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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학문.

박세욱. 2024. 11. 7. 02:57

201 역사와 학문.

얼마 전 무지한 분께서 잘못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의 법적판단을 진실이라고 떠드는 한심한

작태가 있었다.

잘못된 역사에 핍박받은 민생을 고려하지 못하는 제 잘난 처신이다.

민생은 역사에 예속된다는 실상을 망각한 학문이다.

역사에 고통 받는 삶의 저항에서 어두운 내 것에 집착하여 잘못된 시대의 교훈이 없다.

시간의 현상에 머무는 법이 잘못된 역사에 예속되어 격어야 하는 민초의 고통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와 생명과 인연에서 미래를 오판한 패권적 역사에 의한 삶과 자유의 억압이다.

무엇 때문인지 아리송한 비극적 역사의 자의적 포장에서 민초의 억압적 삶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과 학문이다.

잘못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삶이 안타까운 것이다.

 

오천년 역사에서 패권적 지배를 획책하는 식민사관의 예속적 억압을 시대의 사건정도로 포장하려는 속알 머리

부제의 학문이다.

백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주장의 저의는 민족의 주체를 부정하는 외세의 철딱서니 이다.

왜라는 원인에서 현상에 머무는 지식을 학문이라고 떠들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시련에서 학문이 한민족의 문화적 전례와 홍익인간정신의 정체를 상실할 이유가 없다.

제한적 목적을 상실한 중앙아시아 소모전에서 북한군 파병이 한민족의 역사인가 인연인가 혈육의 동질성 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그들의 잘못인가?

 

역사로 포장되는 민초의 삶과 인륜이다.

식민사관의 고통이 민초의 잘못인가 법과 학문에 물어보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를 민초의 고통으로 희석하려는 제 잘난 학문이다.

삼일절에 일장기를 내거는 의지가 무엇을 위한 짓거리 인지 오천년 역사와 문화에서 일말의 정체성도 없다.

주체의 반격은 당연한 것이다.

심리전 영상이라고 하나 북한군 전멸 소식에 무감각한 한민족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국제정세와 상관없이 안타까운 동질성이 우선하는 것이 한민족의 정서이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새로이 설정된 동서냉전의 사선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결과를 예지할수 없는 소모전에

끌어들여 총알받이 운운하며 한민족의 정체를 폄하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대립과 폭력의 역사인지 언제나 억압된 민초의 고통으로 남겨진다.

나와 가족과 이웃에서 체르노빌 원전에 진입한 전문가의 사명과 다르다.

그래서 혈육과 민족의 동질성으로 가치 없이 죽지 말라는 것이다.

인륜과 생명은 같은 것이다.

식민사관도 월남전도 러시아 파병도 우리의 역사가 아니다.

이질적 타의에 의한 패권적 지배의 과거이며 체제와 냉전의 경계에서 폭력적 대립의 현상이다.

민주주의를 경계의 폭력적 사고로 지켜야 한다는 고착화된 설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냉전적 경계의 사고에서 폭력적 생산성의 우려가 한반도 비핵화 문제의 속살이다.

절대우위의 힘에 의한 패권적 지배에서 자본과 무기산업의 보호는 절대의 가치이다.

 

무기산업의 생산에서 소비의 딜레마 이다.

요사이 수조원에 달하는 공중조기경보기를 들여온다는 뉴스다.

분단된 군사대치의 현실에서 방위를 위한 비용이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경계에서 전쟁의 대치가 없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필요한 방위비를 어려운 살림

쪼개어 지출하고 있다.

세계평화의 지정학적 사선에서 보상 없는 지출과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요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에 방위비 추가부담은 ATM기가 아니라 곳간거덜 나는 형국이다.

그나마 근근한 제조업도 뿌리 체 뽑아가려는 형국에 방위비 추가부담은 동맹이 아니라 지배이다.

그 돈이면 어려운 출산율 장려에서 결혼하여 아이 나으면 어지간한 집 한 체씩 제공 할 수 있다.

 

아등바등 고생하며 문지방 붙들고 사는데 애먼 대로 고래힘줄 같은 재정이 헛되는 것이다.

차라리 북쪽처럼 파괴적 무기가 재정과 안보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방어의 비용에서 핵무기 우짜고 거론하면 국제정세의 파괴적 확산을 이유로 사족을 구속하려 할것이다.

민주주의 사수와 확장은 고립과 파괴적 폭력성이 아니라 문화적 소통과 교류의 전파가 효과적 이다.

철도와 도로를 만들어 놓고 휑하니 인적 없는 가로등과 아스팔트의 하얀 선이 이유 없는 조형물이 되었다.

관계의 단절에서 승질머리에 파괴하고 장애물 설치하는 애 굿은 화풀이의 상징이 되었다.

국제질서에서 민주주의 확장을 위한 고립적 압박의 고육책이라면 평화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80여년 민족과 혈육의 단절에서 문화적 소통과 교류의 시도이다.

문화의 일체성 회복으로 가져도 쓸모없는 핵무기의 가치를 희석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왕래하며 온전한 우리 것을 찾을 수 있을지 형색뿐인 K문화이고 선진7개국 언저리이다.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에서 문민정부가 언제인데 정부 따로 국회 따로 독선이 난무하는 판 떼기 이다.

국회운영에서 상임위원장이 무슨 권한으로 소속의원의 반론을 문제 삼아 발언권을 정지하고 퇴장을 명하는지

절차적 괴리가 있다.

무엇을 위한 정치인지 알 수가 없다.

국회법의 권한이라면 민주주의의 합리성이 아니다.

국민의 위임을 사사로움과 집단적 경계를 이유로 절차를 무시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솟을대문에 갇혀 닭 벼슬 세우다 나라 망한 세도정치의 한심한 작태이다.

덩달아 춤추는 사정에서 아직도 권세의 그늘에 정의가 불편하다.

 

녹취에서 알아서 포복할 것이라는 권세의 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매사가 논리 없이 억지춘향의 낮바닥 뿐이다.

철없는 문지방은 어떠한 변고가 있어도 안 된다는 제가의 처절한 집착이 어렵다.

거시적 역사도 문화도 민생도 없다.

여기나 저기나 낮 바닥 처신없이 들이밀고 보는 제 잘난 시정잡배의 닭 벼슬 이다.

도대체 민주적 절차의 합리성을 찾아 볼 수 없다.

모두가 제 잘난 것이다.

허물에 하늘을 탄식하고 정절에 목매는 선비가 없다.

국민 앞에 허세부리고 외세에 줄서는 주체 없는 권세의 처신이 민심은 천심이라는 점지를 모른다.

 

지정학적 경계의 비극에서 민초의 삶과 인연의 감내를 강요하는 사관과 편협한 학문이 안타까운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

사관의 올바른 정리에서 세워놓은 남대문 현판의 역사는 우리 것이고 현해탄의 역사는 과거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위상에서 무시할 것은 무시하자는 것이다.

한미동맹은 필요한 것이나 현해탄 역사의 국민정서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은 의식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경제와 사회 또는 국제질서 공조에서 군사부분을 제외한 가능성은 실현되고 있다.

한반도의 입장에서 냉전적 경계의 평화적 완화가 중요한 요소이다.

태평양과 대륙의 경계에서 아태든 인태든 대한민국이 주도 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다.

대륙의 이웃에서 경제문제와 분단의 고착화 등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강요해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정학적 경계에서 공유하여 공존하는 평화가 아쉬운 것이다.

철딱서니 없는 권세의 어리석음에 동맹의 어려움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예리한 칼날에서 선의 존재감을 이해한다.

인간의 공격성에서 지키지 않으면 선과 진실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국정의 영향력에서 권세의 분에 넘치는 철없는 점지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긴 꼴이다.

무엇을 위한 삼신할미의 협잡인지 예초의 목적에서 물러 날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불손한 협잡에 의한 거짓과 수단에 치우친 의견수렴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생태적 합리성이 결여된 결과에서 미래는 결정된 것이 없다.

 

정치공학의 수단에 치우쳐 진실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신의 뜻에서 동행과 견제이다.

민주주의의 합리성에서 고집스런 내 것 만이 전부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대의에서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선택의 방향은 명확해야 한다.

통신사회의 예속을 기대하는 것은 만인이 공유하는 새로운 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은 인류의 일체성에서 공유와 공존이다.

지식의 진화에서 전례는 깨어지는 것으로 변화의 시작이다.

21세기는 의식하지 못한 곳에서 변화하는 시대이다.

과거의 절대성에 구속되어 새로운 발현을 예지하여 대응하지 못하면 기회의 위기가 된다.

 

통신사회의 민심은 정체되지 않는다.

물리적 지식시대에서 공간적 변화(재림)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반도 정체성과 악이 아니라면 또 다른 선택은 어려운 것이다.

202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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