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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경계(22대 총선).

박세욱. 2024. 4. 11. 09:18

170 정치의 경계(22대 총선).
홍시장의 딴지는 울타리 밑에서 개구멍에 발길질 하는 것이다.
대권에서 보수텃밭의 고집이다.
사정의 권위를 의식하는 검찰공화국은 정치의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전수전으로 갈고닦은 정치연륜의 대로행에서 검찰조직의 우월적 또는 권위적 자가당착을
폄하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대권병은 평생의 발병이고 가업이다.
짓이기고 죽여야 사는 정치판이다.
쓸만한 넘에게 양보하는 싹아지가 없다.
계파와 낮바닦 정치에서 쓸만한넘 검증하는 진실도 없다.
일과 능력이 아니라 울타리 쥔장에 줄서야 정치생명을 연명하는 우리편이다.

선택에서 권력이든 의견수렴의 다수이든 진영의 구획정리에 빠쁜 판떼기이다.
민주주의의 허울에서 정치지형의 저울추는 민생이 아니라 좌우논리의 땅 따먹기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선택의 기우는 울타리 패권 뿐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빨강이냐 파랑이냐 두가지 색깔뿐이다.
정치이든 정당이든 선택을 왜곡하는 집단 이기주의는 민주주의의 병패이다.
다양성의 의견수렴에서 절차적 불신이다.
체제에서 확신할수 없으나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민주적 절차를 이용하는 불합리한 정체의 불신이다.
민주주의와 의견수렴에서 의회를 해산한 히틀러의 독선을 이해할수 없으나 과유불급의 불신이 있다.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국수적 집단의 성취를 우선하는 권세와 기득권의 독선적 지배이다.
민주적 절차의 합리성을 왜곡하여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내것과 우리편을 우선한다.
다수의 독선으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수기의 짝짝궁이다.
22대 총선에서 좌파와 부뚜막 문화의 피해의식을 고집하는 이분법적 경계의 선택이 있다.
정권의 독선을 견제하는 의견수렴에서 부뚜막 문화의 피해의식이 개입한 일방적 선택이다.
젠더갈등에서 패권적 정치에 기대는 거취이다.
민주적 절차의 합리성이라고 할수없다.
일인 일표제의 선택적 불확실성이다.
불투명한 의견제시와 일부의 극단성에서 의견수렴의 합리성을 충족하는 결론이라고 볼수없다.

분단의 학습으로 전이되는 성의 이분법적 갈등을 이용하는 좌우논리의 고질적 경계이다.
경계적 정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서 분별력 없는 갈라치기 이다.
사회의 구조적 갈등에서 합리적 결론의 정치가 아니라 집단의 패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젠더갈등의 정치화는 생태적 결론의 합리성을 배제하는 패권적 지배의 집착이다.
생태적 역할의 책임에서 정치에 만연된 이분법적 경계의 개입이다.
좌우논리의 관성에서 민주주의의 절차적 합리성으로 위장된 이기적 집단의 병폐이다.
정권견제에서 22대 총선의 디테일이 그렇다.
대부분의 선택은 보편성을 유지하였으나 20대 이하 여성의 선택은 젠더갈등의 사회성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권익의 구조적 문제해결에서 패권적 정치에 기대는 파괴적 설정이다.

젠더갈등은 지배력 문제가 아니다.
좌파의 저항적 시시비비가 부뚜막 문화의 관성적 피해의식을 이용하고 있다.
좌우논리의 울타리 정치가 동서냉전의 끝물에서 또다른 경계의 설정을 고집하는 것이다.
정치는 경계라는 사고방식이다.
여성과 남성의 유별은 생태적 결론이다.
생태적 질서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같을수 없다.
성의 동격에서 역할분담은 생물학적 진화의 결론이다.
보호와 안주에서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것이다.
젠더갈등을 이용하는 좌파논리의 패권정치는 결국 반쪽의 저항을 초래하게
될것이다.
2024.4.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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