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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와 선택.

박세욱. 2024. 7. 15. 10:32

181 체제와 선택.
다양성 수용에서 의석비율에 따르는 내각의 협력적 연정과 양당체제의 대통령제에서 선택의 차이가 있다.
양당제는 정당을 구성하는 다수의 전체주의 우려가 있으며 내각제는 의견수렴의 비율적 합리성의 권리가 있다.
국민의 선택과 국정에서 집단적 획일성 강요와 의회운영의 의견수렴에서 협력적 조율의 차이이다.
의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이해이다.
현실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나 정당의 계파주의는 다수의 선택을 빙자한 권력남용의 저의가 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집단적 다수의 표현에서 극단적 투쟁과 강단의 주문에 의한 선택의 강요이다.
비판과 반론의 수용에서 사대부적 권세와 집단주의의 야합이다.
이겨야 산다는 승패적 정치의 치열한 행위에서 국가와 민생과 미래와 상관없는 가열찬 낮바닦의 행색이다.
다양성의 수용을 요구하는 비판과 반론의 절차를 조직의 우유부단으로 비하하는 독선적 권세이다.
 
오로지 용비어천가의 강요이다.
지식과 논리의 합리적 절차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개의치 안고 무조건 이겨야 산다는 것이다.
지잘난 맛에 겨워하는 산넘이 잘한것도 없다.
양당제의 의견수렴에서 진영논리를 우선하는 일방적 선택의 강요이며 존재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현상이다.
정당의 의견수렴이 민심이라는 얼토당토 안는 자가당착적 오만이다.
정당의 민주적 절차는 과반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계파의 집단주의에 불과하다.
좌우논리의 희석과 시대정신의 구심점 상실에서 집단적 극단주의의 현상은 표현의 가시적 효과를 이용하는
선동적 대중심리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수용적 유연성에서 지배적 욕구의 절대목표에 집착하는 집단의 패권적 시도이다.
 
전체에서 검증되지 안은 일부의 머릿수에 기대어 내것 이외의 타의를 부정하는 일방적 주장의 악다구니 이며
합리적 결과를 위한 민주적 절차의 파괴이다.
비판과 반론의 생산성을 문자폭탄으로 시비하고 강요하고 파괴하는 획일적 사고의 무지한 정신지배 획책이다.
우리편의 거수기 아니면 양극화의 울타리에 존재할수 없다는 민주주의 체제의 배신이다.
깃발의 획일성에 충성하라는 독선적 집단의 잘못된 세계관으로 정당내 민주주의의 파괴이다.
생물학적 선택에서 민심은 반반이라는 양당제의 불편한 갈라치기 논리가 작용한다.
중용의 이해와 불편한 거취에서 어쩔수 없는 더부살이에 기대는 정치이다.
체제의 이해에서 정치의 합리적 평형을 요구하는 지적선택의 딜레마가 있다.
오지랖이 가관인 중생 길들이기에 필요한 중용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지식과 논리와 지성의 정치적 거취에서 이분법적 체제의 강요는 신념과 의지의 소홀함이 있다.
대자연의 질서를 학습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생태적 결론의 부족함이다.
양당제와 내각제의 의견수렴에서 선택의 양상은 수용의 합리성이 다르다.
중용은 문제의 합리성을 지적하는 지식의 수용성으로 정책에서 격변보다 예측 가능한 체제의 요구이다.
21세기 선진문명과 선택의 다양성에서 지식의 의지에 부합하는 표현이 증가하고 있다.
다양한 선택지에서 통신사회을 공유하는 지적표현의 의지가 정치적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중용의 지적민심은 양당제의 더부살이 와 전혀다른 정치적 결론을 도출할수 있다는 것이다.
다당제 또는 내각 책임제에서 더부살이 하는 중용의 비율적 참여는 언제라도 가능하다.
국회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의 이유이기도 하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국회의 위임권 동의를 상실하면 행정부와 입법부의 이전투구식 각자도생이 된다.
민생의 협력과 미래를 상실한 여소야대의 대한민국 국정운영이다.
행정부와 입법부 공히 국민의 선택이라는 자기중심의 패권적 위임권 행사이다.
양극화의 구속에서 행정부는 거부권으로 입법부는 의결권 독선으로 대치하는 너죽고 나 살기이다.
좌우논리의 희석과 체제의 시대적 혼란에서 정치의 승패적 관성에 기대는 극단적 집단주의이다.
표현에서 국수적 대중심리를 이용하는 선제적 선동에 이끌리는 비민주적 선택의 강요이다.
일부로 전체를 왜곡하는 가식적 정치의 권모술수이다.
극단적 집단과 절대권력의 거취에서 내것의 사활적 사수를 우선하는 진실의 은폐는 정치판의 생존이 되었다
양극화의 승패에서 사건의 진실은 오리무중의 혼란으로 묻혀지고 있다.
 
선택과 결론에서 필요한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거취의 수단을 우선하는 무지의 산수이다.
생태적 질서의 순리에서 결과의 예지가 불가능한 현상왜곡 이며 민주적 절차의 파괴이다.
민주주의 체제와 절차에서 결론의 합리성이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수단과 방법에서 생태적 순리에 부합하여 미래와 미지를 예지할수 있는 선택의 불확실성이다.
말씀은 민생이고 대의이나 나부터 살고 보자는 각자도생의 정치판이다.
허락받지 안는 능력과 정의의 거취에서 줄서지 안으면 정치생명을 담보할수 없는 권세의 위협이다.
여기나 저기나 소신과 신념은 개밥에 도토리 된지 오래이다.
나의 시간에서 나로 비롯되어야 하는 일신의 영달에 얶메이는 권세의 탐욕이 잘못된 것이다.
정치개혁은 이러한 비생산적 체제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국가와 정당내 민주주의 요구에서 사대부적 절대권력의 구조적 변화이다.
의석비율의 다양성 수용은 정책변화에서 일상으로 예지할수 있는 이해의 정도가 있다.
국정운영의 연속성이다.
정권교체 시 좌우논리의 관성을 우선하는 양당제의 연속성 단절은 정책의 비효율적 문제가 있다.
늬가 한것은 따라하지 안는다는 어쭙잖은 대결적 선입견의 비생산적 현실이다.
국가 주요정책의 백년대계가 무너진다.
선진문화와 70년 냉전의 사선에서 시대적 소명의 문제인식은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까부는 중생들 뿐이다.
휴전선의 위기는 잊혀지고 여소야대의 철조망이 죽기살기로 드미는 형국이다.
민생을 우선하는 정치와 정책의 요구에서 민초의 삶과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협력적 관계는 찾아볼수 없다.
 
통신사회의 지식을 공유하는 22대에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초선의 도전과 창의력은 기사회생에도 없다.
극단적 집단의 저돌적이고 치열한 속수무책에서 정치적 거취의 눈치밥에 연연하여 줄서기 바쁘다.
오히려 눈도장에 구속되어 스스로 목줄 매는 낮바닦 오지랖이 민주정당의 현실이다.
획일성을 강요하는 지배적 집단에 예속되지 못하면 자랑스런 배지의 입신양명이 위태로운 못난 거취이다.
민생에서 기회의 평등을 위한 권력구조 개혁과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정치적 신념은 사라졌다.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각자도생의 의미없는 선택이며 민생과 민족과 역사에서 미지적 희망을 상실하고 있다.
철지난 우파의 고집과 사법리스크의 오리무중에서 견제와 균형을 상실한 생존게임의 병적현상이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이겨야 살수있다는 앞뒤 없는 일편단심에서 민심과 대세의 무지이다.
양짝 모두 도깨비 헛다리에 목숨줄 걸고 있다.
 
하늘의 점지는 오천년 역사의 홍익인간정신과 민생에서 인과응보의 처신을 간과하지 안는다.
정치와 관련된 사건의 언론과 평론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정치적 이해타산을 우선하는 진영논리의 이전투구와 매체의 상업적 현실이다.
체상병 사건에서 국방의무에 충실한 군인의 비극은 없다.
매사 사활적 정치의 이해타산에서 생명과 인륜 마저 도구화 하려는 승냥이들의 무지한 인면수심이다.
사건에서 검증되지 안는 매체의 아전인수식 접근의 권태이며 합리성이 결여된 왜곡이다.
울타리에 갇혀 제멋대로 까불다 아뿔싸 세상사 세옹지마의 진리를 체험하게 될것이다.
우찌되었든 세상은 돌아간다는 현상적 믿음이라며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두들기고 두들기면 열린다고 하였다.
 
이제라도 부러지고 초가삼간 불타기 전에 선택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굳이 중용의 이해가 아니라도 민주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결론의 도출이다.
나의 독선적 의지가 아니라 비판과 반론을 수용하는 체제와 절차의 합리성이다.
무엇을 위한 독불장군 인지 비젼의 실체는 없고 정치적 야욕에 불타는 극단적 집단의 악다구니 뿐이다.
21세기의 정치에서 일부로 전체를 포장하는 좌파논리의 강성집단이 주류가 될수는 없다.
이념적 분단의 비극을 이용하여 정치적 거취를 마련하려는 우파의 시각도 문제이다.
획일적 질서를 강요하였던 좌우논리에서 현상적 학습의 시간충족은 21세기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말씀만 무성하다 설왕설래 자화자찬으로 꼬랑지의 흔적초차 말라버린 입법부의 오지랖 개헌이다.
체제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권력구조 개편이다.
 
한반도 평화에서 남북문제는 문화교류의 방법 밖에 남은것이 없다.
혈육의 70여년 단절에도 중한것이 무엇인지 왕래도 못한다.
한반도 평화에서 목적의 방법도 없이 치고박고 정치적 행위의 쓸데없는 공허만 난무한다.
그런데로 먹고 살만하니 전쟁의 위기에서 풍선날리고 평화의 방법이 전무한 무의식의 무덤덤한 일상이다.
오천년 역사는 먼지만 쌓이고 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비운의 민족이다.
쌈박질에 이골난 선수들께서 가능성이 전무한 체제흡수를 시도하며 아쉬운 쪽이 포기하라는 것이다.
핵무장의 버티기에서 가능성이 희박한 정치적 이슈의 공허이다.
한반도 정세에서 세계질서의 패권주의는 한쪽의 포기도 용납하지 안을 것이다.
 
냉전적 국제질서의 지정학적 완충지대에서 보상없는 총알받이의 형국이다.
견디다 지쳐 이제는 이국체제를 말씀하신다.
한반도 정세와 세계질서의 망막함에서 우선이라며는 이해할수 있다.
차라리 다른나라의 주권으로 왕래와 문화교류의 기대이다.
태평양과 대륙의 패권적 경계에서 한반도의 냉전적 사선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제는 놔 줄때도 되었는데 또다시 휴전선을 경계로 신냉전이 형성되고 있다.
2024.7.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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