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임인년의 시류. 본문
94. 임인년의 시류 (2024.2월 수정).
동심은 사라지고 산업사회와 시장경제 경쟁에 세뇌되어 있다.
삶과 관계에서 인륜은 무디어지고 경쟁의 성취적 욕망은 가시적 평가를 우선한다.
차별적 경쟁은 학연 지연등 고추가루의 인연에서 평수와 권세와 수도권의 특별한 인프라에 집착한다.
경쟁의 일상에서 차별에 치이고 사람에 밟혀 죽어도 서울이다.
성취적 욕망과 가문의 영광에서 판교아래 지방은 유배지 되었다는 시류의 확인이 씁쓸하다.
산업사회의 세뇌는 자연과 생물학적 기억을 상실하였다.
경쟁과 차별의 가시적 현상에 예속된 완전한 산업사회의 세대이다.
신세대에서 가전기구 중 가장 필요한 것이 냉장고라고 한다.
육십 중반의 나 역시 그렇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이다.
신선한 내용물의 실용적 가치이다.
선세대의 개념은 다르다고 한다.
가전중 냉장고가 시야와 공간을 가장많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통신사회의 공유에서 사진의 공간적 집착이 된다.
SNS에 사진 찍어 전송할때 냉장고의 겉모습이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한다는 이유이다.
가시적 현상에 집착하는 폼생폼사 이다.
유럽의 문화은 냉장고의 의미를 창고 정도로 이해한다고 한다.
집안의 빈공간에 냉장고를 배치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냉장고 위치는 가장 눈에 띄는 전면에 배치한다.
우리나라 냉장고의 겉모습은 거의 악세사리 이다.
유럽의 냉장고는 겉모습에 신경쓰지 안는다고 한다.
실용주의와 통신소통의 가치에서 생각해볼 이유가 있다.
독립적 문화는 공동체의 의무보다 나의 존재를 우선한다.
전체보다 부분집합으로 공동체와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시적 경향이 있다.
생태적 질서를 이해하는 관계의 합리성에서 우월적 집단의식이다.
다수와 통신사회의 선택으로 이해될수 있으나 전체와 미래에 신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부분의 선동과 악다구니가 아니라 동의의 전제이다.
산업화 세대의 거취적 시류에서 이성적 갈증과 감성보다 사회적 성취의 조건을 우선한다는 조사이다.
귀떼기 피 돌아도 연애를 안한다고 한다.
고무신 열 컬레에 열번 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이야기는 스토킹 범죄자 되었다.
어두운 골목 창가의 설레임과 길모퉁이 가로등 밑을 서성이는 이성의 갈증은 사막화 되었다.
사회구성에서 생물학적 생태계와 대자연의 질서는 잊혀지고 관계의 상호주의는 사라지고 있다
경쟁의 시류에 지친 독립된 지성의 욕구는 이웃의 존재가 불편하다.
삶이 물질과 성취적 욕구에 예속되어 이웃과 생명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보편성에서 나의 의지를 우선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현상이다.
아들 딸 낳아 잘먹고 잘사는 가족구성의 가치는 파괴되었다.
사회구성에서 가족과 인연의 의미를 상실하면 관계의 절대성이 파괴된다.
21세기의 문화에서 공동체의 기초단위는 가족에서 나 라는 자존감이 우선하고 있다.
가족과 공동체의 발원은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개념의 진화이다.
악의 준동은 존재와 보호의 불확실성으로 약한곳에서 발생한다.
가족의 필요에서 보호자의 부재는 생명과 인륜의 보호가 불확실하다.
유전적 동질성에서 공유하여 보호하려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다.
가족의 구성에서 인연의 보호본능은 가장 우선하는 선으로 선지자의 가르침 된다.
물질풍요의 시대에 경쟁의 차별과 성취적 욕구의 집착이 가족과 인륜의 가치를 힘들게 한다.
연속성의 진리에서 탄생과 존재의 방황은 인연의 보호본능과 서로를 의지하는 상호주의 질서를 파괴한다.
공동체와 민주주의의 이해에서 생태적 질서의 합리성을 망각한 자기중심적 시류의 문제이다.
물질과 정치적 이유의 선택에서 생명과 인륜보다 내것과 울타리가 우선하는 부분적 사고의 현상이다.
아직도 개혁의 딸들께서 악다구니를 계속하고 계신다는 실상이다.
국민연금의 이해에서 연속성을 위한 탄생과 책임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연속성을 위한 젊음의 생산적 배려에서 황혼의 삶이 성취적 욕구의 걸림돌이 되고있다는 세태적 사고이다.
국민연금으로 노후가 넉넉한 것도 아니다.
경쟁과 노동력을 상실한 삶의 방치는 유전적 존재의 의미를 축소한다.
탄생의 망각과 삶의 방치에서 인륜의 외면은 증가하여 익숙해지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세대의 간극으로 견디어야 하는 연속성의 문제이다.
생태계의 순환에서 삶의 미련을 견디어야 하는 죽음의 준비는 필요한 것이다.
육신의 한계에서 생존의지와 이승의 미련이 사라지는 무의미한 정신의 시간이 있다.
자연의 순리에서 연속성의 단절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지 안는다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인연의 시작에서 누구에게나 배려와 책임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시류의 우여곡절을 견디어야 하는 경쟁적 생존과 삶에서 인연과 인륜의 책임은 성취적 우선순위가 없다.
냉장고의 실용성과 겉모습의 시대적 이해에서 생태적 질서의 예속을 경험한 육십줄의 괴리이다.
자기중심적 세태의 현상에서 이웃과 인연을 우선하는 부뚜막 문화의 시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인륜과 기회의 평등에서 전체와 미래를 의식하는 집단지성의 논리가 필요하다.
통신사회의 지성이 앞뒤 없는 성취적 욕망과 울타리 정치의 패권적 저울추에 매달려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세태의 우려는 정치의 집단적 시류를 우선하여 판단하는 동행적 논리의 괴리에서 나타나고 있다.
새벽닭의 예지는 시류의 흐름에서 내안의 진실을 가르치신 것이다.
무리적 습성과 폼생폼사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분별력은 통신사회의 지성이 아니다.
재림의 약속은 합리적 절차와 결론을 무시하고 내것을 우선하는 차별적 시류의 형벌을 말씀하신 것이다.
21세기에 고립된 문화의 유일성과 자기중심적 사고에 집착하는 의식의 문제이다.
수해로 반 지하에 사시는 분들이 희생되었다.
사회의 안정성에서 생존의 저항이 불가능한 희생이었다.
수백 체의 갬 투자로 깡통전세에 내몰리는 암담함이 임인년 말의 사건이다.
돈의 경제에서 가상의 불확실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모한 물질탐욕과 성취적 욕구의 구속이다.
물질의 실용주의를 망각한 시류의 집착이며 제도의 악용이다.
냉장고의 실용성은 내용물의 신선도 이다.
악의 시험에서 종교의 집단주의적 국가관과 잘못된 팬덤의 무지로 선지자의 재림을 의심하지 안는 21세기이다.
무엇으로 실용주의의 중용을 이룰수 있을지 산업사회에 예속된 물질탐욕의 차별과 시류의 인습은 상식밖이다.
호모샤피엔스와 현생인류의 두개골은 변하지 안았다고 한다.
탐욕과 지배와 공존에서 호모샤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가 궁금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샤피엔스와 공존하였던 인류의 유전적 조상이다.
4만5천년 전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적 생존은 호모샤피엔스에 흡수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현생인류의 유전자에는 2%정도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은 멸종 이전에 언어와 문화생활을 하였다.
지능은 현생인류와 크게 차이나지 안았다고 한다.
인류의 폭력적 지배와 탐욕에서 지적 생명체의 탄생적 역사와 시대적 문화가 궁금하다.
존재와 악의 시험에서 힘을 우선하는 문화와 종교적 지배의 갈등과 탐욕은 수단의 변화 뿐이라는 의심이다.
네안데르탈인의 분화와 생존과 공존과 흡수에서 현생인류가 격고 있는 문화적 또는 유전적 차별의 진실이다.
진화의 필연적 조건 학습의 시간개념에서 근본적으로 변한것이 없다는 의심이다.
21세기 지식문화 사회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소멸과 탐욕과 폭력적 지배의 본질적 진실이다.
전쟁과 독선적 지배력과 울타리에 갇힌 배반적 지성의 행태가 수만년 전 있었던 미개한 문화라는 의심이다.
진실의 확인에서 변하지 안은 수만년 전 두개골의 사고력으로 잘났다고 떠들어 봤자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기원후의 역사와 이천년 후 재림의 계시가 무었을 의미하는지 예지가 필요하다.
인류의 진화는 근본적 변화의 전환이 필요하다.
종말론적 물리적 진화에서 정신적 진화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 이며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주와 문화적 사고의 이해에서 나와 우리가 존재한다면 타의는 광범위한 것이다.
미지의 무한에서 창조는 존재와 비교할수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을 잊고 우월적 지배력에 취해 함부로 까불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창조의 무한함을 이해하고 어깨 힘들어간 탐욕적 지배력의 꼬랑지 관리하는 것이 답이다.
지식과 문화는 미지의 예지력을 위한 진화이다.
미래를 위한 현재의 이해에서 생태계의 합리적 결론을 공유하라는 것이다.
미개한 시간에서 벗어나려면 생물학적 존재를 이해하고 의식하여 생명과 인륜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류의 육신과 생명에는 창조에서 시작한 생명체의 진화와 결론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는 무의식의 생태적 질서를 공유하여 각각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다.
선택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창조의 극히 일부만이 역사의 증거로 기록되어 지는 것이다.
폼생폼사의 자기중심적 겉모습이 아니라 내안에 존재를 공유하는 암시적 질서의 모든것이 있다는 것이다.
현생인류의 물리적 진화는 시간의 조건에서 각각의 절대성에 한계가 있다.
증거적 문화의 이해와 상상에서 생태계가 물리적 생존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화의 합리적 결론은 암시적 소통으로 이루어진다.
욕구의 충족에서 생물학적 능력은 정신적 만족을 위한 소통을 필요로 하고 있다.
표현에서 가시적 소통을 위한 감각적 또는 무의식적 공유의 이해이다.
물질문명의 대세에서 정신적 진화는 욕구의 성취에서 감성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물질과 인습의 성취는 결국 감성적 충족의 정신적 만족이다.
밥 잘먹고 화장실 잘 다녀오는 것과 별차이 없다.
인류의 지적한계를 이해하고 각각의 생명에 내제되어 있는 다양성을 공유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한한 창조의 영역을 이해하여 나아가는 진화의 합리적 조건이다.
지식의 광명에서 어두운 밤하늘의 별빛과 같은 노력이 진정한 이시대의 영웅이다.
울타리 문지방에 불켜 놓고 내것에 견주어 우리편으로 줄세워 찾는것은 쉽다.
기계적 저장을 이용한 데이터의 통합에서 인공지능의 생산성은 또다른 미지의 시간이 가능한 시대이다.
생물학적 진화의 이해에서 개별적 지식의 통합은 불가능한 시간에 있다.
암시적 질서의 연결과 소통의 현상적 증거에서 생물학적 진화의 시간적 부재이다.
진화는 의도하지 안아도 무의식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상상에서 생물학적 존재의 소통부재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의 계시는 형체가 안이라 의식으로 전달된다.
인류의 상상은 사물과 사건의 이해와 감각적 존재의 이성으로 이루어진다.
상상은 시간의 필연으로 실제하여 이루어진다.
의식을 공유하여 상상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염원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
합리적 결론을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암시적 소통의 진화는 대자연의 합리적 결론을 전제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멸하지 안는다면 생물학적 생명체는 무한한 창조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여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생명체가 공유하는 데이터의 잠재력은 무한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적 질서의 소통이 된다.
자면서도 무의식의 생체적 흐름과 의식의 조각을 꿈의 형태로 합성하여 저장한다.
암시적 질서의 무한함과 기록으로 저장되는 지식은 태평양과 물방울을 비교하는 것이다.
기계와 데이터는 조건의 영역에서 지식을 합성할수 있으나 상상할수 없다.
생물학적 지식과 생산성은 무한한 상상의 영역으로 기계적 생산성에 대비할수 있다.
생명체는 진화의 합리적 결론을 위해 이미 무의식의 암시적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다.
울타리 쳤다고 늬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태적 질서의 공유적 개념을 이탈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부분으로 전체를 왜곡하는 집단주의의 문제이다.
여울은 강물의 흐름에 흡수되어 역사의 디테일이 된다.
왠만하면 강물로 공유하라는 것이다.
이승에서 시간이 되면 조용한 산사 찾아 나의 실체를 연구해 보고싶다.
이미 평범의 울타리를 넘었다.
이승의 무의식에서 또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평범하지 안은 의식이다.
타의를 배제한 나의 사고에서 인내하고 견디는 시간이 또다른 선택이 되었다.
인연의 책임을 벗어나 일상을 떠나고 싶은 자아의 희망은 요원하다.
버릴것만 후질러 쌓여가는 어쩔수 없는 고집불통의 시간이다.
2022.12.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