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21세기. 본문
192 21세기.
동서냉전의 경계적 피해와 피로 누적으로 희석되는 이념적 역사에서 새로운 체제의 요구이다.
자본과 시장경제의 무한경쟁에서 조건적 차별의 불평등에 지쳐가는 성취와 관계의 새로운 질서이다.
이분법적 역사의 관성에서 개별적 자유와 문화의 시대적 변화이며 물질적 생존과 성취의 실용주의를 우선하는
가치관의 전환이다.
타의에 구속된 사회성 요구에서 나의 존재를 우선하는 독립된 지성의 시대이다.
지배적 사회의 차별적 사회성 강요에 저항하는 자유와 지성이다.
동서냉전의 지정학적 경계에서 진영정치의 위기와 획일적 사회성을 요구하는 산업사회의 예속으로 잊혀지는
자아적 고민의 회복과 휴머니즘의 제고이다.
철지난 이분법적 정치의 집착과 자본문화의 차별적 기회와 지배에서 잊혀지는 대자연의 질서와 공유이다.
문명과 자연이 병행하여 공존하는 삶의 안주이다.
21세기 초입 정치를 살펴보면 1차원적 한계를 실감한다.
우리편 밖에 모르는 국수적 집단의 저돌적 극단주의 이다.
이념적 체제의 희석과 새로운 질서의 과도기적 혼란에서 정치적 집단의 이기적 극단성 이다.
문화의 연속성과 시대적 이해에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돌연변이 적 발현이라는 생각이다.
뼈다귀 없는 저돌적 공격의 주의적 관심으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계산된 정치공학의 시도이다.
거짓과 과장된 표현으로 이분법적 경계의 현상적 효과를 이용하려는 정치이다.
좌우 진영논리의 경계에서 냉전적 승패의 심리를 자극하여 정치적 입지를 취하려는 권모술수 이다.
물론 정당한 경쟁과 인연의 책임에서 생존과 자존의 위기적 저항은 체제와 지배력의 배려가 필요하다.
문제는 선동과 과장의 정치가 지향하는 방향에서 정신적 구심점이 확실하지 안다는 것이다.
전체와 대의에서 우리편에 집착하는 진실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21세기 민주주의의 미래에서 역사와 문화의 정신적 구심점 없이 나와 우리편의 주도적 기회를 위한 집단적
독선의 정치가 옳은 방향 이냐는 것이다.
합리성을 충족하는 순리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맡겨진 자의적 이며 왜곡된 기회이다.
검증의 기회는 있을 것이나 승패의 치열함을 우선하는 대결적 또는 적대적 설정의 결과에서 우려이다.
민주주의의 미래에서 진실을 왜곡하는 불편한 학습의 확장이다.
절차적 충족과 동의의 전제에서 순리를 부정하는 폭력적 경험의 불편함이다.
양당제의 선택과 보완적 국정에서 쉽게 이해할수 없는 시도이다.
옳고 그름의 이해에서 배반적 형태이며 선과 악의 불편한 동행이다.
21세기 민주주의의 미래에서 불합리한 현상이다.
연장 탓 말고 일 잘하면 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빈 깡통이 시끄럽다.
21세기 통신사회의 지적공유에서 미래의 예지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전쟁과 기후의 불확실성에서 주체적 민주주의의 선택은 21세기의 역사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집단주의 역시 여전하나 저돌적 극단성은 시험의 한계에 있는 듯하다.
쉬운 정치는 없다.
21세기 지정학적 문제로 돌아와 통신사회의 지적 지성은 위정자들의 역사를 안다.
가르침을 배반하는 역사의 이질적 대립과 냉전적 진영논리의 경계에서 방치되고 있는 인륜이 처참하다.
전쟁과 정치의 불확실성에서 위태로운 것은 민초의 삶이다.
민족, 문화, 냉전 등 이질적 경계를 구분하는 지배의 비극이다.
비극적 역사를 살펴보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획일적 사고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민족과 정치에서 국경 즉 선의 경계에 있는 이질적 지배의 다툼이다.
역사의 불행한 과거에 집착하는 사고의 고착화에서 꼭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다.
정해진 선을 따라 가야만 목적에 도달할수 있다는 1차원적 사고의 구속이다.
비켜가고 돌아가고 지름길 찾아가는 방법의 부제이다.
역사와 문화의 학습에서 시간과 종의 유전적 분별력을 실감하는 한계적 현상이다.
종의 유전적 유별이다.
글로벌 문화, 사회, 경제에서 3차원적 공간의 공유를 이해해야 한다.
이웃이라는 역사의 필연적 동행에서 과거와 경계를 초월할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우선하여 평화로운 삶을 파괴할수 없다.
전쟁은 죽이는 자나 죽는 자나 모두가 비참하다.
통신사회의 지식은 정치적 명분과 이해타산을 우선하는 역사의 우여곡절을 안다.
역사의 연속성과 기록에서 평화는 안되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혼란을 구제하는 재림의 역사가 굳이 필요할 이유는 없다.
인류의 폭력성으로 인한 일상화된 공격과 방어에서 21세기의 정신은 무엇인가?
침략의 역사에서 21세기의 선택은 새로운 차원의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문명과 자연을 공유하는 평화의 공존이다.
사물의 이해에서 미래와 미지를 지향하는 설정과 인식의 문제이다.
공격과 방어의 생존적 의식이 지배하는 인류의 폭력적 역사는 공존과 이웃의 믿음이 부족하다.
한길 사람 속을 모르는 끝없는 울타리의 경계적 문화이다.
살생과 모여서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라는 가르침에 이유가 있다.
생명에서 죽이고 편 가르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길이요 생명이다." 라는 가르침을 이단의 설정으로 이해하는 잘못이 있다.
선을 지향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궁국적으로 인류는 하나라는 것이다.
문화의 격리로 인한 이동과 소통부제의 이질적 역사에서 인류의 일체성은 끈임 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웃으로 시작하여 씨족과 부족과 국가의 개념에서 글로벌 사회의 공유이다.
인류는 하나라는 진화의 실체에서 국경의 개념은 문화적 소통과 교류를 학습하는 시간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공존에서 소통과 절차를 통한 결론은 하나를 이루는 합리적 체계이다.
존재에서 과거 보다 미래를 우선하는 지적시대의 새로운 정립은 이웃과 동행하는 믿음의 질서이다.
과거와 현상적 사물에 집착하여 편 갈라 죽이고 지배하는 부정적 문화와 역사의 진화가 필요한 시간이다.
예지에서 현존하는 역사와 문화의 갈등은 언젠가는 공기처럼 의식의 공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증거적 관점에 집착하는 브레이크 없는 관성적 절대성의 비생산적 결론에서 미래를 예지하는 절제적 지식의
절대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학습의 유전적 또는 시간적 한계를 이해하는 최선의 선택에서 지적 절대가치의 제고이다.
폭력과 차별적 지배의 인습에서 언제까지 과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글로벌 통신사회와 지적문화의 공유에서 민족과 국경의 경계는 영원하지 안을 것이다.
인류는 냉전적 경계의 이질적 대립과 산업사회의 경쟁으로 지치고 있다.
기후 문제는 코앞에 와 있다.
산업사회의 무한경쟁과 균형을 상실한 자연현상의 버거운 시점에서 비극적 역사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파괴하고 죽인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우리시대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한다면 너 다음은 없냐는 것이다.
왜 사냐?
시끄러워도 21세기의 지적민심은 과거의 이분법적 구속에서 벗어나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될것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새로운 정신의 필요이다.
철지난 좌우논리에 기대는 정치의 기회주의가 아니라 인류는 하나라는 개념과 질서이다.
새로운 시간에서 어떠한 형태이든 선지자의 발현으로 자연과 문명을 공유하게 될것이다.
카진스키가 우려하였던 생명에서 사라지는 자아와 동심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될것이다.
산업사회의 지배에서 잊히는 자연의 예속은 인류의 안식처가 될것이다.
창조는 하나이다.
통신사회는 공간적 의미를 이해하는 글로벌 사회이다.
21세기의 역사는 확장된 문화의 공유이다.
데이터 산업과 기계적 생산성의 미래는 존재의 공유이다.
가까운 미래에 생산성의 지배로 편갈라 다툴 일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늘 가시적 변화를 요구할수 없으나 소의 목에 멍에를 얹고 수천번 오가야 비로소 길이 난다고 하였다.
상상의 학습적 한계에서 시작은 미약한 것이나 의식하면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웃의 믿음이 부족하여 지배하고 편 갈라 죽이는 것이다.
21세기는 이동과 소통의 시대이다.
세계는 이미 글로벌 문화와 사회와 경제의 공유에서 정치적 확대의 시작에 있다.
미래에서 통신사회의 역할이다.
지구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글로벌 기업은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한다.
국경 없는 자본집약과 경제에서 형평성의 기여이다.
정치와 자본과 기업은 민초의 생존과 삶의 차별을 완화해야 한다.
가진자는 가진 만큼 나누어 사회와 인류에 기여해야 한다.
미래는 차원적 시간의 충족으로 진화하여 발전하게 될것이다.
2024.9.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