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새만금. 본문
126. 새만금.
새만금 참사는 고의이고 방치라는 아랫역 아지랭이는 나의 선영이 근처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과 자칭 상위 크라스의 국정운영에서 상식의 불편함이다.
8년전 일본 잼버리의 경험이 있었다.
간척지 였고 열사병으로 삼천여명이 고생하였다.
사례에서 결과를 알만한 사람들 이다.
능력의 차별에서 자랑하시는 수읽기의 깊이이다.
세계의 청소년 수만명을 초청하고 난민으로 전락시킨 희대의 오류이다.
내자식이 아니라고 허허벌판 8월의 뙤약볕에 방치되었다.
신체의 상식에서 환경과 인륜을 망각한 무지이다.
체험학습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행정과 전문성이다.
야외에서 숙식하는 생태적 학습에서 먹고,싸고,자는 문제에 방어하기 어려운 벌레의 공격도 있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예지할수 있는 환경이었다.
국정운영의 책임은 충분한 지식과 전문성의 구성이다.
관련 데이터의 확보는 국가의 역량이다.
진행에서 점검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국가의 위상이 걸린 국제행사 이다.
각국의 미래를 이어가야 하는 청소년 대회이다.
아이들을 낮설은 외국에 보낸 부모의 걱정이 있다.
위탁된 국가의 책임있는 보호가 필요한 국제행사이다.
새만금 잼버리 대회는 모든것이 부족하고 불성실 하였다.
국가의 존재가 부정될수 있는 상황이다.
준비가 부족했다는 말씀으로 이유가 될수없다.
문제의 실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먹는것의 부실과 싸는것의 책임은 사만 삼천명이 참가하는 대회의 기본문제이다.
먹는것의 만족은 국제 잼버리에 참여하는 스카웃트의 문화적 수준이 간과되었다.
주최측의 경제와 문화에 비례하는 충촉의 배려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와 문화적 위상이 적지안다.
싸는것의 배려는 캠핑에서 가장 우선되는 문화적 인격의 회피적 학습이다.
물질순환에서 싸는것의 발효는 더러워 피하는 문화적 학습이다.
행정이 잼버리 대회에서 문화적 배려없이 원시적 생리의 체험을 요구한 것이다.
배설에서 원초적 현상의 체험을 요구한 자상한 배려이다.
문명의 현실은 태초와 생태계의 원초를 잊은지 오래이다.
밭에 떵 뿌리던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시골 시찰하다 밭에 배설물 뿌리는 농부를 보았다.
먹는것에 더러운 배설물 뿌린다고 잡아 가두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시대에는 푸세식 화장실 오물로 배추,무우농사 지었다.
김치는 떵(배설물)의 물질적 순환이 내제된 문화이었다.
말 나온김에 한마디 더하면 이분의 정서는 건국보다 인륜적 배신감이 크다.
제주 4.3사태와 여순사건의 양민학살은 대한민국 역사의 비극이다.
토지개혁은 지주 보상제로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유마무야 되어 계획된 지주보상이 이루어지지 안았다고 한다.
계획적 토지개혁이 아니라 전쟁의 우연으로 보상없이 토지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능력보다 우연이다.
떵으로 돌아와 문명은 더러운 것을 감추는 깨끗함의 회피적 문화가 있다.
뱃속의 것이라도 중력의 법칙에서 나오는 것은 자원에서 물질적 합류의 불경이 있다.
위로 나오는 것은 불경의 정도가 심하다.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들어간 것은 나올수 없다는 생체적 원리의 불경이다.
물질의 이질감은 인류가 성장시킨 유익과 무익의 문명이다.
생리적 순환에서 음식의 물리적 변화는 떵(배설물)이다.
분자와 원소에서 순수한 물질의 합의체이다.
냄세의 진실은 식생과 배설의 학습에서 거부감이다.
아기는 떵이 더럽지 안다.
학습이 전무한 인식의 부제이다.
스카웃트의 자연체험은 생태계 순환의 탐구이다.
더러운 것은 문명이 물질과 자연의 본질을 왜곡한 학습의 결과이다.
기왕지사 싸질러 대기로 작정했으면 남는것이 없어야 개운하다.
떵개와 떵돼지는 한반도 문화이다.
떵개의 진실은 아이 엉덩이쪽 디테일 문제라서 삼가하겠다.
제주 떵돼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돼지고기이다.
돼지의 식생과 연관된 배설물의 생태적 물질 순환이다.
배설물의 재사용 이다.
더러운 것의 물질적 순수는 문화적 학습의 회피적 차별이다.
문명과 문화는 학습의 연속성이다.
싸는것의 학습은 격리되어야 하는 더러운 것이다.
탄생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학습의 분별력이다.
학습의 분별력에서 귀떼기 피돌면 탄생과 아기의 물질순수를 기대할수 없다.
청소년 스카웃트에게 싸는것의 발효는 이미 문화적 회피의 학습이 완성된 것이다.
새만금 잼버리를 관리하는 행정당국의 배설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치간(화장실)은 깨끗하고 멀어야 한다는 상식적 학습이다.
예전에 손님이 온다고 하면 치간을 청소하였다.
손님초대에서 먹는것 씻는것의 인내는 그런데로 한두번의 여유가 있다.
싸는것은 한번으로 평가가 끝난다는 절벽의 상황설정이 부족했다.
조직위의 생체적 문화 무지이다.
야외숙박에서 제일 문제되는 것이 싸는것의 처리이다.
먹는것은 지천으로 널려있어야 좋은 것이고 싸는것은 한곳의 명시가 좋다.
회피적 문화의 지정학적 격리에서 논리의 성립이다.
수세식 화장실(변기)은 인류문명에서 몇 안되는 발명품 이라고 한다.
싸는 이질적 문화의 집요한 발현이다.
새만금의 파행은 싸는 문제의 문화적 소홀이다.
일 터지면 오리발에 익숙한 조직위의 무지이다.
대한민국 화장실 문화는 세계일류이다.
대한민국 휴계소 화장실 체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조금 보테면 화장실 일박도 가능하다
새만금 조직위의 무지로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가 잘못 전달된 것이다.
외국 관광객이 감탄하는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를 인지하고 전달하지 못한 행정의 잘못이다.
국제대회를 유치했으면 무었을 전달할 것이지 정리하는 것이 순서이다.
캠핑에서 절실한 싸는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의 전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의 진행에서 인식의 발전이 필요하다.
새만금의 파행에서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국가의 정체성과 행사의 연속성은 파괴되었다.
정권의 파행적 순환에서 늬가 한것 내가하기 불편한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철지난 권력의 치적과 흔적을 용인할수 없다는 좌우논리의 선입견이다.
대결구도 정치판의 학습이다.
새만금의 실효성은 기회를 상실하였다.
과정에서 거드름과 팟고물에 눈돌아 갔는지 규범적 파행의 평형으로 살펴봐야 한다.
근자에 있었던 압사와 철근과 침수의 파행적 평형이다.
사건의 자기 방어적 순발력은 청년들 보다리 싸기전에 책임전가에 바쁘다.
8월 더위에 전북과 부안군의 문지방에 찬바람이 서늘하다.
대한민국의 흉흉한 사건에서 고관들의 책임이 사라졌다.
백성이 죽어나가고 국제행사가 엎어지고 뒤집어져도 책임자의 밥그릇은 무사하다.
아랫사람 차별하는 사대부의 문지방 염려는 규범의 불사조 이다.
반복되는 비극적 사고에도 책임지는 인격이 없다.
밥그릇 사수를 우선하는 국정책임의 무지한 분별력이다.
노상 엎어지고 자빠져 존재의 증거가 없는데도 있다고 착각하는 환상의 몰이배이다.
증거를 우선하는 지식과 문화의 현실이 아니라 권세로 치장하는 위선이다.
조상과 역사와 하늘 무서운줄 모른다.
만만한 것이 말단이고 실무진 이다.
인연과 문지방 책임은 위 아래가 같은 것이다.
힘없는 인연과 문지방의 생존적 저항이 필요하다
21세기의 지식과 문화의 줄거리가 훼손되고 있다.
제잘난 존재의 실체에서 나의 주체는 없고 이웃집 굴뚝만 바라본다.
배고프면 발품팔아 밥 해먹어야 사람이다.
오로지 내것이 우선하는 무지막지한 문화이다.
한반도의 정체성은 홍익인간정신 이다.
식민사관의 역사를 방치하고 민족상잔의 문제를 우선하는 역사의 분별력이 있다.
민족과 이웃에서 역사의 선후는 있다.
세계사에 마지막 남은 민족분단의 비극은 국정의 순위에 없다.
넘에집 오염수 염려가 우선이다.
우리집 하수구 라면가락 걸린줄 모른다.
새만금 샤워장에는 머리카락도 걸렸다고 한다.
한반도 역사를 부정하는 민족관 이다.
민족이란 단어가 불편한 이중성이다.
이념적 극단성이다.
외세에 의지하는 주체성 없는 지식이다.
오염수 방류에 현해탄 역사의 성찰은 없다.
내집 물건보다 넘에것에 정신팔린 철없는 사대부 이다.
의식이 문란하여 하시라도 문지방 넘어 이웃집 기웃거리는 중심없는 씨앗의 정서이다
역사의 고결함이 없다.
정치가 생존의 모든것을 지배할수 없다.
민주화의 역사는 지워지지 안는다.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
저항에서 피해자의 소외는 배려되어야 한다.
없는넘이 없는넘에게 칼쓰면 맥없는 굿판된다.
왠만하면 아래에 동참하는 것이 옭다.
또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 될것 같다.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선택의 절대를 우선하는 독선이다.
새만금 잼버리 파행 과정에서 지역을 배려하는 균형적 선험은 없었다.
국제행사 유치에서 국격의 책임의식이 없다.
정치판의 시국은 법치의 케비넷 통치가 이어지고 있다.
정치와 민생이 법치에 예속되고 있다.
코로나를 극복한 문화적 질서는 사라지고 내것의 차별과 고집불통의 울타리만 존재한다.
문화 유토피아는 물건너 갔다.
촉촉한 문화의 질감이 내것과 우리편의 이기주의로 마르고 있다.
귄력의 방향에 줄서는 주체성 상실은 넘에집 가훈에 기대어 사는 중심없는 지식이다.
체제의 구성과 존재에서 능력의 환상은 멍멍이 밥그릇 되었다.
오로지 사대부에 줄서야 하는 벼슬이다.
공적 분별력을 상실한 제잘난 판떼기이다.
기회의 불만은 치부의 차별에 열 받는다.
속것의 분출은 육신의 치장과 행락의 경제적 조건이다.
없으면 쳐박혀 살으라는 기회의 절벽이다.
길거리 묻지마 칼부림에 장갑차와 총이 등장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라는 우려가 있다.
군사정권의 삼청교육대와 부산형제원 사건은 공포정치의 피해이다.
신경의 말초에서 민주화 시대가 기억에 남아있다.
민생의 저항은 문화적 차별이다.
총칼로 통제할수 없다.
분배의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민의의 희망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물질의 성취로 부풀려 놓은 삶의 보따리는 만족의 한계가 없다.
그나마 지성과 인내의 체험도 어른들의 무지로 귀곡산장이 되었다.
새만금에 화장실 귀신의 곡이 귀트라미 소리에 섞여 있을 것이다.
새만금의 파행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으로 이해할수 없는 사건이다.
우리편 이외의 존재를 부정하는 차별적 시각의 우려이다.
나로 비롯되어야 하는 천상의 원한이 스물스물 하다.
나의 환상으로 타의를 지배하려는 지옥의 냄세이다.
2023.8.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