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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치기.

박세욱. 2024. 3. 16. 15:44

168 갈라치기.

칠거지악과 부뚜막 문화의 차별과 여성권익 향상의 저항적 학습에서 좌파적 정치개입 우려가 있다.

좌파는 문명과 산업사회의 생산과 분배에서 사회적 평등의 저항적 시각이다.

여성권익의 저항적 시각은 유교문화의 차별적 피해의식이 내제된 사회주의 논리의 전제가 있다.

유교적 관성의 성취적 의식에서 씨앗을 우선하는 생태적 질서의 순종적 차별에 저항하는 평등의 요구이다.

가부장적 부뚜막 문화의 차별적 규범과 관성에서 사회참여의 구조적 문제이다.

힘과 무리 또는 자본과 권력의 기득권에 저항하는 약자적 심리의 좌파적 논리와 동행하는 조건의 성립이다.

이념과 분단의 역사에서 파생된 이분법적 경계의 학습은 낡은습성의 색깔론적 요소가 있다.

양극화의 울타리에 기대는 승패정치에서 좌파의 논리를 충족하는 약자적 조건의 수단이다.

반쪽의 저항적 의식에서 양극화의 이분법적 현상을 우선하는 진영정치의 앞뒤 없는 개입이 문제이다.

 

유교문화의 관성적 피해의식과 동행하려는 좌파적 논리의 정치개입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우파의 반간계가 작용한다.

성평등 문제에서 정치판의 승패에 편승하는 이분법적 갈등의 경계와 확장이다.

이성의 평등과 차별적 문제는 문명으로 이해하는 절대공유의 생태적 질서에서 문화적 해결이 바람직하다.

문화의 시대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문과 순종을 미덕으로 삼았던 부뚜막 문화와 남성중심 가부장제의 시대적 변화는 여성권익 향상과 병행하여

반쪽의 수용성이 확장되었다.

여성의 권익향상에서 남성의 수용성이 간과되고 있다.

남성의 수용성 확장에서 과거 문화의 차별적 시각으로 평가되는 시대적 현상의 불만이다.

 

가해자 안인 가해자와 피해자 안인 피해자의 문화적 대립이다.

이시대의 남성은 유교문화에 살고 있지 안다는 것이다.

학습과 지식에 의한 문화의 시대적 변화에서 지금 당장 유교문화의 관성을 지울수 없다.

문화의 관성적 중첩은 있을 것이나 이시대의 남성은 대체로 여성의 권익향상에 동의하고 있다.

시대적 진화에서 생태적 존재를 이해하는 이분법적 질서의 수용성 확장이다.

문명과 지식은 학습의 시간과 병행하여 진화한다.

여성권익의 구조적 문제에 좌우 진영논리의 정치가 개입하여 이념적 경계를 대입하고 있다.

양극화의 대립적 이해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정치판의 패권적 생존과 저울추에 편승하여 해결하려는 극단적

좌우논리와 혼제된 성평등의 문제이다.

 

이성의 차별적 현상과 관련된 구조적 문제에서 정치판의 권세적 또는 패권적 집착이 더큰 문제이다.

울타리 정치의 승패적 산수를 우선하여 이성과 관련된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갈라치는 무지이다.

양극화의 극단성에 기대는 정치가 여성의 약자적 저항의식을 수단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판의 승패적 생리에서 권력의 패권적 절대성으로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각의 문제이다.

이념으로 갈라진 좌우논리는 설정된 사고에 집착하는 절대성의 맹종적 집착이 있다.

여성권익 향상을 맹종적 정치의 승패적 시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문화적 소양이다.

좌우 진영논리의 양극화 정치에서 반쪽의지의 정치개입 영향력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며 이것으로 여성권익 향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 편승하여 극단적 정치를 부추기는 편협한 정치의 잔머리가 있다.

 

좌파적 논리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합리적 대의를 훼손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의 연장화이다.

산업사회와 사회성 확장에서 생태적 순리를 차별하는 일부의 극단적 저항의지를 이용하는 정치공학이다.

민주주의 체제와 절차의 합리적 결론에서 반쪽의 의견취합은 문제가 있다.

일부의 극단적 극성스러움으로 반쪽 전체를 대변한다는 근거도 없다.

양극화의 정치판에서 위임을 확인할수 없는 반쪽의 정치가 주체가 될수있는 확률은 매우낮다.

아직 유교문화의 관성이 남아 있는 팔뚝굵은 반쪽의 반론과 반격의 정치개입을 예상해야 한다.

생태계의 질서는 합리성이 결여된 현상에 반드시 반론을 형성한다.

부뚜막과 칠거지악의 문화에 저항하는 여성권익 문제에 좌파적 시각의 정치개입과 양극화의 극단성에 매몰된

우파적 반론과 방어와 반격이다.

 

대표적 현상이 여가부 폐지이다.

급진진보 정당의 패미정치를 경험하였다.

여성권익 향상의 구조적 문제의식은 이해하나 패권적 정치 장악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반쪽의 상대적 또는 수용적 피해의식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딸들의 표면적 정치개입은 2년여에 불과하다.

2년여의 시험에서 새로운 것은 익숙함의 진실로 희석된다.

가시적 효과로 미래를 예지하는 것은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개딸들이 외치는 집단주의는 좌우 진영논리의 색깔론적 극단성에 편승하는 정치개입이다.

양극화의 승패적 경계를 이용하여 생태적 반쪽의 문화를 고집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패권에 편승하여 이성의 이분법적 갈등을 부추기고 갈라치는 저항적 집단의 이기적 정치이다.

여성권익을 빙자한 일부 좌파적 집단주의의 정치개입은 민주적 절차의 합리성과 반쪽의 반격이 있을 것이다.

생태적 질서의 불가역적 문화의 이해와 동행에서 진화의 시간을 공유하는 창의력의 문제이다.

미래를 예지하지 못하는 불합리한 현상은 사회문제가 된다.

사물의 이해를 매사 정치적 시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 역시 분야와 전문성 등 다양성의 부재이다.

좌파적 집단주의의 시대착오적 발현은 우파의 대응적 반론를 형성하는 것이 양극화 정치의 고정관념이다.

냉전과 분단의 지정학적 국제질서에 더하여 이성의 이분법적 경계가 갈등의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분단의 비극에 있는 지정학적 경계의 확장적 미래가 될수있다.

 

21세기 통신사회에서 철지난 좌우논리의 확장적 대립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과 정율성 공원 문제의 현상적 원인이다.

좌파적 수단에서 우파의 결속과 대응이 가시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좌우논리의 고착화된 정서에 기대어 편하게 정치하려는 정치인의 무지와 입신양명의 오판이다.

이러한 현상이 옳은 것이냐 하는 우려의 문제이다.

현정부 들어서며 홍범도 흉상과 학살자의 기념관과 식민사괸의 인식에서 우파적 시각이 강조되고 있다.

냉전적 국제질서의 경계에 앞장서 지정학적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대륙과 단절은 안보와 경제문제에서 불확실성을 확장하고 있다.

사회적 저항의식에 편승하는 좌파적 논리의 확장에서 우파의 대응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좌우논리의 패권적 정치에 편승하는 성차별 문제의 현상으로 끝나지 안을 것이라는 우려이다.

준비라는 측면에서 비약하면 성평등 문제에 좌우 진영논리의 계획적 개입을 우려할수 있다.

정권 견제론에서 민생과 이웃과 경제와 여성문제를 좌우논리의 시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좌우의 확장적 대립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경계에서 결코 좋은 미래가 아니다.

작금에 벌어지는 좌파적 또는 우파적 현상에서 정치공학이 작용하는 무지와 음모의 우려이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사대부적 독불장군의 권세가 민주주의의 합리성과 통신사회의 지성을 무시하고 있다.

문화의 범위를 이탈하여 양극화의 패권경쟁에 편승하는 집단주의의 이기적 극단성이다.

국민과 국가와 민주주의를 망각한 권세적 조직논리의 밥그릇 정치이다.

야당의 역할과 정권견제에서 여성권익을 빙자한 집단주의는 일부로 전체를 호도하는 허울에 불과하다.

 

패권정치에 합류하여 성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이분법적 정서이다.

여기에 편승하여 심리적 갈라치기로 정치적 이익을 탐하려는 입지적 산수의 무지이다.

일반적 시각에서 이러한 현상이 민주주의 체제의 합리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충족한다고 볼수없다.

반쪽의 정치는 반쪽의 대응이 있다.

시대적 문화의 이해에서 전체와 개별적 생존은 다를수 있으나 사랑이라는 낱말이 어색하기는 하다.

문화적 소통이 아니라 패권적 정치에 편승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는 이용하려는 진실의 불편함이다.

문명과 산업사회에서 생태계의 이분법적 역할 생물학적 진화는 불가역적 현상이다.

유교문화의 관성에서 어머니의 숭고한 정신은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한다.

민주주의의 체제와 통신사회의 정의에서 일부에 집착하면 전체를 상실할수 있다.

 

정치가 아닌 반쪽의 대립과 증오를 위한 정당내 독선은 견제되어야 한다.

식민사관과 냉전적 역사의 극우적 시각과 비극적 사건의 책임에서 오리발로 일관하는 정권견제는 범야권

결속으로 대응할수 있다.

민주주의의 국정은 이쪽저쪽의 양극화가 아니라 다양성과 동행하는 것이다.

22대 총선은 여성권익을 빙자한 좌파적 집단주의 개입과 반간계를 이용하여 우파의 결집을 시도하는 철지난

좌우논리에 주의해야 한다.

이성과 세대의 갈라치기이다.

2024.3.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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