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무제. 본문
182 무제.
옳고 그름은 정도가 있으며 선택에서 예지가 가능하다.
존재에서 이해의 범위는 흙백논리의 극단적 설정이 아니라 현상의 가감으로 확률적 의미가 부여된다.
아니다와 아닐수도 있다.
또는 그렇다와 그럴수도 있다에서 지식은 이해의 범위를 설정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합리성이 부여된 진실이라는 사고이다.
최선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최선인지 알수도 없다.
오늘 좋은것이 내일 퇴보적 현상으로 변할수 있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한 것은 가장 깊고 오래가는 감성의 지순함 이다.
사랑의 색깔은 빛의 표현 만큼 많다.
모든 사랑을 체험할수 없으나 선택되어 나의 자아를 만족한다.
사랑이라는 것도 조건적 현상의 지배이다.
하나로 획일적 이지 안으며 모성에서 애국의 대의적 가치도 있다.
모든것이 나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삶은 나로 부터 시작이며 내안에서 사물과 현상을 이해할수 있는 자아적 시각의 인식이다.
공동체와 공존에서 타의는 존중해야 하는 협력적 관계이나 존재는 나로부터 설정된다는 것이다.
나는 현상이든 미지이든 무엇인가에 예속된 알수없는 존재이다.
나는 내안에서 전부이나 타의에서 고립된 생명이다.
나는 천태만상의 전체일수 없으며 지식의 한계에서 제한적 현상에 예속되어 의지한다.
창조에서 나는 작다.
인습의 동의를 구하는 수단과 방법에서 보편성이 결여된 나를 우선하면 타의를 구할수 없다.
타의를 의식하는 정치에서 특별하게 발현되는 현상이다.
동의는 권력적 힘이 아니라 보편적 합리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의를 사대부적 권력의 용인으로 착각하는 오류가 있다.
가장 많은것을 중요한 것으로 의식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또는 내것의 고집이다.
대중적 진실의 보편성이 문화의 주체이며 생명을 보호한다.
정치는 나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동격적 민심의 수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민심이 요구하는 합리성에서 보편성을 공유하는 것이 답이며 진실이다.
적대적 사고에 구속되어 있는 불필요한 자기방어에서 매우 잘못된 정치적 인습의 문제이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누구나 물질과 성취의 현상적 지배에 있다.
공익적 또는 보편적 관점의 상대적 비교에서 너만 특별하지 안다는 것이다.
문명과 생존에서 선과 악의 개념은 진실에 앞서 시각적 우선순위의 정황적 기대가 있다.
행위의 진정성에서 결과의 예지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길 사람속을 모르는 진실의 접근에서 보편성을 충족하는 진정성으로 문제를 공유할수 있다는 것이다.
끝도없는 성취적 욕구는 체워지지 안는 경쟁적 인습의 구속으로 찰나적 정신에 머문다.
새로운 비교는 또다른 만족에 구속되어 없어야 하는 경쟁과 좌절을 잉태한다.
권력과 자본의 경쟁적 인습에서 나의 시간으로 머물수 없는 형벌이다.
물질문명과 형이상학적 학습에서 미지적 또는 암시적 진실의 소홀함이다.
물질의 가시적 증거 요구에서 권력과 자본의 지배적 인습이며 수단과 방법에서 진실과 현상의 분별력이다.
현대사회의 인습은 대중적 욕구에 있다고 하였다.
산업사회의 무한경쟁과 생산성 구속에서 내안의 것이 아니라 타의에 예속되는 사회적 지배이다.
미지의 발현에서 문명의 디테일은 인류의 선택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은 선의 문명이나 인류의 선택은 선을 지배하려는 악의 현상적 갈등에 있다.
공동체의 제도와 이해에서 공익과 공정을 상실한 자본과 권력의 지배적 오만이다.
사회적 지배에서 나는 특별하다는 상대적 비교우의의 집착적 고집이다.
통신사회와 지적민심의 이해가 부족한 사대부의 권태이다.
대의에서 민심 또는 정치의 줄거리를 의식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나살기 바쁜 중생이다.
나로 비롯되어 사물을 사고하는 잘못된 권세의 못난거취 이다.
획일적 또는 극단적 선택의 경계에서 지식의 이분법적 충돌이 모든 오류의 시작이다.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탄핵의 비극적 결말에서 정도의 합리성을 상실한 적대적 학습의 전이이다.
수레바퀴의 상대를 부정하는 극단적 정치판의 물고 늘어지는 꼬투리의 지독함이다.
국가에서 제도의 운영은 민심이 이해할수 있는 정도를 설정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하거나 특정되는 사건을 좌우와 선악으로 구별할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인내와 처분의 정도에서 책임을 가감할수 있는 대의의 성립이다.
맥락적 접근의 해결이다.
천당과 지옥이 있는 가르침의 과중한 적용은 좋은세상이 아니다.
허울의 가면으로 파생되는 헌정질서와 대의 민주주의 파괴는 매우 혼란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진영논리의 승패를 우선하여 소행의 작은것으로 대의를 파괴하는 분별력의 무지이다.
대의를 우선하는 진실의 성의에서 구색에 따라 병가지 상사의 정도는 있다는 것이다.
정치와 통치에서 민심의 선입견은 중요한 덕목이다.
자아적 평온의 평화에는 천당과 지옥이 없다.
극단적 깃발에 연연하여 자아와 신념을 상실한 무지와 독선이 역사의 난제를 만든다.
모나지 안으면 바람결에 실려 문풍지 흔들지 안는다는 것이다.
모자란 상대가 고육지계의 이판사판으로 흔들어 권좌의 변화를 시도한다.
대의 민주주의를 까드시고 지멋에 떠들다 오버액션에 지쳐 지정신 말아드실 위인들 이시다.
피에 목마른 승냥이들 께서 일상으로 굿판 벌여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굳건하다.
일취월장의 자아도취에 빠져 지잘난 굿판에 소금뿌리는 소행은 바람직한 문지방 관리가 아니다.
입법기관은 생태적 순리를 학습하는 합의체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예와 아니오의 선택적 분별력이 아니라 의견수렴의 가감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우논리의 극단적 선택 강요에서 옳고 그름의 정신이 새로운 시대의 주체가 될 것이다.
천당과 지옥이 아니라 이웃과 상부상조 하는 평화이다.
악의 전이에서 선을 지키고자 지옥을 만든 것이다.
천당은 선의 유도가 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 길래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지 생명으로 죄를 사한 가르침은 고육지계 이다.
경쟁적 삶의 시류에 세뇌되어 평화를 상실한 약육강식의 치열한 집착이다.
옳고 그름은 신념과 의지의 좌절을 요구하는 좌우의 경계적 획일성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분별력의
평화이며 자아적 삶의 이해이다.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좌우논리에 저항하는 지식과 문화의 자유이다.
나로 부터 시작하는 자율적 사회질서의 문화 유토피아 이다.
동격적 동의에서 자연과 현상의 순리에 따르는 내안의 만족이다.
죽음에 이르러 버릴수 있는 이승의 번민이며 인연의 책임과 점유적 욕망의 자제이다.
인류와 미지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으로 문명과 문화는 선택되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가시적 현상이 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적 비교의 인습을 의식하는 물질과 권세의 성취는 또다른 번민의 시작이 된다.
타의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적당함의 여유에서 뱃속 편한 인간이 장땡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시다.
민심의 성취에 맡겼으면 대세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다.
산꼭대기에 올랐으면 버릴것은 버리는 수단과 방법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별적 성취와 국가는 다르다.
국가의 정체성은 국민의식(문화)과 동행하는 국가기관의 정체성 취합이 된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국가기관의 정체성 독립은 보완과 견제적 역할의 중요한 요소이다.
국가기관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진영논리에 얽매여 시끄러운 언론은 사실관계의 정의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정권순환에서 권력이 언론인의 거취에 개입하고 색깔로 분류하는 우리편의 망종이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거취가 결정되는 대한민국 언론계의 악순환 이다.
덩달아 깃발에 충성하는 아니면 말고식 편파적 평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21세기 통신사회는 의견수렴의 창조적 미래이다.
권세에 줄서서 자기중심을 상실하는 집세기 고무신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세와 민심은 괴리가 있는 것이다.
2024.7.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