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사로움.

공존의 시대 7. 본문

나의 글방.

공존의 시대 7.

박세욱. 2023. 8. 21. 22:40

132. 공존의 시대 7.

반 문명론의 탐구이다.
체제의 성립에서 정치와 권력은 다르다.
통치에서 지배력의 정체성이다.
권력은 추종적 군립으로 절차의 지배을 기대한다.
정치는 다양성의 균형에서 문화적 의지를 우선한다.
지배력 행사에서 권력은 인간의 태생적 문제가 있다.
스스로 설정한 존재의 탐욕이다.

정치에서 개인적 인격과 능력을 배제할수 없다.
생태적 질서에서 생존의 물리적 조건과 방어적 개념의 습성이다.

역사의 굴절에서 인간의 탐욕적 습성과 독선적 자기도취는 정치의 이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문화의 혁명적 역사에도 불구하고 성(울타리)과 추종자의 부르주아적 지배는 여전하다.
민주주의와 만민의 평등은 힘의 지배와 상관없는 것이다.
절대우위의 패권적 지배에 예속되는 허울뿐인 문명과 지식이다.
문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약육강식의 생태적 질서는 변하지 안았다.
문명적 생존에서 존재의 자존감이나 선택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생산성에 집착하는 산업사회는 조직의 체계적 질서를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직업선택에서 나는 조직에 예속된다.
사회적 구속이다.

산업사회에서 직업선택의 인습으로 치부되는 무감각의 일상이다.
물론 생의 목표로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 개념에서 생존수단으로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의 목표가 시류의 흐름에 맏겨지는 운명적 체념의 시대이다.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태적 예속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산업사회의 생존은 성취적 욕구로 포장된 사회적 예속이다.
문명적 이기의 괴리인지 대세인지 시류의 흐름에 맏겨진 삶이다.
자본과 시장경제의 무한경쟁은 생태적 환경의 여유를 잊었다.

나의 존재에서 자연에 예속된 자아적 관계는 사라졌다.

문명이 설정한 사회적 욕구의 성취에 세뇌되었다.
인류가 생물학적 생명체 라는 존재를 잊은 것이다.
텃밭과 들녁 또는 생태계의 생산성에 순응하는 삶의 상실이다.
산업혁명과 도시화에 의해 농경사회의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문명은 산업과 도시의 시대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생존조건의 이해타산은 복잡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사회적 질서를 요구한다.
공익적 관점의 질서이다.
생태적 질서가 규범적 질서로 전환된 것이다.
 
자연에 예속된 삶은 문명의 성취가 안니라 자아의 만족이다.
한정된 지역에서 타의를 의식하지 안는 자아의 성취로 살았다.
차별과 경쟁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생존에서 문명에 예속되지 안는 생태적 생산성의 자유가 있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최소한의 생존이다.
문명은 자연에 예속된 자아적 삶의 의지을 구속하지 못한다.
물론 시대적 지식과 문화의 이해는 공유된다.
내면의 만족을 기대하는 절재의 자아이다.
사회적 예속은 물리적 조건과 신분적 또는 계급적 차별의 문제가 있다.

문제는 성(울타리)과 추종자들의 차별이다.
이른바 부르주아 사상과 계급이다.
불편함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은 인내의 한계에서 지식의 의무이다.
생산성 공유에서 인연의 책임과 자존감을 지키는 문제이다.
나로 비롯되는 사건에서 선택과 결정의 책임과 자유이다.
탄생에서 
물질문명은 기득권의 인연과 제도의 선점으로 만민의 평등을 차별한다.
생산성 분배에서 기득권의 차별적 지배와 낙수효과의 사기는 혁명의 시간이나 지금이나 정치의 한계이다.
불평등에 저항하는 지식은 진화의 잠재력이다.
산업사회의 주류에 저항하는 사회적 규합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생산성과 분배의 균형를 파괴하는 차별에서 공유적 체계의 요구이다.
자연의 순리에 예속된 순응의 의식에서 산업과 자본의 차별에 저항하는 학습이 필요하였다.

생태적 고립의 의식에서 타의를 경계하는 저항적 의지의 발현이다.
사회적 또는 대중적 규합에서 수단과 방법이다.
산업의 주류와 자본의 경계에서 분배의 저항이다.
좌우논리의 공격과 방어에서 대중매체가 동원되고 협잡과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좌파와 우파의 경계에서 논조의 형평성을 상실한다.
진실은 오리무중 이고 승패의 흥망성쇄에서 악다구리 뿐이다.
조직논리의 문화에서 돈과 권력은 특별한 법치를 완성한다.

죄와 벌을 잉태하는 시류의 경계에서 권력자와 감시자를 차별한다.
법의 형평성에서 권력과 기득권의 불편한 작용은 저항적 생존이다.
지식의 저항은 불나방으로 더디게 민주주의 역사에 진입한다.
부르주아적 차별에서 저항을 주도한 지식을 사회주의 또는 좌파라고 한다.

반 문명론적 시각에서 주류에 저항하는 사회적 규합이 문명의 예속을 가속시켰다는 주장이다.
문명사회의 생존에서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적 결속의 강화라는 것이다.
좌파적 주장이 기술산업과 자본시류를 공고히 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래도 선택된 문명에서 생존적 불평등의 비판과 저항은 필요하다.
요사이 부르주아 계급에서 좌파적 경계는 없다.

조직을 이용하는 승패적 좌우논리의 밥그릇이 부르주아 계급이다.
태생적 탐욕의 부르주아 계급은 우파의 주류나 좌파의 주체나 같다는 것이다.
결국 문명의 이기보다 산업 생산성의 탐욕과 분쟁으로 자연의 삶을 파괴하였다.
냉전의 근대사에서 좌우논리의 치열한 이분법적 역사이다.

젊음이 산업사회의 주류에 예속되어 존재가 불편하다.
목구멍 거미줄 걱정하는 직업선택으로 삶의 목적이 결정되는 시대이다.
의식의 선택에서 하고자 하는 자유의 욕구는 돈과 직업의 구속으로 희망사항이다.
문명의 정점에서 상대적 성취는 고사하고 의식주가 어렵다.
삶의 자아를 잊은 부르주아 계급의 탐욕적 욕망은 사치의 환상으로 새로운 자극을 절규한다.

생태적 예속을 잊은 생존에서 탄생과 자아의 권리를 상실하였다.
자연과 자아의 자유에서 파괴적 문명의 시각이다.

혁명의 흔적은 없다.
지식의 저항적 시각은 혁명의 시대나 지금이나 조건적 차이가 없다.
문명의 차별적 경쟁으로 생태계의 위기가 가속되고 있다.
자본과 자원의 불필요한 치부이다.
앞뒤와 좌우없는 부르주아 계급의 차별도 여전하다.
문명의 시류에서 인류의 문화적 선택도 갈팡질팡 이다.
분별력을 상실한 사대부의 기고만장 한 벼슬이다.

교육의 학습평가에서 상대적 선택으로 사교육과 자본의 파행을 격고있다.
교육이 지나친 경쟁으로 지치고있다.
행복의 선택이 협소한 이유이다.
민주화의 시각에서 스파르타식 교육의 신봉은 학생인권의 문제였다.
교육의 유교적 현상에서 학생인권이 재정되고 바리깡과 교복과 학습의 자율화가 이루어지는 듯 했다.
생태적 질서의 교훈에서 선택은 합리적 이어야 한다.
학생과 선생을 상대평가 하였다.
교권의 혼란은 교실에서 가르침의 무시와 폭력으로 학습의 분별력을 상실하였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 사대부의 권세가 끼어들어 제자식이 제일이라는 차별이다.

학교에 적용되는 아동학대보호제도의 법치를 앞세워 교권을 비하하는 사대부의 세상을 만들었다.
부두막 문화에서 지성의 보루 교권은 부모의 예가 필요하였다.
학습의 평등을 주장하는 문명의 분별력과 창의적 예지력이 부족하다.
한때 지잘난 오지람의 치마바람은 촌스러운 기부의 선행으로 자식의 미래를 삿다.
교육현장 분쟁에서 법치의 개입이 아사리판 이라고 한다.
법적분쟁에서 일부 변호사의 오지랖은 무조건 오리발이 상책이라고 주문한다는 것이다.
교권분쟁이 사과와 화해로 해결될수 없는 요인이다.
법치의 문화적 무지이다.
규범적 지식의 우월성이 우선하는 파괴적 문명이다.

문명이 선과 악의 분별력을 상실하였다.
제도의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제도에서 예지력과 생태적 순리를 망각한 문명의 무질서이다.
자본시류에서 주류라고 칭하는 가진분들 제외하고 진보는 부르주아 사상과 계급을 반대한다.
정권순환과 지배력 행사에서 논리부제의 지나친 점이 있다.

감각적 실체에 의존하는 판단이다.
진행의 예지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논리에서 교육현장의 부작용이다.
중용이 부족한 이유이다.

모아라는 새가 있었다.
생태계의 균형에서 방어본능을 상실하였다.
인간에 의해 유입된 육식동물에 의해 멸종되었다.
생태계 파괴이다.
모아의 유전체계에서 약육강식의 생존적 대응이 없었다고 할수없다.
생태계의 유전적 진화는 현상에 대응하는 질서이다.
문제는 진화의 시간개념에서 현상의 파괴와 생물학적 대응은 비교할수 없다는 것이다.
생태계 파괴에서 문명이 대응할수 있는 시간이 없다.
사용자의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파괴의 재앙이다


문명 무용론의 주장이 예사롭지 안다.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읽고있다.
괴리와 대세의 갈등이 있다.
반 문명론에서 그럴수도 있고 안일수도 있으나 유나바머는 인류를 사랑하였다.
삼분의 일 나갔다.
무슨일이 벌어질지 걱정이다.
2023.8.21일.
 

 

 

 

 

'나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념적 종파주의.  (0) 2023.08.29
공존의 시대 8.  (0) 2023.08.24
인간.  (0) 2023.08.18
공존의 시대 6.  (0) 2023.08.18
삶의 원초.  (0) 2023.08.15
Comments