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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여 안주한다.

박세욱. 2024. 9. 13. 09:05

189 비교하여 안주한다.
삶의 욕구에서 모든 사람이 요트를 가진 것이나 안 가진 것이나 문제는 같다.
물론 요트의 실체를 아는 것과 모르는 문제는 문명적 시간에서 다른 차원이다.
아침에 집중력이 좋은 것은 휴식의 장점이다.
경쟁은 피곤하다.
안주할수 있는 정도의 조건이 마련되면 경쟁은 완화된다.
정도라 함은 지식과 지성으로 이해할수 있는 능력적 차등의 범위이다.
무한경쟁의 끝없는 치열함을 완화해 보자는 것이다.
내 것의 집착에서 공유의 개념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멀지 안은 시간에 기계적 생산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것이다.
 
노동력 상실에서 인류의 생존은 절대분배에 의존할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이념적 체제의 선택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진화에서 기계적 생산성 시대의 이해이다.
생산과 분배에서 이념적 체제의 소멸이다.
시대의 전환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공익적 개념의 학습이 필요하다.
21세기 초입에 말씀드리는 공적자본 확장은 이념적 혼란이 아니라 산업진화의 예지라는 것이다.
팬데믹 방역과 격리의 경제활동 중단으로 가계의 위기에서 일상과 생존을 보호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질병확산 방지의 대규모 격리와 치료를 위한 사회 인프라의 총집결에서 빈곤으로 대처할수 없는 생필품 조달과
공급을 위한 자금력 이다.
공적자본 이다.
 
우리나라는 메르스 창궐에서 격리자의 생활비 지급 제도를 마련하고 있었다.
감염자의 치료와 비용은 국민의료보험제도와 재정을 통해 감당할수 있었다.
질병방역의 총체적 대응에서 이러한 공익적 제도가 생존조건의 사회적 위기를 안정 시킬수 있었다.
메르스 방역과 확진자 격리에서 남겨진 가족의 생계 때문에 불응하는 어려움을 경험하며 마련된 제도이다.
국민의료보험 재원과 격리자 가족의 생계보호를 위한 제도의 안정성이 총체적 위기의 방역에서 국민참여를
이끌어 낼수 있었다.
우연한 사건의 대응에서 필요한 조치의 경험이 미래가 된다.
미래는 암시적 질서의 예지적 교훈이 있다.
공적자본의 주장은 이념적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기계적 생산성에서 인류의 존엄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다.
 
경제에서 일시적 자금과 준비된 자금의 효율성은 물가에 적용되는 작용에서 다르다.
준비된 자금은 물가에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고 제도화된 자금회수에서 금리인상의 부작용 보다 수월하다.
현대의 산업은 기존 인프라의 풍선 속에서 무한경쟁 이다.
산업의 분야별 성장에서 선점의 시대는 끝났다.
생필품 산업 경쟁에서 새로운 업종의 개발이나 부족한 인프라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품질향상의 가성비는 경쟁에 유리할수 있으나 경제전반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제조업 포화상태에서 자본과 시장경제의 재투자와 분배는 상호작용의 조건을 상실하였다.
기업 또는 시중자본의 제조업 재투자는 현실적으로 협소하거나 불가능하다.
팬데믹으로 확장된 자본의 방황이다.
 
인간의 물질탐욕에서 별짓을 다해도 호사의 한계가 있다.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과 산업으로 인간의 탐욕적 호사를 만족할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탐욕에서 생필품 제조업의 한계이다.
결국 확장된 자본은 의식주와 거리가 있는 물질과 토지와 주택의 요점적 가치 등 자산에 투기하고 있다.
부동산 가격상승에서 몰지각한 자본의 투기적 배팅을 감시해야 한다.
가진자의 무지에서 철없는 자본문화의 유희이다.
새로운 산업 생산성과 개별적 자본으로 물질을 축적한다는 말씀은 권리와 행사에서 지배적 권력이 발생한다.
개별적 자산과 물질의 치부적 소유는 공급의 불확실성으로 물가상승의 원인이며 생존비용이 증가한다.
물질 등 기초자산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공유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산업전반의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공유경제이다.
인공지능과 데이터를 활용하는 공유적 또는 효율적 물질 활용이다.
수요와 공급에서 과잉생산으로 발생하는 자원낭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산업진화 이다.
생필품 산업 경쟁에서 인프라 확장의 한계로 발생하는 과잉경쟁과 생산의 부작용 개선이다.
공유경제는 시장경제의 무한경쟁과 자본문화의 부정적 학습으로 발현된 경제학이다.
경제 이데올로기에서 공유경제와 공적자본의 이해가 필요하다.
자본과 시장경제의 견디기는 끈질것 이나 데이터와 기계적 생산성에서 자본문화의 한계는 분명하다.
시간의 필연이 되어가는 팬데믹의 위기도 공익적 제도와 공적자본의 필요를 요구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의 곁에 이른다고 하였다.
생명과 인륜에서 공익적 관점의 가르침이다.
주체의 지배와 관계의 순종에서 경쟁과 상실의 피곤을 가르치신 것이다.
십일조의 의미를 제대로 알이야 한다.
생명의 공유는 물질의 치부가 아니라 존재와 관계의 존중이라는 것이다.
존재로 선택된 것은 가진자의 기회가 아니라 높낮이의 형평성을 우선하는 보편성의 공유이다.
약육강식의 생태적 시험에서 생명과 인륜의 인간적 분별력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득권의 차별에서 평등이 전제된 평화이다.
박해받는 생명과 인륜을 위해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사회적 가르침 이다.
 
박애는 박해의 차별을 생명으로 대변하는 앞선 자의 노력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성전을 우상숭배라고 지적한 스테파노는 돌에, 갈릴레이는 종교적 이유로 배척되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안타까운 역사의 주인공 인가?
외계인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행된 오류이다.
최소한 신앙과 학문을 공유한 집단의 시간과 시각에서 진실과 반론의 치열한 박해이다.
예루살램의 지배력 혼란에서 타국으로 이주한 유대인과 붉은 광야에 은둔한 다수의 유대인이 있었다.
이들이 헬라파 라고 한다.
스테파노와 신학자 바울로가 헬라파에 속한다.
예루살램을 떠나 세상과 광야에 은거한 헬라파의 신앙적 믿음이 깊었다고 한다.
 
헬라파의 타국적 이목과 은둔의 정신이 히브리파의 정착적 사회의 예속과 달랐다는 이해이다.
헬라파의 깊은 신앙심으로 순교자의 사후를 관리했다는 말씀이 있다.
예루살램 복귀 후 소수 헬라파와 다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율법적 갈등이 있었다.
당시 히브리파는 예루살램 밖의 신앙을 인정하지 안았다고 한다.
기존신앙에 의한 특정한 관계의 수성과 창조에서 세상은 하나라는 포괄적 개념의 대립이다.
지배와 파괴된 도시의 생존에서 히브리파의 율법은 사회적 결속과 결부된 연속성의 수성이었고 광야에
은둔한 자아와 타적 예속에서 주체를 찾아야 하는 헬라파의 구성적 요건이 달라다는 이해이다.
히브리파의 우리라는 기존율법 수성과 헬라파의 이방인 수용에서 창조는 하나라는 개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에서 헬라파에 대한 유대 기득권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시대의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정 하였다.
통곡의 벽을 사진으로 보았다.
예루살램 성곽이었으나 전쟁에 패한 후 점령자에 의해 성은 파괴되고 교훈적 의미로 남겨둔 일부라고 한다.
훗날 예루살램이 회복되고 이국과 광야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처참함에 통곡한 장소라고 한다.
사진으로 보는 성곽은 미적 감각을 느낄수 없는 긴장되는 높이의 견고한 구조물 이었다.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팔레스티나의 치열하고 처참한 역사를 먼저 느낄수 있었다.
방어의 치열함이다.
지중해 남쪽 초승달 지역은 빙하기 추위를 피해 이주한 유라시아 인류에게 안주와 쟁탈의 이질적 역사가 있다.
애굽을 탈출한 모세의 일행이 요단강이 보이는 느보산에 도착했을 때 이르기를 너는 강을 건널수 없다 하였다.
 
일부해석에서 지배적 사관의 흔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국할수 없다는 가르침 이라고 하였다.
나의 견해는 예루살램의 치열한 정세가 난민형태의 모세일행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팔레스티나의 역사가 그렇듯이 당시 예루살램의 지배적 정세가 만만하지 안았던 것이다.
역사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니다.
예수께서 지중해 남쪽연안 초승달 모양의 지역에서 박해받던 유대인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유복하지 못한 가정 형편이었다.
나자렛은 평범 이하의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권력자의 시각으로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서 선지자의 발현을 의심했다고 한다.
마구간은 가난하고 약한자를 대변하는 탄생의 조건이다.
 
예루살램의 예수께서 기득권의 박해에 정치적 도전을 실현한다.
주제는 평등이며 존재는 권세와 물질이 아니라 종의 유전적 분별과 생명이다.
오늘날에도 기득권의 권세에 평등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물은 낮은데로 흐른다.
가난한자의 내일에서 생태적 순리를 따르는 세상의 변화를 기대한다.
박애에서 불편한 현상의 기대는 희생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의 사함은 박해에서 박애이며 죄에 대한 선의 저항이다.
인간의 동물적 진화를 지적하는 저항이며 과정에서 대자연적 자아의 이해이다.
창조주의 대자연 이다.
 
물질은 시간에 정체된 현상이다.
생명은 물질의 정체와 다른 우주 즉 존재의 원초이다.
사물의 이해에서 생명과 물질은 동격이 아니다.
탐욕적 지식의 생존은 결국 육신과 정신의 해탈에서 대자연을 이해하는 자아적 회귀의 삶이다.
경쟁의 문화에서 이해 불가한 인내와 고행의 정신적 깊이는 고통이 아니라 정신을 위한 선택이다.
물질의 집착에서 자아적 성찰 없는 만족은 한계가 있다.
결국 만족은 내안의 자아이다.
부르주아의 치부적 안주와 이데올로기의 혁명에서 대자연의 평화이다.
역사는 누구나에게 있는 것이나 예수의 가르침은 주체의 평등을 위한 저항의 정신이 되었다.
 
불의에 반론하여 저항하라!
인류의 동물적 본성 폭력적 지배와 기득권의 차별을 배척하는 평등의 가르침 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팔레스틴과 예루살램의 역사가 아니라 부르주아에 저항한 박애정신이다.
약자를 위한 희생이다.
선지자는 물질과 권세에 예속되지 안는다.
21세기 문명과 자본문화에서 스테파노와 바울로의 교훈 그리스도교의 저항의식은 부르주아에 묻혀있다.
종교의 박애정신이 자본과 시장경제의 경쟁적 성취에서 가르침의 망각으로 사라졌다.
성전을 우상숭배라고 당시 권세에 있는 재판정 랍비 앞에서 신앙의 정신을 주장한 스테파노를 돌로 때려
죽인 자들의 정체성과 행위는 무엇인지 예루살램의 역사가 궁금하다.
 
가르침을 전달한 바울로는 왜 은둔하였고 배척되었는지 기득권의 차별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계승자에게 악행을 저지른 그들은 누구인가?
박애에 박해를 가한 무지이다.
나는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선택에서 종교와 정치의 가면이라면 이율배반적 의심의 증거를 요구하게 될것이다.
인류는 동물의 시간을 벗어난 지식의 초입에 있는 창조물이다.
유전적 시간의 차례에서 미지를 예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내가 아니라 주변과 타의를 살펴야 한다.
자유에서 동격으로 타의에 예속되는 지식과 지성은 없다.
 
이웃과 동행자의 의지를 과소평가 하는 자유의 성취는 없다.
인간으로 성취에 우쭐하여 신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사소한 능력을 과대평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의 영역에서 재림은 반드시 존재한다.
가르침의 배신에서 사함과 용서가 아니라 응징과 처벌이 땅의 갈라짐과 하늘의 불덩어리로 증명 될것이다.
치열하고 처참한 인류의 역사에서 변한 것은 땅과 돈의 자리바꿈 뿐이다.
나중에 히브리파와 헬라파는 화해했다고 한다.
2024.9.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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