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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1.

박세욱. 2024. 11. 9. 06:22

202 재림 1.

성경을 인용하면 인류에게 선지자의 재림이 다수 있었다.

대표적 예시가 노아와 모세와 예수이다.

주의할 것은 노아의 시대이다.

물로 모든 것을 벌하였다.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물의 물리적 형벌이다.

모세와 예수의 시대는 예언의 가르침과 스스로 희생하는 고행의 사함이었다.

물리적 형벌에서 유형의 단정적 이유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또 다른 물리적 유형의 형벌과 재림이다.

이번에는 불이라는 것이다.

 

폼페이 최후의 역사가 예시라는 생각이다.

생태계의 합리성과 종의 유전적 선택에서 재림의 역사가 죄와 벌의 형벌로 발현된다는 암시이다.

21세기 인륜과 생명의 비극이 예시의 시작이다.

핵의 대립에서 침묵의 절대가 깨어진다면 불의 형벌이 된다.

우려되는 패권적 대립의 시대이다.

역사의 문명적 재앙에서 인류의 이성은 절대가 아니었다.

비극의 현장에서 걸핏하면 핵전쟁의 위협이다.

원인에서 냉전과 국경과 민족의 경계와 집단과 개별적 지배의 탐욕이다.

더하여 문명과 병행하는 자연환경 변화는 복합적 조건의 암시이다.

 

설령 주기적 지구 대류의 변화라고 하여도 참담한 파괴적 현상에서 지적문명의 가치적 대처는 필요한 것이다.

추가적 원인에서 증거적 관점이 지배하는 산업문명의 책임이다.

산업과 자본문화의 성취적 차별에서 애 굿은 저개발국가의 피해이다.

지구환경은 인류가 공유하는 창조적 질서이다.

재앙적 재림에서 인류의 의지가 통제할수 있는 데이터의 한계에 이르고 있다.

산업과 경쟁의 문명에서 상대적으로 자연에 예속된 노아시대에 어떠한 형벌 적 잘못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성경에서 홍수의 형벌은 인류를 특정한 것이 아니라 생태계였다.

이종의 교잡이라고 보기에는 종의 선별과 홍수 후 생태계의 시험에서 유전적 분별이 뚜렷하였다

형벌의 원인이었던 경건함과 세속적 삶의 야합이 궁금하다.

 

자연과 문명에서 탐욕적 성취와 자아의 타락이라면 시대적 비교에서 현재의 형벌적 조건이 크다.

노아시대의 절멸 적 재림에서 모세의 예언과 예수의 고행적 가르침으로 인류의 탐욕적 공격성이 회계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지구촌 패권경쟁과 철지난 이념적 냉전의 사선과 민족적 경계에서 선과 진실의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

집단과 개별적 생존을 우선하는 성취의 수단과 비교우위의 자본경쟁에서 지배적 차별의 체념적 현상이다.

가르침의 배신에서 지성의 분노는 설득을 위해 인간의 형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재림의 예지이다.

홍수 후 노아의 삶에서 자식과 관계는 세속적 역사이다.

창조자는 인간의 세속적 인연에 간섭하지 않는다.

유전적 시간에서 학습의 한계이다.

 

유인원의 시간에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간섭할수 없다.

만약에 유인원이 진화하여 문명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탐욕으로 인륜과 생명을 차별하고 타락으로 유전적

시간에 도전한다면 인류는 어떠한 판단을 할지 생각할수 있다.

창조에서 인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성에 예속된 유전적 생명체이다.

매우 궁금한 것이 산업사회 이전 수천년 전에 경건함과 세속적 무엇이 신을 노하게 하였는지 알수가 없다.

인류와 문명의 시간에서 당시 지구환경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한편으로 물의 생명력에서 재앙의 재림이 아니라 확장되는 생태계의 생존조건에서 창조의 보완은 아니었을까

감히 신의 선처를 의심 할 수 있다.

 

인종과 가나안의 차별은 노아시대 이후의 역사이다.

무지개는 재앙의 끝에서 평화에 이르는 재림의 완성이었다.

신의 재림에서 형별의 관점은 부분적 이었으며 생태계 연속성의 선처는 그나마 생명을 구원하신 것이다.

21세기 미지 적 가치의 문학적 관점에서 가르침의 학습적 이해를 달리 해석하고 싶은 욕구이다.

나에게 그것을 명하셨는지 증거 불충분으로 답답하다.

복의 선처 없이 부려 드시기만 하셔서 세례 요한의 불평이 이해된다.

성경에 수록된 노아시대의 재림을 증거 적 또는 과학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물은 가까운 외계에서 가져 올수도 있다.

문명 또는 존재의 미지를 인류의 과학적 한계로 단정 할 수 없다.

 

현생 하는 평범한 민초가 달에 갈수 있는 확률은 전무하다.

지동설과 만유인력의 학문적 실체가 그리 멀지 않은 역사이다.

홍수는 부분적 이었을 것이며 재앙의 현상은 시각적 한계에서 확대될수 있다.

재림의 학습적 조건 설정에서 자극적 표현은 가능한 문학적 관점의 상상이다.

선과 진실의 대중적 의식에서 죄와 벌은 확대된다.

공기는 있는 것으로 무감각 하나 없다면 매우 심각한 사건이다.

선과 악에서 천당과 지옥을 증명할수 없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에서 학습의 중심적 요소이다.

노아시대의 가르침에서 형벌의 원인과 진실이 무엇인지 지식이 부족하나 요점은 죄와 벌의 재림이다.

 

인류가 이해하는 지식과 문명의 실체가 지구생태계의 시간과 유전적 경계에 국한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의 미지는 좀 더 우주적 관점에 있다.

내것의 경계에 집착하여 빼앗고 죽여도 너 혼자 살수 없는 세상이다.

보호주의라고 하여도 울타리 밖에서 챙길것 챙기고 내 것 또는 우리 것이라고 억지 부리는 것이다.

늬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 이라는 졸장부의 억지이다.

지구촌 생산성에서 글로벌 기업의 대부분은 힘자랑 하는 제일주의의 밥그릇이다.

선과 진실에서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고 하셨다.

지구 밖 센 분의 재림이 기대된다.

공유와 공존에서 가진 자로 나누어 회계하면 용서의 선처가 있다.

 

80억으로 좁아터진 지구에서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가진 자의 역정으로 죽어나는 민초의 삶이다.

지배와 차별에서 인연이 안타까워 죽지도 못하고 시팔시팔 하며 재림의 시간을 염원한다.

차별적 권세에 억눌려진 민초의 분노에서 제대로 폭력적 본능을 발휘해 보고 싶은 것이다.

재림의 난세가 되면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어차피 종말이면 바위에 헤딩해도 밑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생의 단절에서 언제까지 힘의 논리와 치졸한 권세의 억압에 복창 터지는 인내로 살수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촛불 같은 작은 저항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혁명한다고 하면 가만히 놓아둘 말 종이 없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할 것이라 하였다.

 

돈벌이에 국한하여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경계와 차별을 간과하면 지성의 분노는 강이 되고 홍수에 이를 것이다.

경건함과 세속적 야합의 이해에서 노아의 시대와 비교 할 수 없는 가르침의 배신과 타락적 탐욕을 암시할수 있다.

현상되지 못한 상상과 자아의 조각에 불과한 점지 어쩌고 하는 유전적 시간의 망동에서 신의 모방은 우선하는

불의 형벌이 될 것이다.

슬슬 재림의 불 받는데 열개가 아쉽다.

창조와 존재의 합리성을 충족하지 못하면 현상의 결과는 있으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끝난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계하여 바로잡는 가르침의 선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2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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