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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2.

박세욱. 2026. 3. 18. 18:30

금강경 2.

상좌부 불교(上座部 佛敎).

소승불교이며 대승불교에서 비하한 명칭이라고 한다.

세속의 구제(利他)를 통한 성불보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으로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방법이다

해탈을 목표로 하는 초기불교의 전통이다.

불교역시 시대의 지식과 문화에 적응하면 변화한 역사가 있다.

기독교도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있었고 한 때는 영지주의가 횡행하였다.

정리하면 대승불교는 세속의 구제와 함께하는 것이고 소승불교는 고립된 수행이다.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 지역에서 전승되어 남방불교이다.

가르침을 모르고 구제할 수 없고 구제 없는 수행에서 지혜를 발견하기 어렵다.

불이불원논의 이해가 필요하다.

 

사다함(斯陀含).

한자로 일래(一來)라고 번역된다.

윤회하여 인간세상 한 번 더 태어나 수행하면 아라한에 이른다는 조건적 경지이다.

환생하여 더하면 곧바로 아라한에 이른다는 바늘구멍이다.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은 전생의 업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다원에서 일곱 번 죽어다 살아나야 아라한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열반의 단계적 기준은 수행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타의적 판단이고 수행자가 단계를 의식하여 집착하면 아, 인, 중생, 수자에 연연한 것이 되므로 헛됨이 된다.

아라한의 과정은 무의 성립이므로 감각과 현상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의 과정은 있으나 나와 관계없는 타의적 계량일 뿐이다.

점점 난해하고 어려워진다.

 

일상무상(一相無相).

"하나의 상(相)마저도 상에 없다"는 뜻이다.

수행에서 육신으로 접하고 요구하는 감각과 현상을 완전하게 멸도 하였다는 것이다.

남아 있으면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알렉산더가 현자에게 소원을 물으니 "햇볕을 가리고 있는 대왕께서 비켜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일상무상에 딱 들어맞는 유명한 고사이다.

 

수보리(須菩提).

수보리는 공(空)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무쟁제일(無諍第一)로 알려진

10대 제자이다.

금강경은 부처님(佛)께서 제자 수보리의 물음에 답하여 법을 설하신 것이다.

 

환희지(歡喜地).

화엄경의 십지(十地) 중 제1지로 보살이 수행을 통해 범부단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첫 단계에 들어서며 느끼는 큰

기쁨을 의미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고정관념, 집착, 욕심에 얽매이거나 머물지 말고 청정한 마음을 쓰라는 것이다.

광야에 홀로된 자유이다.

태풍에 던져진 입새가 어렴 풋 하다.

정체를 존중받지 못한다며 봉변을 피할 수 없는 무 방어적 개념이다.

작금의 세속이 그렇다.

소승불교에서 가능한 수행이다.

대승불교에서 구제를 위한 언어와 동행에서 수자는 없어도 아, 인, 중생의 외형적 시각이 있다.

말 빨이 서야 통한다.

소통에서 인식의 평등을 요구하는 관계의 벼슬(상)이 있다.

나라면 출가에서 소승불교에 가깝다.

세속은 대승불교이다.

불이불원론은 중용을 중시하는 마땅한 가르침이다.

 

연등불(燃燈佛).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께서 전생에 선혜(제화갈라) 보살이었을 때 진흙길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깔아 밟고 지나가게

한 정성에 감동하여 "그대는 내세에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부처님이다.

삼세불(과거는 연등불, 현재는 석가모니, 미래는 미륵불.) 중 과거불이다.

연등불로 공양한다.

부처 이전에 부처가 계셨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지식의 역사는 학습에 의한 보편적 바탕에서 시간의 한계를 넘는다.

이미 암시적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전적 시간의 벽을 통과하는 상상 밖이라서 돌연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종이처럼 얇아도 가려진다.

미지는 한 치가 어둡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형상(모습)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는 뜻이다.

상에 집착하지 말고 실체 없는 덧없음을 깨달아야 진리(여래)를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실증(현상)과 실존(미지)의 분별이나 모두 창조에 예속된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에서 불일 불이의 가르침이 있다.

여기서 이미 발현된 현상 또는 실체는 존재의 의미를 다했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 같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상과 미지의 경계적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형상(相)이 진짜 상이 아님(非相)을 깨달으면 여래(부처)에 이른다는 뜻이다.

사물의 외형적 집착을 버리고 존재의 본질을 볼 때 진리를 깨닫는다.

존재에서 유물론의 현상적 또는 이성적 개념과 다른 왜 라는 실존적 의심이라고 이해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라는 뜻이다.

대상의 고정관념과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순수한 마음을 의미한다.

만상과 나와 인연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 같다.

세속적 표현에서 "그럼 어떻게 살지요?"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유추하면 만물의 이치를 깨달으면 아주 작은 것으로 기쁨에 이른다.

언 듯 심오한 경지를 느끼나 쉬운 접근은 아니다.

금강경은 대체로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색장엄(色莊嚴).

부처님이나 극락정토를 다양한 색깔과 칠보(금, 은, 유리 등)로 아름답고 청정하게 꾸미는 것이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시대(1236~1251)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내고자(호국불교) 8만여 장의 목판에 경전, 율법, 논설 등

불교지식을 새겨 넣어 완성한 대규모 목각 대장경이다.

국가의 결집에 불교의 공덕을 이용하였다.

작금에도 종교는 중요한 정치적 시각에 있다.

 

반야(般若, Prajñā).

사물의 실제 모습(공, 무아)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근원적이고 밝은 지혜를 뜻한다.

탐, 진, 치를 끊고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게 하는 최상의 지혜를 의미한다.

반야심경의 핵심개념이다.

금강경의 전반부 내용은 소승불교가 추구하는 무의 수행이다.

중반부부터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나온다.

 

도피안(到彼岸).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언덕(차안, 현실)에서 깨달음과 열반의 세계인 언덕(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교화하는 광대무변한 공간으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가 10억 개 모인 거대한 우주단위를 뜻한다.

소천, 중천, 대천의 3가지 차원을 거쳐 형성되어 삼천이라 부른다.

무한한 우주를 암시하는 공간적 개념이다.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하나로 합쳐진 모습(일합상)은 단지 이름일 뿐이며 그 실체는 비어 있다.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있는 것이다.

형상에는 태생적 진리가 있다.

아래의 논지를 참고할 수 있다.

 

일합상(一合相).

무수히 많은 미세한 먼지(티끌)가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우주) 또는 형상을 뜻한다.

우주를 쪼개면 티끌이 되고 티끌이 모이면 세계가 된다.

결국 우주 또는 형상은 티끌로 돌아간다.

물질의 윤회이다.

만물은 인연(시간)에 의해 잠시모인 현상일 뿐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관념 속에서 없는 것을 있다고 형상(실증과 현상)에 집착한다.

어려우나 현존하는 무엇도 예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창조와 윤회와 무의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창조적 시각의 필요이다.

 

체루비읍(涕淚悲泣).

깨달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울며 기뻐한다.

바보가 된다.

 

바라밀다(波羅蜜多).

괴로움의 세계(차안)에서 깨달음과 지혜의 세계(피안)로 건너간다.

도피안(到彼岸) 혹은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출세간과 멸도를 성취하여 세속을 떠난다는 것이다.

 

칸트의 오성(悟性)

감성(感性) 및 이성(理性)과 구분되는 지적능력이다.

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논리적 사고력(지성)이다.

감각적 자료를 규칙에 따라 통일하여 개념을 구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흔히 지력 깨달음 이해력 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학문적 정리는 중요한 것이나 실체적 진실에서 이전에는 없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의 확장에서 문서와 구전이 충돌한 시대가 예수시대이다.

전례의 전통과 합의된 법칙의 분별이 공존하여 학문의 보편성을 확장한다.

구전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체계화된 학문이다.

학문의 연속성에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정해진 법(진리)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현상과 진리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황(학습)과 인연(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세상과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진화론이다.

 

바라밀(波羅蜜).

저 언덕(깨달음/열반)으로 건너간다.

도피안 (到彼岸)과 같은 뜻이다.

 

할절신체(割截身體).

신체를 마디마디 잘리거나 베이는 극심한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도 아상(我相)등 사상(四相)을 내지 않은 무아(無我)의

경지를 상징한다.

현세를 생각하면 태풍에 던져진 낙엽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모든 것을 내어주면 바보가 아니라 가스라이팅 당한다.

시장 통이든 국제사회든 힘센 놈 세상이다.

무지하고 사악한 지배적 관계의 대응이 반드시 필요한 혼란한 불기 2570년 이다.

스스로 대의를 지키는 호국불교가 있다.

소승불교의 무아와 정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대승불교의 차이가 있다.

수행자의 길을 존중하나 세속의 가르침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강력한 주장이다.

 

위이익일체중생(爲利益一切衆生).

보살이 모든 중생에게 진정한 이익을 주기 위해 보시하고 수행한다는 실천적 불교적 대승적도 정신이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병든 자에게 약을 주듯 상대의 상황에 맞게 돕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널리 베푸는 자비심의 실천이다.

드디어 대승불교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아, 인, 중생, 수자에서 탐, 진, 치를 멸절하는 수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야 실상의 혜안으로 세속의 구제 가능하다.

 

심주어법(心住於法).

마음이 법(상/집착)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즉무소견)과 같다.

대가를 바라는 보시는 깨달음의 공덕을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줄때는 대상을 버리고 무심하게 보시하란 것이다.

주고 돌아서 잊으라는 것이다.

 

부주법.

무주법(無住法) 또는 무주상(無住相)과 맥을 같이한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자세를 말한다.

선을 행할 때 대상을 생각하지 말고 무심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일테면 무기명 기부 같은 것이다.

 

무주상(無住相).

형상이나 특정한 대상(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와 행함을 말한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여래(진리)가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등 행동(위의)을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실상은 고요하여(적정)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여여(如如)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분별 심을 버리고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정진하여 진리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무위의 세계에서 분별 심은 형식과 현상을 따지고 증거 하려는 대상적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속적 시각에서 분별력은 논리적 이해와 양보를 우선한다.

무위와 세속은 시각적 차이가 있다.

 

공부.

!!! 만물의 이치와 인연에서 감각과 깨달음의 시각은 다르다.

감각은 계량하나 깨달음은 계량하지 않는다.

작다고 탓하지 않고 크다고 우쭐하지 않는다.

작든 크든 존재로 받아들인다.

불자의 수행은 경쟁을 추구하는 물질문명과 거리가 있는 사물적 자유의 정신세계이다.

2500년 전과 현재의 사물과 관계의 이해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 깨달음으로 실상에 이른다.

관념에 의한 상이라는 것을 금기시한 가르침에서 실상을 말씀하시고 있다.

모르고 행하는 것과 알고 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진리로 접근하면 지혜가 밝다.

소승불교의 성취에서 대승불교의 시각이라는 생각이다.

결국 중생의 구제이다.

세속과 출가에서 불이불원론이다.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세속 즉 문화와 지식은 종교의 근원이다.

창조와 사람과 종교의 순서이다.

초자연적 현상의 예속과 숭배에서 극복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여 문화를 형성하였다.

다수(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질서에서 종교가 탄생하였다.

학습과 시간의 과거적 순리이다.

인류사의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 진리에 이르면 상에 머물지 않는다.

현세에서 또는 속세에서 상이 상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에 도달하여 득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에 구속되지 않는 깨달음의 혜안을 말 한다고 본다.

연기사상과 연결된 관계의 순수이다.

세속에 머무는 대승불교의 정체이다.

 

!!! 현상을 말하며 "실체는 없는 것이고 명분만 있다."라고 하였다.

무의 경지에 이르는 뜻은 이해하겠는데 실상의 인정에서 학문적 논리는 필요하다.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달기 전에는 실이 허가 될 수 있으나 깨달음에 얻으면 허가 실이 될 수 있다는 정리이다.

될 수 있다는 표현은 무엇이든 규정할 수 없다는 변화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예지적 사고이다.

 

!!! 대상에 집착하면 자연 즉 진리를 감춘다.

관념적 집착은 광야의 넓음을 감추어 마음을 어둡게 한다.

아, 인, 중생, 수지에 집착하면 탐, 진 ,치의 어둠에 빠진다.

2026.3.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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