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공존의 시대 8. 본문
133. 공존의 시대 8.
변화의 이유이다.
정치가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실효적 가치가 없다.
체제 또는 지배력의 간덩이가 변화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혁신 우짜고 알맹이 없이 떠들다 지치는 프로파간다 이다.
정치는 현실안주의 관리형이다.
정치개혁이 민심 눈치보며 떠들다 오리무중 이다.
논리와 실전은 다르다.
문지방이 우선하는 부정적 다양성의 잡식성이 문제이다.
해보지도 안고 족보와 가훈에 누가된다고 고추가루 뿌리며 풍토지리에 사주팔자 운운한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제도권에 터 잡으면 신분의 거취를 우선하는 부르주아 계급이다.
노회찬 이후 그렇다.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정치의 진보는 없다.
자본과 권력은 민심을 세뇌하여 경쟁과 차별의 산업사회를 고수한다.
국제사회의 패권주의와 체제의 진실은 산업의 생산성이다.
대평양과 대륙의 대립은 밥그릇 싸움을 빙자한 냉전적 민심의 세뇌이다.
패권적 국제질서의 실용주의를 위한 한반도 분단의 영구화이다.
힘의 논리에서 도발적 지배와 지정학적 수용의 역사이다.
냉전적 역사의 학습이다
이분법적 패권에서 어느쪽이 실익의 주체인지 정치의 속내가 진짜로 수박이다.
정치는 민심의 눈밖에서 멀어지면 큰일난다.
하시라도 이슈의 양산이 필요하다.
두드려 일 벌리는 도깨비 방망이는 필수이다.
21세기 문화적 주체의 분별력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한다.
오염수 우짜고 떠들어도 빨강색 정치에 열받는 백성과 수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다.
대양의 생태계와 먹고사는 문제이다.
누적되는 생태계 위기에서 국제사회의 지성과 정치적 책임은 분명하다.
정치꾼들 물만난 이슈이다.
떠들다 민심의 관심 떨어지면 아무일 없다.
제발 젖먹던 힘까지 버티어 주시기 바란다.
지지고 볶는 생산성 경쟁에서 시류에 예속되지 안으면 인연의 책임과 생존이 위태롭다.
시류의 모퉁이 부여잡고 힘들다고 떠들어도 팔자소관이다.
만민의 평등을 밥말아 드신 법치의 시각은 증거없이 노상 햇소리 지저귀는 사기꾼들 뿐이라고 한다.
정신과 욕신의 말초에서 운명적 체념은 존재를 상실한다.
못난승질에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기들고 설친다.
아서라 세상사 나만 눈감으면 끝이다.
상대적 기회의 절멸에서 탄생의 선택과 세월의 혼적은 우짜냐고 따지면 할말은 없다.
태어나며 결정되는 사대부의 위치는 가난한 부모의 죄이다.
바꾸어 달라고 오장육부 쥐어짜 쓰고 소리치고 악다구리 하여도 팔자의 규범은 소귀에 경읽기 이다.
내것의 일방통행식 논리로 사대부적 차별과 양극화의 승패적 정치를 바꿀수 없다.
추종적 인물론의 팬덤으로 혁명은 고사하고 혁신도 어렵다.
울타리의 고집은 21세기 통신사회를 비롯한 글로벌 생산성에서 공존적 변화의 확신이 없다.
지금 잘먹고 잘사는데 변화가 무슨소용 이냐는 배부른 작태이다.
냉전의 이분법적 체제에서 주류와 지배력에 연연하는 현상의 안주이다.
지식의 반론은 때만되면 까지는 좌우논리에 속수무책이다.
정치판 시끄러우면 쥑일넘만 살아있는 분단의 역사이다.
솔직히 왠수같은 한반도의 핵이 국제질서의 위협인지 신냉전의 옵션인지 아리송하다.
태병양과 대륙의 밥그릇 싸움에 한반도 핵문제가 주제이다.
어영구영 신냉전의 사선을 한반도 분단선으로 정하려는 씨알 맥히는 수작이다.
외세의 교두보를 자처하여 갓쓰고 덩달아 춤추는 오지랖 때문이다.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노비의 재산이 양반보다 많은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신분사회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인륜적 질서이다.
한반도의 역사이다.
한반도 정세에서 일방적 체제의 꼬라지에 꼭지도는 것은 자유로운 지식과 문화의 주체성이다.
교실에서 제 자식 챙기고 갑질하기 바뿐 사대부는 강건너 불구경 하신다.
바다건너 누구처럼 신냉전의 분위기에 옵션 맞추기 하려는 것이다.
사대부의 굿판은 세금 빼 잡수시는 시류의 계산에 빠삭한 배운분들이 많다.
선과 인륜이 제고되는 생태적 삶의 회복이 필요하다.
문화와 지성의 확장이다.
오천년 한의 정체에서 체제의 방향성에 욹고 그름으로 저항하는 지식이다.
형이상학적 문명에서 그래도 배운분들 한마디가 낫다.
현상의 변화가 두려워도 시간을 충족하는 문명의 진화는 영원하다
무한경쟁과 치부의 차별적 생산성 시대는 개선되어야 한다.
생산성을 위한 산업문명의 풍요는 의식주 해결이다.
사회개혁은 치부와 사치에서 생산과 분배의 균형이다.
기회차별의 문제이다.
사회적 규범과 생산성 예속에서 생태적 삶의 회복이 필요하다.
먹고 자고 싸는것 해결하고 남는것 늬것으로 하라는 것이다.
요사이 입는것은 까발리고 다녀서 비용걱정은 없을것 같다.
단물에 익숙한 부르주아적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신봉에서 선택과 변화는 다른것이다.
선택만으로 변화가 이루지지 안는다.
문제의 복합성 때문이다.
울타리의 지배력과 산업 생산성의 거취에서 이해타산이다.
십만양병설의 승패적 꼬라지 이다.
넘에집 논사면 이유없이 배 아푸다.
콩한쪽도 나누어 드신다는 미풍양속의 역설이다
산업사회의 주류 기득권 안주는 단물의 익숙함으로 과거의 연장을 시도한다.
서빙고와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사건의 기억이 하수도 구멍에 걸린 라면가락 같다.
좌우와 신냉전은 과거 이념적 경계의 논리이다.
글로벌 통신사회에서 통일의 기대는 반공과 승공의 시대로 돌아갔다.
전쟁과 학살의 피비린내 나는 이념적 냉전의 역사로 회귀하였다.
국제질서의 생산성 경쟁은 한반도 분단선을 경계로 신냉전의 사선을 형성하고 있다.
글로벌 지식과 문화의 공유에서 역사의 퇴행이다.
글로벌 문명을 주도하는 주체의 역사는 타의의 지배를 의식하는 도발적 치열함이 있다.
침팬지와 고릴라가 싸우면 침팬지가 이긴다.
괴성을 지르고 거칠게 날뛰며 도발하는 침팬지의 치열함은 고릴라의 수용적 습성을 흔들어 무력화 시킨다.
집요한 치열함으로 분별력의 혼란을 야기하여 수용적 상황을 기대하는 것이다.
패권에 관심없는 수용적 문화는 타의에 치열할수 없다.
사랑방 이든 국제질서 이든 목소리 큰분이 장땡이다.
AI시대에 무지한 패권주의 이다.
21세기는 글로벌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는 통신시대이다.
국정운영과 지배력 행사에서 통신사회의 의견수렴 기능이 추가되었다.
민심의 동의는 민주주의 절차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차와 합의가 무시된 국수적 집단의 진영논리를 우선할수 없다.
일방적 설정의 시국에서 민심이반을 우려하는 지배력의 거취는 여론의 흐름을 호도하려 한다.
수단과 방법에서 궤변으로 선동하는 논조의 장치적 유인이다.
정의와 공정의 분별력을 상실한 승패적 정치는 조직을 사주하여 SNS와 미디어 매체를 이용한다.
황당무개한 논리와 실체없는 진실이 표현의 자유를 토치카 삼아 난무한다.
주장의 괴리를 포장하는 결론없는 요식행위 이며 우리편의 구색이다.
세상이 변하여도 정치의 울타리는 변하지 안는다.
우리편의 이유불문이다.
갓 쓰고 오리발 내미는 망국의 원흉이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시대적 문화가 요구하는 공통된 의제의 학습이다.
예시하면 학생과 선생의 상대평가는 유교적 지배의 수백년 교육관을 길게잡아 십수년에 아작냈다.
인습의 변화에서 학습의 무서운 결과이다.
현대의 학교는 유물론의 사고와 이기는 방법을 가르친다.
승패적 정치판의 학습니다.
요사이 사회현상에서 결과는 긍정적이지 안다.
질서는 문화적 욕구의 학습에 의해 변한다.
현상의 발현은 중요한 증거이다.
법치를 우선하는 감시의 경계보다 문화적 치유의 학습으로 대응해야 한다.
변화에서 정신과 물질이 공존하는 논리적 학습의 필요이다.
기회의 분배에서 생존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충족하는 인성의 설득이다.
자아의 안주를 위한 문명의 배려이다.
끝없는 물증의 성취적 욕구에서 자연에 예속된 자아적 삶을 기억하는 의식주의 작은 만족이다.
교육환경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교육과 헨드폰의 지식전달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공교육의 절대성 상실이다.
물증적 요구의 변화에서 인성의 정신적 학습이 필요하다.
진화의 순리는 현상의 단계를 뛰어 넘을수 없다.
다산선생은 규범의 철학을 만들어 수백번 고쳐서 후대에 전달할수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소의 멍에도 달구지 매달아 수백번 왔다갔다 해야 그제사 제자리를 잡는다고 하였다.
문제의 인식에서 변화에 조급할 이유는 없다.
학습의 한계를 설정하는 이해의 시간개념이 필요하다.
변화를 이끌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선택과 변화는 다른문제 이다.
선택되었다고 천지창조 하시면 안된다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와 행정편익은 학습이 마무리된 현상의 실현이다.
민주화의 역사가 솔찬히 되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현대는 존재하는 것이고 미래는 창조하는 것이다.
반공과 승공은 부뚜막 문화와 얼추 비슷하게 지나갔다.
유물은 역사로 기억되어야 한다.
부뚜막 문화는 시대적 명분을 상실하였다.
21세기에 민족문제를 파괴적 승패로 해결할수 없다.
현존하는 문명을 주도한 치열함은 패권적 역사와 문화의 주체이다.
한반도 역사의 교훈에서 수용적 한계는 지적되어야 한다.
문지방 관리의 주체성 문제이다.
시작은 미약한 것이고 쥐구멍이 땜을 무너뜨린다.
의식하지 못한 작은문제가 역사를 흔든다.
정치는 파괴가 전제된 문명의 균형적 관리이다.
지배력의 불균형에 저항하는 혁명의 역사가 있다.
지적민심은 인내한다.
진화와 문명의 이해에서 완벽한 제도는 없다.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한다.
악도 분명한 실체이다.
어떠한 현상을 목적으로 방법이 제시되었을 경우 복합적 문제를 수반한다.
주체에서 파생되는 문제의 부정적 사건이다.
다양성의 역설이다.
존재하는 것은 정신과 사물의 혼합체이다.
순수한 것은 없다.
빛의 분석도 가능하다.
사물의 이해에서 상상의 범위에 없는 것은 존재할수 없다.
지식과 문화의 진화는 자승의 가속에 있다.
현대에서 가장많이 변한것은 헨드폰 문화이다.
지식정보의 공유이다.
학습방법의 변화이다.
독립된 학습의 자율적 지성이다.
옳고 그름의 분별력 확장이다.
팩트에서 지식과 정보의 공유는 가식과 선동의 시대가 아니다.
대사에서 일의 진실과 순리가 필요하다.
우주를 생태적 존재로 이해해야 하는지 산업사회의 물증적 사고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리송하다.
문명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생태계와 공존하는 인류의 선택이다.
생태계의 진화는 느낄수 없으나 문명진화는 빠르다.
시간의 공유에서 생태계 없이 인류의 자존감으로 문명은 존재할수 없다.
문명은 생태계에 예속된 진화의 과정이다.
불평등에 저항하는 변화에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체제의 이기적 습성이 문제이다.
변화의 필요에서 지배력의 권위적 개입은 합리적 합의의 결론을 훼손한다.
사건의 진실에서 지배력의 주도적 관심은 여론 또는 대세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절차와 정의에서 권위를 이용하는 지배력 행사이다
산업사회의 부르주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합집산이다.
부르주아적 체제의 고집은 경제와 생존은 등식이라는 수용적 세뇌이다.
자아적 의식과 자유의 지배이다.
관성적 무의식으로 산업문명의 사회질서를 강요하는 생태계 파괴는 잘못된 것이다.
인류의 삶은 자연의 순리로 돌아갈수 있어야 한다.
노후에 전철의 삶이 보기 좋은것이 아니다.
생태계 회귀에서 문명의 배려가 필요하다.
산업사회의 대책없는 무질서에 대자연의 질서는 재앙적 위기로 대응한다.
대자연의 발현과 존재에서 방어적 개념이다.
문명은 생태적 요구에 의해 진화할것이다.
자본과 물질문명의 시대는 길지안을 것이다.
대자연이 질서는 영속적 존재이다.
우주에서 인류의 존재는 미미하다.
생태계와 문명의 불균형에서 공존의 개념이 필요하다.
산업사회의 지배는 멀지안아 기계적 생산성의 시대로 전환될것이다.
노동에 의한 생산성 경쟁의 종식이다.
생명의 물질요구에서 치부와 사치가 아니라 실용적 가치의 주류가 형성될것이다.
미래는 치장의 만족이 아니라 실존적 가치이다.
데이터와 기계적 생산성의 미래는 구매가 아니라 공급이다.
공유경제의 본질은 불균형한 산업사회의 다음창이다.
공유적 미래의 설정에서 생태적 삶의 이해가 필요하다.
풍족의 균형에서 물질의 탐욕은 사라질 것이다.
명품의 사치는 생존의 의식에서 존재하지 안을 것이다.
데이터에 의한 실용적 주체에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질 것이다.
제품의 획일성은 시각적 문화에서 알고리즘의 이해에 달려있다.
그래도 좋은것이 필요한 분은 AI에 주입하여 교육해 보시기 바란다.
인공지능 데이터는 특별한 오지랖을 좋아하지 안는다고 알고있다.
학문의 깊이는 특별하게 행색하지 안는다.
인류의 문명은 현재에 머물지 안을 것이다.
지구의 문명은 생물학적 생명체의 지배에 있을 것이다.
현대문명의 의식과 생존에서 인륜적 의지의 산업사회 예속은 맞다.
체제와 산업사회의 관계에서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절차와 동의에서 민심이 지배하는 체제와 산업사회이다.
생태계의 영속에서 인류의 주체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념적 경계의 생산성 경쟁은 문명 또는 문화적 지식의 시대적 문제이다.
암시적 질서의 목적을 위한 문명진화의 과정이다.
현실에서 삶의 욕구는 문화와 지식과 물질의 풍요이다.
생존조건에서 차별없는 의식주 해결이다.
통신사회의 의견수렴과 물리적 이익에 집착하지 안는 지적 분별력은 민심이 주도하는 체제의 준비이다.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서 사회의 분야별 전문화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개입없는 통신사회의 포괄적 의견수렴과 결론이다.
정치의 보편화는 권력분산과 체제의 세분화이다.
산업사회의 생산성 경쟁은 영원하지 안을 것이다.
현대는 지배와 탐욕의 시대이나 궁국적으로 인류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다.
대자연의 영속적 진리는 문명의 파괴적 시간을 생태계의 예속으로 회복할 것이다.
생태적 진화와 과학의 물증적 진화는 병행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가르침 이라면 두개의 방향은 어느싯점에 하나가 될것이다.
인류는 물질풍요의 기대에서 생태적 평화로움을 찾을 것이다.
2023.8.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