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형벌. 본문
92. 형벌.
인류의 역사는 계절의 고난과 무수한 천재지변을 격었다.
생존의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생명의 그리움을 상실하였다.
존재의 미지에서 절대가치의 믿음으로 그리움의 불확실성을 해소하여야 했다.
종교의 탄생과 선지자의 가르침은 기적으로 표현되었다.
병마의 기적과 빵의 기적과 강물을 가르는 몰살의 기적이 있었다.
물고기의 기적은 물질의 윤택이다.
새벽닭의 예언과 부활은 계시의 가르침 이다.
배드로는 새벽닭의 가르침을 깨닫는데 형이상학적 이해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사고와 사건으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가룟유다의 행위는 죄와 가르침의 선택에서 인류의 탐욕적 욕구와 협소한 판단의 사고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건과 사고에서 인류에게 분별력과 예지력의 필요를 가르치신 것이다.
지식과 문화의 발전과 인륜적 지성의 공유이다.
시대적 문화와 지식의 공유는 가르침의 본질을 좀더 가까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의 종교적 판단은 완전하지 안다는 것이다.
대자연의 질서를 공유하는 암시적 잠재력의 이해가 필요하다.
21세기의 문화에서 기적의 확률은 지식과 반비례 한다.
우주의 무한한 영역에 예속된 지식의 진화는 사건과 사고의 진실에서 예지력의 확장이 된다.
생명체의 생태계와 지식과 문화의 진화는 시간의 필연성이 있다.
생명체가 멸하지 안고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신의 영역에 이를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는 예지력의 갈증이다.
멸하지 안는 존재의 지식과 문화의 진화는 신의 영역을 이해하고 가까이 하기 위한 노력이다.
멸하지 안는다는 것은 합리적 결론에서 보편성을 충족하는 질서이다.
즉 대자연의 순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주와 인류의 관계에서 무한함에 예속된 존재를 확장하여 나아가는 것이 지식과 문화의 진화이다.
신의 영역 선을 위한 진화의 과정에서 종교의 규범과 관습은 악의 방해를 경계하는 것이다.
21세기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에서 인류는 예언의 실체에 좀더 가까이 이르고 있다.
사고와 사건을 예지할수 있는 지식과 문화의 공유에서 조건의 진화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을 앞장서 따르는 자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죄와 형별을 두려워해야 한다.
통신정보를 통한 지식의 확장과 문화의 공유는 지배력의 횡포에 저항하는 시대이다.
기적의 확률보다는 가시적 진실을 탐구하는 지성의 시대라는 것이다.
지배자와 양들의 관계에서 선한목동의 분별력을 말씀하신 이유의 충족이다.
21세기의 종교적 탄압과 독선적 권력의 횡포는 선한목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계시는 하늘의 울림으로 물리적 또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사사로운 이해가 아니다.
대자연의 질서와 진화에서 합리적 결론을 위해 암시적 질서를 공유하는 소통의 광장이다.
계시는 암시적 질서의 소통이 전제된 합리적 결론의 예지가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순환과 시간의 지배에서 종교는 문화와 지식의 진화와 병행하는 시대적 질서의 주체이다.
종교의 규범과 관습에서 이해와 질서는 시간의 변화로 영속적 이지 안다.
창조의 무한한 영역에서 지식의 광명을 찾아가는 진화의 순리는 시간의 필연적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순리를 초월하는 진화는 존재하지 안는다.
생태계와 생명체는 시간으로 변화하며 존재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신의 영역과 우주의 끝은 존재한다.
증거하기 까지는 정신적 이든 물리적 이든 진화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인류의 지식과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끝임없이 진화하는 것이다.
대자연의 질서에서 생명체의 진화는 시대적 변화의 합리적 결론을 수용하는 것이다.
시대적 지식과 문화의 이해에서 어떠한 규범과 관습도 시간의 필연에 의해 변한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은 생태적 순리에서 시간의 필연으로 변하는 시대적 지식과 문화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기원전과 기원후 또는 이천년의 약속이 변화를 계시하는 선지자의 가르침이 된다.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선한목자의 가르침이 된다는 것이다.
재림의 계시는 기원후 종교의 규범으로 21세기의 지식과 문화의 욕구를 형벌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죄와 형벌에서 지배력의 탐욕을 위한 인류의 차별적 형벌은 신의 형벌을 표현할수 없다.
신의 형벌은 인류가 상상할수 없는 교훈이 될것이다.
"나로 인하여 천국에 이를 것이다."
"가르침의 일상으로 부처에 이를 것이다."하였다.
신의 가르침을 인류의 탐욕으로 해석할수 없다.
종교의 주체 선의 시각으로 해석해야 한다.
말씀은 나의 지배력이 아니라 나로 인한 가르침의 공유이다.
선지자께서 요구하는 선의 이해에서 창조자는 절대로 독선적 지배력을 요구하지 안는다는 것이다.
창조의 무한한 영역에서 선지자는 인류의 운명적 선택에 개입하지 안는다.
계시는 미래의 예지이며 암시이다.
선지자와 선의 관계에서 종속이 아니라 공유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의 문화적 역할에서 인륜과 시대를 이해하는 선한목자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앞선자와 나중된 자의 차별이다.
이것이 신의 형별에서 선택이 된다.
거미줄의 예지가 없었으면 이슬람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하나 동굴을 찾아온 병사들이 선의 이해에서 죄와 형벌의 가르침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거미줄은 선지자의 예지이며 병사의 두려움은 선의 정의가 된다.
종교적 시각에서 병사의 두려움은 선지자 또는 선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미줄과 병사의 두려움은 생명의 예지이며 선의 정의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종교의 이해에서 선을 공유하라는 선지자의 계시와 선한목자의 가르침 이다.
부르카와 히잡의 강요는 문화적 진화에서 종교적 규범과 관습을 지키려는 수단으로 이해할수 있다.
거미줄과 병사의 두려움은 선지자께서 행한 생명의 실체적 가르침이 된다.
부르카와 히잡이 생명을 위한 거미줄의 예지와 선의 정의를 두려워 하는 병사의 선택을 우선할수 없는 것이다.
죄와 형벌에서 문화적 진화의 두려움으로 규범과 관습에 얶매여 생명을 해칠수 없는 것이다.
지식과 문화는 무한한 우주에서 멸하지 안고 생명을 지키려는 절대가치 이다.
인류의 지식과 문화는 정체될수 없는 진화의 진실이다.
선을 지키고 이해하려는 수단에서 가시적 형태의 증거와 종교의 절차적 규범이 필요하다.
종교와 문화는 선이 주도하나 악의 촉매와 동행하고 있다.
종교와 문화의 동행에서 악으로 부터 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선과 악의 이해에서 악의 존재를 약자와 관련지은 지배력에 문제가 있다.
선한목동의 가르침은 규범을 지배하여 양들을 괴롭히는 앞선자의 관습을 우려한 것이다.
종교와 문화적 진화에서 앞선자의 지배력으로 약자에게 악의 관습을 지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악은 대체로 앞선자 즉 강자의 지배력으로 발원하는 것이다.
약자의 순종적 사회참여에서 잘못된 목동에 저항하는 생명의 순리는 악이 될수없다.
폭력과 억압으로 종교의 규범과 관습을 강제하여 선을 정당화 할수없다.
크레인의 잔인함은 종교가 지향하는 선과 인륜보다 통치의 무자비함이 우선한다.
종교를 빙자한 살육은 과거의 교훈으로 남아있다.
종교를 빙자한 폭력과 억압으로 강요된 선택과 차별의 고통이었다.
21세기는 통신정보를 공유하는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시대이다.
시간의 흐름으로 변화하는 문화적 욕구의 저항을 폭력과 억압으로 강제할수 없는 시대이다.
지식과 문화의 시대적 진화는 선지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순리이다.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는 개인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지배하는 진화의 대세이다.
평등의 욕구는 생명의 가치로 부여되는 공존과 공유의 분별력 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며 이성을 격리하고 두려워 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선한목자의 가르침은 종교의 규범과 문화적 관습에서 악의 지배를 경고하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지식과 예리한 칼날은 선과 순리의 차별을 죄와 형벌로 지키려는 것이다.
거미줄의 예지와 선처는 생명을 우선하는 선지자의 가르침 이다.
종교와 통치에서 형이상학적 집착보다 합리적 결론이 전제된 암시적 질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이천년의 약속에서 필연적 시간의 흐름과 변화는 선지자의 계시이다.
거미줄의 예지와 선의 정의를 두려워 한 병사의 선택에서 생명을 우선하는 선한목자의 가르침이 있다.
21세기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에서 미래와 창의력을 구속하는 규범의 이해는 확장되어야 한다.
종교의 진실에서 시간의 변화에 의한 지식과 문화의 욕구를 이해하여야 한다.
선한목자가 되시라는 것이다.
2022.12.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