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산다는 것 본문
190 산다는 것.
1)
[길을 가는데 큰 코끼리가 성난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다 긴 넝쿨이 늘어져 있는 우물 안으로 피했다.
우물은 깊었다.
코끼리는 쫒아 왔지만 우물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우물 가까운 주변을 위협하고 있다.
절명을 면하는 촉각의 여유에서 위기를 살피니 우물 안에는 여러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배회하고 매달린 넝쿨은
검은 쥐와 힌 쥐가 갈아먹고 있다.
탈출로가 없는 절망의 순간 꿀이 얼굴로 떨어졌다.
달다.]
부처님께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코끼리는 권세와 물질의 세파이며 도망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견주기의 경쟁에서 운명적 체념이다.
우물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며 넝쿨은 삶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탄생의 선택에서 생명은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시류의 변방으로 내몰린 그 나마의 생명에서 인간의 공격성은 뱀의 독과 혓바닥으로 쫒아온다.
타의를 이유 없이 또는 내 것을 우선하여 폄하하고 배신하는 인간의 혓바닥은 독이다.
시류의 잔인함에 악다구니 하며 파괴적 배수진으로 최후의 존재를 찾으려 해도 거대한 세파의 불가항력은 숨 쉬는 것
말고 사라져 간다.
시간의 허무에서 넝쿨을 부여잡고 잊히는 또는 가물가물한 자아의 존재를 찾으려 하지만 쥐들이 갈아먹는 밤낮의
세월은 내마음이 아니다.
동심의 기억에서 잊히어 가는 생의 미련이 허무하다.
꿀은 시류의 구속에서 벗어나 그나마 남아 있는 동심으로 돌아가 내안의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을 떠나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찾고자 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망에도 그리움을 찾는다.
생명과 운명과 자아는 온전한 내 것이다.
도망치지 말고 내안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동심과 자아는 달다.
성취와 법과 제도를 나누면 더 달다
2)
가룟유다의 배신에서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은 선택된 운명이었다.
십자가의 길에서 시몬의 일조는 창조물의 구성에서 죄가 없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질과 권세의 지배에서 성전의 우상숭배를 지적한 스테파노의 신앙정신은 하나님의 뜻이다.
종교적 순수에 형벌을 명하고 돌로 쳐서 죽인 자들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심연의 가르침을 상실한 형식의 지배이다.
신의 심판이 아니라 보이는 것의 문화에 예속된 인습이다.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없다.
로마의 지배에서 그리스도와 순교자의 희생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공유하는 유대사회 내부문제 였다.
모세의 애굽탈출로 시작된 예루살렘의 역사에서 물질과 권세에 지배된 인습의 오판과 기회주의를 엿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의를 지배하려는 작자들의 자기중심적 권세가 판을 친다.
정의를 왜곡하는 인간의 혀는 뱀의 독과 비교될 수 있다.
정의의 형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3)
분노는 고독의 시작이다.
분노가 인내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 또는 정체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다.
나라는 불확실성에서 완전한 무엇에 의지 한다는 것이 범인의 생각과 다른 깊숙한 곳의 자성이 있는 듯하다.
일상에서 평범을 공유하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체에서 불확실성을 확인하려는 욕구이다.
고행은 고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인내이며 생명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역사의 안주와 타의에서 주어졌다면 운명이라고 체념할 수 있으나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고독은
육신으로 나누어진 생명의 포괄적 접근이라는 느낌이다.
굳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내안에서 생명의 원초에 예속되려는 격정의 몰입이다.
육신의 삶에서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자아적 연민이다.
생명의 순수와 자아적 진실의 접근에서 고행의 고통만이 이르는 길은 아니라고 본다.
"미쳤어, 미쳤어" 순수에 미치면 일어나는 일이다.
현실을 보면 박애와 희생은 종교의 역사에 의해 발현되는 현상이 대부분이다.
범인의 일상에서 성인이 되는 일은 나의 기억에는 없다.
선지자의 선행적 가르침에서 종교의 역사가 이끌어 내는 고행의 실천이다.
생각해 보면 세파에 연연해야 하는 인연을 고민하며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막의 고행자가 어처구니없는 폭도와 소란스런 과정에서 손발이 묵인체 오발로 죽었고 발가벗겨진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허무가 종교의 관점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믿음에서 왜라는 실체가 부정되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이런 말씀 드리면서 매우 어려운 것은 일반적으로 신앙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범인의 사고 때문일 것이다.
증거적 관점의 학습이라고 해도 딱히 반론할 이유는 없다.
고행의 허무에서 인간으로 아쉽기 때문에 그렇다.
고통의 한계에서 특별한 분께서 선처하셨다면 그뿐이다.
샤를 드 푸코의 고행이다.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순수에 좀더 접근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나의 일상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물가에서 56만원과 2만원은 차이가 많았다.
사회 인프라와 경제에서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도 그렇다.
일부러 나누지 않았는데 경계적 현상에 의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버스가 구분되어 있다는 설명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거리에 사람들이 많고 북적이는 시장모습에 안도하는 사람 사는 곳이라서 다행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길거리 학대에서 입양한 동백이 문제로 지지고 볶는 모습이 숨 쉬고 살만한 세상이다.
섬진강의 여유로운 풍경과 별빛에 보태어 불량한 이단자의 출현은 아직 격어야 할 것들이 남은 것이다.
2024.9.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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