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삶과 역사. 본문
184 삶과 역사.
시대적 요구에서 학문으로 시작한 이념적 역사의 교훈은 공산과 민주(자유)의 이분법적 진영논리 대립이다.
과정에서 선택의 강요와 전쟁으로 파괴된 삶과 인륜의 참담한 비극이 있다.
21세기 글로벌 문화의 공유에서 동서대립의 관성에 구속된 지정학적 경계에 의해 파괴되는 삶과 평화이다.
정치는 인습을 추종하며 현상을 우선하는 지배적 행위이다.
문제는 현상의 인식에서 극단적 집단의 정치적 선동에 휩쓸리는 지식과 저항의 광야적 한계이다.
소통과 공유의 한계에서 언제나 또는 상황적으로 전체의 대의를 인식하고 학습할수 없다.
부분적 현상으로 접근하여 전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과정에서 합리성을 충족하고자 하는 논리가 민주주의 이다.
이념적 역사를 잉태한 시간의 현상과 학문에서 21세기 글로벌 통신사회는 공유의 시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새로운 질서의 요구이다.
주체의 동의에서 삶을 우선하는 자아적 지식의 충족이며 개별적 생명의 존중이다.
삶의 주체는 대자연의 예속에서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에 안주하는 보편성 이다.
이념적 학습의 관성과 의식적 경계의 인습에 편승하는 적대적 또는 파괴적 정치의 저항이다.
역사는 삶을 기초하고 발현하는 학습의 전이와 시간의 현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삶이 역사보다 우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승패적 이념과 집단적 권세로 선택을 강요하고 지배하는 역사는 문화적 시간의 학습을 거부할수 없다.
진화의 실체에서 만물은 변화한다는 이해의 현실적 가치이다.
하물며 정치가 과거에 미적거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입신양명의 기회에 연연할수 없다.
민초의 일상과 생존을 파괴하는 위정자들의 정치적 사각에서 역사로 포장되는 위선이 있다.
인륜과 공영의 대의에서 나와 우리편을 우선하는 정치의 속살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학습에서 시대의 흐름에 안주하는 삶의 주체가 진화의 결론이며 정치가 보호해야 하는 실체이다.
일상의 평화를 우선하는 생존과 생명의 존중이다.
미지의 도전은 주체의 바탕에서 학습의 완성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목민심서의 가르침은 사대부(기득권)의 착취에서 백성을 우선하는 삶의 일상으로 역사와 미래를 이해하고 있다.
삶의 주체는 위정자 또는 집단주의의 고집이 아니라 민초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호도하는 정치는 성립될수 없다는 민주적 의지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의 시대적 이해에서 주체와 참여의 관계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사회성 요구에서 민주주의 체제는 참여의 동행과 합리적 관계의 설정이다.
대자연의 질서를 학습하는 생태적 상호주의의 성립이다.
구성에서 관계의 보완적 설정이다.
타의를 공유하는 질서에서 민심의 수용적 절차이다.
대자연의 질서에서 부정되는 존재는 없다.
최소의 논리적 저항도 부정할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주체와 참여의 관계는 확률적 분배의 질서로 존중되어야 한다.
체제에서 참여와 자유의 절제는 주체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화나의 자유를 주장한 유럽의 작가가 있었다.
법의 제재에서 개별적 자유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공동체의 질서에서 구성적 절제는 어쩔수 없었다.
전체와 부분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접근적 관계의 절제가 민주적 절차이다.
과정에서 타의는 존재로 존중되어야 한다.
자유는 이념적 진영논리가 아니라 주체와 참여의 관계적 절제라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의 이탈에서 타의를 침해하지 안는 개별적 자유가 존재한다면 온전한 내것이다.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쥔장 없는 물질은 없다.
최소한 공유되고 있다.
사물의 현상에서 매사가 사회적 구속으로 살아가는 것이 산업사회의 현실이다.
공동체의 사회성 요구와 공유적 질서에서 개별적 생존을 최대한 배려하는 자유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삶과 타의의 수용에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이해는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한반도 문화의 뿌리에 근간을 두고 있다.
홍익인간정신은 주체와 참여에서 타의를 수용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충족하는 문화이다.
공동체의 질서에서 자유의 절제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다.
굳이 자유를 지켜야 한다면 진영논리의 경계적 설정이 아니라 학습의 전이를 위한 전파가 효율적 이다.
단절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공존적 교류의 노력이다.
이분법적 지배가 아니라 문화적 공유가 자유의 전파에 훨씬 유익하다는 것이다.
내것과 우리에 집착하는 진영논리의 자유는 과거에 머무는 역사관 이다.
각자도생과 극단적 집단의 개별적 생존에서 표현과 자유는 주체와 참여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몇개의 좌석을 차지하고 잠자는 버르장머리나 그늘막에 주차하는 얌체나 택시에 쓰레기 버리고
내리는 무식이 자유는 아니다.
나이팅게일의 응급실 뺑뺑이 역시 주체의 동의는 아니다.
역사와 문화에 의한 국가관에서 주체가 전제되는 전체의 대의를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독선적 의회주의에서 매사 적대적 관계를 부각하였던 탄핵국면이 소강상태에 있다.
이념적 체제의 불확실성에서 가치관의 과도기적 혼란에 의한 극단적 집단의 발현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시대적 현상에 기대는 낮바닦 정치의 선점과 선동이다.
정치가 민심의 진실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정치공학의 잘못된 산수에 얽매이고 있다.
21세기 통신사회의 지적 분별력은 나와 우리를 우선하는 진영논리의 일방적 선동에 흔들리지 안는다.
민주적 절차와 수단에서 극단적 정치는 시대적 정체성으로 발전할수 없는 충동적 시도에 불과하다.
결국 각자도생과 일부집단의 극단주의는 시간과 학습의 한계를 넘을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가 없는 내것과 우리만의 정치에서 한계이다.
전체의 동의에서 일방적 논리의 부정적 한계를 체감하는 현상이다.
울타리 정치에서 진실의 신념이 부족한 입신양명의 허울이 지식의 판단을 소홀히 한 결과이다.
통신사회의 민심에서 정치적 분별력 상실은 한방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가까운 코딱지에 현혹되어 미래를 예지하지 못하며는 문지방 사수도 어렵다는 것이다.
지적민심을 오판하는 극단적 선동의 정치공학에 집착하여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군자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안는다고 하였다.
역사의 연속성에서 시대를 체우는 결정권의 주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부분으로 충동할수 있으나 전체의 대의는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 이다.
인류의 존재에서 근본의 뿌리라는 것이다.
정치판 깃발의 신뢰에서 가다가 자빠지면 시작하지 안은 것만 못하다.
21세기 세계질서의 주체에서 민주주의의 선택은 자유의 올바른 이해와 문화적 전파의 확장이다.
이념적 경계를 고집하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고립된 삶의 주체를 변화시키는 자유의 문화와 학습적 전이이다.
극단적 단절이 아니라 관계적 교류와 소통이다.
새로운 질서의 요구는 시류를 덥고 있는 물질적 현상의 이해와 돌파이다.
경쟁과 성취의 힘든 지배에서 물질적 인습과 병행하는 자아적 삶의 회귀이다
제도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라 문화를 공유하는 가능한 평등의 조건에서 평화의 확장이다.
산업의 진화에서 의식주를 공유하는 새로운 생산성의 책임이다.
공유와 공존에서 다수를 존중하는 주체의 안정과 미지의 도전이다.
2024.8.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