다.
자동차는 필수품이다
가난한 자는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머리에 이고 주말을 보낼 수 없다.
행정이 법치를 지나치게 적용하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평일의 교통방해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야간과 주말에 주변도로에 주차하고 있다.
단속이 능사가 아니라 대책이 먼저이다.
대책 없이 주민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무책임한 행정이다.
가난이 죄라면 그렇게 고지하면 된다.
궁금한 것은 형평성이다.
관내도로의 수백 수천대의 단속이 동시에 이루지면 주민생활 불편이 발생한다.
특정하여 집행하면 행정의 가렴주구이다.
4월27일 오전 9시53분이면 일요일 오전이다.
2025.5.13일.
2) 초월적 존재.
학문과 종교가 궁금하여 어머니가 남긴 성경을 읽고 있다.
인류의 시간과 미래의 의심에서 탐구이다.
사물과 현상은 변화하는 것으로 인간과 문명의 현세에서 절대는 없으나 초월적 존재를 따르는 참 종교는 인류의 미래에
유익한 학문이다.
유전적시간과 학습의 한계에서 문화의 절대적 사고에 정체되는 권태의 갈등과 다툼으로 파괴에 이르는 지식의 생태적
불안정에서 예지하여 순리와 평화의 생산성에 기여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종교를 선택하라면 불교에 가까운 사람이다.
허나 참 종교의 유익함에서 학문적 접근은 자아와 자유의 광장이다.
가능하면 문화와 문학과 학문의 전문성 외에 내가 참 종교로 판단하는 4대 종교의 경전을 살펴보고 싶었다.
머리맡에 있는 성경에 손이 우선하였다.
요한일서에서 계시록을 먼저 읽고 생계의 시간으로 미루다 작정하고 펴들었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철학을 담고 있는 관계로 대중문화의 익숙함이 많았다.
일상에서 구전으로 공유되는 말씀의 속살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옥석의 분별을 위해 대부분 구전의 비유적 표현이다.
제자들에게는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 표현으로 진리를 말씀하신다 하였다.
다행하게 통신사회는 성경의 야사와 직설적 표현으로 역사와 기적을 설명하고 있어 범인의 이해를 돕고 있다.
가지와 잎이 풍성한 줄기 즉 비유의 학문적 해석에서 시장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토 달면 나름으로 줄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어지간히 완성하고 확신에서 공유의 불안에 있는데 간밤에 불한당의 무리가 쳐들어와 위협하고
강압하였다.
그중 가장 어리석고 작은 놈이 큰 칼 들고 무작정 덤벼들었다.
코끼리에 쫒기다 우물에 뛰어들어 넝쿨을 부여잡고 아래를 보니 독사가 우굴 거리고 위의 넝쿨은 힌 쥐와 검은 쥐가 갈아
먹는 형국이다.
팔자가 더러워 꿀은 없고 이유 불명한 가위눌림 당했다.
무엇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마귀의 위협인지 우물쭈물하는 처지에서 요나에게 행한 체벌인지 분별이 어렵다.
아리송하면 이판사판 내지르는 것이 낫살의 답이다.
까짓 것 손해가 있어도 남은 것이 적다는 산수이다.
부처님께 조금은 송구한 하나님의 뜻이다.
밤새 뒤척이다 머리통 비우지 못해 오늘도 밥 공장 가동이 어렵다.
일상에 지쳐 조금의 여유로 몇 칠 눈 감고 피난해 보자던 것이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머리맡에 있는 미증유의 미련이
보름의 위기에서 한 달은 귀신들과 싸워야 될 것 같다.
2025.5.19일.
3) 정의와 배반적 분노.
주변의 민심이 흉흉하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양극화의 일희일비에 앞뒤의 눈치가 개밥에 도토리이다.
사선에서 타의에 벗겨진 알몸으로 사는 것이다.
자아와 자유가 불안정 하다.
사는것이 깃발 정치의 일희일비에 갈대 같은 처지이다
어쩌겠는가 성경처럼 깨끗하게 극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자아의 분노는 정의이나 시궁창에서 견디는 것이 삶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왠만하여 원한다면 육신을 정리하는 성경의 확실함도 있을 것이다.
자기중심적 경계와 멸시에서 극단적 선택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 지배를 충동하면서 초월적 주인과 개의 관계를 의식하지 못한다.
개별적 개체에서 시간과 학습의 한계이다.
전체의 무지에서 아직도 육신을 지배하는 권능과 절대가 필요한 세상이다.
힘의 지배에 예속되어야 비로소 정의를 이해하고 비참함을 안다.
지구의 껍질에 비일비제하며 우주를 논하는 무지이다.
육신을 죽여도 생명으로 환생한다.
무지가 진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다."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짓어데는 개들의 세상이다.
겨자씨 안에 예속된 또 다른 겨자씨 안의 겨자씨이다.
정의는 썩은 주체에서 피 빚 살점에 바둥거리는 소금 같은 것이다.
포도밭의 가르침에서 멸절은 인내의 한계가 있다.
2025.5.19일.
4) 창세기.
사람들이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하는 것은 대의와 선에서 가능한 것이다.
울타리의 깃발에 줄서서 멀쩡한 인격 붙들고 내 것이라고 씨알 안 맥 히는 고집이다.
자아와 자유는 온전한 내 것인데 분별없이 울타리의 승부에 구속되어 우리 편 아니면 낮 바닥 서러운 것이다.
제 잘난 행색이 섣달 대문 밑 얼어붙은 개 밥 그릇처럼 한심하다.
창세기 사나워 피하지만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은 라면가락 걸린 하수도구멍이다.
창세기 하니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형광등은 어설픈 지식이다.
한글사전에 창세기는 대장과 소장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가랑잎도 안 되는 식견과 고집으로 선택의 자유에 개입하는 창세기 없는 처신은 창조와 우주가 없다.
한마디로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많고 할 일 없는 심심한 중생들이 괜 시리 들쑤시고 간섭하여 하루의 지루함을 견디는 것이다.
너 잘났다고 엎어져도 뒤집어져도 내 것 이면 하나님이다.
초월적 존재의 모방이다.
주제를 알아야 복 받고 천당 간다
선거 때라고 아무리 낮 바닥 치장해도 우파적 사고와 역사의 행색은 감출 수 없다.
중도를 바보 취급하시면 추수 날 기다릴 것 없이 지옥행이다.
21세기의 정치에서 중한 것은 합리성을 우선하는 실용주의 이다.
우상에 기대는 계엄의 난세에 허우적거리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와 관세전쟁에서 추상적 개념의 좌우논리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성장 율 빵 퍼센트에 낮 바닥 두꺼운 줄 알아야 한다.
시장에서 생산과 분배는 상호작용의 관계이다.
추상적 좌우논리가 경제의 주체가 아니다.
민생과 경제는 결과를 우선해야 하는 실용주의이다.
좌우논리의 정치를 우선하여 기업과 노동을 차별하는 시대가 아니다.
권력기관의 국회 이관에서 다수당의 관리는 어불성설 이다.
정당이 아니라 독립성을 우선하는 국민의 의지에 의한 국회법과 제도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국가권력기관의 분산이다.
2025.5.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