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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 1.

박세욱. 2025. 4. 12. 21:58

256 삼라만상.
1) 삶과 시간과 권태.
빙점의 기억은 사랑과 시류의 미온적 선택에서 반복적 시간의 권태이다.

소설의 전계에서 지루한 일상의 일탈적 욕구가 있다.
인연의 비극적 전계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는 충동적 삶의 말초적 본능을 표현하고 있다.
관계에서 환경과 현상에 충족하지 못하는 기회 적 일탈이다.
진화에서 유전적 또는 정신적 관계의 절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감각에서 익숙한 것은 무디어 지고 무의식 되어간다.
익숙해진 선택의 권태에서 울타리 밖 미지의 도전은 충동적 감각의 욕구이다.
삶은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현상에 머무르지 못하는 자유의 본능이다.
 
탐욕적 진화의 실체이다.
신의 부비트램 사랑으로 포장되는 이분법적 본능과 문화적 지배에서 자연과 자아 적 예속의 회귀적 미련은
반항적 문명의 미지적 욕구이다.
진화에서 주어진 시간의 절대가 아니라 일상의 지루함을 일탈하는 사과의 선택이다.
보편성의 안주에 지루한 진화의 본능적 충동이다.
시류는 만인의 대의로 포장되는 절대적 학습의 지배이다.
대의는 절대다수의 개념이다.
자아는 절대다수에 구속되지 않는다.
자아는 자연의 순리에 예속되는 절대존재의 한계적 생존이다.
 
시류에서 이탈하려는 내 안의 삶이다.
인간은 관계에서 지배든 성취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못한다.
대의와 시류의 콩깍지에 물먹은 중생들 많다.
이것저것 찾다 그것이 그것이라는 자연의 합리성을 이해하고 죽을 자리 찾는다.
십리길 발병은 찾아 봐야 새로운 충동을 충족 할 수 있는 절대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과 평화에서 타의와 거리가 있는 자아적 삶의 이해이다.
결국 내 안에 있다.
이런들 어찌 하리 저런들 어찌 하리 이 말씀은 내 안의 것은 포기하고 대세에 예속되어 살라는 것이다.
이해는 하나 불의에 끓어오르는 정의와 분노가 문화이고 문학이고 자아이다.
 
타의에서 자아의 인내 적 합리성은 한계의 치열한 분노가 있다.
어찌되었든 선의 지배를 표현해야 한다.
사과의 교훈에서 선택된 21세기의 지적 인식이다.
위정자들이 간과하는 지식과 문화의 시대이다.
기억의 회귀와 현상은 많이 다르다.
선에서 추억과 현상의 차이는 분명하다.
관계를 상실한 추억은 악이 없다.
탄생은 선이라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문명으로 이해하는 아담과 하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아 적 삶을 쉽게 사고하는 관계와 권세의 경거망동은 저항이 있을 것이다.
제안과 격 없이 간보는 것은 다르다.
정치와 의견수렴의 대의는 국가이지 왜곡된 정당과 사사로운 성취의 독선이 아니다. 
자아 적 신념과 통신사회는 형평성의 불의와 불편함에 예속되지 않는다.
2025.4.10일.

 
2) 인식과 의지와 자아.
(낼 모래 방 빼신다는 분들이 어찌 내 집에 와 죽 치고 있다.

좋은 양주병 들고 끈 떨어진 낫살의 행색이다.
그래도 기고만장하다.
또 한분은 말이 없다.
불한당들께서 내놓으라고 출입문을 부수고 있다.
신기하고 불가한 의지로 막고 있다.
전생의 인연이 불가사의 하다.)
 
(트랙터에 물통을 실고 불 끄러 가는지 나무에 물 주러 가는지 좋지 않은 좁은 언덕길 올라가고 있다.
머리띠를 한 투사 같은 두 사람이 커다란 잘못을 했는지 은신하고 있다.
발견되었다.
도망치다 잡혔다.
마을 중앙 삼거리 넓은 장소에서 다수의 민중이 처벌을 논의하고 있다.
극단적 처벌이 결정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결정을 알려주고 도망치게 하였다.
숲을 향해 무사히 도망쳤다.
이제는 내가 도망치고 있다.
화난 마을사람에게 쫓기고 있다.
절세의 경공으로 낙옆 싸인 논두렁 높이에 은신하여 새처럼 쏜살같이 이동하고 있다.
낙엽이 소리 없이 나를 은폐하여 보호하며 제 형태로 돌아가고 있다.
공력의 차원이 다르다.
멀리 나무사이로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의 인식과 의지는 자아에 입력된다.
대자연의 암시적질서는 의식적 관계에서 정신의 공유가 있다.
정신과 물질은 공유되어 공존한다.
미지는 무한하다.
2025.4.10일 새벽.
 
3) 이승과 저승.

(삼성역 근처이다.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고 안방마님께서 뒷좌석에 있다.
내차인데 영업용이 아니라 뒷문이 위로 열리는 밴이다.
차량들이 많은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하고 있다.
위로 열려진 뒷문으로 남매로 보이는 아이 둘이 다가와 태워달라고 한다.
옆문으로 탑승하기 좋게 조금 앞으로 이동하는데 육시럴 차가 멈추어 지지 않는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발끝의 거리 감각이 없다.
도로의 차량이 앞과 옆으로 빼곡하고 전면에서 역주행하는 차도 있다.
왼쪽에 커다란 버스가 있어 피하기 어려운데 차량은 멈추어 지지 않는다.
첫 번째 위기에서 버스와 앞차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두 번째도 좁은 차량사이로 은신하듯 피했다.
세 번 째 진로변경 위기에서 외제 차 형식의 후미를 포기하듯 강하게 추돌하였다.)
요사이 잠이 불편하다.
이번 주말은 쉬는 것으로 작정하고 자정 넘도록 치맥으로 잠자리 염려가 있었다.
역시나 비몽사몽이다.
깜짝 놀라며 꿈을 꾸고 있다는 어렴풋한 인식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제정신 돌아와 잡귀들이 싸가지 없이 장난친다고 짜증하다 도리 없이 어려운 잠을 청했다.
당일 택시운수종사자 교육이 있었다.
출근시간 피해 일찍 출발하여 삼성역에서 사당역 교육장까지 걸었다.
다시 꿈이다.
 
(강좌리다.
동네와 김제, 전주, 익산으로 갈라지는 만경교 삼거리 사이에 방치되어 있는 숲 같은 과수원이 있다.
정체되어 있는 민주주의이다.
여기에 동남아 원주민 분들 서넛이 있다.
주체의 대의에서 이탈적 변방이다.
쥔장이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니 체험하고 있다는 식의 답이다.
이질적 분별의 학습이다.
용인되었다.
대세의 영향에서 미미한 정체의 확인이다.
뒤돌아서는데 한편에 가건물이 보이고 닭과 꿩이 석여있다.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의 혼란이다.
쥔장이 꿩 잡으러 간다고 하였는데 소식이 끊겼다.
정체성의 의지를 상실한 빈총의 역부족이다.
집에 왔다.
역사의 설득을 포기하였다.
열려 있는 부엌에 들어가니 작은 상이 차려 있고 뚜껑이 열려 있는 가마솥에 방금 지은 푸다만 쌀밥이 있다.
개헌의 미온적 태도이다.
주걱으로 그릇에 퍼 담으니 누룽지 까지 긁혀진다.
난세의 대의에서 합리성이 결여된 기회주의의 숟가락이다.
작은 상에 올려 한 숟가락 먹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작은 수레를 끌고 부엌문 앞을 지나간다.
관계에서 영역과 주의의 침략적 시도이다.
어머니가 오셨다.
구원자 이시다.
내가 위험에서 벌거벗고 있었던 것 같다.
제 멋데로 간섭 할 탄핵정국과 역사가 아니다.
어머니가 부엌문을 닫아 나무막대 장치로 걸어 잠그었다.
자아와 통신사회의 분별이다.
숲이 된 과수원에서 체험하시는 분들이 매실 같은 열매를 주었다.
모자람의 학습에서 굴러온 돌의 개과천선이다.
몸에 좋다고 하며 어머니가 드신다고 하였다.
개헌은 보약이다.)
후기는 그런대로 괜찮은 잠자리 였다.
글세다!
이 양반 아직 이승에 계시는 것 같다.
웃을 일이 아니다.
2025.4.12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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