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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과 제삼의 선택.

박세욱. 2024. 3. 31. 08:00

169 중용과 제삼의 선택.
세상의 부정과 불합리한 사고의 반론을 자신들 영역이라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정치는 양극화의 승패적 경계와 색깔론적 획일성이 아니라 민생을 지키는 정의와 공정의 진실이다.
정사의 진실은 이해타산과 불의로 공생하는 정치의 야사와 다르다.
야사는 낮바닦 색깔과 다른 권세와 기득권 사수를 위한 야합과 협잡과 권모술수의 은폐가 있다.
다양성을 이해하는 민주적 절차의 합리적 통치가 아니라 집단의 권세를 앞세워 국수적 논리를 강요한다.
정치와 국정에서 민생을 우선하여 의식하지 못하는 이기적 집단의 전체주의이다.
시대의 주류와 성취에서 나와 우리편으로 지배하려는 절대권력의 독선이다.
정치는 헌법적 가치에서 국가 씨스템을 관리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국민 스스로 참여하는 문화적 질서와 분야별 상호작용에서 생산성 관리의 효율이다.

산업사회와 공동체의 질서에서 분야별 다양성과 전문성의 인정이다.
민생의 거취와 행복에서 획일적 정치의 요구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안주와 성취이다.
국가의 성립과 운영에서 정치의 역할을 하나의 전문분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정치가 모든것을 지배하고 해결하는 획일적 집단성 개선이다.
민주적 절차를 충족하는 씨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국가와 국정의 효율적 관리이다.

정치가 과하면 국방과 치안과 사정과 언론등 국가 씨스템을 장악하고 지배한다.
패권적 절대권력의 조건에서 지배력 쌈밥질에 여념이 없는 정치이다.
국정에서 제도와 인사권과 공적지원등 합리성을 상실한 권력의 과도한 씨스템 개입이다.
독선적 지배의 강요는 스스로 참여하는 문화적 질서와 분야별 전문성의 상호보완적 자율을 구속한다.

국가의 생산성 관리에서 비효율적 운영이다.
최후에 국가 씨스템은 울타리의 권세에 구속되고 획일적 정치의 독선만 남는다.
결국 정치와 사회의 안정은 패권적 지배력 다툼의 겉모습으로 변질된다.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상황과 다르지 안다.
국정운영의 헌법적 가치에서 씨스템이 안정되어 있다면 불의가 끼어들수 없다.
공정과 정의를 우선하는 문화적 안정에서 분야와 전문성의 보완적 작용이다.
현실에서 정치의 시류는 내것과 울타리의 이익에 집착하는 비대칭의 탐욕이다.
촛불정국에서 광화문의 장수들이 외치던 무소불위 절대권력의 폐해이다.
수년전 광장과 촛불로 표현되는 격동의 시간지나 의회다수에도 불구하고 권세의 횡포에서 다른것이 없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절대권력의 탐욕이 우선하는 굿판은 여전하다.
답없이 행여나 하고 찔러보는 무지의 권세와 상대의 헛점 찾아 헤메는 정치판 산수의 권태이다.

진실의 부재에서 정의로운 척 분칠한 낮바닦의 치열함이 지나친 치졸한 현상이다.
겉모습의 인습에 얶메인 기획과 연출의 허세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합리적 결론을 위한 수레바퀴의 보완적 합리성 중용의 안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양극화의 대립과 대결을 빙자하여 민생과 정의 위에 군립하려는 기득권의 부정적 공생이다.
이분법적 정서에 기대는 권세와 정치적 야합의 의심이다.
승패정치에 기생하며 국민감정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한솥밥의 공생이다
적과 공생하는 정치적 야합을 수없이 경험하였다.

케비넷 정치는 야사이다.
정치판의 법은 책데로 안한다.
무슨넘에 송사가 그리 많은지 사기꾼은 모두 모여 있는것 같다.
정치공학의 산수는 정의와 공정을 물말아 드시고 사건과 송사를 물물교환 한다.
그것이 정치의 기술이라고 자화자찬이다.
예초에 어긋나지 안았으면 속창시 없이 가져다 붙이고 저울추에 매달어 산수할 이유도 없다.

야사의 진실에서 민초는 알수도 관심도 없는 정치판의 이율배반적 한솥밥이다.
정치의 잘난격에서 민심은 모르는 것이 편하다고 치부한다.
모든것은 역사로 포장된다.
 
중용의 요구는 기득권 사수를 우선하는 우월적 자가당착의 권세와 정치의 폐쇄성을 개선하는 것이다.
둘이서 끼리끼리 짝짝궁하다 삼이라는 숫자에 화들짝 놀라 자라 목가지 들어가듯 한다.
21세기의 정치는 야합보다 정사의 진실이 필요하다.
차별의 모순과 저항에서 안방과 건너방이 가깝고 아랫목과 울묵이 같은 것이다.
권모술수의 낮바닦이 다르지 안은 실용적 질서이다.
시장 모퉁이에서 민생과 정치가 함께하는 생활속 정치이다.
삶에서 특별하지 안은 문화적 질서의 공유이다.
점퍼차림의 왕과 바구니 들고 사장보는 총리이다.
"나는 총리로 여러분은 노동자로 국가에 봉사한다" 하였다.

대자연의 질서는 형평성의 조율이다.
광장과 촛불에서 진실과 낮바닦이 다른 정치의 개선은 진보의 주장이다.
정치판의 시류는 바닦이 더러워 아무리 깨끗해도 꼴이 무사하지 못한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정치의 정체성과 규범을 떠드는 칼자루의 권세는 오로지 나와 우리편을 우선한다.
정치의 수단과 방법에서 반론과 진실의 깨끗함은 돌연변이 이며 유물이다.
글로벌 통신과 문화를 공유하는 시대에 물질과 좌우의 시류를 벗어난 고결한 정신으로 정치할수 없다.
낮바닦과 허세로 포장되는 정치판의 진실은 열심히 살펴보아야 그나마 산수할수 있다.
관계의 물질적 모순과 울타리의 이질적 대립에서 당연한 정치판의 생리이고 관념의 치부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선택을 위한 절차적 순리를 말하는데 이분법적 사고의 배반적 차별이 있다.

촛불에서 장수들 시대 지나 검찰머시기 까지 낮바닦들이 벌이는 정치개혁의 허세이다.
광장에서 민생개혁을 외치던 민주화의 요구는 사라졌다.
양극화의 편한정치에 안주하는 기득권의 배떼기이다.
정치의 목적은 승패에 집착하는 허울좋은 울타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적 평가는 비판과 반론에서 국민이 한다.
광장과 촛불의 거창한 태동에도 울타리의 권세는 변한것이 없다.
대문높이와 의관의 폼생품사 뿐이다.
개혁의 가치에서 촛불에 숟가락 올린분들 많다.
이불에 오줌싸고 키 안쓰겠다고 하는 것이나 촛불에 숟가락 올린 것이나 낮바닦 처세는 같은것 이다.

민주화 시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이좋고 매부좋은 양극화의 울타리에서 희노애락이다.
선택의 저울추에서 지고도 다수의 야당이다.
요사이 정치판 풍토는 이겨도 좋고 져도 좋으니 뺏지만 달아 달라고 한다는 소문이다.
명찰달면 지 잘난줄 알고 세상사 관심없다.
수많은 참사에서 비극에 곡하여 애절하면 그제사 낮바닦 분칠하고 숟가락 올리는 권세의 처신이다.
송파 세모녀 사건에 동네 불나드만 요사이는 시도때도 없다.
양극화의 경계에서 정치판의 언행은 진실보다 공수의 상대적 대응이 대부분이다.
중용과 제삼의 선택은 인지상정의 굿은것 보여서 국민들이 실한일꾼 새로 들이겠다고 하는 것이다.
양극화의 편한성취에 취해 있다 중용의 선택지 요구에 화들짝 놀라 천기에 오강단지 깨지는줄 모른다.

갈등과 대립이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의 정치 끝낼때도 되었다.

민족과 이웃의 승패가 아니라 합리적 결론의 중용을 요구하는 국가 씨스템과 민주적 절차의 반론이다.
정치개혁의 염원에서 울타리의 묻지마 선택과 일백팔십 좋은그림은 깨진 오강단지 뿐이다.
그나마의 시작에서 대문밖 노심초사에 문짝 붙들고 승냥이의 치졸함으로 시시비비 찾아 거품물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위성정당의 결말이 묻지도 따지지도 안은 하늘의 점지로 귀결된다면 국운의 미래이다.
돌이켜 사고하면 촛불과 광장의 지속적 주장과 학습에서 제삼의 선택까지 까질러 고생한 결과이다.
정치개혁과 권세의 비대칭에서 하늘의 점지로 이루어진 고추가루의 인연이 다행이다.
대의의 목적에서 절차를 충족하는 곁가지의 진통은 있는 것이다.
새칠로 한다니까 위대하지 못한 양극화의 울타리 정치가 문지방 노심초사에 굿하고 자빠졌다.

정치개혁에서 쌍수들고 환영해도 지은죄가 무거운데 피냄세가 그리운 승냥이들의 오지랖이 가관이다.
공수처 설치에서 눈에 형광등 달은 오크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형국을 경험하였다.
새판의 오기인지 반으로 갈라진 좁은땅에 이짝저짝 금 그어늫고 오줌 싸응게 내땅이라고 지랄이다.
대한민국 정치판 쥔장은 둘뿐이라고 호적정리 하고 자빠졌다.
울타리에 줄서서 낮바닦 뿐인 오지랖으로 명찰달면 절차적 순리도 인간적 도리도 우째 철딱서니 뿐이다.
양극화에 줄서서 입바른 소리 해봐야 사대부의 사랑방에 줄서는 허울좋은 권태이다.
참말로 어디 써먹을 데가 없다.
민주화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은 희생과 투쟁의 변화가 아니라 시대의 문화적 진화로 폄하되고 있다.
죽은자의 기억에서 산넘들이 지키지 못한것이 많다.

울타리의 예속에서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불나방의 신념은 정치판의 이해타산이 되었다.
촛불의 시간과 격동에서 무엇이 우찌되었는지 민생은 오늘도 힘들다.
격동의 역사에서 적대적 관계의 똑같은 피해자 라는 한솥밥 공생이다.
죽은자의 희생만 역사의 한이 되었다.
염원하던 민생우선과 자유는 희생과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진화의 시간에 맏겨진 것이었다.
비장한 추억은 현실에 안주하는 산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여전히 좌우이고 분단의 현실도 그데로 이다.
자본과 노동의 경계도 세윌에 비례하여 반듯한 것이 없다.
주화의 역사에서 다양성의 자유를 주장하였던 개혁은 주체를 상실하고 이분법적 시각으로 정체되었다.

피의 희생을 견디어야 했고 역사의 기록으로 찬양하던 노력의 댓가가 또다시 좌우이고 기득권 세상이다.
진실없이 내것만 있는 지긋지긋한 이분법적 대립의 정치에서 탈출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 씨스템과 민주적 절차의 합리성을 무시하는 패권적 권세는 생산성이 없다.
이분법적 논리에서 승패에 집착하는 자가당착만 증가한다.
중용과 제삼지형의 태동은 이분법적 대립의 정치에서 민생우선의 실용주의이다.
정치의 돌파구에서 역사의 진보는 누구라도 시도할수 있는 영역이다.
정치개혁에서 제삼의 선택은 이분법적 정치의 대안이 될것이다.
깃발에 줄서는 갓쓴 멍청이들께서 정치의 정체성과 원칙을 모른다.
일의 능력과 선택에서 울타리 쥔장의 점지에 얶메인 정치생명의 불성사나운 낮바닦 뿐이다.

중용의 정치는 약자의 편에서 옭고 그름이다.
21세기 통신사회에서 실용주의를 우선하는 새로운 선택지가 필요하다.
중용를 무시하는 버르장 머리는 댓가를 받을 것이다.
표의 분할에서 양극화에 기대어 공생하는 진영정치는 30% 제자리 찾으시면 된다.
그동안 중용의 더부살이로 좋은시간 되었으면 만족하셔야 한다
양당제 폐해를 거론하면 대통령제라서 어렵다고 억지춘향이다.
대통령제도 다수의 원칙에서 다양성의 합리성을 충족하는 민주주의 체제이다.
2024.3.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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