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공존의 시대 5. 본문
124 공존의 시대 5.
문명의 패권적 지배와 경쟁적 욕망은 생태계 파괴를 가속한다.
시장경제의 대세에서 글로벌 지배력의 무한경쟁은 국경의 위상과 예속의 염려이다.
민족사관과 문화의 존립이다.
생존을 위한 생산성 경쟁은 생태계의 균형을 의식하고 보호할수 없다.
시장경제와 국제질서에서 생산성 경쟁의 생태계 파괴는 통제불능이다.
지식과 문화의 지성으로 방어할수 없는 지배력 경쟁의 한계이다.
대자연의 질서는 문명의 파괴에서 스스로 회복의 단계에 이를 것이다.
회복에서 자연의 생명체 지배는 문명의 한계를 요구한다.
대자연의 질서에서 인류는 문명으로 파괴된 생태적 회복의 저항을 통제할수 없다.
회복의 진통에서 문명으로 대응할수 없는 불가항력적 자연변화는 필연이다.
생태계 파괴는 생명체의 재앙적 위기이다.
대자연의 질서는 문명에 개입하지 안는다.
생태적 균형은 생명이다.
자연파괴는 인간의 오만이 부른 문명적 절재의 한계이다.
생태계의 균형에서 문명의 독선적 점유이다.
만물의 영장 인류의 생태계 지배이다.
생태계 위기는 물질문명의 증거적 욕구와 시장경제의 생산성 경쟁이다.
공존이 아니라 내것을 우선하는 탐욕과 경쟁의 문화이다.
삶에서 환상에 집착하는 사유화의 분별력 없는 치부가 문제이다.
배부른 특별한 욕구불만이 육신의 치장과 정신의 허무에서 자원을 폭식한다.
누구라도 물질과 자본시류의 인습은 감각적 충족의 차별적 환상에 있다.
정치의 대의에서 좌우논리의 선입견이 자연과 생명의 공존을 방해한다.
곳간의 흥망성쇄가 인습이 요구하는 차별적 신분이다.
선의 주체에서 치부에 집착하는 물질시류는 사물의 이해와 가치의 혼돈이다.
생태적 순리에서 물질적 성취의 승패적 선입견은 탐욕적 욕망을 우선한다.
보편성으로 만족할수 없는 특별한 치장의 동의이다.
울타리의 거취가 우선하는 태초의 공존과 공유의 상실이다.
물질시류의 욕구에서 표를 의식하는 정치가 생태계를 보호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생태계 파괴에서 문명의 문제는 공존의 균형을 의식하지 못하는 지배의 집착이다.
시장경제의 성취적 경쟁에서 자본과 사유화의 차별적 욕구이다.
물질문명은 정신의 소홀에서 육신을 우선하는 특별함의 환상적 욕구이다.
자원의 파괴에서 공유경제의 주장과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데이터의 실용적 진실이다.
수요와 공급에서 최적의 자원활용이다.
기우적 가상의 가치에서 실용적 문화의 방향성 이다.
시류와 인습은 형이상학적 문화의 감각적 탐욕이다
존재에서 증거의 욕구이다.
정신의 만족에서 무형과 유형의 문화적 선입견은 물질의 경쟁적 차별이다.
형이상학적 신분의 증거는 곳간의 감각과 갓의 형상이다.
형체적 문화의 시대이다.
보이지 안는 것의 부정이다.
증거를 위한 경쟁에서 정신과 물질의 균형이 파괴되었다.
수단과 방법에서 챙기는 넘이 신분과 정신을 지배한다.
분배와 인륜의 자비를 두엄자리에 버린 자본논리이다.
귄력과 치부의 가속도는 제도와 규범의 선점에서 인륜을 상실하였다.
제도와 규범의 약탈이다.
대자연의 질서를 망각한 생산성의 불평등이다.
낭비되는 자원의 불균형은 생태적 저항의 발현이다.
생태적 질서에서 문명은 인류의 선택이다.
말씀이 선택이지 생태계 진화의 필연에서 유전적 시간의 순리이다.
문명의 파괴적 현실에서 선택의 필연이라고 단정할수 없다.
형이상학의 증거적 욕구는 지식의 선택이다.
우주에서 인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신과 하늘은 형체가 없다.
빛의 세계에서 인간의 증거적 욕구가 형태적 문화를 선택한 것이다.
돌멩이가 정신의 허구보다 우선한다는 물질문명의 사고이다.
정신과 물질의 균형에서 물질의 시대이다.
형태적 삶은 욕구는 끝없는 욕망의 탐욕이다.
경쟁의 만족은 체워도 충족하지 못하는 또다른 증거의 욕구이다.
만족할수 없는 정신의 허무에서 내것의 특별함에 집착하는 환상이다.
특별함을 요구하는 경쟁의 차별과 지배의 문화가 생태계를 파괴한다.
생태계의 물질공유에서 공존의 신뢰와 믿음이 아니다.
물질시류는 내것으로 생존하는 경쟁적 경계의 차별적 설정이다.
내것과 생존의 등식이다.
이웃과 공존은 없다.
생태적 공존에서 경쟁의 차별과 지배적 탐욕은 문명으로 해결할수 없는 재앙의 잉태이다.
내것을 위한 차별과 지배이다.
물질시류의 우월적 지배에서 생존과 선의 문화가 예속의 위기에 있다.
끝없는 경쟁과 치부의 욕망이다.
잘못된 문명과 문화이다.
선지자는 인간의 운명적 선택에 개입하지 안는다.
밤이면 도시를 뒤덥은 십자가의 휘황에도 가르침은 사라졌다.
불자의 일상에서 극락에 이르는 자비의 보시는 귀하다.
선지자의 존재와 가르침의 망각은 지옥의 암시이다.
인류는 이미 지옥의 문턱에 있다.
생태적 악순환의 가속이다.
문명으로 대자연의 질서에 회귀하는 생태적 자정능력을 돌이킬수 없다.
문명파괴의 주장을 염려해야 한다.
인류는 파괴적 수단을 준비하고 있다.
홍수에 강이 범람할 지경이면 주체를 보호하기 위해 강뚝을 터트린다.
최소한의 문명지연이 필요할지 모른다.
주체를 위한 파괴이다.
죽음의 준비는 기억과 환상과 감성의 상실이다.
문명의 생태적 한계에서 지옥에 근접한 환경이 선택의 절대성을 해소한다.
파괴력의 설정에서 이판사판의 상실이다.
생태계의 절박함에서 가난하여 굶주리는 어린이가 수억이다.
음식의 삼분의 일이 버려진다.
인륜의 구제에서 축복은 강아지 보다 사람이 우선한다.
남극에 비가온다.
초록이 무성하다.
사라지는 빙하는 해수면 상승이다.
남태평양의 섬들이 바다에 잠기고 있다.
한랭전선의 불규칙한 이동으로 기후변화의 재앙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가믐과 홍수와 태풍의 새로운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동토에 숲이 들어서고 있다.
숲의 보온으로 메탄이 증발한다.
온난화의 주범 온실효과의 가속이다.
빙하와 동토에 갇혀있던 수만년전 미생물이 번식한다.
바이러스 위기는 빙하에 내제된 진화의 시차로 발현한다.
환경파괴에 의한 생태계의 불균형적 확장이다.
지옥의 문턱에서 내것으로 눈돌아간 자본은 무었하나 온전한것 없이 곡괭이 들이데고 있다.
생태계 파괴의 가속이다.
온난화의 과열은 지각 활성화를 염려해야 한다.
튀르키예 지진의 피해는 부실공사 이다.
건물의 안정에서 빼 잡수는 철근의 무지가 아슬아슬 하다.
공기업의 신뢰에서 치부의 정도가 이판사판이다.
탐욕으로 공동체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규범을 상실한 위험한 치부의 조급함이다.
오지랖 지랄도 유분수 이다.
천당행 기차표 다시 팔아야 한다.
문화적 진실 학습의 연속성에서 교육환경의 갑질도 문제이다.
혈육과 가문의 영광에 집착하는 내것의 우월적 망종이다.
타의를 침해하는 심판의 암시가 부족하다.
이율배반적 논리의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
교육인격의 존중에서 가치의 분별력을 상실하는 학습의 재앙이다.
세대의 특징에서 현상적 학습환경과 교육의 역사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부두막 문화는 아니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정치판에서 민주주의의 절차와 인격의 무지가 있다.
유권자의 권리에서 낫살을 차별하는 개별적 가치의 설정은 기본권의 차별이다.
세대의 진화에서 표의 비율적 가치를 따지는 일인 일표제의 무지막지 한 혁신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시대의 돌연변이적 암시이다.
지식과 문화는 세대의 연속성으로 이어진다.
연륜은 세월의 희노애락이 내제되어 있다.
젊음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생의 분별력이 있다.
머리에 피 돌아도 경험에 의한 지식과 학문은 생전의 문제이다.
육신의 쇠락은 사회와 경제와 문화의 기여에서 생태적 질서로 존중되어야 한다.
생명의 가치는 같은 것이다.
무지막지한 분별력의 실종은 특별한 환상의 자극이다.
명품과 진미에 줄서는 이유는 소유의 직관과 경험적 환상이다.
시류로 포장된 인습의 내면이다.
생존은 실용적 가치의 분별력이다.
이질적 행위를 살펴보며는 분별력을 상실한 환상적 몰입의 오류가 있다.
늬것의 자유는 인정하나 공유된 질서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지식과 문화의 진화에서 재림의 시간적 예언은 새로운 선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의식의 공유이다.
개별적 선택의 차별은 민주주의와 생명의 무지이다.
진화의 증거에서 존재하는 것은 변한다.
성의 지배는 생명의 가치와 인륜을 망각한 문화적 차별이다.
종교적 가르침의 시대적 이해가 필요하다.
생태계 진화에서 이성의 분별력은 유전적 연속성의 조건이다.
중생을 구제하는 종교의 실용성은 만민의 평등이다.
생명에서 인륜의 평등은 개별적 인격의 존중이다.
종교와 규범적 질서는 생명과 인륜을 우선하는 가치이다.
문화의 현실은 비극과 재앙에서 신의 존재를 성립시킨다.
예수와 마호메트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구원자이다.
부처 역시 나로인한 것이 아니며 존재를 이해하고 중생을 구원하였다.
삶의 이해에서 보이지 안는 것의 믿음이 필요하다.
형이상학과 변증론은 보이는 빛의 세계에서 증거의 의심이다.
믿음의 부족은 미지의 발현으로 증거하고 있다.
끝임없이 발현하는 미지는 문명의 미래이다.
탄생의 신비는 새로운 생명의 발현이다.
정신은 보이지 안는 존재의 믿음이다.
우주의 질량에서 27% 정도가 암흑물질 이라고 한다.
과학이 증거하는 우주의 균형적 실체이다.
대자연의 질서는 보이지 안는 생태계의 균형이다
신의 영역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안는것의 균형적 순리이다.
생존에서 선은 생명의 균형이다.
생명과 인륜에서 선지자(구원자)의 가르침은 선의 질서를 이루는 가치이다.
상상의 한계에서 형태적 증거의 요구는 보이지 안는 것의 부정이다.
보이지 안는 철근은 증거의 무지이다.
인류의 선택에서 문명은 생태계의 유전적 질서이다.
생태계의 유전적 질서에서 앞선 문명은 구원자의 존재가 증거이다.
무한한 미지에서 문명은 선택과 진화의 과정이다.
무형과 유형의 지식진화에서 물질문명을 필연이라고 할수없다.
보이지 안는 존재를 부정하는 믿음의 혼란이 형태적 문화를 증거한 것이다.
사람과 미지의 관계에서 우물쭈물 하는 문화이다.
지구의 문명은 우주에서 태양계의 우물안 이다.
생태계의 위기는 상상의 한계와 지식의 오만이다.
지배를 위한 자본시류의 생산성 경쟁은 생태계의 파괴를 염려해야 한다.
정치 또는 자본으로 대자연의 자정적 질서에 대응할수 없다.
생태적 위기에서 문명의 절재와 평화의 안주가 아쉽다.
2023.8.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