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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박세욱. 2024. 11. 9. 19:55

147 작별하지 않는다(단절).
들판 지나 멀리 산자락이 시작되는 경계의 아쉬움이 있었다.
증조부는 고향집에 터 잡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낮은 산자락에 이르는 시선의 자유를 생각했다.
수룡귀지에서 가전리와 재난리 지나 백구 정 상상봉으로 이어지는 마당의 세상이었다.
백구 정 상상봉은 만경강 제방에 이르렀다.
건너 방 앞에 있는 대청 문을 열면 마당 넘어 들판 지나 산자락까지 수키로의 시선이 마음의 넓이였다.
멀리 하늘빛 보다 진한 모악산의 균형 잡힌 산세가 시야의 사물을 담고 있다.
들판은 생활의 풍요이고 모악산의 균형은 정신으로 충분하였다.
고향집에서 동쪽으로 이백여 미터 떨어진 호남선 철도의 뚝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수신의 시선을 막았다.
철길뚝에 막힌 시선의 아쉬움이 많았다.
 
언젠가 청년이 되면 철길 넘어 들판 지나 낮은 산 구릉사이로 감춰진 길 찾아 모악산에 가고 싶었다.
20대 전후 낡은 옛집 헐고 새집을 지었다.
당시 지붕을 내리고 상량을 해체하며 70년 세월이 지난 기독교 집안의 기록이 있었다.
한반도 역사의 상처를 잉태하던 1900년대 초반이었다.
열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청년과 부용 넘어 돗꼴마을의 처자가 한집안을
이루었다.
일제의 호남지역 곡창지대 수탈과 산업사회의 산물 철도의 악연이 나에게 있다.
철도의 높은뚝이 들판의 풍요와 산자락 넘어 모악산에 이르는 미지의 시선을 차단하였다.
대청에서 한없던 평화의 간섭이다.
 
삶에서 시선이 막힌 환경적 지배의 값이 있었다.
철길 뚝의 음산한 불길함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으로 나를 가두었다.
철도가 지역의 정신에 개입한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 그렇다.
부용 역에서 수룡귀지의 급 커부 지나 달리는 상행선 열차가 만경강 제방높이의 오르막에서 증기기관차의 무게를
버티고 있었다.
칙칙폭폭에서 칙익칙 포옥폭으로 관성을 상실한 기차는 뛰어가 잡을 정도로 속도가 떨어졌다.
무작정 서울상경의 시골탈출에서 만경강 제방 전 느린 기차는 차표의 비극이 많았다.
차표 없이 타고 가던 사람들이 부근에서 뛰어내리는 사고가 종종 있었다.
 
살은 자는 사라지고 다친 자와 죽은 자의 사정으로 철도는 음지였다.
오밤중 어스름 달빛에 피투성이 되어 철길을 오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의 형체가 기괴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철도 밑 밭에 무구덩이가 있었다.
겨울철 아침에 밭에 갔다 반쯤 얼어버린 젊은 사람 수레로 실어와 택시 불러 태워 보냈다.
얼어 구부러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구부려 태웠다.
무름에서 석으럭 거리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림새가 양복에 넥타이에 구두까지 당시시절에 쉽지 않은 행색이었다.
택시기사는 동내청년들 애기 듣고 어디론가 의식 없는 육신을 실고 갔다.
지금의 상식으로 어림없는 법인격과 경제적 책임은 후차였다.
 
일 년에 두어 차례는 주검으로 잘못되어 유족을 찾을 때 까지 거적 떼기에 덥여 방치되었다.
이럴 때면 철길 뚝은 귀신들이 시위하는 성황당이었다.
한밤중 안방 문 앞 오강단지도 무서워 두어 번 뒤 돌아보았다.
뒷골이 아슬아슬 하여 털지도 못하고 이불속에 웅크렸다.
시선과 정신의 자유에서 단절이었다.
오십년이 훌쩍 넘은 애기이다.
집안과 마음의 상처라고 생각하며 비운을 전가하던 호남선 철도의 아쉬움이다.
디젤 기관차가 들어오고 지금은 고속철도이다.
차표의 모험은 속도와 경제적 여유로 사라졌다.
 
자연의 평온에서 산업사회는 실리적 생산성을 우선한다.
물길과 자연은 통제의 시대에 있다.
물길의 위협에서 강과 나루는 수재의 불편함으로 제방으로 분류되었다.
자연에서 산업사회의 지배이다.
철도 뚝 넘어 농사의 터전을 양답이라고 하였다.
만경강 제방 안 논들을 강안이나 하천 답이라고 하였다.
젊어 양답에서 동네농사 도우며 들판 끝 산자락은 아쉬운 시선이었다.
들판의 시야에서 산자락 넘어 높낮이가 다른 산들의 세상이 궁금하였다.
시선의 증거적 상상에서 모악산 넘어는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이십대 전후에 모악산에 두어 번 올랐다.
마당에서 보이는 균형 잡힌 산세는 김제 지나 가까이 갈수록 쪼개지고 갈라져 대칭을 상실하였다.
영원 할 것 같았던 삼각형의 균형과 확실한 꼭지 점의 각인에서 또 다른 모습은 완벽 할 수 없었다.
사물의 이해에서 보이는 것의 속살은 간직하고 싶은 기억보다 복잡하고 넓었다.
삼각형의 균형 안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수없이 많았다.
겹치고 겹쳐서 대청과 마당의 시선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그것밖에 없었던 시선의 진실에서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무지가 두려웠다.
돌아오는 길 갈라졌던 산들이 하나둘 합쳐져 마당에서 삼각형의 균형은 기억한 데로 있었다.
나와 모악산 사이에 수많은 산들이 품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
 
철길의 단절에 원한이 많았던 시선은 마당의 기억으로 안주하며 모악산의 한계를 넘었다.
들역 산자락의 목상에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다.
시신이 둥둥 떠다니고 떠내려간다.
혈육의 인연으로 산자의 행색이 안타깝다.
들 역에는 물이 많아 무덤이 없다.
들 역에 살다 죽으면 산자락 넘어 높은 곳 찾아 안주하였다.
동내사람들 선영이 산자락 넘어 많았다.
육신의 회귀는 마른땅의 조건에서 산자의 정신적 안정을 요구한다.
동양철학은 죽은 자의 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무덤에 물이차면 머리카락과 손톱이 자란다고 한다.
영혼의 안정에서 자손의 불길함이다.
죽음의 절차에서 육신의 물질 환원은 연속성의 인연과 인륜적 순리가 있다.
혈육으로 각인된 인연의 집착은 꿈으로 표현 될 수 있다.
생명의 이별에서 기억되는 그리움의 애잔함은 또 다른 인연과 관계의 감성적 대비가 있다.
인연에서 내안의 책임과 예속되었던 책임에서 모질은 모자람이다.
사물과 사건에서 경험의 직관은 나의 실체이다.
생명은 같은 것이나 인연과 인륜에서 학습된 희 노 애 락의 감성과 사물 적 이해의 분별은 다르다.
산업사회의 관계적 문화에 살고 있다.
 
자연에 예속된 자아 적 삶으로 안주 할 수 있는 영역이 좁다.
80년 5월 18일 사건의 잉태와 전모에서 당시 실체적 감각이 무지하였다.
시류와 동떨어진 시간에 있었다.
집안의 몰락에서 뒤주의 부담과 사춘기의 상처는 자아에 집착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증조모 사후 집안의 몰락과 학업중단의 소외 적 부담으로 세상과 시류를 멀리하였다.
사건의 이해에서 시류와 역사의식 부재에 있었다.
광주에서 군대와 민병대가 충돌하여 사람들이 죽었다.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에서 군대의 진압에 총으로 대응하는 처참하고 안타까운 혼란이었다.
광주주둔 사단이 민병대에 동조하였고 전주에 주둔한 군대는 광주봉쇄에 전념하였다.
 
광주에 공부하러간 또래들이 봉쇄로 발이 묶여 돌아올수 없었다.
역사의 큰 사건이나 익산과 김제의 일상은 평이하였다.
역사의 이해와 시국에서 시류의 변방을 자처한 문화적 소통의 부재였다.
군사문화의 폐쇄성은 정보의 공유에서 판단의 무지를 조장하였다.
추후 전해지는 정사와 야사의 진실에서 인륜의 처절함을 역사로 이해하였다.
저항의 이유에서 분단의 심리가 작용하는 이분법적 역사의 갈등이다.
국가의 미래보다 좌우논리의 선입견을 우선하는 울타리 정치의 집착이다.
안타까운 것은 과정에서 양극화의 승패정치와 관련없는 인륜과 민생의 피해이다.
도청진압에서 옥상까지 쫓기던 생명에 투항을 권고하지 않고 4.3의 토벌대처럼 살육을 자행하였다.
 
옥상까지 쫓긴 저항군의 최후는 죽음을 피할수 없는 민주화의 비극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상상 밖 허무에서 군대의 위치가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역사에서 군사문화의 존재감을 우선하는 위정자들의 선택이 아이러니 하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인륜과 역사의 대의에서 목적에 반하는 선택의 방향성이다.
군사정권 연장에서 7년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무엇이었을까?
분단의 비극을 이용한 이분법적 정치에서 군사문화의 잘못된 존재감으로 역사의 순리를 왜곡한 것이다.
영원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논리를 우선하여 인륜을 소홀히 하였다.
정치의 협력적 이해와 소통에서 적대적 이념의 갈등이다.
 
무소불위 절대 권력의 관성적 지배의 정치이다.
공유하는 역사와 문화에서 시대적 동행의 가까운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격리된 사고의 불확실성이다.
나이 들어 어느 날 세상이 작아졌다.
사물이 작아진 느낌은 이해의 확장이다.
시각과 지식의 무지에서 미지에 있던 사물의 익숙함이다.
시각적 한계에 머물던 사물이 진실과 이해의 확장으로 내안에 가까이 들어온 것이다.
학습의 무지에서 보이지 않는 사물의 미지는 방어적 두려움의 거창함으로 인식된다.
세월과 시각적 이해의 확장에서 미지의 거창함은 사라지고 내안의 가까운 것이 된다.
지나간 것은 기억과 추억으로 크기나 관점에서 작아지기 마련이다.
 
존재에서 내안의 것은 위대 할 수 있으나 거창하지 않다.
자아이다.
80년 5월 18일 비극적 사건의 이해에서 단절된 시간을 채우는 진실의 집착이 있었다.
역사의 증거에서 상식의 괴리에 힘들어 하는 트라우마의 시간을 이해한다.
진실의 접근과 전계에서 자아의 집착은 글 쓰는 사람의 생체기이다.
표현은 사물을 이해하는 자아의 내면이다.
나를 부정하고 무엇도 표현 할 수 없다.
그래도 라면에 달걀의 흥망성쇠가 아니라서 챙겨둔 것이 많다.
글 쓰는 사람의 집착은 먹는 것의 의식이 부실하다.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를 때도 많다.
화장실도 잊는다.
문제의 집착으로 머리는 항상 만원이다.
비워야 잠이 오는데 비워지질 안는다.
끝없는 나락에서 육신은 지쳐간다.
줄거리의 집착에서 마음대로 중단 할 수 있다면 어설픈 시작이다.
문제에 집착하는 의지가 육신을 지배한다.
육신의 한계에서 잠을 잔다.
의지가 아니라 육신이 잔다.
 
자아의 집착에서 정신의 고립과 육신의 한계는 사색의 단절과 휴식을 요구한다.
사색의 집착에서 먹고사는 문제로 내일이 비워져 있다면 매우 만족스런 자유이다.
생계의 책임이 없다면 간간히 고행처럼 견디고 싶은 시간이다.
나의 실체에서 시간의 흔적과 내면의 진실을 끄집어 내여 표현하는 자위의 집착이다.
어찌되었든 결론에 도달할 것이고 견딜 만하면 일상은 돌아온다.
목적이 주어진 자아의 집착은 나쁘지 않다.
그래도 만원자리 두 장 이면 괜 찬은 것이다.
하루 한 끼는 하루 한 병의 절제로 대체 할 수 있다.
마시면 피가 육신으로 번져 순간 머리가 비워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문장의 연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의 깊이는 또 다른 복잡한 줄거리를 생산한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문장의 사색은 마음대로 휴식하고 단절되지 않는다.
진실의 몰입과 집착은 꿈에서 발현된다.
표현에서 찾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만족하는 목적의 완수가 육신과 자아의 자유를 준다.
조건이 된다면 간간히 경험해 보고 싶은 생체기이다.
책의 서두에서 새라는 단어의 이해가 아리송하였다.
자유일까 하다가 새참의 새라는 이해이다.
둘 다 틀리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의지가 강한 분들의 시간이다.
이제 시작이다.
2023.11.20일.
 
148 작별하지 않는다 (관계).
눈이 많다.
죽 집에서 거리의 사람들을 표현하였다.
시장은 시각에 따라 삶의 역동성이 될수있다.
작가의 시각은 시장보다 작업실의 고립이 편하였다.
외로움과 동행하는 나만의 시간이다.
일상과 숙면의 고통에서 자아의 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시장과 인간세상은 복잡하다.
글은 복잡한 시장과 인간세상의 선입견을 간추려 단순하게 정리하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자아이다.
 
글과 작업실은 자아의 보호이다.
시장은 목적이 있는 작업실 고립에서 어쩔수 없이 또는 필요에 의해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작업실 탈출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숨은 쉬어야 한다.
눈은 세상을 단순하게 한다.
순백의 세상이다.
사회의 이해관계와 시장의 복잡함을 덥 는다.
죽은 사람을 하얀 천으로 덮는 것은 시장과 인간세상의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정리한다는 느낌이다.
순백 또는 순록에서 단순함의 휴식이다.
 
순백은 좀 더 단순하다.
순록처럼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작업실 이탈에서 순백의 단순함은 매우 훌륭한 휴식의 조건이다.
눈은 정지된 시간처럼 내리는 함박눈이 제격이다.
고찰에 갇힌 한밤중에 생명체의 흔적 없이 내려 쌓이는 눈이다.
어둠속 희미한 불빛의 정적에 힌 송이 느린 움직임은 일상을 망각하는 시선의 여유이다.
소리 없는 지배로 인간세상의 흔적을 덮어버린 태고의 고요이다.
불빛에 한정된 소리 없는 단색의 영역은 나만의 정적이다.
시장에 내리는 눈은 늬 것 내 것이 없다.
 
눈은 지저분하기도 하다.
녹으면 길거리는 질척거리고 미끄러움은 일상을 방해한다.
내리고 쌓여있을 때만 시각적 휴식이 있다.
비처럼 버려진 것들이 쓸려가지 안는다.
쌓여있으면서 질척거리는 골목에 질기게 수분을 공급한다.
도시의 아스팔트와 탄소 찌꺼기가 섞이는 눈은 하얀색의 깨끗함과 대비되는 흑색의 오물이다.
물질의 혼합이다.
순수의 한계이다.
석이여 어울리는 관계는 인간세상의 필연이다.
 
탄생과 소멸의 반복에서 사회적 관계이다.
글의 줄거리에서 관계는 자아에 투영된 단순함과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표현은 자아의 거울이다.
소설은 사건의 기록과 달리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없다.
표현의 유동성 이다.
결과에서 원인이든 원인에서 결과이든 순서의 배열은 작가의 자유이다.
어쩌면 독자의 예상에 충격을 가미하기 위한 재미의 은폐가 될수있다.
사건의 진행과 인물의 인격에서 위치의 설정이다.
역시 소설에는 비급이 있다.
 
단순하게 국어는 수학이다 라는 개념의 믿음에서 자유가 필요하다.
소설에서 동물의 등장은 사회성에 집착하는 인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단순한 생명의 대비이다.
동물은 격이 아니라 생존의 본능을 우선한다.
동물은 생존에서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 한다.
아직은 확실치 안으나 앵무새의 등장은 첫장 새의 또 다른 의미가 될것같다.
월남전 참전을 애국이라고 하시는 분들의 주장은 괴리가 있다.
1953년 3년여의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념적 진영논리의 패권이 작용한 전쟁이다.
인류의 이념적 분열에서 외세와 민족적 저항의 역사에 있던 시간이다.
 
식민주의 역사를 살펴보며 는 차별적 체제의 근본이 있다.
러시아의 아프간 침공 시 남여차별이 없었다.
공적개념을 우선하는 공산주의는 식민사관이 존재 할 수 없다.
계층과 성별의 차별이 불가한 사상이다.
지배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산주의를 주장 할 수는 없다.
일부의 개념이 그렇다는 것이다.
월남전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을 끌었던 지루한 전쟁이다.
애국의 개념에서 남의 나라 전쟁에 국제질서의 진영논리로 참전하였다.
 
6.25전쟁도 동서 진영논리의 국제전이다.
파월은 가난에 구속되었던 시절 비일 비제 하였던 젊음과 시간에 정체된 정신의 탈출이었다.
가난과 젊은 시간의 정체에서 대부분 지원으로 참전하였다.
참전 장병이 귀국하면 어른들 키 만 한 커다란 나무상자가 배달되었다.
월남에서 본인이 작업하여 배달된 것이다.
내용물 중 중요한 것은 동네에 한두 대 있던 TV였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살아 돌아오면 부자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주변에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가 참전하여 전사한 집안도 있다.
 
현재의 베트남은 시장경제를 지원한다.
민족적 경계 또는 국경으로 단절된 비극이 없다.
월남전에 참전한 후 트라우마로 고생한 선배가 있었다.
동네청년들 대장이었다.
귀국 후 한여름에도 두꺼운 외투 깃 세우고 입고 다녔다.
고향동네 가운데 오래된 초등학교가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앞 동네와 뒷동네로 나눈다.
학교건물은 남향의 5학년 이하 교실과 서향의 교무실과 6학년 교실이 분리되어 두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물사이는 지붕을 덮은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관 끝에는 화장실이다.
앞 동네에서 뒷동네에 가려면 6학년 교실 앞 화단을 지나 현관 화장실 전에서 학교 뒷마당과 연결된다.
뒷마당은 뒷동네 마을길과 공유하였다.
철도 쪽으로 마을외곽을 돌아가는 길이 있었으나 농사철 외에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두워지면 화장실이 있는 현관은 음침하였다.
화장실 귀신 씨 나락 까 드시는 소리는 어두워지기 전 귀가를 서둘렀다.
어두운 통로 중간에 저학년 복도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다.
선배는 학생이 없는 날 이곳에서 두꺼운 외투를 입고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동네청년들 대장이기도 하였고 상식 밖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말씀을 자제하였다.
 
비극이 있은 후 월남전 트라우마 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제기되는 민간인 학살의 처참함과 전장의 전멸과 생존에서 사지의 혼란한 충격을 의심하는 것이다.
가면가고 오면 왔다고 생각하지 전사자나 참전의 충격을 이해 할 수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만경강 제방을 힘겹게 넘어가던 호남선 철길과 교차하는 제방 밑에 밭이 있었다.
기차가 제방을 넘으며 철이 부디 치는 요란한 소리로 건너던 만경강 철교의 입구이다.
그날 아침 어머니가 호박을 따오라고 심부름 시켰다.
집에 있던 오래된 일제자전거 타고 대부뚝(제방) 지나 파수막이 있는 철교입구에 이르렀다.
당시 제방 뚝은 플라타나스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전군 간 도로였다.
건널목 파수막 근처에 사람들이 많았다.
 
철교아래 첨벙한 논에서 너 댓 명의 동네 형들이 무엇인가 보자기에 갈무리 하여 옮기고 있었다.
모네기 후라서 물에 잠긴 모가 10여 센치 정도 자라 있었다.
밤새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멈춰있었다.
더러 있는 일이라서 특별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철교를 바라보니 찌기고 잘려진 육신이 수백 미터가 넘는 철교의 반을 덥고 있었다.
뻘 것 게 흩어진 육신이 한사람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도 철교 침목사이 아래로 떨어진 사체를 모으고 있었다.
구경인지 걱정인지 모여 있던 어른이 철로 옆에 무엇인가 덥혀진 작은 옷가지를 발로 찬다.
손목이 잘린 거 무 탱탱한 손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나무란다.
외투를 입고 다니던 형이었다.
호박을 따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사건은 야사로 전해진다.
전날 다리건너 목천동 파출소에서 소란이 있었다.
동네의 행정구역은 김제이나 생활권이 익산이라 제방넘어 목천동 파출소의 사건이 많았다.
술 취해 경찰관을 폭행하고 걷다가 철로를 배고 잤다고 한다.
자려한 것인지 죽으려 한 것인지 철로에서 잠이 들었다.
기관사 말로는 개가 웅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가가면 도망칠 것이라는 예상인데 그렇치 안았다.
5미터 쯤 거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의 형체가 순간 사라졌다.
"악" 하는 비명소리를 들은 분이 계셨다.
형의 옆집에 사시는 어른이다.
형과 단짝인 별종 형 어머니이다.
새벽 다되어 형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하고 기차는 멈추어 기적을 울린다.
챙겨서 달려가는데 발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고무신 이었다.
외투 형과 별종 형은 신발을 자주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전쟁의 참혹함에서 민간인 희생은 잘못된 것이다.
선배의 비극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월남전 트라우마 이다.
몇 칠을 고생했다.
이래저래 호남선 철길은 음지였다.
인간세상의 희 노 애 락을 비켜가는 비극이 있다.
비극은 작든 크든 같은 것이다.
인륜은 개별적 인격이다.
책의 관심에서 4.3의 비극을 여성 세 명의 시선으로 전계하였다고 하였다.
4.3의 암시는 중 산간 마을과 학교의 주검에서 혈육의 비극을 확인하는 눈 덮인 사자의 신원이다.
 
학교와 하얀 눈에서 북촌국민학교 학살사건이 떠오른다.
동서냉전의 지정학적 사선에서 민족의 이념적 갈등으로 격어야 했던 비극적 참극의 무고한 희생이었다.
신탁과 반탁의 무력봉기에서 진압군의 희생을 마을주민에게 생명의 처참함으로 보복한 학살이다.
강연을 이유로 마을주민을 학교에 모이게 하고 군과 경찰 공무원 등 우파의 인연 빼고 남여 노 소 관계없이
불타는 마을에 안절부절 애타는 절박한 이웃을 팔도의 사돈을 총검과 죽창으로 무자비 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손잡고 찾아간 곳 어린자식 주검 남겨두고 혼 빠져 돌아온 길 나라 빼앗긴 세월보다 긴긴 세월 무엇으로 연명할까?
아침햇살 처마 끝 매달리면 밭 갈고 소 키우고 고은 빛 서산 넘어 아득히 고단할 때 고운 손 찾아 구들에 불 지피는
그 정성 어디 갔나!
사는 것이 근방 어디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이고 불태우고 고운 손 빼앗아 갔다.]
 
[총성에 꼬꾸라지고 사방으로 튀고 흐르는 핏자국에 검게 물든 땅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말라 엉켜 붙은 주검의
흔적이다.
혼비백산한 귀전에 "철커덕 철커덕" 총알장전 하는 소리가 무었을 위한 희생이었는지 한 많아 찾지 못하는 사라진
마을 되었다.]
식민시대 활개 치던 순사가 변신한 경찰과 군인과 우익이라는 서북청년단에 의해 지행된 민족분열의 참상이다.
비극의 한을 표현하는 목상 작업 중 공방쥔장 인선의 손가락이 절단되었다.
병원과 만남에서 갑작스런 앵무새의 부탁과 수용은 꿈에 암시된 목상공원의 운명적 공유이다.
봉합과 치료에서 신경의 감각을 위해 상처부위를 바늘로 찔러 덴다.
비극을 기억하는 산자의 고통이다.
 
앵무새의 생존을 위해 눈보라 치는 중 산간 마을의 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쁘다.
바닷물에 휩쓸려 망망대해로 떠내려가는 주검의 황망한 기억이 숨죽이며 살아난다.
숨죽인 창호지 구멍사이로 백사장의 비극은 야사의 기록이 되었다.
문학의 진실에서 표현되어야 히는 역사의 참극이다.
비극적 기억에서 파도에 휩쓸리는 주검의 꿈을 전달한 자의 행위적 책임이 있다.
꿈과 자아 적 은둔에서 목상으로 비극을 표현하려는 행위자의 노력과 의지가 궁금하다.
눈 내리는 인적 없는 작은 도시에서 미소의 의미가 궁금한 팔순노파의 등장이다.
증언의 신빙성은 보고 들은 현장의 역사가 필요하다.
연륜의 설정이다.
 
심지 깊은 돌아가신 인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꿈의 확신에서 시장의 조건과 숨 죽여 은폐된 시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전달자의 행위적 번민이다.
목상공원의 행위적 실체가 희석되어 갔다.
상상과 자아의 의지에서 사물로 결정되는 행위의 부족함 이다.
자아 적 해결에서 타의의 동의와 사물의 윤곽으로 꿈의 암시를 전달하고자 하였던 관점의 희석이다.
인선의 의지에서 시류와 세파에 흔들리는 안타까운 꿈의 허무주의 이다.
처참한 역사에 예속된 생명의 한과 목상으로 표현하려는 사고와 번민에서 자아에 머무는 시간이 괴롭다.
자아의 완성은 수십 년 참선으로 어려운 수신이다.
미지의 극히 일부가 발현된 삶을 선과 진실이라고 확신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수의 인습과 환경의 지배에서 나의 완벽한 실현은 거의 불가능 하다.
인순의 행위적 관점은 처참한 역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사명과 이념적 격리에서 의지와 자유이다.
인선의 의지는 꿈의 자아 적 번민을 의식하지 않는 공유된 목상의 목적에서 충성이다.
꿈의 당사자는 사고의 번민으로 목적의 혼란이 있을 때 이미 사물의 윤곽을 완성하고 있다.
역사와 사물의 이해에서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번민의 복잡함을 가시적 실체의 행동으로 공유된 목적을 단순하게 정리하려는 것이다.
실체적 행위의 진행으로 예초의 메세지를 완성하려는 인선의 의지이다.
꿈과 공방의 관계에서 사고와 행동의 보완적 의지이다.
목적과 관계의 성립에서 공유된 본질의 상호주의는 필요하다.
 
꿈의 암시에서 행위적 표현의 일체성이다.
목상에서 암시적 사고의 생명력은 주체의 목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달된 사고의 이해에서 부족한 것의 보완적 관심이다.
글과 자아에서 유서는 과장된 것이다.
대계의 유서는 수신인이 없다.
소설에서 유서는 삶의 애착이다.
단적으로 눈보라 치는 여정에서 생명의 관심과 책임은 죽음과 연결되는 인습의 수학이 아니다.
구하려는데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앵무새의 생존에서 한 달이 아주 재미있는 직업실의 고립과 일상도피의 시간이 될 것 같다.
 
자유를 느낀다.
작업실의 획일적 환경에서 벗어나는 자유이다.
꿈과 앵무새가 되어든 4.3이 되었든 자아에 고립된 자유의 만족이다.
줄거리에서 사고의 촉매와 관련되지 않은 사건과 장소는 필요하지 않다.
나는 설정에서 벗어나는 덕지덕지 가 싫다.
독서의 몰입은 인습의 주의적 관심이 아니라 설정에서 작가의 자아 적 몰입이다.
등산 백을 짊어진 수상한 젊은이의 등장에 시류의 잡동사니를 염려한다.
주저리주저리 시간의 지루함을 채우려는 노력은 산만한 것이다.
수상한 젊은이는 소설의 관점을 흐리지 말고 미련 없이 비행기 타시기 바란다.
 
젊은 사람은 육신의 생체기가 다르다고요?
한 달은 누구라도 도를 닦는다.
소설과 괘락 적 시류에서 바람 잡는 젊은이의 관심 적 선입견을 인정한다.
2023.11.26일.
 
149 작별하지 않는다(구구절절).
소설에서 죽다 살아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고 온갖 인연이 시시각각의 운명으로 해석된다.
육신은 없고 정신은 텅스텐 끝 어진 전구 처림 붙어다 떨어졌다 제 마음대로 이다.
소설의 진행에서 주의와 집중을 위한 의지의 한계가 필요한데 사지의 변명 말고는 방법이 없다.
새의 생존에서 한 달의 자유가 쉽지 않은 고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겨진 인연 생각 못하고 쉽게 죽는 인간들 많다.
달마조사는 저승에 가면서 집 세기 한 짝을 남겨 놓았다고 한다.
사람들의 죽음은 구구절절 사연이 많다.
이승이 아쉬워 문제 아닌 문제를 기억한다.
 
그래봐야 산자의 행색은 죽은 자를 일상으로 기억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어쩌다 제 필요하면 억지로 살려놓고 빗대어 제 자랑 한다.
눈보라와 어둠과 지식의 부재에서 그냥은 소설의 수학이 아니다.
그래도 백색의 어둠에서 미끄럼 타며 주저리주저리 시래기 발 역어내는 지옥여행은 해볼만 한 것이었다.
조금은 과한 생사의 극적 연출은 주검의 사지와 관련된 주입 적 기획의 기대이다.
축구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경기 중 최종수비수 이었는데 꼴 키퍼가 꼴 문을 비우고 나갔다.
천재일우의 기회에서 공격수의 방심은 기똥찬 기교의 득점이다.
관중을 의식하여 멋 부린 것이다.
 
나는 꼴 키퍼 위치와 공격수의 시야를 생각했다.
슈팅의 각도와 파괴력이다.
공격수는 자신과 꼴 키퍼의 존재에 집착하여 꼴 문을 향하는 최종수비수의 움직임을 간과하였다.
슬 적 멋지게 밀어 넣는다는 기교의 자만이다.
꼴 문으로 향하는 나에게 공의 방향이 잡혔다.
꼴 라인 전에 충분하였다.
문제는 나에게도 인습의 지식이 있다.
될 수 있으면 극적이고 멋지게 막아내는 것이다.
잛은 순간에 꼴 라인과 꼴의 동선에서 최적의 위치와 액션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슬라이딩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고 죽 미끄러져 두어 바퀴 뒹굴다 꼴 망에 거칠게 부디 치는 것이다.
공은 꼴 대를 벗어났고 망연한 공격수는 축구의 차원을 인정한다는 표정이다.
우리 편은 편의 자부심으로 다친데 없냐고 물어본다.
기회의 순발력을 발휘한 기획과 연출로 주가상승이다.
인습에 집착하는 사악한 연출의 효과이다.
소설에서 죽다 살아나는 것은 다반사 이고 신약과 비급은 감초이다.
그나저나 손가락 잘린 인선의 상태가 걱정이다.
소설의 주체 목상과 관련하여 인선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이다.
없어도 사는데 붙였다고 큰일 나면 병원 잘못 간 것이다.
 
어찌되어든 눈보라 속 집 찾기는 요단강 전에서 4.3을 기억 할 수 있을 것 같다.
4.3의 문학적 시각에서 작가의 표현은 예초에 기대했던 독서의 목적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등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은 지루했던 것이다.
동물이 동종을 죽이는 상황은 드물다.
사람이 사람을 떼로 죽인다.
전쟁에서 섬멸전 이라는 것이 있다.
수만을 죽인다.
저항과 도피의 절멸에서 죽음의 평등으로 생존의 의지를 상실한다.
죽음의 만연과 공유에서 생명은 소홀하다.
 
같이 죽으면 별것 없다는 순응적 학살에서 알 수 없는 산자의 안타까운 번민이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 만 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멸 적 사지에서 존재를 가늠 할 수 없는 상실의 이해가 어렴프시 하다.
역사와 정치와 인간의 폭력적 잔혹함에 지배되어 생존을 포기하는 민초의 사지이다.
울타리 밖 미지의 불확실성이 두려운 좁디좁은 잘못된 이념적 사고의 적대적 집착이다.
존재에서 생명의 불확실한 실체와 극단적 인간성 상실의 역사에서 무모한 절대성의 무지이다.
미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안은 현상에서 이성을 상실한 기계적 감각에 집착하는 지식이다.
앵무새의 안부를 위한 부탁과 수용의 과정은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공유이다.
여행에서 목적 외의 기획과 연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임 본 김에 뽕따는 것이다.
삶도 그렇다.
목적에 만 집착한다면 기계가 되어야 한다.
요사이 돈과 자본에서 인륜이 기계가 되어가는 문제이다.
산업사회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념적 비극도 산업사회의 가변성 문제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다양성에서 내것의 지배력에 집착하는 역사이며 절대성에 지배된 관성이다.
이분법적 지배와 저항에서 파괴적 관계이다.
단절된 생명으로 시대에 특별하다고 자만하는 학문과 지식의 오만이다.
 
통치에서 자기도취에 빠진 위정자들의 획일적 강요이다.
정치가 지배하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참여하는 대중적 문화의 질서가 옳다는 것이다.
일부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다양성의 합리적 수용에서 절차적 민주주의 이다.
시대의 주류는 굳이 평화로움을 의식하지 안는 평범한 일상이다.
진화의 본질은 앞선 자가 아니라 현실의 대세를 이루는 민초의 역사이다.
눈보라 치는 지옥을 맛보이고 알 듯 말듯 하였던 중 산간 마을 공방을 찾았다.
백색의 밤중에 미끄럼 타며 사지를 헤매다 두발로 걸어서..
요단강에 발 담그려는 처지에서 천지의 기운이 신통방통하다.
 
소설의 전계에서 어느 시간에 어떠한 방법으로 살아날 것이지 관심이었다.
책의 반쯤 진행했는데 남 어지를 쥔장 죽이고 속절없이 나아 갈 수 없다.
사지에서 생명의 불빛은 언제나 희미하게 시작한다.
손가락 절단과 앵무새 생존의 경황에서 등화의 소홀함이 천지의 기운이 되었다.
순백의 천지에서 어둠으로 불빛의 방향을 찾았다.
사건의 전계에서 구구절절 결말에 이르는 과정의 필요이다.
분량의 필요라고 하여도 설정과 관련된 흥미라면 무방하다.
목상의 한은 육신의 한계에서 순수에 이르는 행위적 고통의 의지이다.
바닷물에 휩쓸리는 사지의 표현에서 목상으로 죽은 자의 역사를 왜라고 하는 것이다.
 
꿈의 암시에서 우듬지 잘린 검은 목상의 고행이다.
이유 없는 주검의 저항에서 기억해야 한다는 차별적 역사와 학습의 자아이다.
역사의 죄와 벌에서 작아지고 잊히는 시대적 희석의 자각이다.
그때 그러했을 뿐이다.
그것들이 현재의 지식과 문화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
고통의 기억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념적 울타리의 집착은 선의 혼란이 있다.
생명의 독립성에서 다수의 논리로 선과 인륜을 평가하려는 모순이다.
권세와 폭력적 집단의 지배에서 개별적 반론과 저항의 한계이다.
 
절대성의 집착이 아니라 가치로 미래를 예견 할 수 있는 지식과 문화의 공유가 필요하다.
공존을 위한 이해의 공유이다.
금방 변하여 작아지는 역사의 순리에서 생명을 이해하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꿈의 자아는 유서와 작업실과 숙면과 편두통과 위경련의 고통에서 공방으로 확대되었다.
학살에서 주검을 덮고 있는 눈을 치우며 혈육의 비극을 확인하던 소녀의 기억이다.
요단강 전 초죽음 되어 살아온 육신이 꿈의 번민에서 공방과 목상의 실체를 확인하기 바쁘다.
인선이 정신적 인연을 찾아 부탁한 앵무새의 순서가 위험하다.
목적의 집중은 좋은 것이나 물러나는 촉각의 여유가 순리를 찾아준다.
새의 생존에서 목상의 집착으로 자아의 만족을 우선한다.
 
제주에 온 목적에서 인선과 관계가 설레발이로 끝날 것 같다.
자아도 내 것이다.
사고의 번민에서 앵무새는 덧칠의 도색이다.
꿈의 암시에서 목상과 관련된 행위의 실체가 궁금하다.
미루어지는 인선의 등장을 의심하는 것이다.
자아 적 실용주의의 부재는 인선의 행위적 결단에서 대리만족을 확인한다.
사고의 비약에서 앵무새의 생존으로 필자를 제주의 공방으로 보낸 인선의 기획 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예초에 설정한 꿈의 예시에서 공방의 실체를 통해 공유된 일체성의 의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인선은 꿈의 방황을 염려하였다.
 
인선과 필자의 관계에서 가능한 설정이다.
사지의 우여곡절에서 시방은 공방의 정신보다 새의 생명과 여행의 여유가 필요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불도 있고 나무도 있으니 우선하여 인선이 부탁한 따뜻한 생존의 설득이 필요하다.
얼어 붙여 놓았으면 녹여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뺑뺑이도 좌우로 균형 잡아 돌린다.
제 살았다고 독자를 모르쇠 하는 것은 인정머리에 문제가 있다.
문학적 지식의 인륜이 필요하다.
너무 춥다.
 
불 좀 피워라!
서서히 고대하던 4.3의 시간에 접근하고 있다.
등장인물과 설정의 바람잡이에서 비극적 표현이 궁금해지고 있다.
4.3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조바심이다.
맛 뵈고 사라진 젊은 놈과 팔순노파의 정체도 아리송하다.
비행기가 몇 칠 결항된다고 하였다.
혹시 인순이 공방과 관련하여 또 다른 부탁을 하였을지 모른다.
어째 튼 치고 빠지는 날강도 같은 놈들이 싫다.
흔적 없는 선택의 간섭을 사절한다고요!?
2023.11.28일.
 
150 작별하지 않는다(기대).
첫 장 새가 끝났다.
작별에서 죽음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더구나 글제는 4.3의 비극이다.
염려한 앵무새는 죽었다.
예초 앵무새는 꿈의 행위적 완성에서 발현 적 동의를 예속하기 위한 인선의 기획이라는 이해이다.
꿈의 암시에서 목상으로 표현되는 사물의 완성이다.
꿈의 방황에서 행위자의 의지이다.
목상은 생명이다.
필자(경하)는 인선에게 꿈의 방황을 애기했다.
 
인선에게는 어머니의 기억과 가족과 관련된 비극적 사건의 진실에 억눌하였던 자아 적 표현의 발견이었다.
눈밭에 서 있는 목상이다.
목상의 의미에서 어머니로 비롯되는 각인된 희생자의 모습은 인선의 자아이다.
덧칠되지 않은 비극적 역사의 기억이다.
죽은 자의 비극을 이해하고 목상의 고행으로 자아의 한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유일한 동행자의 방황은 위기이다.
인선의 자아가 완성되는 행위의 줄거리가 오래된 된장 풀은 냉이 국처럼 입맛 땡 긴다.
회자의 간격이 있는 드물고 잊을 수 없는 익숙함이다.
삶의 고단함에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간열 적 격정의 그리움이다.
 
나의 느낌에서 인선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소설의 주제이다.
4.3의 전달자 어머니의 혼이 들어 있는 목상의 생명에서 실체적 전달자 이다.
인터뷰에서 회벽의 그림자였던 종려나무는 앵무새의 무덤이 되었다.
새의 수의와 무덤은 소홀한 생명의 변명이다.
아마(새)는 예전에 짝을 일었다.
중산 간 외딴곳에서 유일한 생명적 교감은 인선의 소리와 동적 움직임이다.
어느 날 사리 졌다.
4.3의 기록을 살펴보며 죽은자의 흔적에서 비롯되는 산자의 행적이 궁금하였다.
토벌대의 살육을 피해 해방으로 36년 차별에서 돌아온 일본과 육지 가까운 곳으로 피난 갔다고 한다.
 
좌익의 반란으로 치부하는 우익의 주체에 의해 연좌제로 고생하였다는 잛은 문장 뿐이다.
내것 이외의 존재를 부정하는 울타리 권력의 이분법적 통치의 자가당착이다.
선과 인륜과 논리와 진실의 어떠한 주장에도 생존은 자기방어를 우선한다.
인륜과 생명의 철학은 배부른 낮 바닥 분칠하는 입바른 소리가 되었다.
앵무새의 속절없는 죽음이 서운하다.
새의 죽음과 후기에서 책의 권력이다.
목상과 관련된 생명에서 무엇이든 죽음의 사지를 좀더 기대했다.
아마(새)의 허밍으로 인선의 목소리 정도 기대 할 수 있었다.
자아 적 번민은 사실과 관계없이 자책을 우선한다.
 
행위적 의지의 자신 없이 자책한다.
육신의 고통으로 여행의 여유는 평화와 거리가 있다.
목상의 고행이 육신의 고통이 되었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인 꿈의 사물 적 접근에서 자아 적 사고의 욕망은 채워지고 있다.
공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듬지 잘린 목상이다.
역사로 희생되는 죄 없는 생명의 자아적 구속에서 세상과 공유 할 수 있는 표현의 확인이다.
억울하게 구속되어 있는 자아의 행위적 표출이다.
아이와 아버지와 동굴에서 중산 간 마을 사람들의 산속은 극한의 도피였다.
남겨진 식구의 걱정은 나로 인한 정치적 선택의 책임에서 보호 할 수 없었다.
 
대사리이다.
집에 남겨진 사람들이 산으로 도피한 식구를 대신해서 토벌대에 의해 죽어야 했다.
산속에 들어간 어머니 아버지 마누라 지아비 자식 형 동생을 대신해서 총살당했다.
이웃과 민족과 인륜이 멸절된 사고와 존재의 무의식 이다.
탄생의 백지에 무엇이 쓰여 졌는지 자연에 예속된 자아의 삶이 아니다.
산속의 고통에서 마을에 남겨진 인연의 안전을 걱정한다.
시대의 이분법적 비극이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중산 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사살한다는 포고령이 한라산 금족령이다.
소설의 전계에서 목적에 집중하여 격정 하는 기대는 시처럼 전체적 이지 않다.
 
분노의 확장을 충족하는 치열한 표현의 요구이다.
4.3의 지식에서 분노와 슬픔의 기대이다.
줄거리의 대부분은 하나의 사고에 집중하기 위한 매듭의 연결이다.
공방과 목상의 전달을 위한 요단강 체험은 매듭의 사이를 채우는 작업이다.
또다시 고립이다.
이번에는 문명의 접근이 어렵다.
속병을 고려하는 대책이 없다.
건강은 사고의 절대를 차지한다.
육신의 극한상황에서 문학적 분별력은 떨어진다.
 
중산 간 외딴 곳에서 덜컹거리는 문짝의 표현은 이질적 접근의 또 다른 비급을 예견한다.
아직 목상의 실체와 4.3은 시작에 불과하다.
인선과의 연락은 할 수 있는 것인지 아직 전기불은 들어오고 있다.
따뜻한 것은 전기렌지에 올려 진 커피포터의 끓는 물이다.
소설이 따뜻함을 애써 피해가는 차가움이 있다.
주검위에 녹지안고 쌓여있는 눈의 고집이다.
주검이 만연한 4.3의 배경이다.
단독정부 반대와 군경의 진압을 피해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의 고초가 비참하였다.
먹는 것과 잠자리의 고통이다.
 
한라산 금족령은 먹는 것 등 물자의 차단을 고려한 조치였을 것이다.
책의 두께를 본다.
소설이든 사건이든 당시상황을 판단 할 수 있는 이성적 접근에서 아직은 만족 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4.3의 문학적 시각이다.
현장의 기억과 산자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목상의 고행은 정신적 한의 표현이다.
처절하게 육신을 괴롭힐 이유는 없다.
4.3의 기록에서 죽은 자의 단체사진이 있었다.
사진속의 사람들은 모두 학살되었다는 설명이다.
 
단체로 사진 찍어놓고 죽였다.
커피 잔 들은 나의 손이 분노의 격정으로 떨린다.
회벽에 흔들리는 종려나무 그림자가 죄 없는 영혼의 귀환을 암시한다.
공방의 기물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어머니의 방은 정갈하다.
노크하듯 덜컹거리는 문짝의 표현에서 기획 적 서술의 미안함이 있다.
노크는 리듬의 정갈함이 있으나 덜컹거리는 문짝은 파괴적 소음이다.
목상으로 습득된 기구의 기술은 문짝정도는 금방 고친다.
혼자 사는 산중이라 산짐승의 출물을 기대했다고 거짓말 할수없다.
덕지덕지 덧칠되는 잡동사니 출물에 긴장된다.
 
4.3에서 중산간 마을에 백말 탄 기사는 없었다.
인선은 목적에서 행위가 정확한 사람이다.
요단강 탈출의 기사회생을 도왔던 전기도 나갔다.
겨울철 보일러가 멈추면 추위가 아니라 배관이 얼어 터진다.
전기와 동시에 보일러의 멈춤은 행위적 준비의 치밀함에서 인선의 존재가 춥다.
목상공방의 부스러기 땔감 조건에서 나무 보일러도 따뜻하다.
인선의 치밀함에서 사고와 준비는 다르다.
눈보라 치는 날씨에 필자는 새의 생명으로 모험이 필요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수 없는 공방작업은 어느 정도 시간의 여유가 있다.
 
도시에서 몸 풀고 어슬렁거리다 산짐승의 눈빛으로 등장하는 시류의 잡동사니가 불길하다.
덜컹거리는 문짝으로 등산가방의 젊은 놈이 찾아올지 신통방통한 천지의 기운이 찾아올지 아슬아슬하다.
난방 할 수 있는 기술은 있는지 싸가지는 그것밖에 없다.
비극의 여행도 식후경이다.
다음 장은 밤이다.
첫 문장에서 언뜻 바닷가와 뼈들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4.3이 시작될 모양이다.
2023.12.1일.
 
151 작별하지 않는다(증거).
손가락으로 방문 창호지에 구멍 뚫어 숨죽인 바닷가 모래밭의 비극을 본다.
백사장에 사람들 모아놓고 줄 세워 학살하였다.
열을 앞세워 총격으로 쓰러지면 다음 열로 또 다음 열로 순서대로 죽어야 했다.
앞선 주검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린다.
생명의 상식에서 죽음이 공유되고 있다.
뱃속의 아이도 손잡은 아이도 존재하는 것이 없다.
도망칠 곳 없는 탁 트인 시야에서 도망치다 죽는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 뿐이다.
절멸의 사지이다.
 
해방의 염원에서 팔도의 사람들이 사돈이라고 역사와 민족에서 유리편이라고 생각하였다.
역사에서 한편이었던 이웃과 민족이라는 사람들이 죽인다.
아니다!
식민시대 압제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와 벌의 기득권이 죽였다.
해방의 주체는 모호하였다.
이질적 역사와 문화의 핍박에서 해방을 염원했는데 제 잘난체 하던 놈들이 또 한다.
주검은 바다에 버려졌고 희끗희끗한 옷가지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파도에 휩쓸려 점점멀리 절멸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비극이 산자의 기억에서 숨을 죽인다.
 
다음날 피범벅이 된 백사장은 바닷물에 쓸려 흔적이 없다.
이유 없는 학살의 주검이 대마도 쪽으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꿈속 들판과 바닷물과 목상은 파도에 휩쓸려 흔적조차 없는 백골의 환영이다.
제주의 젊은이들은 학살을 피해 산속에 들어가 숨고 피난가고 일부는 토벌대에 가담하였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살기위해 해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다수의 우익이라는 서북청년단의 만행도 확인되고 있다.
제주의 처자들이 죽임과 강간을 피해 서둘러 시집가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였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행위이다.
옆구리에 종교서적을 끼고 다닌다고 가르침을 따르는 인간이 아니다.
4.3과 6.25 발발 후 예비검속에서 많게는 수십여만 명이 학살되었다.
 
제주공항 활주로 밑의 소문이 있다.
4.3의 시간을 접할 때마다 분노를 넘어 슬프다.
대한민국 건국이 동서 진영논리의 국제질서에 휩쓸려 역사와 민족과 인륜을 상실하였다.
아직도 관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분법적 역사이다.
4.19 혁명은 제주의 사건을 민족의 비극으로 규명하려 하였다.
수십만이 희생된 인륜의 비극이 오천년 문화의 동질성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에 맡겨진다.
군사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희생자의 유해와 증거를 찾는 유족회를 억압하였다.
체제적 논리에서 참혹한 역사의 부정이다.
진영에 집착하는 진보와 보수의 시각적 아이러니 이다.
 
정치와 민족과 인륜에서 격리된 경계이다.
민주주의를 시도 때도 없이 주장하는 정치는 누구의 것인지 눈먼 자들은 무엇이 중한지 모른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는 없다.
위장 자와 권력의 울타리에 줄서는 잡배들의 세상이다.
국민의 생명을 절멸의 사지로 몰아가는 이념의 병이다.
극단주의자들의 집단주의이다.
술한잔 들어가니 문학적 사상의 끝빨 오른다.
문학은 술이다.
쌍욕은 목구멍에 걸려 뺏다.
 
심각하지 마라 그냥해본 넋두리이다.
이분법적 울타리를 적용하여 유족들을 탄압한 이념적 논리의 시대가 안타깝다.
군사정부는 유족회 회장에게 사형을 부회장에게 15년의 중형을 구형하였다.
무지한 비극에서 희생된 가족의 유해를 찾고 명예를 회복하는 혈육의 책임과 관련된 인륜이다.
4.3의 진상에서 전임정부가 추진한 정책이다.
사관의 갈등에서 군사혁명의 모질은 역사이다.
군사혁명 후 라면 혈육의 인륜을 망각한 법적억압에서 멸공시대의 군사검찰 가능성이 크다.
이념에 억매여 민족의 시각으로 공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인륜이 말살된 이념의 시대이다.
 
식민시대의 고통을 망각한 이분법적 사고의 극단적 집착이다.
그렇게 하여 무었을 이루었는지 결과에서 처참한 시간은 민주주의와 민족과 인륜이 절단된 시간이다.
동굴과 폐광과 어딘지 모르는 사지에 묻힌 백골의 원한이 망연하다.
목상에 죽은 자의 영혼과 산자의 절규 적 인내가 있다.
말 못하는 시간의 고통에서 진실을 찾아 처참한 아품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비극의 증거를 찾아 이념에 숨죽인 인내의 시간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오빠의 행적을 찾아다녔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오빠는 육지형무소에 수감된 후 예비검속에서 희생되었다.
어머니의 기억과 노력으로 실상의 저항을 위한 비극의 증거들이 살아있다.
 
희생자 유족회에 가입하고 참여하였다.
어머니는 비극의 한 올 한 올 기억하고 기도하며 살았다.
피는 못 속인다.
필자(경하)의 꿈을 통해 발견한 목상은 세상과 공유하려는 절규 적 인내의 표현이다.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문화적 공유이다.
체제가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의 인연과 인륜이다.
사상적 이유와 표현은 민주주의의 자유이다.
이분법적 갈등의 정치에서 어디까지 사고하고 저울질 하고 처세해야 하는지 예술과 문학은 자유이다.
표현의 자유이다.
 
경하를 지키려는 인선의 자유이다.
나락 같은 꿈의 번민으로 암시적 환영에 고립되어 목상의 표현을 포기하려 하였다.
꿈의 전달로 드러난 자신의 자아가 실체적 행위에서 보완적 상대를 의식하고 있다.
부족함의 비교에서 인습이 지배하는 사고의 번민이다.
인선은 꿈의 의미를 알았다.
경하가 모르는 어머니의 한과 증거들로 비극적 시간의 자아를 완성하고 있었다.
죄 없이 죽은 자의 차디찬 기억이다.
인선은 비극의 증거와 자신의 자아를 경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꿈의 번민과 고립에서 "내가 있 잔아"라고 하였다.
 
목상의 동행에서 짝 잃은 앵무새가 느껴을 고립적 감성이다.
인선의 자아는 꿈으로 전달된 목상의 생명적 표현을 삶으로 완성해야 한다.
지금은 무엇이 변하였냐고 묻는다.
정치와 시장과 시류에서 아니면 상관없는 영혼의 간섭에서 암시적 의지의 반문이다.
동행의 소망을 위한 행위이다.
시류와 인습의 도전이다.
사지를 찾아다니며 완성한 자아 또는 예술적 의지이다.
인선에게 경하는 모든 것의 동행자이며 목상의 발현자이다.
여전한 눈과 어둠에서 촛불과 그림자의 시간이다.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는 죄 없는 영혼의 귀환이다.
앵무새의 서운함은 그림자의 환영으로 아쉬움을 덜었다.
새의 존재와 알리바이는 급박한 구원의 구성에서 인선의 미스테리로 남겨졌다.
다행인 것은 인선의 치밀함을 보상하는 화목보일러가 공방에 있었다.
조금은 따뜻해 질것 같다.
성냥에서 학살현장의 화약 냄새 느낌이다.
꼬꾸라진 주검의 마른 피가 아침햇살에 반짝이는데 뒤에서 "철커덕 철커덕" 총알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해 학살이 자행된 밭에서 어린아이 머리만한 고구마가 수확되었다고 한다.
체제와 세월에 억압된 증언은 수도 없이 많다.
 
북촌국민학교 참상이 그렇다.
덜컹거리는 문짝의 비급은 신통방통한 천지의 기운이었다.
인선은 병원의 위기에서 신출귀몰 하며 실체 없는 환영으로 공방에 있다.
병원의 마지막 행적은 급박한 통화단절 이었다.
이후로 안부에 관한 문제의 진행은 없었다.
목상의 주체에서 어찌된 것인지 설명이 없다.
앵무새의 생사와 인선의 신출귀몰은 논리의 배반이다.
또 다시 소설의 한계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아리송하다.
꿈인지 생시인지 혼이 빠진다.
 
꿈과 목상의 실체적 문제에서 주어가 실종된 갑갑한 고문이다.
육하원칙의 파괴이다.
소설의 정체에서 비급이 난무하며 공정과 정의를 상실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에서 주어의 배신에 혹시나 하며 조급하다.
부족함의 미완으로 끝까지 끄뎅이 잡으라는 것이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 남겨두었다.
마무리에서 명백한 명암을 기대하며 잠시 속 알이 하려는 것이다.
제주방언은 힘들다.
아무리 노력해 추상해 보아도 글은 없고 글자만 보인다.
 
페이지 기획에서 몇 장 더 쓰면 되는데 에너지 소비가 많다.
춥고 주어 없는 미스테리에 외국어 같은 한국말로 독자 잡아 돌리는 재미가 솔 솔 한가 보다.
뒷글로 대충 이해하라고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전달의 단절은 정신 차려야 의미의 연속성을 유지 할 수 있다.
어느 부분의 잔영인지 독자의 기억력 테스트 같다.
옆에 있으면 한대 때리고 싶다.
중산 간 외딴집에 새가 더러 있나 보다.
이제 따뜻했으면 좋겠다.
2023.12.3일
 
152 작별하지 않는다(마무리).
[책을 마무리한 날 꿈이다.
요사이 부재가 사라져 예전에 정해진 비번 날 아침에 잠깐 보충한다.
특별할 이유는 없으나 용산 쪽이다.
용산 역 부근에서 시내방향으로 남여손님이 길 방 이다.
느낌으로 서대문 쪽 어디에 있는 신문사를 간다고 한 것 같다.
헨폰으로 레비게이션를 시도하는데 잘 안 된다.
사이에 삼각지 부근이다.
공사 중이다.
거대한 크레인 기둥이 도로를 가로질러 작업 중이다.
 
크레인 본체는 원효로 넘어가는 고가 쪽이다.
작업장 안내원이 밑으로 통과하라고 한다.
상황이 아슬아슬하다.
통과 중 자량이 정체된 듯 멈추었다.
사고다.
육중한 붉은색 크레인 기둥이 내차의 지붕위로 내려앉고 있다.
둥근기둥의 크기가 차량 전체에 그늘을 만들 정도이다.
앉은 자세에서 꼼짝없이 문짝방향으로 고개부터 허리가 꺽이고 있다.
점점 더 내려온다.
 
볼 수 없으나 뒷좌석에 탐승한 승객의 상황이 스친다.
더 내려오면 죽을 것 같다.
다행히 승객과 나는 생명을 부지하였다.
차는 레카차에 끌려 도로변에 있다
더러 있을 텐데 사고차량은 내차 만 보인다.
폐차해야 될 것 같다
공사관계자에게 어찌 하냐고 물었다.
걱정 말고 치료하라고 한다.
막연히 크레인이 크니까 큰 건설회사 라고 생각한다.
나의 입장에서 사고수습은 걱정 없을 것 같다.
 
먹고사는 것이 문제이다.
차에서 헨폰을 챙기는데 정사각형의 신형 폴더폰 이다.
이상하다.
집근처 병원에 가기위해 택시를 잡는데 방향이 한강대교 넘어 이다.
결혼초 아이들 취학 전 대방동에 살았다는데 그쪽으로 연상된다.
다시 헨폰이 원래의 것이 되었다.
꿈의 시각에서 사물의 전체가 아니라 환영처럼 부분만 투영된다.
용산 역 부근에서 멀쩡하게 택시잡고 있으니 크게 다친것 같지 않다.
나는 시방 남양주에 살고 있다.]
 
소설로 돌아와 존재와 자아의 완성에서 사물 적 또는 행위적 주어는 없 엇다
인선의 실체는 사물 적 존재로 이해 할 수 없다.
앵무새의 알리바이도 생명적 시각이 아니다.
경하의 내면에서 그려낸 환영이다.
구성에서 인선의 목상은 비극의 현장을 체험한 어머니와 희생된 가족의 한이다.
어머니는 오빠의 행적을 찾는다.
과정에서 육지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천지의 기운으로 살아서 풀려난 아버지를 만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과 관계에서 서술이 없다.
오빠와 관련된 어머니의 심기가 전부이다.
 
사랑과 인연은 차가운 것이 아니다.
소설의 차가운 비중에서 어느 정도 은폐되었던 어머니가 그리워 한 아버지의 흔적이 목상의 눈밭이다.
4.3때 불타고 동네사람들이 바닷가에 끌려가 학살된 아버지의 마을이다.
건천건너에 있는 비극으로 사라진 마을이 책의 정신 또는 목상의 실체이다.
공방이 있는 중산 간 외딴집은 어머니의 본가이며 환영으로 그려지는 책의 무대이다.
인선도 앵무새도 존재의 의미에서 4.3의 이해를 위한 그림자의 구성이다.
사고의 번민과 행위의 부족함에서 꿈의 암시적 당위성에 집착하는 전계이다.
소설의 주제에서 4.3의 시각을 형성하는 경하의 내면이다.
나의 독서에서 인선의 의지는 충분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행위적 실체이다.
목상의 예술적 감각이다.
자아의 집착에서 거창하다 사라진 소설의 끝이다.
생사의 모호한 설정에서 죽음의 사선에 있는 비극적 역사의 환영이다.
비극의 사실적 전계에서 어쉬움에 분노하였다.
글을 통해 나의 기억에 있는 사건과 연계하여 역사와 4.3을 다시한번 체험하였다.
실현되지 못한 목상의 표현에서 마무리의 휘발성이 강하다.
눈과 어둠과 영혼의 그림자와 촛불의 빈약한 위기는 끝내 추웠다.
소설이다.
2023.1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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