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형장의 갓. 본문
91. 형장의 갓.
11월30일 현재기온이 영하7도 이다.
어제 보다 17도 이상 떨어졌다.
낙엽 진 산야는 푸른생명으로 풍성했던 시야를 땅의 거죽을 드러낸 적삼의 속살로 바꾸어 놓았다.
병마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병원 외출하시는 분은 여름과 가을의 기억으로 썰렁한 산야가 갑작스럽다.
하루하루의 시간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진득하고 절절한 생명의 희노애락으로 부여잡고 싶은 것이다.
육신과 시간에 여유롭지 못한 낫살의 조급함은 내것의 온전함에 그리움이 그립다.
늬것의 애잔함도 때론 내것이 된다.
사는것이 사고의 연속이다.
인연의 불행을 요리조리 피해 보지만 격어야 비로소 그리움이 만들어 진다.
코로나로 10여일 고생하다 오늘아침 진단키트의 줄이 하나다.
겨울의 초입에 그나마 고생을 벗었다.
팔자가 드세서 좋지 안은 것은 비켜가지 안는다.
운명의 미련에서 언젠가의 기우가 잘못없는 잘못을 쌓아두고 사는 것이다.
시류와 타협하지 못하는 내안의 고집이다.
나 역시 이시대의 형상으로 시류의 다툼 속에서 선택의 책임으로 살아간다.
시류와 대의에서 내안의 고집으로 설정한 존재의 뿌리는 암시적 질서의 소통으로 이해한다.
미지의 의심에서 서당개 삼년의 풍월은 선택의 또다른 책임으로 생명이 되었다.
시류의 치열함에서 평범한 사고의 잘못이 인연의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영하7도에 수도가 얼어 붙지는 안는다.
그래도 해마다 격는 노심초사의 우려는 수도꼭지를 열어 두었다.
사는것이 나 말고는 미더운 것이 없다.
허기사 팔자 억센넘은 내것으로 사는 것이 편한 것이다.
천지신명의 미련에서 선처를 기대할수 없다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날벼락의 고통은 불상한 중생의 인연으로 어지간하게 선처해 주신다.
익산역과 구포역 폭팔사고도 서해 훼리호 사건도 성수대교도 세월호도 이태원의 절망도 안타까움 뿐이다.
헬로윈 참사 당시 집구석 젊은분들 걱정이 살짝 있기는 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워낙이 기회가 협소하여 그짝은 쳐다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비규환의 시간에 이승의 인연이 안타까워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생명의 기운이 있었다.
그랫다!
저승에 이르지 말고 구천에서 진실을 구하라고 하였다.
홍익인간정신의 미래에서 연속되는 참극의 분노이다.
승패적 울타리에 집착하는 우유부단 한 정치의 실망이다.
북망산천 가기전에 요단강 앞에서 지옥문의 인연을 후대를 위해 남겨두라는 것이다.
생명을 경시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의 문지방과 문갑과 천장에 머무는 원혼이 되라는 것이다.
운명을 예지할수 있다는 자들과 생명의 비극을 공유하라는 것이다.
대의를 빙자하여 생명을 경시하는 자들과 북망산천을 동행하라는 것이다.
형장에서 갓을 고쳐쓰는 선비는 없다.
정치공학이 우선하는 이해타산의 무시와 방관에 어리둥절 하다.
초상집에서 북치고 꽹과리 치며 춤추는 몰상식의 행태가 안타까운 것이다.
죽일넘 살릴넘의 시시비비 보다는 망나니의 칼춤에 핸폰 후랫쉬 집중되는 시대의 모순이다.
인륜과 진실의 이해에서 문화와 지성의 불확실성을 인내해야 하는 안타까움 이다.
자유와 표현에서 인륜을 망각하는 이탈적 행위의 피해이다.
양극화의 승패적 울타리에 기대어 어찌하면 표밭 갈아 놓을까 뭉그작 거리는 것이다.
지식사회의 문화는 진실의 정의에서 사필규정의 진리가 있다.
죽은자의 경계에서 이승의 형벌은 산자의 몫이다.
생물학적 진화의 시간에 인류가 할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
인류의 진화에서 코로나의 창궐은 사필규정의 진리가 있다.
도시화의 밀집된 문화에서 미래의 위기에 가까이 대처하는 시간이다.
의지와 시간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합리성은 정치의 정지된 시간으로 해결할수 없다.
민중의 이해에서 통신정보를 공유하는 지식문화 사회의 시대를 성찰하여야 한다.
하나의 사고는 강제가 아니라 창의력의 자율적 도전에서 합리적 결론으로 도달하여야 한다.
대자연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선지자의 가르침에서 인류의 한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시간으로 진화 한다.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는 합리적 결론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지식과 문화의 공유와 통신시대의 시간적 필연으로 이루어진다.
시대적 대세에서 문화의 관성은 수많은 여울를 이루는 것이나 역사를 막을수 없다.
소통부재의 문화적 관성과 공유의 시대에서 규범과 관습의 형태도 평등의 욕망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부뚜막 문화의 순종과 자유를 우선하는 창의력의 시대는 시간의 이해가 다르다.
형이상학을 주장하는 성취적 욕구의 인습에서 기회의 평등과 도전의 갈등이 있다.
지식사회에서 권위주의 또는 국수주의에 예속되는 문화는 합리적 결론의 실체가 불투명 하다.
이타적 문화는 합리적 상호주의 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상대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아웅산 수치 고문을 정글의 밀폐된 콘크리트 건물에 격리하였다고 한다.
내년 8월의 총선을 대비한 버마군부의 치졸한 선택이다.
국민의 선택에서 자신없는 권력과 무력의 횡포이다.
총선을 의식하여 관련없는 구금된 인륜 수천명을 인심쓰듯 석방하였다고 한다.
민주인사를 석방하여 정당한 민의를 수렴하여야 한다.
이것이 아세안이 중재한 5개항의 합의를 이행하는 것이다.
버마 쿠데타의 역사적 진실은 한세대 안에 평가하게 될것이다.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는 세계질서의 보편성을 확장하고 확립하여 나아가는 시간이다.
국경의 의미는 공유의 개념으로 축소될 것이다.
정치보다 민생이 우선하는 문화의 시대는 가까운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에서 종교는 공유하는 것이지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며 창조물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에서 평등의 욕구는 이타적 상호주의 이다.
남여의 분별력은 시간의 희노애락을 신께서 사랑으로 배려하는 것이다.
맹목적 생존의 생물학적 존재에서 정신과 감성의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다.
생존의 경쟁에서 감성의 존재는 공유의 개념이다.
사회의 진화에서 민의에 의한 진통의 시간은 분명한 미래가 있다.
권위와 국수주의를 고집하는 위정자들의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종교는 강제가 아니라 선택의 믿음으로 맏겨져야 한다.
종교의 의무에서 선을 지향하며 악을 행하는 것은 죄의 형별이 무서운 것이다.
죄의 형벌을 무서워하지 안는자에게 종교의 권리가 주어질수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을 빙자하여 육신과 인륜을 폭행하는 자들은 처벌되어야 한다.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다양성을 공유하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통신사회의 대세이다.
인류가 발전시켜 진화의 대세를 이룩한 시간이다.
대자연의 질서에서 부정할수 없는 진화의 시대적 실체이다.
문화적 관성은 여울로 존재할수 있으나 역사의 흐름은 통신사회의 대세를 규정하고 있다.
위선과 가식으로 선동하여 민심을 왜곡하는 정치의 오지랖은 부뚜막의 부지깽이에 불과하다.
적삼의 속살을 그리워 하며 사건의 진실에 목마른 것이다.
망나니의 칼춤에도 갓을 고쳐쓰는 선비의 절개가 아쉽다.
사대부의 종자가 안체를 철통같이 방어했어도 문지방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이다.
육십줄 중반에 부뚜막과 문지방의 문화를 체험하고 산다.
문화의 진화는 자승의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내안에서 타의을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나의 존재에서 그리움은 시류와 타협하는 타의가 아니다.
인연의 책임을 잊을수 있는 스스로의 설정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날 孔子와 子路가 만났다.
활과 칼을 찬 모습의 자로와 공자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다.
子路가 孔子에게 말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무력으로 안되는 것이 없다.
禮와 樂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였다.
孔子는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해서는 오래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오직 민심을 얻는 지도자가 미래를 열수 있다고 하였다.
당신의 武를 文으로 다듬을 때 진정한 통치의 가치도 살아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孔子의 말에 子路는 제자로 입문하게 되었다.
2022.11.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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