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국제질서와 문화. 본문
95. 국제질서와 문화.
1 우크라이나 전쟁.
동서냉전은 무었을 위한 경계인가?
대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는 문화적 공유를 위한 진통의 시간인가?
그렇다면 소련 붕괴후 러시아는 인류의 문화적 흐름에 동행하였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용인이다.
단지 지배력의 차이라며는 국제질서에서 종교국가의 이해와 별반 다르지 안다.
인류의 문화적 하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적 진화와 냉전의 관성에서 역사의 이해가 대립하는 지배력의 고립은 국제질서의 모순이다.
문화의 동행은 합리적 결론의 이해이다.
정치적 고립은 역사와 문화적 생존의 저항이 있다.
사회,경제,문화의 세기적 변화에서 고립과 갈등의 고통을 이해하여야 한다.
공존을 위한 인륜의 배려가 필요하다.
냉전의 경계에서 문화적 이해의 바탕이 마련되었으면 정치와 행정은 민심의 이해를 기다려야 한다.
대립의 해소와 문화적 수용의 설정은 지배력에 대한 정치적 배려도 필요하다.
냉전의 이유가 무었이냐는 것이다.
지배력의 차별을 위한 냉전은 비극이다.
지배력의 차별이 아닌 문화적 수용에서 냉전의 이유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대립의 해소에서 문화적 수용과 인내의 고립은 분노와 저항을 만든다.
세계질서를 양분하는 지배력의 실질적 변화는 민생에서 민주주의의 수용이다.
국제질서의 대세에서 냉전의 목적은 민주주의와 문화의 공유이다.
격변하는 고난의 시간에 문화적 공유와 고립은 다른것이다.
민주주의의 수용에서 문화적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지배력의 존재에서 변화의 이해를 위한 운신의 기회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와 문화적 격변에서 민심의 수용은 시간이 필요하다.
냉전의 결과에서 공존할수 있는 이해가 필요한 시간이다.
문화적 수용의 이해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승패의 시각으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경계적 개념이 고립과 저항의 역사를 만든다.
표적의 개념에서 피맛의 향수가 사리진 전쟁의 역사를 기억한다.
21세기의 정치적 극단성은 결론의 수용이 아니라 피아의 승패적 경계를 요구하고 있다.
남북의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합리적 결론의 불복이 증거이다.
선택의 절차에서 불복은 또다른 표적의 설정과 집중이다.
정치적 관심을 위한 파괴적 설정의 필요이다.
동서냉전의 역사적 진실은 무었인가?
문화적 공유에서 끝이 없는 지배력의 탐욕이 파괴적 역사를 만든다.
정치를 위한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민생의 희생은 진화와 역사의 불행이다.
결과적으로 정치와 지배력을 위한 냉전의 구도라는 부족한 이해이다.
정치를 위해 냉전의 비극적 관성을 이용하고 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국제질서의 민주적 대세에서 논리의 주체는 동행의 순리를 인정하여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이다.
절대성이 아니라 절대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원인은 알수있으나 미래가 없다.
냉전의 관성에서 문화적 공유를 이해하는 기다림이 없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전쟁을 담보하는 파괴적 냉전의 복원은 문화적 진화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이분법적 경계의 설정은 변화한 사회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구소련의 향수는 변화의 힘든시간으로 이해한다.
민생이 요구하는 욕구의 총족에서 만족하였다면 사회주의 제도는 공고하였을 것이다.
경쟁의 국제질서에서 생산성과 분배의 한계를 인정하여야 한다.
동서냉전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와 생산성을 우선하는 문화의 강을 건넜다.
통신사회에서 격변하는 지식과 문화의 진화를 지배력으로 통제할수 있다는 판단은 과욕이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실현되고 있다.
대자연의 역사는 과거를 딛고 미래를 항해 흐르는 것이다.
생존과 문화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진화의 전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가 인류문화의 진화에 무었을 하겠다는 것인가?
생물학적 진화는 유구한 것이나 문화적 진화는 촉각의 시간이다.
무었을 위한 승패인가?
냉전의 관성에서 아직 이념적 경계의 잔해는 존재하고 있다.
문화적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하는데 울타리 흔들며 제촉하면 좋을것이 없다.
소통은 상대을 인정해야 이루어진다.
전쟁의 파괴적 행위가 정치와 역사의 만족을 위한 지배력의 경쟁이라면 삶과 일상의 피해가 크다.
역사는 진화를 위한 기록으로 지배력의 기대치를 충족하는 시간이 아니다.
민생을 위한 합리적 결론은 지식과 문화를 충족하는 민심에 의한 것이다.
문화적 진화는 파괴적 지배력의 시간에 머무를수 없는 것이다.
전쟁의 목적이 구소련의 지배력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면 잘못된 시도이다.
한산도 분단의 역사에서 언론의 형태는 냉전의 경계를 우선하고 있다.
내편 늬네편의 이분법적 해석이다.
필요한 것은 진실이다.
민주주의의 전파는 문화의 공유를 위한 시간의 배려가 필요하다.
힘의 논리로 민주주의와 글로벌 문화를 전파할수 없다.
문화의 확장은 지배가 아니라 공유의 목적이 유효하다.
문화적 공유가 이루어지면 냉전과 지배력의 경계는 필요없는 것이다.
2 사회주의의 향수.
시간의 그리움과 민초의 삶이 중요하나 이미 글로벌 사회에 있다면 현재는 과거보다 앞선 것이다.
편안함은 노력의 댓가가 필요하다.
생산성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공유하여 편안하였다면 누군가의 노력이 포함된 것이다.
사회주의의 진실은 공동체의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노동의 생산성을 전제하는 제도이다.
지배력을 위한 사회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분배에서 지배력으로 모든것을 해결할수 있다는 논리가 비 사회주의적 접근이다.
생존과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수 없는 사회주의는 성립할수 없다.
삼십만년 호모샤피엔스의 탐욕적 진화에서 분배와 생산성을 예견하지 못한 문화적 한계가 있다.
생존에서 나보다 이웃을 우선하는 문화는 아직 멀리있는 미래이다.
21세기 통신사회에서 문화적 포괄성으로 생산성의 공유를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의 풍요가 사회주의 이론을 충족할수 있는 조건이다.
지배력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진화의 순리이다.
기계적 생산성과 공유경제의 이론은 이미 세상에 존재한다.
역사의 지배보다 진화의 순리가 우선하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진화의 순리에 있다.
진화에서 역사의 기록은 선택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재림의 계시는 선택된 방향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와 역사는 호모샤피엔스의 삼십만년 무의식의 선택이다.
삼십만년의 시간을 뛰어 넘을수 있는 변화는 인류의 지식과 문화로 불가능한 것이다.
전쟁의 죽음과 파괴는 재림을 기대할수 없는 소멸이다.
우주와 시간의 이해에서 인류는 무한의 존재에서 선택된 하나이다.
역사의 대의도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이해가 우선하는 것이다.
시작과 결론의 이해가 부족한 전쟁에서 파괴와 죽음의 인연이 안타까운 것이다.
시간의 막연함으로 현실에 집착하나 무었이 답인지 미래는 알수없는 것이다.
전쟁의 이해타산은 문화적 공유보다 지배력의 역사이다.
전쟁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편의 행복과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후대의 행복도 중요하나 현재의 존재도 중요하다.
파괴보다 평화의 유산이 좋은것이다.
적당한 것은 의견제시 이나 지나치면 지배와 저항이 된다.
전쟁은 후대의 행복을 위해 가르칠 필요도 없는 갈등과 대립의 기록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처구니 없는 반복되는 재발방지 이다.
성과의 지루함을 인내하지 못하는 정치와 지배력은 표적을 요구한다.
잘못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요구하여 수용하였으면 인정하여야 한다.
문지방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급하게 드시면 배 아프다.
2023.1.22일.
'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반도와 냉전의 관성. (0) | 2023.02.01 |
|---|---|
| 국가구성의 비례성. (0) | 2023.01.29 |
| 정치개혁. (0) | 2023.01.09 |
| 정치와 인륜. (0) | 2022.12.18 |
| 형벌. (0) | 2022.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