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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예속.

박세욱. 2024. 9. 25. 06:32

191 대자연의 예속.
북극곰의 위기는 어제 오늘 애기가 아니다.
탄소배출로 발생하는 지구 온난화에 의한 빙하지역 축소의 문제이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민가로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던 북극곰이 사살되었다.
죽인 것이 안타까운지 실험용으로 쓰겠다는 설명이 부자연스럽다.
시베리아 동토가 녹아 질척거린다고 한다.
순록의 이동은 괜찬은지 동토의 생태계가 우려된다는 보도이다.
시베리아의 저온에 응결되어 있는 메탄의 증발은 어찌되는지 지구 온난화의 악순환이 점입가경 이란 생각이다
가뭄과 홍수가 빈발하고 있다.
북유럽과 동남아의 홍수와 중동에서 심상치 안은 호우와 홍수로 기후위기의 현상적 체험을 일상화 하고 있다.
 
지난대선에 R200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탄소배출 문제이다.
이상기후로 농작물 작황이 떨어지고 바다기온 상승은 어획량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육고기 대신 생선 많이 찾아 드시라고 하시드만 그마져도 불행하게 될것같다.
한국에서 김치가 사라질 것이라는 딴 나라 학자의 우려도 있다.
온난화의 기온상승으로 배추, 무우 등 가을작물 생산이 어렵다는 보도이다.
배추를 대륙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올해 김장은 우여곡절이 있을 듯하다.
추수철 남부지방 들판에 바람과 홍수가 들이닥쳐 여물은 벼들이 쓰러지고 잠기는 안타까운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9월까지 길어진 여름은 한가위 명절 추석이 하석이 되었다.
나이 지긋한 분께 "올해 같은 9월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팔순에 처음이라고 한다.
육십 후반 나도 처음이다.
문제를 알고 있으나 현실적 대안은 학문적 우려에 그치고 있다.
선진국의 산업경쟁에서 발생하는 공업화의 문제가 지구생태계의 불확실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산업사회의 국제질서에서 인류공영과 거리가 있는 패권적 지배의 문제라고 지적할수 있다.
자본지배의 경쟁에서 파생되는 화석연료와 자원낭비의 문제이다.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수급불안은 청정에너지 정책의 후퇴와 원전부활의 원인이 되었다.
화석연료의 안보적 중요성이 북극곰의 생존에서 우려되고 있다.
 
AI산업의 에너지 요구량은 폐쇄된 원전을 재가동 하는 수순에 있다.
화재로 인한 밧데리의 불확실성이 있으나 전고체 등 기술의 진화에서 미래산업의 예지는 전기가 동력이다.
방송에 출현한 과학자께서 과학은 실행의 오류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강변하셨다.
그래도 수백 대가 주차해 있는 지하주차장에서 자연발화를 의심하는 화재는 위기를 실감하는 불확실성 이었다.
큰 오류는 실험실에서 하시고 일상에서 작은 오류로 수정되었으면 한다.
탄소배출의 부작용에서 대안이 마땅치 안은 기술적 한계이다.
중용의 이해에서 양과 음의 이치는 반대되는 사물의 존재이다.
다이너마이트의 원천기술은 실수에서 발견한 물질의 보완적 또는 상호작용의 기능이었다고 한다.
현상은 순수의 상호작용 이다.
 
과학적 미지의 영역은 탐구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는 지배와 생존의 조급함에서 에너지 수급불안으로 발생하는 자연파괴 현상이다.
화석에너지도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명과 육신에서 준비된 물질은 선택된 것이다.
화석에너지나 밧데리의 화재나 경쟁의 습성으로 쉽게 접근하려는 자본의 문제이다.
대륙의 작은 거인께서 고속철도 문제로 하신 말씀이 있다.
가면서 쉬고 오면서 쉬면된다는 말씀이다.
틈바구니 없는 자본과 시장의 경쟁에서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경쟁의 선점에서 기회의 꼬투리를 부여잡는 섣부른 오류의 비생산성 보다 학습의 시간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화석에너지 시대의 예상치 못한 오류를 수정해야 하는 싯점이다.
AI 역시 인류가 알수없는 영역의 오류를 의식해야 한다.
산업사회의 지배에서 비개발 국가의 인프라 확장은 선진국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경쟁의 정당한 현상이다.
자본과 시장경제의 경쟁에서 아마존 밀림 훼손과 화석연료의 개발욕구를 무시할수 없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어느나라에서 자연생태계에 있는 코끼리 이백여 마리를 도살하여 식용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보도이다.
말씀은 자연보호이나 가뭄과 생태계의 균형에서 인류의 현실과 인내는 녹녹하지 안다.
지배적 국제질서의 경쟁에서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논리는 없다.
선진국의 지위를 영위하며 지구환경에 위험하니 개발을 유보하고 비인간성을 우선하여 잡아먹지 말라고 할수없다.
파키스탄 홍수에서 선진국의 탄소배출을 지적하고 책임을 요구하였던 기억이 있다.
 
정치적 해결이 아니라 자연과 문명이 공존할수 있는 책임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산업문명으로 발생하는 모든 환경문제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병행한다.
문명은 사회의 관성적 요구에 의해 진화하는 것이며 대자연에 예속되어 존재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무한경쟁과 과도한 탐욕의 인습이 잘못된 문제를 만들고 있다.
가시적 증거를 요구하는 경쟁의 욕구불만이 만들어 내는 우월적 또는 지배적 인습의 병패이다.
갈매기의 꿈에서 자기만족의 안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고가 행복하다고 할수는 없다.
오류와 불편한 최고는 만인의 시기에 있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존경은 타의에 있는 것으로 나눔이 없는 끝없는 치부는 나와 상관없는 너의 삶이다.
 
수백, 수십억의 집이 서민과 나의 삶에 도움주지 안는다.
불편한 너의 것일 뿐이다.
내 것으로 먹고산다.
잘못되어 심통나면 경쟁에서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가졌다고 우쭐 거리 며는 만인의 어두운 시선이 무섭다.
예전에 공영방송의 보도 프로그램을 시청한 기억이 있다.
인천으로 기억된다.
땅값이 경제를 주도하던 시절 인천에서 유지되시는 집안의 어르신 애기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일반적으로 쉽게 접할수 없는 세간의 굿은일 하시며 한푼 두푼 모일 때 마다 전답을 사 모았다.
 
농경사회 끝물에서 전답의 소유는 부농에 예속되는 소작농과 품팔이의 집착적 애착이 있었다.
요사이 부자들 불로소득 놀이터 부동산 개념이 아니라 부농에 대한 동경이다.
지금의 산업사회 경쟁과 비교할수 없는 농경사회에서 생존과 후대의 걱정이었다.
이분께서 그렇게 전답을 모았다.
땅의 산업적 욕구에서 하루아침에 인천의 부자가 되었다.
문제는 익숙한 일상의 그리움이다.
바램대로 자손은 번창 하였고 집안은 지역에서 일족을 이루었다.
산업사회의 일반적 시각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다.
좋은집에 좋은침대에 후대의 미래와 내일이 걱정없는 노력에 의한 풍족한 물질적 성취였다.
 
돈으로 할수있는 최고의 조건에서 삶의 미래를 마련하였다.
그런데도 물질의 이질적 인습과 세월의 공허함은 어쩔수 없었다.
세파의 도전과 견디기에서 과정과 결과의 혼란이었다는 생각이다.
결과는 또 다른 조건의 관계와 성취를 요구한다.
결과에서 또다시 전계되는 상황이 온전한 내 것이라고 단정할수 없다.
삶의 전체에서 내안의 자아적 연민을 상실한 이질적 공허함 이다.

내안의 문제에서 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차별적 시류에서 인연이라 하여도 주변과 타의를 의식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결과의 이질적 상황에서 주변의 사물이 인습을 총족하여도 동심과 자아의 연민은 내것으로 남아 있다.
 
인고하였던 과정에서 온전한 내것의 그리움이다.
지게지고 남의 농사일 하며 쌓인 익숙한 일상의 회상이다.
초가의 냄새에서 아궁이 불 지피고 따뜻한 온돌방에 익숙한 나의 시간에서 편안함 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뱀의 혀같은 타의를 배척하고 간섭받지 안는 세계이다.
육신의 고행으로 채워지는 하루의 시름에서 나만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막걸리 한사발의 자유였다.
구중궁궐 새터의 인연을 남겨두고 떠나 허름한 패가에 은둔하며 옛것의 편안함을 찾았다.
후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복의 선처에 다행히 주변의 관심으로 익숙한 자유에 안주할수 있었다.
왜라는 증거적 관점의 위기가 아니라 편안함을 느끼는 내안의 평화이다.
호사다마라고 할수있는 교통사고 만 빼놓고 그렇다.
 
사고가 없었다면 시간이 지나 후대의 연락은 이었을 것이고 자손들은 구중굴궐에 모시길 바랐을 것이다.
자손들의 요구에 따랐을지 자신의 시간에 머무는 자아의 연민을 이해해 주었을지 자유는 내안의 것이다.
나의 존재에서 물질시류의 경쟁은 생의 주체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수단과 방법이라는 것이다.
나는 변할수 없으나 수단과 방법의 인습은 시대와 학습으로 변한다.
종과 생명에서 생은 개별적 존재이며 인습의 지배는 사회에 예속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시류와 나의 관계에서 수단과 방법의 이질적 혼란과 자아적 의지의 문제이다.
과학적 오류는 경쟁적 물질시류의 조급한 학습에 지배된 인습의 결과이다.
경쟁과 도태가 전제되는 선점의 원리는 대자연의 합리적 질서가 아니다.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구조적 불평등에서 차별적 조급함이 만들어 내는 집착이다.
 
자연생태계의 위기에서 삶의 본질적 이해를 우선하여 견주기의 다툼이 없다면 매사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지지고 볶아도 삶과 생명은 대자연에 예속되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오류는 선택에서 구조적 문제이다.
좌와 우의 이분법적 논리는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지배적 역사에서 피지배자에 의한 지식의 반론이다.
새로운 질서는 이분법적 경계의 파괴적 불확실성에서 평화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선점의 차별과 인내의 요구에서 공유하여 공존하는 삶의 여유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문명과 물질시류에서 좌우논리의 지식이 부추긴 적대적 경계의 부작용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가난한자의 형평성을 우선하였던 예수의 가르침과 인류공영의 평화를 우선하는 보편적 삶의 요구를 좌파로
매도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의 집착이 가관이다.
 
패권적 사관의 지배에서 나의 존재를 우선하였던 시민정신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다민족 국가의 합리적 정체성은
내것을 우선하여 철지난 좌우논리를 부추기는 집단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대자연의 질서를 학습하는 생태적 순리이다.
삶과 생존에서 합리적 절차의 충족으로 수단과 방법의 오류를 최소화 하는 체제이다.
구성에서 동의가 전제된 전체와 존재의 수용이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는 진실과 상식을 벗어나는 거짓과 선동의 차별적 정치가 아니다.
차별적 위기를 조장하는 적대적 시도는 미래도 미지의 탐구도 아니다.
철지난 좌우논리의 망동은 내 것을 우선하는 집단주의의 이기적 선동에 불과하다.
예수의 가르침과 헬라파의 신앙에서 창조는 하나이다.
 
내 것을 우선하는 논리부재의 극단적 고집은 산업사회의 과도한 경쟁으로 발생하는 양극화의 차별과 생태계
파괴에서 문제해결의 합리적 접근이 불확실한 정체이다.
21세기의 좌우논리는 냉전적 과거의 일시적 현상을 기대하는 정치의 시대적 과오이다.
일과 미래가 아니라 이분법적 승패에 집착하는 권모술수 이다.
근자에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학습된 현상이다.
2024.9.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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