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악의 시험과 선택. 본문
157 악의 시험과 선택.
대의와 밥그릇의 혼돈은 옳고 그름의 신념에서 배타적 무의식이다.
역사와 시대적 문화의 공유에서 역시 밥그릇의 기회주의는 민생의 분별력이 없다.
길거리 확성기로 민생 우짜고 입설이 거창하드만 할일없이 빈정거리다 때되면 일신의 미련이 많다.
위임의 책임에서 비일비제 하다 속창시 없이 공천에 줄어서 낮바닦만 비장하다.
바쁠때 없드만 울타리의 권세에 저항하는 민주적 절차에 호들갑 떨며 무리지어 버선발이다.
양극화의 극단에 예속된 정치적 생존에서 신념은 국가와 민족과 민생을 떠난지 솔찬히 되었다.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더니 색깔로 말뚝박은 선택이 잘못되어 죽쑤어 머시기 주어야 할 판이다.
입바른 마빡이 번지르해서 뽑아 놨더니 시정잡배가 따로 없다.
21세기 통신사회에서 이짝이나 저짝이나 조선을 망하게 하였던 세도정치의 망령이 버젓하다.
국정과 위임의 대변에서 민심과 울타리의 우선순위가 다르다.
정치인의 거취가 민심에 충성하지 안고 울타리 쥔장의 눈도장 점지에 속창시 없다.
국가의 미래가 백성의 뜻이 아니라 국수적 집단의 이기적 패권에 있다.
정당내 민주주의는 개밥에 도토리 되었다.
군사정권의 독선에 저항하며 불나방의 슬픔에 애절하였던 민주화의 역사가 가난한 시절을 잊었다.
내가 또는 우리가 해보니 권세의 입감이 솔솔하다.
울타리의 패권에 줄서는 일신과 권모술수는 시류의 잡것을 동원하여 색깔론과 갈등의 경계에 충성한다.
민생에서 실용적 가치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우리편의 승부 뿐이다.
양극화의 경계에서 살고보아야 한다는 가난한자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위임의 기회와 선택에서 낙동강 오리알은 천기와 관계없이 비참하다.
권세의 공천으로 죽고 사는 정치판 악다구니에서 선과 악의 분별력은 사치이다.
물질시류와 성취적 욕구의 증거적 현상은 수단과 방법에서 선악의 의미가 없다.
쥔장의 점지에서 우리편의 저울추에 안주하는 치졸한 선택과 균형적 비판에서 낙동강 오리알의 문지방 비극 뿐이다.
사물의 이해와 관계에서 선지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울타리의 색깔을 우선한다.
선의 순리와 악의 시험에서 일과 능력을 우선하는 생산성은 자아적 신념과 권세의 혼란에 있다.
정치가 집단의 패권에 집착하여 정의와 공정의 순리를 망각하고 있다.
최소한 대한민국 정치판의 생리는 선의 순리가 아니라 악의 시험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물의 진실은 결과보다 과정의 디테일에 있다.
정치는 울타리의 승패가 아니라 의견수렴의 합리적 절차이다.
이기고 지는넘 뿐인 선택에서 저울추의 조건은 선의 순리보다 악이 지배하는 모순이다.
사과의 전설은 사물의 이해와 진화에서 내것의 탐욕이다.
위임의 대변에서 미래의 예지가 아니라 과거에 얶메인 시시비비와 현재에 안도하는 기득권 안주이다.
견제와 균형을 위한 평가에서 미래의 긍정이 아니라 과거의 부정이 우선한다.
선거때만 되면 정당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인격과 능력이 아니라 사건의 송사로 물고 늘어지는 진흙탕이 된다.
민심을 대변하는 자의 신분이 법의 시각으로 평가된다.
정치적 선택이 미래 또는 선의 창의력이 아니라 과거의 허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악의 증거로 미래를 선택하는 불행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분법적 생체기 라는 관성적 인식이다.
일의 평가가 아니라 상대의 약점잡아 산수하는 버르장머리이다.
때만되면 악의 권모술수로 정의를 저울질 하는 잘못된 정치이다.
상대의 불행 찾아헤메다 냄새만 나면 진실과 상관없이 미친머시기 물고 늘어지듯 한다.
악의 팩트에서 정치적 유불리는 삶의 역경과 인격과 탄생의 순수마져 아작난다.
코 뀌고 목줄맨 짐승처럼 끌고다니며 추락한 몰골로 광고 찍는다.
나뿐인간 보시고 우리편 되라는 것이다.
이웃과 관계의 인륜은 없고 우리편 아니면 이유불문 하고 즉사하는 패권적 조직논리의 정치이다.
법의 절차에서 요단강 넘어갈 인간은 민생의 교훈 이외의 시야를 좁혀 광고판에서 낮바닦 지워야 한다.
적당함의 중용에서 정치가 아니라 인격과 인륜을 연민하는 사람사는 세상의 문제이다.
진영논리의 관성적 집착에서 매사 악의 저울추는 긍정과 미래에서 잘못된 인습이다.
이짝저짝 할것없이 모질은 승패와 복수의 정치 배워서 하는 짓거리이다.
울타리의 패권으로 생사를 논하는 대립의 정치에서 승패적 원한의 비생산적 악순환이다.
너와 나는 다른 세계관의 별종적 관계라는 것이다.
미래지향적 사고에서 낮바닦과 말씀은 대의이나 민심의 올바른 의견수렴이 아니다.
좋은것으로 판단할수 있어야 좋은 짓거리가 융성한다.
나쁜것의 학습은 나쁜사회가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자아가 부족한 성취와 탐욕으로 지적 분별력을 상실한 권세와 지배가 선의 순리를 왜곡한 결과이다.
악의 시험으로 사족이 둘러싸인 울타리 안이나 밖이나 입바른 정의는 변방이다.
정치생명과 거취에서 오로지 옥황상제 오지랖 방어에 목가지 들이미는 밥그릇의 무지이다.
치간같은 권세에 줄서는 조직사회의 병폐이다.
국가의 생산성에서 조직의 충성과 개별적 능력은 별개이다.
조직생리의 정치판에서 능력있는 인재의 생존확률이 희박하다.
청렴과 능력과 신념에서 떡잎의 정직한 싹아지는 조직과 밥그릇의 위기이다.
충성시험으로 간보다 수틀리면 배신과 협잡의 말종을 동원하여 변방에 웅크린 외로운 늑대를 만든다.
문화와 지성이 이해하는 선의 주체에서 신념과 의지의 거취가 힘들다.
정치와 조직의 권태는 권세에 줄서서 결탁과 야합으로 들이미는 내것의 시류이다.
부정한 성취의 이질적 분노와 인연의 책임에서 정의와 존재에 얶메여 눈치보는 넘이 이상한 양반이다.
법도 경우도 아닌데 도적넘 아닌 떡잎 멀정한 나만 멍청하다.
능력있는 분의 예지력은 시정잡배의 구정물에 구차할 것이 없다.
더러워 보따리 싸고 정치의 변방에 은거하는 인재가 많다.
정치판에 쓸만한 인재가 가믐에 콩나는 이유이다.
정치판에 선의 순리라는 신념과 의지의 순수는 꽤나 힘들다.
조직과 울타리의 색깔에 줄서야 하는 정치판에서 옳고 그름의 고결한 정신과 지성의 분별력은 사치이다.
신념과 의지에 상관없이 시류의 잡것으로 악다구니 하는 돌격대의 소모전이 현실정치의 정체이다.
울타리의 폅현함에 갇힌 무리적 습성의 깡패정치이다.
정당내 민주주의는 메아리도 사라졌다.
말장 도로묵이다.
공정과 정의의 부재에서 사대부의 권세와 시류의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정치판이다.
상향식 공천이 민의를 대변할수 있는 제도이다.
이익의 주체가 일꾼을 고용하고 품삿도 주는 것이다.
품삿만 받아가고 땡땡이 치다 밥때만 나타나는 인간이 태반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심이 쥔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용주 보다 작업반장 끝빨이 세다.
울타리의 권세에 줄서야 하는 하향식 공천이 원인이다.
옳고 그름의 사리에서 실용주의가 무의식 되어가는 선택의 불길한 미래이다.
긍정적 미래의 확률없이 우리편의 기우적 믿음으로 선택하는 불확실성이다.
쓸만한 넘 검증에서 우리편의 말뚝에 눈돌아가 맥없이 뽑아놓고 후회하는 역사의 무지이다.
오로지 이분법적 정치에 매몰되어 우리편의 편협함으로 일관하는 진영논리의 구태이다.
좌우의 극단적 경계를 자극하여 정치생명을 유지하려는 무지한 불한당의 작태에서 중용의 의지가 필요하다.
평가와 선택에서 울타리의 극단으로 설레발이 치는 막장의 신분에 주의하라는 것이다.
정치지형에서 중용의 실용주의를 대변하는 선택의 의지가 없다면 정치개혁의 명분을 기대할수 없다.
정치와 국정은 변화하는 시대적 문화의 바탕에서 국민의 공감으로 평가된다.
좌우논리의 편협한 시각으로 21세기의 통신사회를 평가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생태적 질서를 이해하는 민주주의 절차에서 선택은 합리적 이어야 한다.
좌우논리의 승패적 시각은 긍정보다 적대적 선입견의 파괴적 선택이다.
이러한 시각을 개선하려는 것이 중용의 선택지이며 정치지형 확대이다.
4.3의 기억에서 우파적 행위의 참담한 기억이 있다.
역사의 이해와 사건의 분별력에서 역설적으로 분단된 역사의 좌파적 의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어투의 정치적 표현에서 견제를 위한 평가와 심판의 단어적 의미는 다르다.
심판의 어투에서 저항적 의식의 극단적 선동을 엿볼수 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수 있다는 것인지 좌우논리의 관성에서 사소할수 없는 이미지의 인식이 있다.
양극화의 승패적 경계를 의식하는 표현이다.
정치적 행위와 어투에서 전체적 공감의 표현이 안정적 이며 중용이다.
통신사회의 지적변화와 글로벌 문화의 공유에서 우파나 좌파의 행위적 표현은 공감에서 쉽지안은 시대이다.
지식과 문화의 필연적 진화는 사물의 이해를 확장한다.
이해와 공유의 확장은 파괴적 극단성을 완화한다.
내것에서 이해와 공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문화적 질서의 요구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주류가 된다.
선택에서 양극화는 미래의 예지력이 희박한 좌우논리와 이분법적 변별력의 함정이 있다.
체제의 다양성과 상관없이 낮바닦 선동으로 우리편의 획일적 경계를 요구한다.
나팔수 또는 선동꾼들의 행태에서 일이나 잘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양극화의 극단성은 상대의 약점찾아 악의 시험으로 민심을 저울질 하는 정치이다.
좌우의 경계에 구속된 승패정치는 다양성과 긍정의 미래에서 배반적이다.
극단성에 치우친 중용과 실용주의의 결여이다.
분단의 역사가 정신을 지배한 시간의 결과이다.
인격과 능력을 검증하는 선택에서 관성적 좌우논리를 대입하는 것은 막말이다.
포장으로 일관하다 권세로 덥어버리면 정체의 진실은 닭 쫓던 멍멍이 머시기 된다.
포플리즘의 포장은 권력의 집착과 씨스템 장악에서 이기고 보자는 정치공학의 함정이다.
국가의 생산성과 정치의 안정에서 의견수렴 절차의 비합리성 개선이 필요하다.
정치개혁과 권력분산의 요구이다.
시대적 요구에서 제삼의 선택지는 새로운 가치를 주장하는 민심을 대변하는 것이다.
21세기 통신사회의 새로운 가치는 공유와 공존이다
의식의 변화는 일상의 데테일에 있다.
삶의 디테일에서 지식과 문화의 현상으로 진화하고 역사가 시작된다.
이것이 주류적 사고의 바탕이며 정치가 살펴야 하는 민심이다.
정치는 주장에서 선택이다.
주장과 선택의 절차적 합리성에서 중용의 의지를 확인할수 없다면 어쩔수 없는 것이다.
정권과 국정평가에서 의견수렴의 다수를 점하는 중용을 대변할수 있는 새로운 정치지형의 선택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절차에서 다수의 존재와 선택은 반드시 필요하다.
의견수렴의 합리적 결론에서 민주적 절차를 충족하는 다수의 대변을 위한 선택지이다.
흙백논리의 강요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구성의 합리성에서 표현의 자유를 왜곡하고 있다.
변화하는 문화의 다양한 의식을 고착화된 좌우논리로 지배하려는 무지이다.
싫으면 언덕론을 주장하신 중용의 집 비우시고 방빼 새집 짓든지 거취에서 천기에 따라야 할것이다.
어제밤 꿈에 염라대왕이 나타나 시퍼러게 날선 팔월도 한자루를 부탁하였다.
연말연시 일손 바쁘다고 본인의 영역에서 나뿐 한량들 조치를 당부하였다.
지옥의 비대위로 선임하고 전권을 위임하였다.
하늘의 계시는 정치판 왔다리 갔다리 하고 다르다.
어스름한 밤 희미한 달빛이 팔월도의 날을 스치며 지옥을 암시한다.
고즈넉한 산사의 하얀겨울 이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세상사 진실이 김서린 문풍지 사이 바람결에 섞여있다.
문득 핏빛계절의 한이 찾아온다.
어스름 호수에 담긴 달빛에 날세우고 하나둘 모여 불가역적 사상으로 생의 극한에 있다.
처절하였던 불나방의 의지는 죽은자의 정신으로 역사와 동행한다.
구천은 처절하였던 기억으로 한올 바람되어 사지의 외로운 관에 있다.
바람결에서 천군만마의 진군소리가 들려온다.
안타까운 것은 사기꾼 보다 어리석은 도사의 행색에 대책없는 동행자의 안주이다.
저승에서 이승은 증거적 관점에서 멀다.
육신의 정체에서 또는 인연에서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이다.
불가역적 시간의 공유에서 정신의 정도는 있는 것이다.
지옥을 열것인지 말것인지는 산자의 기억에서 죽은자와 동행이다.
고추가루의 기억은 있어야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수 있다는 것이다.
계묘년 한해가 진창이었던 수사정국에서 겸찰의 진실과 쌍특검이 기대된다.
울타리에 올인하는 끄뎅이의 불성사나운 모습에서 양극화의 끝장을 학수고대 하고 있다.
양극화의 승패적 악다구니가 민심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획되지 안은 자연스런 어부지리는 새로운 정치의 천기이다.
정치에서 하늘의 기회는 국운의 잉태이다.
천기는 인간의 사사로움이 개입할수 없다.
여타의 관심에서 고추가루의 방해는 물론이고 시류의 잡동사니는 죄이다.
악의 시험과 관계없는 중용과 실용주의는 양동이와 빗자루로 관성적 좌우논리의 불편함을 치워야 한다
이참에 극단의 승패에 집착하는 정치의 잡동사니 치우고 중용의 주류를 완성해야 한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저항의 시대를 망각한 절대권력의 무지스런 집착이다.
2023.12.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