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야만적 사악함. 본문
145 야만적 사악함.
평화를 파괴한 처참한 흔적으로 생명과 문화와 정치를 위협한다.
이것이 21세기의 선이다.
힘이 선이다.
무력의 지배이다.
21세기에 나를 지키기 위한 파괴적 무기는 필요하다.
무력적 시위없이 평화의 파괴를 방어할수 없다.
힘의 논리에서 평화는 우리편의 한계이다.
내안에서 평화이다.
서쪽과 태평양은 선이고 동쪽과 대륙은 악이라는 편견은 야만적이다.
이겨야 생존할수 있다는 냉전의 역사이다.
삶과 일상에서 악과 선이 아니라 이분법적 논리의 승패가 우선한다.
우리편의 선입견이 우선하는 지배와 예속의 세계사이다.
공존은 선의 전파가 아니라 파괴적 무기의 균형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기는 넘이 장땡이다.
세상의 주류는 선의 평화가 아니라 지배를 위한 파괴적 행위의 준비이다.
진영으로 울타리 치고 민생의 평화를 파괴해야 비로소 내것으로 자유의 의지를 표현한다.
가진것 없이 평화로우면 안되는 냉전적 사고의 국제질서이다.
인간은 배부르면 딴생각 한다.
존재가 심심하여 악을 시험한다.
만물의 영장 인류는 약육강식의 미개한 시간에 있다.
민족으로 울타리 치고 죽이고 억압하는 물리적 지배에서 존재의 희열을 느낀다.
선지자와 성지는 허울이다.
대체로 우리편이 선이고 넘에편이 악이다.
이겨서 지배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공존은 없다.
폭탄으로 죽이나 기습해서 죽이나 파괴적 시류의 죄값은 같다.
선악의 구별이 쉽다.
수단과 방법에서 사랑과 자비없이 처참하게 파괴하여 지배하는 자가 선이다.
선과 악은 지배와 피지배의 경계이다.
평화에 안주하여 파괴적 폭력에 대응하지 못한 처참한 주검이 악이다.
인류의 역사는 동물적 본성의 문화이다.
사람 될려며는 아직 멀었다.
선지자의 가르침 사랑과 자비는 지배의 가면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가르침과 철학은 부족한 선의 역설이다.
평화의 파괴로 선의 실체를 주장하는 세상은 사기이다.
선의 문화는 가면이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내것과 우리편 이라는 상대적 경계가 있다.
승패의 이분법적 시류에서 원수를 사랑하면 진다.
다버리면 모두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버리고 없어 보이면 지배에 눌려 죽는다.
존재에서 파괴적 수단만이 나를 지킬수 있다.
문수보살의 예리한 칼날은 악의 방종에서 선을 지키는 수단이다.
인류는 사과를 선택하였다.
내가 아니라 타의이다.
물질문명에서 생존은 사과의 소유권이다.
우찌되었든 뺏앗고 죽일수 있는 자가 대빵이다.
21세기 단테의 지옥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교훈이다.
하루에 수백명이 거대한 울타리에 갇혀 학살되고 있다.
요단강이 가까워 죽은자의 여행이 쉬운 것이다.
선으로 선택되었다는 존재의 악행이다.
원수를 사랑해서는 안되는 수천년 방랑의 집착이다.
사랑은 넘에편 뭉게고 우리끼리 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연은 관계의 비극적 시류이다.
사랑의 순수가 아니라 이웃의 대립적 비극이다.
사랑보다 파괴적 시류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을 견주는 지배와 예속의 생명적 갈등이다.
죽여야지 산다.
넘에것 빼앗고 지배해야 비로소 성취로 배부르다.
악에 비교하여 선의 가르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것으로 울타리 치고 넘에것 간보는 악의 세상이다.
창조자의 선택을 침바르며 내땅 늬땅하다 여차하면 모두가 내땅이라는 태세이다.
말씀의 가르침과 고상하고 유익한 철학에서 선의 부족함은 절절하다.
부족하여 선처를 기대하고 시험에 들어 떠들에 데는 것이다.
사람은 배부르면 딴생각하고 사자는 배부르면 잔다.
단순하고 무지해야 평화롭다.
지적욕구가 부족하여 천지개벽과 상전벽해 등 땅꺼죽 뒤집어지는 파괴를 갈망하는 것이다.
계산기를 발전시킨 전자공학이 문제이다.
예초 하늘과 땅의 계산으로 충분하였다.
선지자와 구원자의 자손들이 벌이는 족보의 영광이다.
창조하실때 하나만 하시지 이것저것 시험하여 말성이다.
21세기 문화는 성지와 멀리할수록 평화롭다.
가르침의 비극이다.
하마스의 비극은 역사와 문화의 지배에 은폐된 극단적 집단주의의 증오이다.
민족적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서 잔인한 자결권의 자의적 행사이다.
울타리의 민생이 책임져야 하는 폭력적 동의의 한계가 있다.
무었이 민족의 역사와 현실을 대변하는지 불확실한 주체의 행위이다.
민족적 소외에서 위정자 또는 극단주의가 벌이는 저항의 방법과 책임이다.
무차별 공습은 비극적 침공의 주체와 상관없는 민생과 평화의 파괴이다.
하마스 침공과 민간인 학살의 책임에서 팔레스타인의 처절함은 민족적 학대이다.
은폐된 위정자의 판단을 백성의 삶과 일상의 비극으로 추궁하는 범죄이다.
역사의 책임을 민족의 연속성에 전가하는 연좌제이다.
민족적 동질성의 원죄이다.
증오의 불가항력적 책임이다.
느그늘 편이니까 민족이니까 비극적 참상의 이유가 없다.
70년 상전벽해의 소외에서 갈곳없이 죽어야 하는 증오이다.
교과서 한줄 공유했다고 극단적 폭력의 대리희생이다.
철조망에 가로막혀 도망치고 저항할수 없는 인륜의 처절함이다.
선지자의 땅에서 우리편의 우월적 집념이 확실하다.
국제질서의 등이 든든한 기세의 벼슬이다.
역사는 업치락 뒷치락 앞뒤를 다투며 진화한다.
나중된자 먼저되고 먼저된자 나중된다고 하였다.
세계사에서 과거의 원한이라면 애매한 민족의 피해이다.
열강들의 세계지배에 속절없이 뺏앗긴 땅의 원죄이다.
세대와 시간의 유동성을 망각하고 있다.
성지의 울타리에 갇힌 21세기 처절한 식민의식이다.
어마어마한 국제질서의 허세에서 만만한 것이 홍어 머시기이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역사를 부정할수 없다.
악행을 저지른 극단주의의 목적이 민족인지 역사의 증오인지 망망대해의 외로운 돗단배이다.
참상의 후기에서 국제질서에 합류하는 세계인의 정치가 필요하다.
통신사회의 글로벌 문화를 활용할수 있다.
의지의 책임에서 국제질서의 참여는 정당성이다.
팔레스티나의 공존은 이웃과 관계의 필연이다.
2023.10.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