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다산서집. 본문
1. 귀양길.
1)석우촌에서 작별.
[쓸쓸한 석우촌에서 가야할길 세갈래로 갈리었네.
장난하며 서로우는 두 마리 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나 보네.
한 마리는 남으로 가야 할 말이고 한 마리는 동으로 달려야 할 말이네.
제부들께선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큰형님은 눈물이 턱에 고인다.
젊은이들이야 다시 만날 수 있겠으나 노인들 일이야 누가 알 것인가.
잠깐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해가 이미 서산에 기울었네.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가자꾸나 애써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면서.]
석우촌은 숭례문에서 남쪽으로 3리 떨어진 마을이다.
신유년(순조 원년 1801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선의 조정은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산과 집안은 정조의 총애를 시기하였던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옥사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다산은 둘째형님 손암 정약전과 옥사를 면하고 장기로 유배길을 떠나면서 석우촌의 하루해가 잛았다.
2)율정주막의 이별.
[초가주점 새벽등불 깜박깜박 꺼지려 하는데 일어나서 샛별 보니 아! 이제는 이별인가.
두눈만 말똥말똥 나도 그도 말이 없다.
목청 억지로 바꾸려 하니 오열이 되고 마네.
흑산도 머나먼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가 어찌하여 이 속에 왔단 말인가.
고래는 이빨이 산과 같아 배를 삼켜다 뿜었냈다 하고 지네 크기는 쥐엄나무 만큼하며 독사가 다래넝쿨 처럼
엉켜있다네.
내가 장기에 있을 때는 낮이나 밤이나 강진 바라보며 깃 날개 활짝 펴고 청해를 가로질러 한 바다 중앙에서
그사람 보려고 했더니 지금은 내 높디높은 교목에 올랐으나 진주는 빼버리고 겉껍질만 산 것 같네.
마치 바보스런 아이가 멍청하게 무지개를 잡으려고 서쪽언덕 코앞에서 아침에 뜬 무지개를 분명히 보고서
아이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더욱 멀어져 서쪽언덕 가도가도 늘 서쪽인 격이야.]
황사형 백서사건으로 또다시 위기에 처한 다산과 손암은 정순왕후의 배려로 옥사를 면한다.
이후 강진으로 가는 귀양길에 나주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율정주막에서 형제로 지기로 마지막
하루밤을 보내게 된다.
해가 뜨면 손암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말머리를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다산보다 4살 위인 손암은 형님이며 지기였다.
주막 앞에는 야속하게 두갈래 길이 있었다고 한다.
손암은 다산이 해배되기 전에 우이도(牛耳島)에서 사망하였다.
율정주막에서 이별이 형제로 지기로 이승의 마지막 동행이었다.
손암은 흑산도 유배생활 중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2. 홀로 앉아서.
신유년(1801년) 3월 장기에 유배 되었을 때 쓴 시이다.
[쓸쓸한 여관에 홀로 앉아 있을 때면 대나무 그늘도 끄덕않고 일어나려는 향수를 그대로 주저 앉히고 익어가는
시구나 마무리 짓는다.
잠시갔다 다시오는 꾀꼬리는 미더운데 제비는 무슨생각에 말을 하다 입 다물까?
다만 하나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은 소동파 배우느라 바둑을 못 배운 것이다.]
[간들간들 버들가지 주위는 적막한데 봄잠 깨고나니 들빛 어둑하다.
산에 구름 멀리 걷히니 달이 뜬양 훤하고 숲의 잎이 흔들리것 바람있어서 아니다.
녹음방초 찾아서 눈은 가고 있지만은 마음은 마른나무 죽은 재와 똑같다.
집으로 돌아가게 나를 비록 놓아준다 하여도 기껏해야 그 모양이 한 늙은이 뿐이다.]
2019,3,19일.
3. 기성잡시.
3월9일 장기에 도착하여 이튼날 마산리 늙은 장교 성선봉의 집을 정하여 지내게 되었다.
긴긴해에 할일이 없어 때로 짦은 시구나 읆곤 하였는데 뒤섞여 순서가 없다.
성산포 포구에는 좁은 바위사이 수문처럼 파도물결 드나들고 동으로 부상까지 푸른바다 아스라 하다.
푸른바다 망망대해 용이 와서 섬 없애다는 전설이 사람마음 이다.
계림의 육부 역시 횡폐한 마을이었다.
모려령 위에 왠만하면 가지 말아라 우거진 숲 험한 비탈이 지친육신 시름에 젖게 한다.
망망대해 푸른물이 북해도 왜인들의 삶이 궁금하다.
산꼭대기 쓸쓸하게 사십체 있는 인가 비뜰어진 거적문이 지다 남은 꽃 속에 있다.
물을 마실 샘이 없어 성위에 줄매고 수차를 쓰라 한다.
조해루 용마루에 석양 빛 붉을 무렵 관리가 성 동쪽으로 나를 몰아 쫒기에 갔더니 시냇가 자갈밭에 오두막 한채
있고 농부가 있었는데 그집 주인이었다.
집집마다 두길넘게 울짱 세워두고 처마머리 그물치고 긴 창들 꽂아 놓았다.
왜 이다지 방비가 심하냐고 물었더니 예 부터 기성에는 범과 이리가 많았다고 한다.
여인들 말투가 화난듯 하고 어쩌면 애교 스러워 붓을 손목처럼 쓴다고 하여도 표현할 벙법이 없다.
한푼도 돈 들여 달리 살 생각없이 두가닥 머리체 이마 앞에 매어둔다.
새로 짠 생선기름 온집안 진동하고 들깨농사도 않하는데 참기름 있겠는가?
김무침 접시에서 머리카락 끌려나오고 가마솥에 지은 돌벼 밥 모래 섞여있다.
구름바다 사이 한조각 외로운 돗 울릉도 갔던 배 이제 막 돌아왔다.
만나자 험한파도 무사한것 묻지도 않고 가득실은 대쪽만 보고 웃으며 기뻐한다.
아이들은 항구에 나가 고기잡을 생각도 말아라 깊고 푸른바다 여덟발 문어에게 걸러들까 무섭다.
근년에는 해구신이 이상하게 값이 올라 한성에서 재상들이 서둘러 구하고자 서신 자주보낸다.
동산의 뇌록도 진기하고 돌에 박힌 파란줄기 복신처럼 생겼다고 염국(濟用監)에서 곡물로 받지 않았기에
영릉의 종유혈이 천년내내 계속 되었다.
마산 남쪽에 있는 죽림서원 느릅나무 대나무 숲에 굳은비 내리고 멀리서온 납촉(촛불기름)은 주어도 받지
않으면서 그래도 사람들은 송우암을 들먹인다.
온돌방 한칸에다 시원한 마루한칸 주인과 마주보며 서로 웃는 얼굴이다.
새로 막은 대나무 울타리 그물같이 엉성하여 막혀서 앞산 못볼 걱정은 없다.
제주도산 말총모자 쓰고 소나무 의자 기대앉아 일본산 자기잔에 보리 슝늉 마신다.
금년에는 해초들이 모두 다 잘 말랐는데 이른봄 날씨가 맑고 시원한 덕이다.
밥은 쌀로 국은 고기로 그것이면 족하고 꽃과 나무 바라보며 한가한 시름젖고 울타리 사이 울퉁불퉁 무슨나무
인지 몰랐다가 잎 피기에 보았더니 그게 바로 석류였다.
금화전에 오르고 옥당에 있을 생각 말아라 바닷가 사는것은 부러운 것이 어부이다.
아내 맞이 할 때에는 고래수염 자를 주고 자식 분가시킬 때에는 개딱지 솥 나누어 준다.
밥 먹고는 잠을 자고 잠에 깨면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술사와 금사주를 데우라 한다.
도무지 소일 할 일 없고 이웃영감 때때로 와서 장기두는 것이 고작이다.
봄 나자 습증이 중풍으로 변했는데 북녁태생이 남쪽음식 적응 못해서 이다.
비방인 창출술 먹었으면 좋겠는데 약술 들고 종이와서 고향을 묻고 있다.
내 인생 그릇친것 책인줄을 잘알고 사는 동안 맹세코 그 은정 끊으려 했으나 아직도 마음속에 그 뿌리가
남아 있다.
이웃아이 책 읽는 소리 누워서 듣고있다.
노을도 아니요 구름도 아닌 보리가 크는 하늘 복숭아는 술 취한듯 벼는 조는듯 슬슬걸어 산 구경갈 생각하지
못하고 틀어박혀 지은죄 생각뿐이다.
옛날에는 오서에 올라 지는해 보았는데 오늘은 동해에서 뜨는해 보고 있다.
내 어찌 동해,서해 다 구경하는 몸이던가 강토가 원래 그리 넓지 않아서 그렇다.
초봄에는 힌머리가 두개 났었는데 하나는 검은편 이고 하나만 하얐더니 이곳에 와서는 또 하나가 더 보태어
져서 세개 모두 천연스럽게 하얗기가 은빛같다.
푹푹찌는 비린내에 파리가 너무많아 밤은 늘 늦게들고 잠은 늘 일찍 깬다.
이는 하늘이 게으름을 징계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무단히 부를 써서 미워하였다.
살 깨무는 빈데 때문에 잠을 잘수가 없고 벽에는 지내가 다녀 사람 놀라게 한다.
작은벌래들 이빨도 내 마음데로 할수 없는 처지다.
그렇게 생각하고 저들 멋데로 하라 할수 밖에 없다.
날 따뜻해 작은밭에 장다리꽃 활짝피니 노랑나비 파란벌래 드나든다.
저걸 보며 장주가 물화를 알았나 보다.
죽장짚고 느릿느릿 거닐면서 서성 댄다.
옛날에 검정실로 짠 작은 은냥 너를 나 혼자 끌어안고 이곳저곳 다 갔었다.
누우나 서나 네가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만지시던 손떼 묻어서 이란다.
서남해 바다 물빛금릉과 맞닿아서 장사배가 몇칠이면 이곳까지 닿는다.
"경뢰가 바라 보인다." 그말 믿지 못해더니 빽빽하게 모인 섬들 푸르고 험하구나.
2019.3.29일.
4. 석지부(惜志賦).
신유년 여름 장기에서 서글퍼라 내인생 좋은때 못만나 가는 앞길 험난하여 자주 죄에 걸리었네.
기특한 재주안고 오락가락 맴도니 뭇사람들 하잖게 여겨 재앙을 끼치누나.
내 자신 반성하여 행실 더욱 닦았지만 억울하고 번뇌로움 사라지진 않는다내.
궁궐문이 이미 막혀 들어가지 못하니 쇠스랑과 곡쾡이로 논밭 어찌 다스리리.
첨음에는 숨어서 소곤소곤 비방터니 나중에는 시끌벅적 떼 지어서 소란피워 내 스스로 살펴보면 깔끔하고
해맑으니 죄를 비록 씌운데도 마음 어찌 상하리.
공야장은 새소리 듣고 포승줄에 묶여으나 중니께서 억울함 밝혀 그이름 드러났고.
장재는 불가를 믿고 중년에 숨었으니 주자가 스승으로 높여 모든 공적 그치었네.
올바르고 고운사람 넘어진 것이 애달픈데 두들기고 짓밟아서 여지없이 부러졌네.
입으로 말하고 싶었도 얼버무려 분명치 않고 기운은 겁나고 불안하여 가슴에 응어리 졌네.
물들여도 의를 지켜 변치 아니하니 날더러 추잡함을 씻기 어렵다 이르네.
그들의 어리석음 탓 할 것이 뭐 있겠나 내 허물 애써 살펴 장차 잘하면 그만인걸.
용은 힘차게 꼬리치며 높은하늘 달리는데 도마뱀은 비실비실 기를 펴지 못하고 준마 발굽 씩씩하여 드넓은 길
치닫는데 두꺼비는 엉금엉금 제 신세 슬퍼 할 뿐.
두 아름다움 지니고서 이를 모두 놓쳐으나 그 가지 무성하고 뿌리 깊 길 바란다네.
비할데 없이 맛 좋은 오자음식 옆에 두고 싱거운 것을 씹으면 어찌 만족할수 있으리.
아스라이 넓은바다 물결없이 잔잔한데 고래놈이 모 쓸어 한입에 삼키려네.
궁한 귀신 보낸 한유 더한층 따라 붙고 재주부린 소자첨 역시 좌천 당하였네.
이미 천명 신봉하여 어지기를 아니하니 한스러워 할것이 또한 뭐가 있으리.
(장기애 유배되어 시류에서 소외된 감정을 표현하였다.)
2019,3,19일.
5. 큰아이가 찾아왔다.
학가가 왔기에 그를 데리고 보은산방으로 가 이렇게 읊다.
(학가는 다산의 큰아들 학연이다.)
객이와 내문을 두드리기에 자세히 보니 바로 내자식 이었네 수염이 더부룩이 자랐는데 미목을 보니 그래도
알만하구나.
생각하면 너 네댓살 시절에 꿈에 보면 언제나 아름다웠었다.
장부가 갑자기 앞에서 절을 하니 어색하고 정도 가지 않아 안부 형편은 감히 묻지도 못하고 우물우물 시간을
끌었단다.
포견이 황토 범벅인데 허리뼈 라도 다치지나 않았는지 종을 불러 말 모양을 보았더니 새끼 당나귀에 갈기가 나
있었는데 내가 성내 꾸짓을까 봐서 좋은 말로 탈만 하다고 하네.
말은 않해도 속이 얼마나 쓰리던지 너무 언짢고 맥이 "확" 풀리더군.
억지로 웃으며 말을 또 꺼내 차츰차츰 농사에 대해 물었더니 밤나무는 해마다 증가하고 옻나무도 날이 갈수록
번성하며 송채 겨자도 몇이랑 심었는데 마늘은 맞을지 어떨지를 몰라 금년에야 마늘을 심었더니 마늘크기가
배 만큼씩 해서 산골저자에 내다 팔아 그것으로 오는 노자를 했다네.
처절하고 처절하여 그만두고 다른말을 꺼내기로 했네.
지난시절 낭패 당하던 초기에 책들이 남은게 없이 다 없어져 왕의 친필도 더러 잊어버렸는데 그 나머지야 찾아
뭘 할것인가?
세상에 빛나는 십삼경은 종족들이 희귀한 보물이라고 했고 죄없는 대경도 라든지 잘못없는 황성의 까지도
밤중에 모두 불타 없어져 이웃사이에 무단한 의심만 더 샀지.
그 좋은 한서선은 위기를 요행히 면했는데 통곡통곡 뼈속이 시리고 아파 님의 속뜻 거기에 있었는데 막바지
바다까지 떠내려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영영 기약이 없네.
날씨춥고 거센바람이 많아 대나무 소리 마저 퍽 구슬픈데 미천한 나그네 입이 더 보태졌으니 지혜만으론 기한을
달랠길 없어 손을 맞잡고 산으로 올라 왔으나 나와 너 갈곳이 어디란 말이냐?
엉클어진 산들을 보고 넓고넓은 천지라도 가보련만 기구하게 절간을 찾아들어 구걸하는 모양 이라니 다행히도
반칸짜리 방을 빌어 세 때 종소리를 함께 듣는구나.
응달쪽에는 싸래기눈 깔려있고 낮은가지에는 단풍든 잎 붙었으며 샘물이 장대 울리며 흘러내려 세수고 세탁
이고 마음데로 할수 있지.
동백이 또 꽃을 일찍피워 나에게 시소재를 제공하는데 잡서들은 모두가 그게 그거고 주역만은 손을 놓지 않는단다.
인생은 약한풀과 같은것 더구나 너무늙고 피곤한데 하루아침에 풀의 이슬 말라지면 그 뜻을 누가 있어 알것인가?
내 지금 너에게 읽히노니 돌아가 네 아우의 스승이 되라.
(다산의 둘째는 학유이다.)
나라의 왕이 바뀌어 권력의 중심 이동으로 집안이 풍지박살 났다.
유배지로 떠나면서 쉽게 자라 해 가기 전에 겉모습이 변하는 자식들과 생이별 하였다.
먼길 헤메며 상상할수 없는 모습으로 강진에 찾아온 혈육의 애절함과 유배생활의 어려움이 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정조의 죽음이 병사였다면 권력의 계승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신유사화의 변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조선의 정치는 당파에 의한 것으로 왕의 정치는 권좌에서 운신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주례는 생전의 권력에 의해 존재하였고 죽음으로 사라진 것이다.
왕정의 절대권력 에서도 권력의 일반적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조선의 정치에서 왕이 중심이 아니라 당쟁이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조선의 정치는 사람중심의 정치로 권좌의 인맥에 의해 권력이 성하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영조의 죽음으로 영조 때의 인물이 숙청되고 정조의 죽음으로 정순왕후와 벽파에 의해 정조의 측근들이
천주교(서서)를 명분으로 사단이 났다.
정순왕후의 수렴천정이 끝나자 순조와 시파의 반격에 의해 벽파가 숙청되었다.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권력의 방향에 의해 절대권력으로 권력의 주체가 바뀐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인맥의 물갈이를 위한 것인가 보다.
과정에서 나라의 미래에 필요한 인물들이 고초를 당하여 인륜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의 사지에서 큰 뜻을 잊지 않은 수고로 학문의 정통성이 지켜진 것이다.
2018,9,13일.
6. 둘째에게.
[네가 갑자기 의원이 되겠다는데 무슨뜻이냐?
무슨이익이 있는 것이냐?
너의 그 의술을 빙자해서 요즘의 재상들과 교의를 맺어 너의 아비가 죄에서 풀려날수 있도록 도모하려는 것이냐?
옳지못한 일일 뿐만 아니라 또 할수도 없는 일이다.
세속에서 이르는 "겉으로만 인정을 배푸는척 한다"는 말을 너는 알고 있느냐?
힘 않들이고 입만놀려 너의 뜻을 기쁘게 해주고는 돌아가서 냉소하는 자가 가득차 있다는 것을 너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냐?
넌지시 권세가 성함을 보여 몸을 굽히고 땅에 엎드리게 한 것인데 네가 과연 그 술수에 뻐졌으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무릇 사람들 중에 높은벼슬과 높은직책이 있고 덕이 높고 학문이 깊은 사람도 별업으로 의술을 하는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 몸이 아주 천한데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병자가 있는 집에서도 감히 곧바로 그에게 묻지 못하고 서너너덧 단계를 거치고서야 겨우 처방 한가지를
얻어 가지며 그것을 보물 얻은것 같이 여기고 들으니 그래도 괜찬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지금 너는 소문을 내고 문을 크게 열어놓고 있으므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날마다 거리를 메워 찾아들고
물고기 같고 짐승같은 한량 잡배들과 내력을 묻지도 않고 근본과 행실을 자세히 모르면서 모두 잠깐만난 처지에
친구가 되는가 하면 관곡까지 전당 잡히고 있다 하니 이것이 무슨 변고란 말이냐?
이뒤의 일은 나에게도 귀가 있으니 만약 그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왕래도 하지않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
눈을 감지도 않을 것이니 너는 생각해서 하라!
나는 다시 말하지 않겠다.]
실학자인 다산의 당시 사회적 시각을 알아볼수 있는 편지이다.
서출과 평민의 인재등용을 주장하고 있는 진보적 시각으로 판단할때 신분적 귀천이 아니라 학문적 귀천을
였볼수 있다.
사대부의 학문적 나태를 비판하며 실학의 진보적 사고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학문으로 정리하였다.
목민관의 도리와 지식을 기록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후대에 남기려는 노력에서 인재를 안타까워 하였다.
잘 다듬어진 사람보다는 거칠고 적극적인 사람의 학문적 기질을 평가하였고 구하여 스승으로 다듬고자 하였다.
여쭈어 보면 실학이라는 것이 일상에서 격는 불편한 것과 불평등한 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임금의 뜻이라는 학문이다.
2018,9,13일.
7. 목민심서(牧民心書)요약.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정약용(丁若鏞)이 지은책으로 1818년 장약용 58세에 완성
되었다.
관리의 부임 부터 해임까지 전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각 조항으로 정하고
정약용 자신의 견식과 진보적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이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실상을 파악할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의 실정을 규탄하면서 수령의 실천윤리를
제시하였다.
48권 16책.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해배(解配)되던 해인 1818년 (순조 18)에 완성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자(子)·집(集)등에서 치민(治民)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수록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해배(解配) 유배에서 풀려나다.)
서두에서 목민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산은 어려서 부터 부친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며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익혔다.
그후 금정찰방(金井察訪)과 곡산군수로서 백성을 다스렸다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통해 백성이 국가권력과 관리의 횡포에 도저히 배겨내지 못하는 것을 누구 보다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목민심서가 저술되었다.
권두에 목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와 책임진 지방수령들의 기본자세가 얼마나 숭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목민의
뜻을 밝히고 있다.
내용은 부임(赴任),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전(兵典),공전(工典)·진황(賑荒),
해관(解官)의 12편으로 나누고 각편을 다시 6항목으로 나누어 모두 72항목으로 엮었다.
각조의 서두에는 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들을 간단 명료하게 지적하였다.
설정된 규범들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과 고금을 통해 실전적 사실의 사업과 공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평해 첨부 하였다.
목민심서는 지방관리의 부임과 해임에 이르기 까지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를 자신의 견식과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이다.
탐관오리는 백성들은 흙으로 밭을 삼고 부정한 관료들은 백성을 밭으로 삼았다.
백성의 살과 뼈를 긁어내어 가렴주구(苛斂誅求) 하는 것으로 추수를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당시 실정을 규탄하면서 수령의 실천윤리를 제시하였다.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아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다.)
제1편 부임(赴任)에서 제4편 애민(愛民) 까지는 목민관의 자세를 다루고 있는데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청렴,
절검의 생활신조와 백성본위의 봉사정신 등을 주요내용으로 들고 있다.
수령은 근민(近民)의 직으로서 다른 관직보다 그 임무가 중요하다.
반드시 덕행,신망,위신을 갖춘 적임자를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령은 언제나 청렴·절검을 생활신조로 명예와 재리(財利)를 탐내지 말고아야 한다.
뇌물을 절대 받지말며 수령의 본무는 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기본으로 삼아 국가정령(國家政令)을 빠짐없이
알리고 민의(民意)의 소재를 상부관청에 전달하고 상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해 민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1편 부임(赴任) 임명이나 발령을 받아 근무할 곳으로 감.
2편 율기(律己) 안색을 바로잡아 엄정히 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림.
3편 봉공(奉公) 나라와 사회를 위해 힘써 일함.
4편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5편 이전(吏典)에서는 관기숙정(官紀肅正)을 전제로 아전·군교(軍校)·문졸(門卒)의 단속을 엄격히 하고 별감의
임용을 신중히 하되 현인의 천거는 수령의 중요한 직무이므로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6편 호전(戶典)은 농업진흥과 민생안정을 위해 호적정비와 전정·세법 등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해 권농·흥산의
부국책을 도모할 것을 내세우고 있다.
수령직무 중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에 있어 관료들이 진전(陳田)·은결(隱結)이라 빙자하고
협잡하는 일을 제거하였다.
아래로 백성에게 해가없고 위로 나라에 손(損)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결부법(結負法)은 불편한 방식이다.
초지는 토성이 바뀌는 것이므로 양전에 유의하여 국가재정 확립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전정(田政) 조선후기 토지에 부과되던 모든조세를 일괄하여 수최하는 일종의 전결세(田結稅)로 조세행정제도)
(양전(量田) 농지를 조사 측량하여 실제작황을 파악하는 제도.)
(결부법(結負法) 고려와 조선시대 토지를 파악함에 있어 면적과 수확량을 동시에 표시한 계랑법,)
(전결세(田結稅) 결정권을 가진 관리에 의해서 전과 답에 세금을 부과하던 것.)
토질은 변하는 것으로 20년마다 전체농지의 질과 수확량을 조사하여 새로운 부과기준을 마련하였다.
지방수령들에 의해 토양의 질과 수확량이 결정되었다.
이것을 기준으로 결부법을 시행하였다.
토양의 질은 변하는 것이며 수리,재해등으로 해마다 수확량의 차이가 있다.
전체를 조사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어려움이 있어 진전(陳田)만을 조사하는 사진(査陳)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진전(陳田) 묵힌 밭.) (은결(隱結) 속병을 말한다.)
진전관리에 대해서는 농민들이 다시 농사 지을수 있도록 하며 세를 무겁게 하지 말아야 한다.
상경전(常耕田)을 진전이라 속이는 일을 밝히고 합리적인 관리방안으로 어린도법(魚麟圖法)을 쓰자고 주장하였다.
강진현의 전결잡세와 부가세를 법전에서 규정하는 기본적인 전 1결의 세와 대조하여 법정 이외의 것을 모두 횡령
이라고 지적하였다.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관리의 협잡을 제거하자는 방향에서 조세개혁을 논하였다.
(상경전(常耕田) 밭을 갈고 씨 뿌려 가꾸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국가경비의 절약과 함께 협잡의 바탕이 되었던 대동법의 모순확대를 지적하며 농민들을 이러한 굴레에서 풀어줄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대동법(大同法) 조선중기 이후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는 제도.)
재전징세(災田徵稅)를 바로잡아 밝히고 이속의 횡령을 방지하며 징수에 있어서 부유층에서 걷고 문서에 따른
관리를 정확히 할 것과 관료적 고리대로 악용되는 환곡의 협잡을 자세하게 논증하였다.
(재전정세(災田徵稅) 농사가 허하여 궁핍한데도 세금을 징수한다.)
이러한 협잡 제거는 제도적인 개혁 즉 법의 구속을 기본으로 하였다.
국가재정의 정비 관료의 절약과 청백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문서관리의 정확성에서 찾고자 하였다.
7편 예전(禮典)에서는 주자와 다른 진보적인 교육관을 살필수 있다.
8편 병전(兵典)에서는 첨정,수포의 법을 폐지하고 군안(軍案)을 정리하는 등 당시 민폐가 가장 심했던 군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수령은 백성들의 생산활동에 지장되지 않는 범위에서 항상 훈련을 실시하여 비상시에 대처하여야 한다.
나아가 국방력 강화를 위해 외국의 발전된 무기도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편 형전(刑典)에서는 청송(聽訟)과 형옥을 신중히 할것을 제시하였다.
(청송(聽訟) 푸른 소나무로 사실관계를 자세히 살펴 송사한다.)(형옥(刑獄) 형벌과 감옥.)
우선하여 봉건적 형벌제도의 남용을 견제하였다.
당시의 법규가 "백성을 계몽시키지 않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실상에 있어서는 백성을 잡기 위해 그물질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수령은 선 교도 후 형벌(先敎導後刑罰)의 원칙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10편 공전(工典)은 산림,천택,영전의 합리적 운영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농업과 함께 임업,광업,교통,수공업·상업 등 각분야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 선진기술 도입을 주장하는 등 산업
개발 문제와 대책을 다루고 있다.
11편 진황(賑荒)은 빈민구제의 구황정책을 다룬 것이다.
(진황(賑荒) 땅이 박하여 재물로 빈민을 구하다.)
12편 해관(解官)은 수령이 임기가 차서 교체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2018,3,2일.
8. 흠흠신서(欽欽新書)요약.
초기 책명은 명청록(明淸錄)이었으나 우서(虞書) 흠재흠재(欽哉欽哉)의 형별은 신중히 하라는 뜻에서 흠흠(欽欽)
이라 하였다.
흠흠(欽欽)이란 걱정되어 잊지 못하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審議)하는 흠휼(欽恤)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것이다.
1819년(순조19년)에 완성하여 1822년에 펴냈다.
(흠율(欽恤) 죄수를 신중하게 심의 하는것.)
정약용(丁若鏞)의 저서 목민심서,경제유표와 함께1표2서로 중요한 책이다.
정약용의 형정에 대한 사상을 알수있으며 18세기 조선의 살인사건 판례를 살필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살인사건의 재판은 무고한 자를 해칠수도 있으며 살인자를 묵인 할수도 있다.
재판을 맡은 수령들은 법률과 재판하는 법을 익혀 백성들의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
자산(子産)이 형전(刑典)을 새기자 군자가 나무랐다.
이회(李㷄)가 법경(法經)을 만들자 후대가 그를 얕보았다.
그 마저도 인명에 관한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수당 때에는 살인을 절도(竊盜)와 투송(鬪訟)을 혼합하여 나누지 않았다.
오로지 한고조 패공의 "사람을 죽인자는 죽인다" 뿐이었다.
(투송(鬪訟) 송사하여 다투다.)
당시대에는 인명과 인륜에 대한 문화적 또는 볍률적 보호가 없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인명에 대해 잔혹하여 주검으로 젓갈을 담았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의 주검이 그러 하였다고 한다.
이후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율례(律例)가 발전하여 인명에 관한 문화적,법튤적 형태를 갖추었다.
(율례(律例) 형률의 작용에 관한 법례.)
모(謀,꾀할모),고(故,예고),투(鬪,싸울투),희(戱,놀희),과(過,지날과),오(誤,그릇할오)의 분별이 세밀하게 제시
되어 송사와 형별의 율례(律例)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평생 시부(詩賦)나 잡예(雜藝)에 몰두하다 신분에 의해 목민관이 되었다.
기득권에 의한 음서제의 나태는 송사와 형벌의 지식과 경험부족으로 실무에 어리둥절하여 서리에 일임하였다.
이로 인하여 재물을 탐하고 인륜을 경시하는 간사한 탐관오리의 자의적 또는 법외적 재판으로 형벌이 중도에
맞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연산군의 갑자사화에 인명과 인륜은 땅에 떨어지고 춘추시대와 같이 주검으로 젓갈을 담구는 패륜이 있었다.
명종 때 의주목사는 인륜을 경시하고 치적을 위해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해쳤다.
황해도 의적 임꺽정을 소탕한다는 빌미로 죄없는 백성들을 임꺽정 일당으로 몰아 수없이 고문하여 죽였다.
사대부의 권세는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태연하여 잘못을 모른다.
목민관이 지위에 있으면서 권세와 재물을 탐하여 백성의 안위와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건릉(정조,정조의 능호.)때 감사와 수령 등이 직무의 소홀함으로 호출당하는 일이 있었다.
목민관의 규율과 감시에 경계하여 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사이 억울한 옥사가 많아졌다.
내가 목민에 관한 사례를 수집하고 정리한 후 인명을 다루는 재판과 형벌의 부과는 반드시 법률을 근거로 해야
하며 전문적인 서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재판을 맡은 관리들이 참고할수 있도록 흠흠신서를 편찬하였다.
흠흠(欽欽)이라 한것은 삼가고 삼가하는 것으로 형벌을 다스리는 기본이다.
30권 10책으로 구성하며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비상준초(批祥雋抄) 5권,의율차례(擬律差例) 4권,상형추의
(祥刑追議) 15권,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요의(經史要義)에서 중국의 유교경전에 나타난 형정(刑政)의 기본이념을 밝히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역사책에 나타난 유익한 형사판례를 뽑아 고금의 변천을 소개하고 비판함으로 써 목민관이 참고
하도록 하였다.
중국의 판례 79건과 조선의 판례 36건을 소개하였다.
저술에서 저자는 법률을 변통없이 고수만 해서는 안되며 의(義)에 비추어 처리할수 있는 가능성을 승인하였다.
형벌의 공정성에서 하찮은 연민의 정은 경계하였다.
비상준초(批祥雋抄)는 조선의 판결문인 제사(題辭)나 재판관계의 왕복문서인 첩보(牒報)의 장황하고 잡스러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법률식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 중국의 재판문서 가운데 모범적인 판례를 뽑아 해설과 비평을 붙였다.
(제사(題辭) 논술서의 머리글.)(첩보(牒報) 기록을 공개하다.)
의율차례(擬律差例)는 살인사건의 유형과 적용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구별되지 않음을
고치기 위해 중국의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상형추의(祥刑追議)는 무원(無寃),무의(無疑)한 재판에 참고할수 있도록 정조의 인명사건에 관한 판결을 모은
상형고 (祥刑考)를 자료하여 엮은책 이다.
(상형고 (祥刑考), 좋은판례.)
상형고 가운데 144건을 골라서 정범(正犯)과 종범(從犯) 자살과 타살, 상해치사와 병사, 고의와 과실 등 21개
항목으로 분류하였다.
최종판결의 당부(當否)에 대하여 논평하였다.
(당부(當否) 옭고그름.)(무원(無寃) 원통함이 없는.)(무의(無疑) 의혹 없는.)(종범(從犯) 범행을 도와준자.)
전발무사(剪跋蕪詞)는 저자가 곡산부사와 형조참의 등으로 재직하던 중 관여한 인명관계의 판결과 유배시간에
보고 들은 것이다.
인명에 관한 옥안(獄案),제사(題辭),검안발사(檢案跋辭)로서 의심가는 판례 17건을 모아서 분류하고 평하였다.
(옥안(獄案) 의혹이 있는 송사.)(검안발사(檢案跋辭) 해결되지 못한 송사.)
요즈음의 판례는 수도 없이 많다.
법치의 문화적 분별력에서 고려와 조선전기의 시대와 다르다는 것이다.
임꺽정 사건 이후 힘께나 쓰는 장사들이 이유불문 하고 관아에 불려가 물고를 당하였다고 한다.
솥뚜껑 보고 놀란 관리들의 노심초사 이다.
목민관의 지식과 경험부족은 결국 백성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시대에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사로운 치우침을 배제하는 것이다.
법률의 집행에서 중용의 가치와 인명과 인륜적 가치인 흠휼(欽恤)사상의 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8, 3, 4일.
9. 경세유표(經世遺表) 요약.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께서 행정기구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책이다.
원제명은 방례초본(邦禮草本)이며 1817년(순조17년, 정약용 57세. )에 저술되었으며 미완성작 이다.
유배 중 전라남도 강진에서 저술하였다.
앞머리에 방례초본인 (邦禮草本引)을 붙여 저술의도를 밝히고 있다.
“터럭만큼도 병든곳이 아닌곳이 없다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근본적 개혁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사회상황을 염려하여 개혁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주례(主禮)의 이념을 근거로 하였다.
현실에 맞도록 정치,사회,경제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주례(主禮) 조선의 체제,임금을 섬기다.)
체제상 개혁의 목적과 원리를 제시한 후 기존제도의 모순과 실제사례를 모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논리적 이고 실증적으로 설명하여 설득력을 가질수 있도록 15책 44권의 구성으로 서술하고 있다.
제1책(권1∼3)과 제2책(권4∼6)은 천관이조(天官吏曹),지관호조(地官戶曹),춘관예조(春官禮曹),하관병조(夏官
兵曹),추관형조(秋官刑曹),동관공조(冬官工曹) 등 육조와 소속관서의 구성 및 담당업무를 서술하였다.
각조에서 관장할 사회,경제개혁의 기본원리를 세분화 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조는 궁부일체(宮府一體)의 원리에 입각하여 왕실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호조는 재정담당 기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개혁을 주관하고 국민교육 기능을 갖도록 하였다.
예조는 제례를 담당하는 기능을 강화하였다.
병조는 중앙군영을 직접 통제하여 실질적인 군사담당 기구가 되도록 하였다.
형조는 통치질서 확립을 위한 사회통제 기능이 강화되었다.
향리통제,거래질서 확립 등의 업무가 추가되었다.
공조는 부국강병을 이룰수 있도록 국가자원을 관리하고 수레,선박,벽돌,도자기 등의 제작과 기술보급을 담당
하도록 하였다.
제3책(권7∼9)은 천관수제(天官修制)이며 이조의 업무부분 이다.
관직체계와 관품체계의 조직과 운영방법 등 국도(國都)의 재구획안과 전국 지방제도를 재조정 하였다.
지방행정 체계의 운영방법 개선 및 관료의 인사고과 제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관직체계 운영을 개선하여 중인 기술직을 우대하고 능력에 따라 서출 출신의 승진을 주장하고 있다.
전국 8도를 12성(省)으로 재편하였다.
민호(民戶)와 전결을 기준으로 군,현 등급을 합리적으로 재조정 할것을 강조하였다.
제5책 부터 제14책까지는 지관수제(地官修制)로 호조업무에 관한 부분이다.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개혁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제5책(권12∼14)과 제6책(권15∼17)은 정전제(井田制)에 대해 서술하였다.
정전법 이란 토지를 정자(井字)로 구획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면적을 계산하여 사전(私田)과 공전(公田)의
비율을 9:1로 하거나 세율상 9분의1 만을 납부하게 하는 제도이다.
조선의 체제에서 정전법을 실시할수 있는 가능성과 실현방법 등을 제시하였다.
(정전제(井田制) 토지를 井자로 9등분하여 중앙의 수확량을 세금으로 징수하는 조세제도.)
제7책(권18∼20)과 제8책(권21∼23)도 정전제에 대한 서술부분 이다.
시행방법과 군사제도의 정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전국토지를 강제로 몰수하여 재분배 하거나 모든 토지를 구획하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관에서 기준할수 있는
정전을 마련하여 9분의1 만을 세금으로 받도록 하였다.
정비된 제도는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가도록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전제를 실시함과 동시에 정전을 경작하는 농민을 기간으로 하는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중앙군은 상비병이므로 정전이 아니라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양성하도록 하였다.
(둔전(屯田),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땅.)
군인들이 농사에 가담하여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는 것이다.
제9책(권24∼26)은 정전제 실시를 위한 양전(量田)의 필요성과 방법을 설명하였다.
즉 수확량을 기준으로 양전하는 결부법(結負法)을 고쳐 토지의 실제면적을 기준으로 하도록 하였다.
어린도(魚鱗圖)를 작성하여 양전에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린도(魚鱗圖) 비늘이 있는 물고기의 그림, 명과 청때 이용된 토지대장.)
(양전(量田) 조선시대 조세기준으로 전체농지의 넓이와 생산량을 조사하던 제도.)
(결부법(結負法) 양전의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수확을 기준으로 토지의 크기를 정하여 조세하는 제도.)
다산은 토지의 크기로 조세하는 정전제(政田制)를 제시하고 있다.
제10책(권27∼29)과 제11책(권30∼33)에는 부세제도(賦稅制度)의 개혁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재물의 형평성에서 농민과 토지에 국한하여 국가의 부세가 집중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광업,공업,어업,상업,임업 등 모든산업에 과세하여 국민의 조세 평균부담을 줄이는 한편 국가의 재정수입
증대를 도모하였다.
제12책(권34∼36)에서는 환곡제도의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있다.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고 상평법(常平法)을 시행하여 구휼사업이 실제효과를 볼수있도록 하였다.
(사창제(社倉制) 지방에 곡물저장 창고를 설치하여 곡물을 대여하는 제도.)
(상평법(常平法) 조선초기 상평청,상평창을 두고 물가를 관리하던 법.)
제13책(권37∼38)에도 부세제도의 개선방안을 수록하였다.
어업과 염전 등에 부과되는 세금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선박에 대해서도 크기와 성능을 규격화하여 기준에 따라 과세하였다.
군용선을 평상시에는 상선으로 이용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제14책(권39∼41)은 호적법과 교민지법에 관한 것이다.
호적을 정비하여 국민의 구성을 파악하여 조직화 하였다.
체제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서 인재를 뽑아 교육시키는 방법이 수록되었다.
제15책(권42∼44)에는 춘관수제(春官修制)와 하관수제(夏官修制)가 같이 수록되어 있다.
주로 문과와 무과의 과거제도 개혁방법을 논 하였다.
문과와 무과 시험을 3년마다 1회씩 실시할 것을 제시하였다.
사대부의 권세를 유지하려는 별시 등 각종 특별시험의 음서제(蔭敍制)을 폐지하였다.
음서제의 폐단으로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인원이 관직을 갖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에도 음서제의 폐단으로 인사적체가 심하였다고 한다.
응시자격을 제한하여 누구라도 능력있는 인물들이 응시할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선발과정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관직수행에 필요한 자질을 갖춘 인재를 선발할수 있도록 하였다.
(음서제(蔭敍制)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고관자제를 기득권으로 모셔 특체 하는것.)
특히 서출출신 이나 서북지방 인재들이 과거시험에서 차별받지 않게 하였다.
관직에 들어선 뒤에도 사대부의 음서제 폐단을 제거하여 순조롭게 승진할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능력없이 울타리 줄타기로 빕그릇 챙기는 시정잡배의 사회악은 여전하다.
경세유표는 1표2서(一表二書)라 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와 함께 정약용의 경세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목민심서나 흠흠신서는 당시의 법률체계나 사회구성 원리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지방행정 이나
형사사건 등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세부적 실무지침을 규정하고 있다.
비교하여 경세유표는 국가와 사회개혁을 위한 근본적 방법이 제시된 저술이다.
관직체계의 전면적 개편으로 신분과 지역에 따른 차별을 배제하는 인재 등용책 이다.
자원의 국가관리에서 정전제의 토지제도 개혁으로 부세제도의 합리화와 지방행정 조직의 재편이다.
저술에서 제기되고 있는 개혁안들은 사회체제의 근본적 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들이다.
당시 남인 실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으로 토지제도 개혁과 민생안정을 제시하고 있다.
부국강병의 실현에서 당시 북학파 실학자들이 주장하였던 기술발달과 상공업 진흥의 의견과 견해가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경세유표는 정약용 자신의 정치와 사회적 이념의 이해뿐만 아니라 당시 실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였던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사회의 실상과 모순을 비판적 안목에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정치사와 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법과 제도는 나라의 흥망에 따라 줄이고 더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사람들 식견도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 버리고 더해가는 것이다.
문화란 강이 흐르는 것과 같이 유구한 것으로 시대의 가치관은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면서 변하는 것이다.
변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에 적용할수 없는 법과제도를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안주의 권세와 물질의 어리석음이다.
천지의 이치가 원래부터 고치거나 변경하는 것이 진리이다.
생각건데 효종대왕께서는 공법(貢法)을 고쳐 대동법(大同法)으로 하였다.
영조대왕께서는 노비법(奴婢法)과 군포법(軍布法)을 고치고 한림천법(翰林薦法)도 고쳤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理致)에 합당하고 인정으로 화협(和協)하여 변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였다.
그시기에 회의하던 발언이 궁내에 가득하였다.
토론의 경계에서 임금에 간청하며 선대에 따르고자 대궐난간을 부서트리는 신하도 있었다.
군주의 시대에도 바른말 하는 옭고그름의 분별력은 선비의 자세가 되었다.
(공법(貢法) 세법.)(화협(和協) 화합하여 의논하다.)(대동법(大同法)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납세하는 제도.)
영조대왕께서 균역법(均役法)을 고치려 할때 반대하는 신하가 있었다.
임금께서는 "나라가 망한다 하여도 이법을 고치지 않아서는 않된다"하였다.
성군은 논리적 분별력과 미래의 예지력이 필요한 결단력을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에도 법과제도를 고치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은 "조종(朝宗)께서 재정한 법을 고칠수 없다고 한다."
(균역법(均役法) 조선후기 양역제(良役制)의 개선을 위한 양역균일의 재정제도.)
(양역제(良役制) 군사나 상응하는 국가가 필요한 절대인력 확보에서 인력대신 재정으로 부담하는 제도.)
(조종(朝宗) 태조.)
사사로움으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조금이라도 만족하지 못하며는 무리지어 소란을 피웠다.
이런 까닭에 계획할 때에 사방의 소란으로 걸리고 넘어져 아무일도 하지 못하였다.
국가창건 초기에는 말속(末俗)을 따르는 것을 도리로 삼으니 예나 지금이나 병통(病痛)이다.
(말속(末俗) 시류.)(병통(病痛) 병이 보인다.)
개혁의 시간을 지나 법을 시행하고 시대가 변하여 나라가 안정되니 낙 (樂)과 덕(德)으로 백성의 뜻이 어느정도
이루어졌다.
"지금 생각건데 터럭 하나만큼 이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어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 후 그칠 것이다."
초(初)라고 하는 것은 수정과 윤색을 기다리는 것이다.
선인의 주장이라고 하여도 수정과 윤색은 필요한 것이다.
죄받은 신하가 감히 나라의 법을 논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소소한 조래와 자잘한 명수(名數)에 구애됨이 있어 말속에 어려움이 있다면 나의 소견을 고집하여 한글짜도
변경할수 없다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고루한 것은 용서하고 편협한 것은 공평하게 수정하고 윤택하게 할것이다.
수십년 시행하여 실험한 다음 금석(金石)같은 굳은 법전 만들어 후세에 전해주면 소원이며 즐거움 아니겠는가.
"선왕께서는 예(문화)로써 법하였는데 후왕께서는 법으로 법하였다."했으니 선생은 이미 예로써 법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문화)가 아닌것을 법으로 할수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질서의 근본은 천칙(天則)에서 나왔고 예와 법은 한가지 라는 것이다.
사라사욕에 눈먼자들이 함부로 법이라 하는것과 다른 것이다.
(천칙(天則) 대자연의 법칙.)
좋은수래에 길들여진 말 매어도 앞으로 수백보를 걸려 조화가 이루어진 다음이라야 몰고가는 것이다.
법을 세워서 아끌어 나가는 것이 이것과 다르겠는가.
초본(初本)이라 이름한 까닭이다.
제4책 10,11권의 자료를 찾을수 없는 것이 이책의 미완성으로 보인다.
2018,3,5일.
10. 신유사화의 묘지명.
정조는 즉위하자 왕권확립을 위해 의리와 명분을 우선하는 준론(峻論)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였다.
(준론(峻論) 바르고 엄격하면서도 날카로운 언론.)
외척을 배제하고 노론과 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하였다.
(청류(淸流) 명분과 절의.)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노론의 과도한 전제정치와 관련하여 사도세자가 희생되었다는 남인과 시파의 주장이다.
정조와 남인이 제기하는 사도세자의 문제에서 당사자인 노론은 기존의 정치적 입장을 강경하게 확인하였다.
이때에 노론의 정치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벽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정치의 주류였던 노론은 이문제로 벽파와 시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노론의 시파는 정치적 우선권에서 왕의 정책을 수용하고 타 당파의 정계진출을 허용하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정조는 탕평책의 일환으로 노론을 견재할수 있는 남인(南人)과 시파(時派)를 가까이 하였다.
1790년(정조14년) 남인도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다.
천주교와 관련하여 공서와 신서로 또다시 갈라진다.
(공서파(攻西派) 정조가 남인과 시파를 가까이 하자 시기하여 노론 벽파에 가담한 남인 벽파의 무리.)
정조는 상공인과 유통시장을 이루고 있는 서민과 중소 지주층을 대변하는 남인들을 비호하고 육성하였다.
정권에서 멀어진 벽파는 권력장악을 목표로 남인과 시파를 시기하고 모함하였다.
남인 시파에는 당시의 서학(西學) 천주교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조가 죽은 뒤 비호세력이 사라진 상황을 이용하여 노론의 벽파가 다시 주류로 등장한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때문이었다.
정권 순환기에 벽파는 남인을 제거하려 하였다.
1791년 벌어진 진산사건을 빌미로 홍낙안 등이 남인 시파를 제거하려 하였다.
(진산사건(珍山事件) 또는 신해사옥 이라고 하는 조선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
진산사건은 전라도 진산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유교의 제례를 무시하고 천주교식 제례를 주장한 사건이다.
이사건으로 선비 윤지중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하여 탄압하였다.
1801년 다산의 셋째형님 정약종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서와 성구,신부와 주고받은 편지가 나왔다.
이것을 정치적 이유로 진산사건과 연관하여 확대한 것이 신유사화(辛酉士禍) 이다.
서학과 천주교의 박해는 정권 순환기에 정치적 이유로 벽파에 의해서 자행된 역사의 비극이다.
다산은 신유사화의 변고로 희생된 27명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 28편을 지었다.
이기양,이가환(李家煥 1742~1801),권철신(權哲身 1736~1801),오석충(吳錫忠 1743~1806),정약전(丁若銓 1758~1816)
6명과 지신의 묘지명 7편을 수록한 수사본이 있다.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는 의미로 비본(秘本) 이라고 써놓았다.
1801년(순조 원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죽거나 유배당한 사람들의 억을함을 기록하고 있다.
묘지명 7편은 권력의 순환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희생시킨 당파정치의 역사이다.
절대권력에 집착하는 벽파와 공서파(攻西派)의 무도한 횡포로 희생된 역사의 진실과 반론을 기록한 것이다.
비본으로 전해지는 것은 공개될 경우 정치적 파문으로 자신과 후손에게 화가 돌아올 것을 염려한 것이다.
역사의 교훈에서 정치의 비극은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1935년 다산선생 서거 100년 기일 1년 전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76책을 간행할 때 7편의 비본도 공개되었다.
비본에는 사사로움으로 다산선생 등 6명의 신념과 의지를 해친 신유사화의 진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기양) "평생 동안 서서를 한 자도 보지 않았다"
(권철신) "서교(西敎)를 믿지 않았다"
(정약전) "서교의 설을 듣고 좋아했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다.
“신해년(1791)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했다"
묘지명에서 다산은 자신을 포함하여 희생된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쓴 정치적 희생자임을 기록하고 있다.
비본에는 악당(惡黨) 또는 한둘의 음사(陰邪)한 사람으로 목만중,홍낙안,이기경,서용보,민명혁 등 신유사화를
주도한 사람들의 당시행적이 서술되어 있다.
다산선생은 1801년 천주교의 믿음으로 순교한 셋째형 정약종과 권일신(권철신의 동생)이나 조카사위 황사영
및 자형인 이승훈의 묘지명을 작성하지 않았다.
유교의 정서를 철학으로 삼았던 다산선생의 천주교 운운은 정치적 모함이었던 것이다.
공서파의 천주교 탄압은 남인 시파(신서파)를 제거하기 위한 권모술수에 볼과한 것이었다.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김씨 정순왕후가 죽었다.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은 시파의 반격을 받아 김달순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었다.
또다시 정권 순환기에 인륜의 참상이 발생하였고 다수의 벽파는 사라져야 했다.
1807년 이경신의 옥사로 벽파는 절멸하였다.
정순왕후 사후 벽파가 시파의 반격으로 몰락하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김조순 일당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김조순은 정순왕후 사후 신유사화의 비극을 저지른 노론 벽파를 정조의 유지를 거스른 역적으로 죄를 물어
처벌하였다고 한다.
김조순은 정조가 간택한 세자빈의 아버지로 사돈이며 외가로 6촌 형제이다.
이후 조선후기는 왕권의 몰락으로 외척이 중심이 되는 소수 노론의 세도정치가 주류를 이루었다.
세도정치로 조선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정조의 총명한 개혁정신이 세도정치의 김조순을 어린순조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2022,9,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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