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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대장.

박세욱. 2024. 6. 24. 21:22

177 골목대장.

식민시대 일본에서 태어나 14세 중학교 2학년에 아버지의 귀국을 따라 식구들과 현해탄을 넘었다.

일본에서 전동차였는데 부산에 도착하여 전북옥구까지 화물차를 빌려 14시간을 고생하였다고 하셨다.

화물차 뒤에 타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이동한 고생이 만만하지 안았던 것이다.

외조부는 지역의 수재로 동경의 유명대학에 유학하셨다.

책보고 글 쓰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한량이었다고 한다.

셋째딸로 외조부의 사랑이 남달라 아버지 자건거 뒤에 타고 큰 간장공장 정문을 지나 등하교 하였다.

2차대전 때 외조부 친구의 주선으로 동경외곽에 있는 작은도시의 집을 빌려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학생복 단추를

달며 연명하였다.

동경폭격에 동네사람들이 언덕에 올라 구경하였다고 하시며 장관이었다고 하셨다.

 

전쟁통에 죽는자와 죽이는 자와 산자의 일상이다.

폭격이 있으면 폭탄이 떨어진 지역으로 피신하며 집집마다 마련된 물웅덩이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뛰어들었다.

어려워도 나누며 살아다고 소녀의 기억을 회상하셨다.

역사를 외쳐대지만 사람 사는것이 가까운 환경과 관계를 우선한다.

일본의 미래를 의식한 외조부의 귀국으로 소녀의 그리운 고집은 어쩔수 없었다.

옥구본가에 도착하니 동네사람들이 귀한사람 왔다고 돼지잡이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작은댁에 얻혀 몇해를 사신것 같다.

외조부의 외적성향은 동네사람들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안았다고 한다.

덕분에 6.25 전쟁때 동네사람들 추천으로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작은댁 어른은 청년위원장을 하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부역자 신분으로 무사하지 못했다.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체 안방에 들어와 외조부를 체포해 갔다.

그때 굉장히 놀라고 무서웠다고 하셨다.

다행히 동네사람들의 연판장 탄원으로 살수있었다.

연좌제의 고생은 이념적 역사의 고통이다.

평생 전쟁을 두 번 격어다고 하시며 아슬아슬한 기억에 격변의 시름이 크셨다.

완고한 유강리 증조모의 시집살이도 보통이상 이었다.

집벼눌이 집체만한 동네에서 만만하지 안는 부농이었다.

 

보릿고개에 쌀밥을 먹을수 있었다.

한순간의 가세 몰락은 부잣집 며느리에서 품삿에 연연하는 일꾼이 되었다.

매일 십리를 걸어 한복 짓는법을 배워 삿바느질 하며 한두끼로 연명하는 육남매의 어머니였다.

가부장 기질이 심했던 지아비의 십수년 병수발에 지치고 고단했으나 그나마 없으니 망연하여 갈피가 없었다.

노래를 좋아하셨다.

교회는 어머니가 선택한 노년으로 그나마의 갈피에서 안정을 찾았던 시간이다.

둘째딸이 교회를 오래다녔다.

장례는 기독교 절차로 치루어졌다.

쉽게 말할수 없으나 자식의 행색으로 어머니의 영혼이 편안하기를 바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십여일 되었다.

6월23일 새벽 한시경 꿈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명확하진 안으나 버스타고 시골 친척집을 가고있다.

돌아가시기 전 모습으로 작은 보다리가 있었던것 같다.

중간 기착지를 경유하였다.

잠시후 차안이다.

창문이 열려있고 어머니와 내가 자리를 바꾼것 같다.

내가 창문쪽에 있다.

버스창문이 열려있는데 가는지 서있는지 바람은 느껴지지 안았다.

창밖풍경이 한여름에 내리쬐는 붉은볕 밖에 기억나지 안는다.

열린창으로 밖을 보다 옆자리를 보니 어머니가 아니다.

짓은 검은 머리카락의 음산하고 분위기 안좋은 얼굴에 굵은주름이 많은 중년여자이다.

흠칫 놀라며 사람들이 더러 타고 있는 차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어머니는 없다.

맨 앞자리에 머리카락이 아주적고 희긋한 분의 머리 뒷모습이 보이는데 확실하지 안다.

상황이 바뀌어 집인데 내가 왜 집에 있는지 어머니는 어찌되었는지 알수가 없다.

전화가 왔다.

가기로 되어 있는 외가쪽 목소리가 깨끗하고 맑은 남자어른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다고 하고 왜 어머니 만 왔냐고 책망한다.

글세 나도 영문을 모른다고 하였다.

무슨 글쓰기 대회가 있어나 보다.

글제도 준비했는데 내가 왜 집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옆에서 아이들 엄마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어른에게 어머니는 우찌되었냐고 물었다.

서울에 계신다고 한다.

잠시전 분명 시골에 가셨는데 서울이라고 한다.

이양반께서 왔다 가신 것이다.

내게 무엇인가 전하려는 것이다.]

 

사심이 있는자는 대빵이 될수없다.

골목대장의 영달을 위해 민주적 절차와 국가제도를 줄세우는 좌파 극단주의의 오지랖이 하늘 무서운줄 모른다.

삼권분립에서 입법독주는 공청회 등 국민 의견수렴 절차를 무시하는 위임권(다수)의 횡포이다.

이분법적 진영논리의 승패적 대립에서 민주적 절차를 왜곡하는 공공연한 극단주의의 체제배반이다

추종적 권위주의의 치졸한 인격으로 체제와 제도의 규범적 질서를 왜곡하는 극단적 지배의 시도이다.

다양성의 관계에서 비판과 반론의 수용을 거부하는 권세의 획일성 강요이다.

오로지 나로 비롯되어야 하는 권세의 아집과 객기의 자가당착이다.

안하무인의 독불장군으로 별볼일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며 시정잡배에 견줄만한 인격의 망종이다.

체제와 정당의 정체성을 배반하는 극단적 집단의 다양성 부정이며 정승집 멍멍이에 줄서는 사대부의 권태이다.

 

새로운 질서의 요구에서 사법정의는 삼권분립의 견제적 역할이다.

사법은 민주적 체제의 절차와 선택에서 최후의 질서이다.

사정개혁 역시 문화의 시대적 이해에서 규범과 제도의 수호적 역할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승패적 진영논리의 입법독주는 문화적 규범과 제도 위에 군립하려는 부르주아이다.

나와 관련된 규범의 진실에서 매사 수사권에 불복하고 사법제도의 합리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독선이다.

파괴된 수레바퀴 논리에서 집단의 점유적 욕구가 더큰 문제이다.

무엇하나 지식의 보편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극단적 집단의 부르주아이다.

입법독주에서 매사가 탄핵의 꼬투리에 몰두하는 권모술수이다.

다양성과 소수의 존재에서 비판과 반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반민주적 세계관이다.

 

극단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민주주의 체제와 절차의 배반이다.

단일체제의 시도이며 가치의 혼란에 빠진 레닌주의이다.

노예제도와 21세기의 민주주의를 비교하는 가당치 안은 역사관이다.

156년 전 링컨의 민주주의와 시민정신으로 파괴된 인종차별 제도이다.

여권신장의 구조적 문제에서 전쟁을 시도할 정도로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문화의 시대적 이해에서 무지한 진영논리의 경계이다.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여 좌파의 극단적 경계를 설정하려는 지식의 음해이다.

이분법적 진영논리와 노망 들린 세계관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이다.

입법기관의 비대칭에 우쭐하여 172석이 진보의 우월적 가치와 시대정신 이라는 자기중심적 독선이다.

 

오호라 통제여 초상집에 소금 뿌리는 경우 없는 시정잡배의 권세는 사라져야 한다.

민생에 침이 마르면서 관혼상제와 미풍양속의 경우를 모르는 곰배지의 객기이다.

인격과 관계를 망각한 민주주의의 병패 밑바닦 조직과 하수인의 말종이다.

조직과 공적위세를 앞세운 하잔은 견장으로 민주주의의 절차적 합리성과 지적사고를 파괴하려는 말종이다.

치졸한 조직의 하수인을 앞세워 문화적 사고와 자유의 지배를 획책하는 권세의 낮바닦이다.

조직논리의 관행적 따돌림을 이용하여 상제의 미풍양속을 훼손하는 위계에 의한 권리행사 방해이며 국민

기본권의 무지이다.

21세기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자격이 없는 시정잡배의 인격이다.

홍익인간정신의 배반에서 그래도 우리편 이라고 속창시 빠진 경우없는 연장이다.

 

비린네 나는 생선대가리 같은 인격과 화환 몇개 와 부담스런 조의금 행색이 없어도 상부상조 하는 관혼상제의

문화는 유구하다.

단지 산자의 행색으로 사자의 원한이 깊어질까 걱정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아니라도 정치판의 구설은 기록되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한다.

정치판 야사의 진실은 언론을 피할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정치판의 진실을 전해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21세기는 글로벌 통신사회의 역할에 주목해야 하는 시대이다

나의 사사로움은 통신사회를 통해 생명을 우선하는 인륜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글로벌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와 위상에 기여하였다.

 

극단적 권세에 줄서는 앞뒤없는 승냥이들의 먹이감으로 소멸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진실을 조직논리의 위계로 억압하여 지식과 자유를 지배하려는 망동은 21세기의 지적 민주주의가 아니다.

점유적 욕구의 번민과 권세의 증오를 경계하라 하였다.

증오의 인내는 보편성의 절대가치 동격적 동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상부상조의 관혼상제와 미풍양속은 이웃을 중시하는 한민족의 문화이다.

상제에서 민주화의 주체를 자처하는 민주정당의 정치가 조직의 하수인을 동원하여 사자의 인격을 비하하고

 

다양성의 비판과 반론을 억압하는 것은 체제와 지식의 배반이다.

정치는 예로 시작하는 것으로 상제의 예는 슬픈 것이다.

2024.6.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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