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교권문제. 본문
122. 교권문제.
절대평가의 교육관이 학생과 선생을 상대평가 한다.
잘못된 논리의 주장이다.
교육에서 학생과 선생은 수용과 전달의 분별력이 있다.
관계에서 절대평가의 영역이다.
상대평가에서 절대값의 균형은 언제든지 파괴된다.
관계에서 패자와 승자 또는 차별적 계층의 상대적 우월감이나 소외감의 불안적 체증이다.
시장적 관계에서 강자의 갑질과 약자의 저항적 분노의 경계이다.
독립적 교육환경의 중용에서 교권에 시장적 시류가 방임되고 있다.
미완성 인격의 위임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요구하며 악마화 한다.
학교는 공적개념의 공동체이다.
자본논리의 차별적 사교육 총애에도 불구하고 만민의 평등을 가르치는 공교육의 절대성은 중요하다.
교권침해는 내것에 집착하여 공적개념을 이탈하는 치졸한 갑질의 비문명적 원시이다.
지성의 앞뒤를 망각하고 혼자서 북치고 장고치는 편협한 오지랖의 굿판이다.
소유와 자유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망각하는 우월감의 외딴섬 이다.
스스로 갇혀사는 창살없는 정신의 감옥이다.
경쟁의 상대적 논리에서 협력으로 공생하는 이웃의 관계가 편협해 지는 불편한 현상이다.
이웃과 공동체의 공적개념을 의식하지 못하는 자유의 이탈이다.
교육자는 인격체이다.
규범의 원칙에서 긍정과 희생은 강요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권이 강자와 약자 또는 차별적 계층의 선입견에 노출되는 문제이다.
공교육의 역할이 사교육의 시장적 경쟁에서 소홀한 이유이다.
공동체의 구성에서 교육의 절대평가가 왜곡되고 있는 잘못된 흐름이다.
경쟁과 소유와 계층의 차별에서 사물과 인성의 분별력 문제이다.
지식과 문화의 전달에서 학습을 통한 역사와 인륜의 진화를 망각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진화는 유전적 절대성이 아니라 학습의 연속성이다.
학교와 가르침의 중요함이 소홀하다.
증거에서 결과를 우선하는 형태적 삶의 정신적 결함이다.
급한 성상으로 결과를 우선하여 원인과 과정에 소홀하다.
이런분들 상상은 붙박이 이다.
결과에서 시간의 충족은 잉태의 고민과 과정의 희노애락이다.
과정의 희노애락 없는 결과는 만족의 환상에서 허무할수 있다.
과정의 만족없는 결과는 또다른 욕구의 시작이 된다.
행복의 조건에서 보편성 즉 절대평가의 영역이 협소해지는 것이다.
매사 결과로 행복할수 없다.
차별없는 절대평가의 확장으로 이웃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며는 비스무리에 안도하는 만족이 있다.
경쟁의 상대평가는 만상의 꼭대기에서 특별해야 만족한다.
상대적 우월감의 성취적 욕구이다.
을타리에 갇혀 애쓰고 힘드는 지배력의 자아도취 이다.
속빈강정의 껍데기 지랄병 이다.
경우없는 짓거리의 뒷퉁수에 만인의 레이저 꽂히는것 모른다.
노상 자유라고 하시니 이웃과 공동체의 규범적 질서까지 제멋데로 무시한다.
높은 음자리 울림 기대하지 마시고 자아적 성취로 만족하시라는 것이다.
학교와 가르침은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는 장소이다.
개인적 우월감이 개입할수 없는 공익적 시설이다.
내것의 소유와 기회의 편중을 요구할수 없다.
학교에 보내으면 믿고 맏겨야 한다.
교육적 개념에서 강요와 체벌은 잘못을 지적하는 방법이었다.
교육적 개념이라 함은 차별 또는 감정과 증오가 배제된 목적의 행위이다.
하늘과 땅의 성립에서 강요와 체벌이 있었어도 학생과 선생은 지고지순한 순결의 관계였다.
요사이 이런전설 애기하면 아제개그이다.
시대의 문화와 지성에서 강요와 체벌의 비인간적 교육관은 배척되었다.
인륜적 또는 인격적 관계의 발전이다.
교육은 분별력의 성장이다.
잘못과 악을 지적하고 분별할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
교육은 수용성이다.
옭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의 성장이 필요하다.
잘못과 악을 분별하는 교육이다.
잘못의 지적에서 교육적 차원과 문화적 지성으로 수용할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교권문제의 이해가 부족하다.
학생이 모든것을 스스로 할수있다면 하산해야 한다.
부족하여 체우는 것이 교육이고 선생의 역할이다.
학교는 공동체이다.
치졸한 권세와 기성세대의 개인적 탐욕이 우선할수 없다.
학교 공동체에서 학문의 전달은 우선순위가 없다.
물질시류의 불편함이 있으나 만민의 평등을 가르치는 곳이다.
학생에게 교육자의 존중과 밝음이 필요하다.
교육현장은 맑고 밝아야 한다.
전달과 수용에서 긍정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교육의 본분에서 목적을 이해하는 현명한 방법이 고려되어야 한다.
학교는 가문의 영광을 비즈니스 하는곳이 아니다.
편협한 정신줄의 성상으로 시류의 꽃깔쓰고 굿하면 안된다.
교육현장이 폭력과 송사로 시류의 혼란스러움에 있다.
교육의 규범은 사회적 규범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법치의 이성에서 미완의 교육현장에 사회의 규범을 들이미는 것은 무리이다.
교육현장의 관계와 분쟁에서 법치의 개입은 최소화 되어야 한다.
진짜 싹수 노란분들만 골라 밥 잘드실수 있는 곳으로 모셔야 한다.
사회적 규범의 적용이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세대이다.
인격의 위임에서 학교는 학생의 신분과 행위의 책임이 있다.
외부의 개입과 시장의 차별에서 미완을 보호해야 한다.
사회적 규범의 개입에서 학사는 방어적 개념에 충실해야 한다.
교권의 독립이다.
시도 교육감 직선제의 목적이 무었인가?
국민의 위임으로 학생의 신분과 교육현장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개인의 교육관으로 지배하라는 위임은 아닐것이다.
사회적 규범의 무리한 적용에서 교육적 규범을 보호해야 한다.
의무교육은 특별한 미완성의 보호이다.
교권문제는 교육적 규범에 사회적 규범을 들이데는 치졸한 권세와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송사과정의 염려가 아니라 분별력 없는 송사가 잘못된 것이다.
만민의 평등을 가르치는 가장 공정해야 하는 학교를 침해하는 권세의 분별력이 문제이다.
학생의 신분은 학교에서 우선하여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
이분법적 역사의 교육은 필요하나 분별력 완성후 판단하여도 늦지안다.
21세기의 지식과 문화의 공유에서 정치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론의 여지가 있다.
정치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안는다는 것이다.
갓과 오얏나무의 정서가 요사이 정치판 화두이다.
국정운영에서 이해충돌을 말씀하시면서 챙겨주고 살려주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짝짝궁이 버젖하다.
하늘이 증거이다.
갈넘은 가고 올넘은 오는것이 인생무상의 진리이다.
제멋에 겨운 물갈이는 순환의 순리이다.
기차 잘못탄 식솔들의 인륜이 걱정되기는 한다.
말씀에 여의도의 취업 호환성은 괜찬은 편이라고 한다.
교육현장에서 정치를 우선하는 좌우논리의 선택적 경계는 불필요하다.
사용하고 버리는 연장의 시각으로 진리의 순수함을 건들지 말라는 부탁이다.
교육은 기회의 연속성 이다.
실수에는 반드시 반성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
학생기록부 말씀이다.
잘못의 기록은 조건으로 삭제될수 있었야 한다.
2002년 월드컵 신화에서 떠들던 히딩크 감독의 경영철학이 있다.
한번의 실수는 반드시 만회할수 있는 기회를 준다.
실수 또는 실패의 교훈이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논리이다.
교육적 규범에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물론 싹수의 질적인 측면이 고려되기는 한다.
학교와 교권은 긍정을 위해 존중과 밝음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아니라 실용적 가치와 방법이 제고되어야 한다.
중국은 사교육을 제한하였다.
대한민국의 학사를 참고하였다는 후문이다.
2023.7.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